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늦가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늦은 나이에 혼자서 떠난 영국. 새로운 환경에 아직도 완전히 적응이 안된 상태에서 생일을 맞게 되었다. 저녁이라도 함께 할 친구도 없었고, 긴장된 날의 연속이라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때였다.
그 때 나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으로 왔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공부하고 있던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말에 자기가 사는 곳에 와서 학교도 구경하고, 기숙사 구경도 하지 않겠냐는. 그 후배가 내 생일을 알고서 초대한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기차를 타고 서너 시간을 가는 동안 조금도 지루한 줄 몰랐다.
후배는 내게 자기 학교 구경도 시켜주었고, 함께 시내 구경도 했으며 저녁때가 되자 자기 기숙사로 나를 데리고 왔다. 자기는 나가서 저녁 준비를 할테니 나보고는 방에서 쉬면서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잠시 후, 후배가 차린 저녁 상에는 따뜻한 미역국과 흰 쌀밥, 그리고 영국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김치까지 올려져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후배가, 그것도 남자 후배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게 될 줄이야. 김치는 어디서 났느냐고 했더니 직접 담그었단다. 그러면서 기숙사 뒤로 나를 데려가더니 땅에 묻은 아주 작은 항아리 비슷한 통을 보여준다. 김치가 저 속에 들었다고. 아마도 기숙사를 함께 쓰는 다른 친구들에게 냄새가 날까봐 밖에다 묻었는지 모른다. 후배가 차려준 생일 저녁상을 받으며 나는 미안하고도 고마워서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저녁을 잘 먹고 그날 나는 깨끗하게 정돈된 그 후배 방에서 편하게 자고, 그 후배는 기숙사의 다른 친구의 방에 가서 불편한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기차역으로 가는 길, 길가의 가게들마다 특이하게 생긴 동물 인형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저건 무슨 인형이냐고 했더니 그것이 그 지방의 상징인 상상 속의 동물이란다. 빨간 색과 초록 색으로 옷을 입고 있는, 귀엽게 생긴 인형들 구경을 하고 시간에 맞춰 내가 탈 기차에 올랐다. 겨우 잘 있으라는 인사만 하는 나에게 그 후배는, 돌아가서 씩씩하게 잘 지내라고 자상하게 말해주었다. 누가 선배이고 누가 후배인지.
기차가 막 떠나려고 하는데 누가 내가 앉은 좌석 옆 창문을 막 두드리길래 내다보니 그 후배가 손에 방금 전에 본 그 인형을 들고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새 가서 그 인형을 사온 것이다.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 나는 그 인형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아쉽게도 그 후배와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는다. 어디선가 또 그 누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며 잘 살고 있겠지. 그 날의 감동을 난 지금까지 제대로 그 후배에게 표현하지도 못했다. 고마웠다고, 그보다 더한 감동은 지금까지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그 말을 해주고 싶은데. 

OO야, 잘 지내고 있지? ^^ 

 

흥얼흥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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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02-2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후배를 두셨네요.^^ 다시 연락이 된다면 참 좋겠어요.^^

hnine 2010-02-27 18:09   좋아요 0 | URL
요즘 말하는 훈남이랄까요 ^^
나이만 제가 좀 위일뿐 제가 선배노릇 해준 건 아무것도 없고 받기만 했어요.

울보 2010-02-27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멋진 후배분이신데요,,

hnine 2010-02-27 18:10   좋아요 0 | URL
이런 남자가 정말 멋진 남자인데 말이지요. 요즘은 왜 그리 외모만 따지는지 모르겠단말입니다 ^^

순오기 2010-02-27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살짝 이슬이 맺혔어요.
이렇게 진정으로 마음을 써 주는 이들이 의외로 있더라고요.
hnine님 행복하셨겠어요.^^

hnine 2010-02-27 18:11   좋아요 0 | URL
그때 정말 집생각도 많이 나고 외로왔는데 이 후배가 그걸 알아본것이지요.
다른 사람의 외로운 구석을 알아보고 채워주려고 하는, 그런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 이후에도 이 후배에게 제가 받은 것이 참 많아요.

