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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평점 :
얼마 전에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란 말을 알게 되었다. 뜻을 풀이해보면 내가 나의 벗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내가 나의 벗이 될 수 없음을 생가해보면 그 척독(尺牘)을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면 오우아거사는 누구일까? 바로 이덕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스스로롤 간서치(看書癡)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책만 보는 바보였다. 그는『논어』로 병풍을 삼고 『한서』로 이불로 삼아 추운 겨울날을 견디며 살았다고 한다. 더구나『맹자』를 팔아 밥을 지어 배불리 먹고 희희낙락했다고 하니 정말로 미치지(狂) 않고서는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이 책은 옛 사람들 중에서도 미친(狂)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 이채롭다. 앞서 말했듯 미친(狂)은 치(癡) 혹은 벽(癖)이라고 불렸는데 단순히 미쳐서는 미칠 수 없었다. 정말로 미쳐야 미쳤다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푸코의 견해를 통해 광적(狂的)인 경계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다. 첫째로 지식의 문제이다. 지식은 곧 안다는 것인데 참된 지식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가령 김득신은 자신의 거처에 억만재(億萬齋)라는 당호를 지었다고 한다. 그의『독수기(讀數記)』를 보면 내 눈을 의심하게 한다.
즉『백이전(伯夷傳)』은 1억 1만 3천 번을 읽었고『노자전(老子傳)』은 2만 번을 읽었고『장자』와『사기』은 많이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읽은 횟수가 만 번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싣지 않았다고 했다. 미련하다고 하기에는 그의 노력이 애틋한데 깨달음의 비밀을 풀 수 없을 것 같았다.
둘째로 권력의 문제이다. 이 책에 나오는 18세기 지식인들은 권력의 이방인이었다. 홍길주가『김영전(金泳傳)』에서 “세상은 재주 있는 자를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한탄했는데 그들에게 권력은 시시비비를 따지는 한바탕 일장춘몽이었다. 비록 김영이 굶어죽은 천재이었지만 그가 남긴 학문의 길은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푸코의 문제가 아닌 저자의 관점으로 보면 만남의 문제이다. 저자가 말한바 멋진 만남은 맛난 만남이라는 것이다. 옛 사람은 벗을 제이오(第二吾)라고 했다. 벗은 이익과 권력에 얽매이지 않았을 정도로 인생의 동반자였다. 뿐만 아니라 홍대용의 그의 벗들이 보여 준 실내악 연주는 이념, 나이, 계층, 성, 지역 등 삶의 조건들이 달랐지만,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신뢰한 낭만적인 클래식이었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조선 지식인의 내면을 마주하는 순간 일상의 편안함을 쫓아다니는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죽비소리가 생생했다. 그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분명 고단하고 쓸쓸해보였다. 그런데도 가슴을 물컹거리게 하는 멋스러움이 부러웠다. 삶의 길목 길목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상처 투성 이었지만 그들은 바보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심했다. 더욱이 아픈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진통제 같은 약 대신에 바람에 흔들려도 꺼지지 않는 촛불마냥 지식인의 불빛을 밝혔다.
돌이켜 보면 이 책에 나오는 지식인들의 삶은 이상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어쩌면 이것이 불합리한 생을 견디는 나름대로의 현명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만약 이것마저 없었다면 초라한 생(生)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이덕무를 비롯한 18세기 조선 지식인들과 시공을 초월하여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이었다. 일찍이 플라톤은『향연』에서 사랑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을 말했다. 그들이 곧 오우아거사와 다를 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