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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평점 :
비틀어버림, 그게 죽음이다.
-사르트르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뭘까? 죽음이라는 불청객이다. 최선을 다하며 끝까지 살고자 하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어느 누구도 생명의 법칙을 파괴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있다. 일상적인 그러니까 늙고 병들거나 아파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은 자연적인 죽음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극한상황에서 자살(suizid)을 선택하는 것은 비자연적(非自然的)인 죽음이다.
자살에 대한 거부감은 극명하다. 자살은 단단한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단단한 흉터로 남는다. 흉터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자살은 죽음을 담보로 하여 삶에 반항한다. 반항하는 이미지가 차곡차곡 쌓일수록 삶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만약에 삶을 질식시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성은 마비되고 탈출이라는 고통스러운 감각은 살아남게 된다. 여기까지 충분히 면죄부가 허용된다. 그럼에도 자살에 대한 죄책감이 피부에 와 닿게 되면 이상하게도 불편하였다.
우리는 사회적인 잣대로 뉴스 화면에 나오는 자살을 수동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장 아메리는『자유죽음』에서 우리가 제대로 인지 못하고 있는 자살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자살은 자살을 둘러싼 객관적인 사실들의 결과다. 분명 어딘가 원인이 있으며 원인에 따라 자살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자살자에 대한 가혹한 상황이 전부일까? 자살자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운명의 수레바퀴일까?
그래서 ‘자유죽음(freitod)’을 생각할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하는 고민이다 보니 결코 가벼운 문제는 아니라는 것. 자살과 죽음은 죽음이라는 범주에서 보면 서로 의미가 충돌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살과 죽음 사이에 자유를 놓고 생각하면 낯선 의문들이 생겨난다. 자살이 의미하고 있듯 자살은 자유의 영역이다 보니 자유죽음과의 경계선이 흐려진다. 나를 찌르는 대상이 남이 아니라 나이며 그런 내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 자유죽음과 비슷한 궤도에 있다.
이렇게 자살과 자유죽음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무엇이 타당한 선택인지 선명해진다. 자유죽음을 택할 것이다. 삶의 무게감이 시시포스가 밀어 올리는 바위와 같더라도 살기 위해서 자살을 부정하게 한다. 그럼에도 ‘에셰크(echec: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것을 적시하는 단어)’를 구원하는 자유죽음이 이미 내 몸속에서 같이 살고 있다는 위로를 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자살에 대해 질문하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일찍이 비트겐슈타인은 “대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은 던지지 마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대답 자체가 곤란한 질문이다. 자살은 곤란한 질문이지만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죽음은 정말이지 곤란한 질문이다. 어쩌면 대답하기 어렵다고 해서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삶에서 정말 중요한 질문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삶의 피곤함과 좌절감이 켜켜이 쌓일 뿐이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인 장 아메리는 ‘자유죽음’이라는 침묵을 깨트리고 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죽음을 성찰하면서 자유죽음에 대한 진실에 접근하고 있다. 자살과 자유죽음을 둘러싼 수동과 능동의 관점은 자살자의 내면에 얼마큼 접근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유죽음은 자살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삶의 밑바닥에 가려앉아 있는 죽음을 마주한다. 그리고는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만 하는 인생은 없다.”라고 하며 실존적 부조리를 파헤치고 있다.
실존적 부조리에 따르면 우리에게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다. 생명은 ‘없음에서 있음’이다. 이와는 달리 죽음은 ‘있음에서 없음’이다. 우리는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견디며 살아야만 하는 정언명령을 따라야 한다. 비록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있음이 없음보다는 대단히 허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없는 마당에 삶이 무슨 소용이라 말인가? 생명의 효율성을 최고로 여기며 살아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삶은 정반대로 작용했다. 오히려 생명의 올가미에 둘러싸인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스스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생명이 아닌 자유죽음의 관점으로 보면 이야기는 사뭇 다르다. 가령, 운동선수는 부상을 당해 더 이상 운동할 수 없다는 괴로움에 못 이겨 그토록 안타까운 눈물을 흘린다. 물론 운동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얼마든지 먹고 살 길은 있다. 문제는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눈물 흘리는 이유를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에 있다. 운동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선수에게 삶의 가치를 호소하는 것은 회복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다. 더구나 죽을 듯 살아가는 정신적 황폐함으로 무작정 손을 놓아버리는 것은 개인의 희생양이라는 주홍글씨를 남기게 된다.
자유죽음이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정신착란이라는 몹쓸 병에 걸린 것은 아니다. 죽음의 방식으로 ‘손을 내려놓는 것’은 타인의 의지가 아니다. 타인의 의지에 일어나는 죽음이 ‘사건’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유’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말대로 자유인은 언제까지 살 것인가 스스로 결정한다. 그리고 자유죽음을 굳이 ‘손’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나와 내 몸은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데 있다. 이러한 까닭에는 ‘나’라는 것이 공간이라면 내부세계인 자아와 외부세계인 내 몸은 시간이라는 주장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손을 내려놓으면 시간이 사라진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려보면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더 이상이 근심이 없다는 것이다.
문득, 왜 자유죽음인가? 라는 문제를 둘러싼 고민을 해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살이 아닌 자유죽음은 왜 사는가? 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혹은 삶의 부당함에도 구토를 참아가며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부조리에 맞서 저자는 자유죽음이라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휴머니즘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말한다. 견디기 힘든 모멸의 순간, 마음의 문을 필사적으로 잠갔을 때 삶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는 인간의 특권이다. 어느 누구도 인간의 특권을 대신할 수 없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직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만약에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동물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도 동물은 스스로 죽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동물에게 없는 부음(訃音)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것은 죽음을 단순히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음을 삶의 진공상태가 아니라 집합체로 믿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살이 만연하고 있는 ‘자살문화’에서 힘겹게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죽음을 자살과 곧바로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낙인이다. 자유죽음은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죽음이 아니다. 장례식장에 가본 사람은 느끼게 된다.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유죽음은 죽음으로 뛰어내기 전 출구를 찾아 나선다. 자유죽음을 둘러싼 옳고 그름은 폭력적이다. 결과적으로 죽음의 경계선에서 자유는 삶을 파괴하지 않으며 더더욱 자살을 응원하지 않는다. 누구나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처럼 누구나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있다.
이러한 메시지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저자의 묵직한 고백을 읽으면서 ‘자유죽음’이라는 네 글자가 죽음의 율법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는 자유죽음을 불청객이 아니라 친절한 손님으로 맞이하니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삶의 어느 순간에 자유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존엄한 삶을 더 발견하게 되었다. 자유죽음이 결코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