stella.K 2010-02-27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고마운 후배로군요. 멋있는데요?
그런 사람은 꼭 붙어있어야 하는데 왜 이래저래 멀어지는지 모르겠어요.
많이 생각 나시겠어요.^^
에치나인님 글 보고 짠 나타나면 좋겠당...ㅎ

hnine 2010-02-27 19:32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그 후배가 에이치나인이라는 닉네임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거든요? 이 글을 보면 자기 얘기인줄 알까 모르겠어요 ^^

무스탕 2010-02-27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렇게 생각하면 안되는데 막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져요..
그 후배분 나인님 좋아했던거 아니에요? 꺄아~~~~~~ >0<
정말 감동스러운 사건(?)이었네요 ^^

hnine 2010-02-27 20:21   좋아요 0 | URL
낄낄...^^
안그래도 다시 만나면 한번 물어볼려고요.
저 사건(?)이후에도 저 애는 저를 여러번 감동시켰지요.

stella.K 2010-03-01 10:2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좋아한 거 맞구나! 글치않아도 저도 무스탕님처럼 쓸까하다
찍힐까봐 못 썼는데...
지나놓고 보면 다 낭만이고 아름다운 추억이죠.^^

hnine 2010-03-01 13:23   좋아요 0 | URL
찍히기는요~ ^^
'지나놓고'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는 것 같아요.

상미 2010-02-27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 무렵 참 힘들었을 때였지?
내 생각엔 널 흠모했던건 아니었을까 싶다.ㅋㅋ
꼭 다시 찾고 연락이 닿으면 좋겠다.
우리 써클송을 들으니 20대로 가고 싶단다...

hnine 2010-02-27 22:17   좋아요 0 | URL
저 노래는 너때문에 알게 된 노래인데 처음 듣는 순간부터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마노아 2010-03-01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큰 위로와 감동을 느꼈을까요.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에요.^^

hnine 2010-03-01 13:24   좋아요 0 | URL
잘 둘러보면 지금 우리 주위에도 저런 따뜻한 사람들이 분명 있을거예요. 또 지나가고 나서야 깨달으려나요...

같은하늘 2010-03-02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따뜻한 분이시네요. 아마도 지금은 어느 한분을 감동시키며 잘 살고 계시겠지요.^^

hnine 2010-03-02 12:45   좋아요 0 | URL
위의 후배를 저의 다른 여자 후배에게 제가 소개시켜준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여자후배는 너무 자상해서 싫다고 하더군요. 참~

비로그인 2010-03-0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 공연을 영국에서 직접 보신거군요~ 전 별생각 없이 올리는데 hnine 님 덕분에 뭔가를 더 알아가네요 ㅋ

그나저나. 남자가 너무 자상하고 그러면 밖에서 줏대없이 살까봐 여자들은 싫어하나봐요..ㅎ

hnine 2010-03-06 21:32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오랜만에 바깥에 나갔다 들어와
겨울이 봄에게라는 제목으로 몇줄 끄적거리다가 생각한다.
겨울은 겨울이고 봄은 봄인데,
뭘 이러쿵 저러쿵 의미를 붙이고 말로 꾸며대려 하는가
겨울이니 봄이니 하는 것도 인간이 붙힌 이름일뿐
자연은 그렇게 구분지어 모습을 갑자기 바꾼 적 없는데 

 

쓰던 글을 미련없이 휙, 지워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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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2-2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추천! 3번 누르고 싶어요.
이런 명쾌함이라뇨. 모두 부질없는 의미들이겠지요.

hnine 2010-02-28 11:33   좋아요 0 | URL
공감해주시는 프레이야님에게 또 공감을 하며...^^

같은하늘 2010-03-02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럼 저 위의 추천(3)음 모두 프레이야님이 누르신것? ㅋㅋㅋ
hnine님께도 이런 화끈함이 있으시군요.^^

hnine 2010-03-02 12:46   좋아요 0 | URL
ㅋㅋ 과분한 추천을 받았지요.
제가 저렇게 느닷없이, 예고없이 화끈할 때가 있답니다 ^^
 
