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앞에서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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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산문집 백지 앞에서를 읽었다. 작가는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다. 그녀가 이번에 소설이 아닌 산문집을 낸 까닭을 살펴보니 이야기에 있었다. 돌이켜보면 소설도 이야기이긴 마찬가지다. 작가 말대로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다. 이와 달리 산문은 허구가 아닌 자기자신의 이야기다.

 

그러나 소설과 산문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다. 바로 어리석음을 존재의 시작점으로 삼고 있다. 소설은 허구의 인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반면에 산문은 어떤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낸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과 사고가 낱낱이 간파당하는 두려움과 압박감 앞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시그리드 누네즈는 그해 봄의 불확실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설 작가에게 어리석음이라는 기질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걸 갖고 있다.

 

작가에게 어리석음은 글쓰기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뜻한다. 어리석음은 작가의 감정에 균열을 일으키는 동시에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단단한 마음이기도 하다. 만약에 어리석음이 없다고 하면 작가의 글쓰기는 일기처럼 될 것이다. 일기는 이야기가 있지만 감정이 없는 다른 글쓰기니까.

 

평소에 책읽는 것을 좋아했고 좀 더 나아가 리뷰를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을 쓰면서 오늘까지 왔다. 그렇다고 해서 유명한 소설가나 에세이스트가 된 것은 아니다. 근사한 글을 써보겠다는 마음이 없지 않지만 글을 쓰면서 내 삶을 더 사랑할 수 있는 행복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늘 백지 앞에서 불안하다. 작가의 표현대로 초심자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오랫동안 글을 많이 쓰면 이제는 글쓰는 두려움에 대한 백신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데 현실은 정반대로 어긋났다. 백지 앞에서 마주치는 지친 마음과 결핍을 생각할수록 실패감이 몰려왔다. 실패감은 곧 자기 연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작가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글을 쓰는 삶에 대해 귀 기울일 수 있었다. 글은 말할 수 없는 용기이며 아픔의 결과물이다. 혼자라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비록 실패하더라도 계속해서 써야 한다. 무엇보다도 글을 쓰지 않는 삶이란 죽음의 출발이며 도착이라는 사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글을 쓰는 삶은 지극히 나의 모든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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