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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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개의 눈을 지닌 거울처럼 사물 앞에  드러누울 뿐 그 사물로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때, 그런 것을 나는 사물에 대한 때 묻지 않은 앎이라고 부른다.(니체,『차라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슬롯』은 흥미롭다. 1억원 당선작이라는 타이틀이 읽는 재미를 더 한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일본 소설들과 경쟁하는 데 있어 충분히 라이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용도 감각적이며 짜릿한 즐거움이 있다. 작가는 도박과 여자라는 빅 넘머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가 만들어낸 게임은 10억이라는 돈을 카지노에서 써버리자는 것이다. 몇 백 만원도 아닌 몇 십억을 아무렇지 않게 써버린다는 것이다. 황당하면서도 가슴에 덕지덕지 쌓인 생의 무게감이 한 순간 시원해진 느낌이다.

 

이 책은 카지노를 무대 삼아 다양한 인간상을 마주하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카지노는 도박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것이 카지노의 함정이다. 사람은 누구나 카지노에서 잭팟을 기대한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번쩍거리고 당첨된 돈이 경쾌하게 떨어진다.

 

하지만 환상 너머에는 목숨을 걸 만큼 위태롭다. 도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 모두가 차갑고 초췌하다. 그들은 카지노 시스템에 중독되어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다. 자존심을 내동이 친다.

 

그래서 10억을 가진 남녀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인다. 이 싸움에서 오히려 10억을 가진 남녀가 낭패를 본다. 도박의 도시에서 도박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승부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그들이 도박을 하는 것은 ‘파스칼의 내기’에 있다. 도박을 하는 것이 도박을 하지 않는 것보다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불확실한 카지노를 통해 양극화된 사회를 황량하게 파헤치고 있다. 합법적인 곳에서 인생의 실패자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불법이 아닐 수 없다. 머니의 농락이다.

 

삶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어쩌면 공평하다. 과거 학생회 사무실에서 빈병에다 시너를 담근 운동권이었던 헤어진 여자가 갑부가 돌아온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확실한 건 좋든 싫든 변화를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헐어버린 자리에 카지노가 우뚝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불법이 아닌 세상이다. 그보다는 돈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때 묻은 것이다. 이것이 10억이라는 판돈에서 깨달은 살아있는 삶의 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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