<마망, 너무 사양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마망 너무 사양해 - 행복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꼬마 파리지앵의 마법 같은 한마디
이화열이 쓰고 현비와 함께 그리다 / 궁리 / 2010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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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 중에 너는 어떤 것에 일순위를 두지?" 
나의 물음에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인간이 살아나가는데 필수적이라고 꼽는 세가지, 초등학교 시절 부터 학교에서 배워 알고 있는, 모든 인간에 해당된다고 생각했던 이것을 아무리 그녀가 파리지엥이라지만 그렇게 끝까지 이해를 못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다. 그건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세가지로 결정내릴 수 있냐는 것이다. 말도 안된다는 표정, 너희 나라는 초등학교에서 그런 걸 '가르치냐'는 말까지 나왔다. 아마 그녀를 안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를, 그리고 프랑스와 우리의 문화, 사고 방식의 차이를 그나마라도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도 덩달아 영문을 몰라하며 소통이 단절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거의 1년을 그녀와 단짝 처럼 붙어 다니며 친하게 지냈다 하더라도, 우리가 함께 지냈던 곳은 한국도 프랑스도 아닌 제3국이었고 그녀가 모든 프랑스 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프랑스에 대한 이해도 편협하기 그지 없다는 것을 안다.
스물 아홉 되던 해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독신 주의를 고집하던 한 파리 남자를 만나 청혼을 하고 그 남자의 독신 주의를 무너뜨리고 결혼하여, 단비, 현비라는 아이 둘을 낳고 키우며 십오년 째 파리에서 살고 있는 한국 여자 이 화열. 그녀가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다.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유창하진 않아도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어린 현비의 입에서 "엄마, 사랑해"라는 뜻의 "마망 너무 사양해" 그 말을 듣고 행복해하는 저자는 아이를 키우는 모든 엄마들과 같기도 하고 또 다르기도 해보였다.
누구에게나 아이를 키우는 일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떠나는 여행과 같다고 생각하고, 아이와 같이 떠난 그 여행에서 자신은 '길잡이'가 되기 보다는 '동반자'가 되고 싶다는,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으로 안내하는 나침반은 엄마가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갖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솔직한 자신과 대면하는 과정이고, 인생을 진실하게 살아야겠다고 매번 다짐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그녀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기도한 반면, 성공을 위한 자제력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마시멜로 이야기'에 반감을 보이며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성공을 위한 자제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의 가치를 스스로 따질 수 있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점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 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저자의 두 아이들이다. 귀여운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대화 중에서, 정답이나 무슨 견본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사고의 틀이 형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 보여지는 진솔한 답들에 우리 나라 아이들과 많은 차이를 느꼈다고 할까.
"사무엘은 공부 잘하니?"
"엄마, 내가 사무엘의 답안지를 베끼는 것도 아닌데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어떻게 알겠어?"
막내 현비의 대답이다.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건 좀 멍청한 것 같아."라고 딸 단비가 엄마에게 말한다.
"왜?"
"영화 속의 주인공과 실제 인물하고는 다르잖아. <캐리비안의 해적>에 나오는 조니 뎁하고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조니 뎁하고는 전혀 다른데, 영화의 역할이 멋있다고 그 남자 배우와 사랑에 빠질 수 있어? 난 배우나 가수에게 좋다고 꽥꽥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 그건 그 사람들의 직업일 뿐이라고."  라고 말하는 초등학생 꼬마 단비 아가씨. 그건 이미지와 사랑에 빠지기 때문에 그런거라는 엄마의 말에 비싼 브랜드만 입는 자기 친구 이야기를 하며 그것도 일종의 이미지와 사랑에 빠진 것 아니냐고 대답한다.
내일 수학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하는 아이들을 도와준답시고 문제 푸는 것을 도와 주는 것이 아니라 몇 시간 동안 개념에 관한 질문과 대답만 하고 있는 남편을 보며 답답해하던 저자는 후에 차차 깨닫는다. 프랑스 교육의 핵심은 '자기 생각'을 고민하게 만들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훈련, 그 자체라고. '나 자신'보다 '관계'에 얽히고 살았던 그동안의 삶에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고.
한때 열렬히 사랑했을 남자, 아이 둘을 갖게 된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성공이라고 생각한다는 남자, 그래서 감사한다고 책의 서문에서 저자가 밝힌 그녀의 남자와 나눈 대화 한 꼭지를 옮기며 마친다. 누군가는 공감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남편: 어제 교회 앞에서 리본이 달린 웨딩카를 봤어. 근데 그 리무진은 끝이 안 보일만큼 길었어.

