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만사,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려버리면 얼마나 통쾌할까요?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걱정을 하다 보니 심리적인 부담감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놀 때 놀아야 하는데 제대로 놀지 못하고 있지요. ‘놀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내다’라고 합니다. 어쨌든 무슨 일이든지 즐겁게 해야 하는데, 정작 오늘내일이 지루하고 답답할 지경입니다.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편히 자고 싶어도 그러지 못합니다. 이런저런 고민 때문에 가슴이 숨 막히고 머리가 깨질 정도로 찌근거리고 아픈 나머지 제대로 잘 수도 없습니다. 불면의 고통을 참아내려고 이불을 뒤집어쓰며 최후로 버텨 봐도 속수무책입니다. 끝내는 이불을 발로 확 걷어차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번 당하고 마는 ‘이불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이불킥을 하지 않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먼저 이불킥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불킥을 하게 되는 과정은 아주 단순합니다. 몸에 난 상처는 눈에 보이니까 약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치료하기가 어렵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마음이란 게 워낙 복잡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의 병이 자신도 모르게 쌓이고 쌓입니다. 어떻게 아프냐고 대답을 요구하더라도 왜 아픈지 모르기 때문에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이불킥의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을 이야기하다보니 몸을 조심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합니다. 몸이 추우면 이불을 덮다가도 몸이 뜨거워지면 이불을 걷어차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몸이 마음의 온도에 따라 얼마든지 차가워지고 뜨거워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고민을 가지고 이불킥의 심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불킥의 대부분이 무언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5단계’로 올라갑니다. 바로 생리 욕구, 안전 욕구, 애정. 소속 욕구, 자기 존중 욕구, 자기실현 욕구입니다. 앞 단계의 낮은 욕구에서 다음 단계의 높은 욕구로 올라가게 되는 모양으로 피라미드와 같습니다. 높은 욕구일수록 성공 가능성이 낮습니다. 이러다 보니 욕구에 대한 불만이나 회의가 생겨나며 부족한 것을 꼭 획득하려고 합니다. 매슬로의『존재의 심리학』따르면 ‘결핍동기’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결핍동기에 집착할수록 두려움과 의심으로 ‘흐릿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시각각 감정이 바뀔 때마다 이불킥을 날리며 감정을 토해내는 것은 흐릿한 렌즈를 깨뜨리는 것일 뿐 결코 건강한 치료는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매슬로가 주장하고 있는 ‘성장동기’입니다. 성장동기는 결핍동기와 달라서 뭔가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흐릿한 렌즈가 아닌 선명한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흐릿한 렌즈는 우리의 이성을 혼란스럽게 해서 정신을 갉아먹습니다. 하지만 선명한 렌즈 덕분에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을 더욱 효율적으로 지각하고 현실과 더욱 편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과 불편한 관계를 가진다고 하면 우리가 자아실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현실과 편안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행복해보입니다. 이렇듯 성장동기는 우리가 가지고 있으나 드러낼 수 없는 잠재력을 최고로 빛나게 하기 때문에 ‘경이로운 가능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인생이 허무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됩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금세 표정이 어두워집니다.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누군가 삶은 시행착오의 연속이니 실패하더라도 끝가지 최선을 다하라고 합니다. 어떻게든 살면서 버텨야 하니까요.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실망이 커지고 최선은 줄어든다는 것,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낮에도 우울하다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삶의 무거움으로 죽음이 가벼워지는 이 시대. 이왕이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침’과 ‘죽음’을 서로 나눠보면 그리 좋아할 사이는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생각’이라는 연옥을 통과하다 보면 왜 좋을까? 라는 반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김영민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앞서 말한 경이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침없이 ‘죽음킥’을 날리기 때문에 삶이 ‘확’ 달라지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답답한 속이 한바탕 시원해지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시절을 돌이켜보면서 죽음이라는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있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죽음으로 선택하는 것이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그 쓸쓸한 마음 한 구석에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무의미하게 사는 고통을 끝내겠다는 것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순간, 죽음에 대한 연민이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더라도 고통의 탈출구로 여기는 방법을 한 번쯤 고민하게 됩니다. 과연 죽음이란 이런 것이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이유인즉,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 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p8).

 

죽음이 오히려 삶의 기반이 되는 감각이라는 문장을 되새겨보았습니다. 인생을 한 순간 사라지게 하는 죽음이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절망했는데, 저자의 버티는 삶을 통해 절망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삶의 또 다른 열정을 되찾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매일매일 어느 한 순간 내가 죽음을 생각하게 된 절박한 이유입니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닙니다. 거침없이 죽음킥. 죽음도 더 이상 과거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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