-
-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맹자가 처음 살았던 곳은 공동묘지 근처여서 그런지 늘 보던대로 곡(哭)을 하는 등 장사 지내는놀이를 하며 놀았다. 이를 본 맹모는 시장 근처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건을 사고 파는 장사꾼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된 맹모는 다시 서당 근처로 옮겼다. 그랬더니 예절을 알고 글을 가까이 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맹모를 훌륭한 어머니라고 한다. 그 분의 노력(?)이 없었다면 맹자는 한평생 그저 시장을 어슬령거렸을 것이다. 이처럼 자식에 대한 교육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다. 자식에 대한 맹모의 사랑은 절대적인 의무이다. 이는 칸트의 말대로 도덕적 행위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우리가 그동안 자연주의적 오류를 믿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맹모가 삼천했으니 우리도 삼천 아니 몇 번이라고 옮겨도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타니 겐지로가 지은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를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 책은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것이라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고다니 선생님의 이야기지만 또 한 편으로는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어른이 함께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 특히 파리를 키우며 사는 데쓰조라는 아이의 입에서 어느 날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라고 말했을 때 그 감동은 교실 전체를 눈물 바다로 만들었다. 서로가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흘러내리는 눈물은 오랜 시간 선생님과 아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으며 스스로 사랑을 발견하는 결정체이다.
그런데 맹모삼천지교에는 이런 감동이 없다. 오직 맹모만이 판단하고 행동한다. 상대적으로 맹자는 이따금 얼굴을 내밀 뿐이다. 만약에 맹모가 이 책을 읽어 본다면 어떤 현명한 지혜를 우리에게 남겼을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저항정신일 것이다. 저항이고 해서 무조건 상대방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다하면서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사는 곳이 싫다고 마냥 옮겨 다니는 것은 아무래도 현실을 회피하는 모습이다.
지금 아이들이 온통 교육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도 결과적으로 마찬가지다. 좋은 대학만이 전부는 아닌데도 여전히 어른들은 입시공부를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들이 짊어진 책가방은 그래서 무겁거나, 혹은 텅비어 있다. 무거운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텅빈 것이 심각하다. 이는 학교가 너무 싫다는 반항심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 살아있는 교육이란 아이들의 숨겨진 보불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동심(童心)이며 더 나아가 나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이다. 즉 도덕적 행위를 온 몸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 혼자만으로는 어렵다. 아이들 곁에 선생님이 가까이 있어야 한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배움의 대상인 동시에 존경의 대상이 아닌가.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선생님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의 눈높이와 같아야 한다. 그러면 교육이 천국인 세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