아내: 왜 사람들은 결혼식 날 그렇게 멍청해지는 거지? 왜 그렇게 멍청하게 리무진을 빌리고 돈을 물 쓰듯 쓰는 걸까? 정말 인생에 한 번밖에 없는 이벤트라서 그런 걸까?

남편: 감옥에 들어갈 사람이 그 전날 돈을 물 쓰듯 쓰는 거랑 비슷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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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 2010-02-27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파리에 사는 어린애라서 <랑>을 양으로 발음하나보다.
프랑스 요리사랑 결혼하고 싶어하는 철없는 우리 딸을 어째 생각하니? ㅋ

hnine 2010-02-27 22:19   좋아요 0 | URL
이 책에도 나오는데 프랑스 사람들은 철저한 개인 중심이라서 공동으로 묶이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더구나. 뭐든 혼자 하기보다는 무리를 지어 함께 섞여서 하고 싶어하는 우리들 근성과는 참 다르지?
프랑스 요리사는 곧 세계적인 요리사, 멋진걸? 그런데 결혼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잖아. 언제 누구를 어떻게 만날지 1초전까지도 모르는...^^

비로그인 2010-02-28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hnine님 댓글이 넘 재밌어요^^ "결혼은 교통사고같은 것이다" 오늘 밖에 나가서 계속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살짝 웃음 지으면서요~ 사람들이 좀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살짝 걱정 됩니다. ㅋ

hnine 2010-02-28 14:46   좋아요 0 | URL
비유가 좀 과격하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정확한 비유를 아직 못봤네요.
전 지금부터 바람결님 서재에 가서 말러 들으면서 하던 일을 계속 하려고 합니다. 오늘 남편이 아이와 놀아주느라 애쓰고 있습니다 ㅋㅋ
 

 

봄날 같았던 어제,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아 하루 종일 부시시한 차림으로 집안에만 박혀있었다.
내 모습을 나 스스로도 보고 싶지 않은 그런 날, 어제가 그런 날이었는데, 달랑 콩나물 비빔밥과 된장국만으로 차려준 저녁을 맛있게 먹으면서 아이가 느닷없이하는 말, 우리 엄마는 참 귀엽게 생겼단다. 그러면서 웃는다. 그 시간까지 세수만 간신히 하고 머리도 빗는둥 마는둥 하고 앉아 있는 나를 보고서 귀엽다니.
엄마가 원래 귀엽잖아 라고 한술 더떠 너스레를 떨었더니 아이가 호기심에 찬 모습으로 아빠가 그래서 엄마랑 결혼했냔다. 글쎄, 아빠가 왜 엄마랑 결혼하기로 했는지는 엄마도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럼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하기로 했냐고 묻는다. 마음이 착하고, 거짓말 안 할 것 같고, 허풍떨지 않아서 좋았고 등등 대답해주었더니 '허풍'이 뭐냐고 묻는다. 자기가 가진 것, 할 수 있는 것 보다 부풀려서 말하며 뽐내는 것을 말한다고 했더니 아이 하는 말, 그건 엄마가 잘 못 알았다고 한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아빠는 요즘도 자기가 옛날에 수퍼맨이었다느니, 힘이 천하장사였다느니 하면서 허풍을 떤다는 것이다.


오늘도 몸이 영 시원찮다. 곧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인데 마냥 퍼져서 누워있고만 싶어지지만 있는 힘을 다 모다 몸을 일으켜 움직이게 하는, 가족의 중요성을 깨닫는 순간이다. 나 혼자 있었더라면 의지력 약한 나는 아마 계속 밤까지 누워만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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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 2010-02-24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냥 퍼져서 누워 있는 날도 필요하지 않을까? 크게 아프기 전에

hnine 2010-02-24 19:47   좋아요 0 | URL
3월이 며칠 안남았다는 긴장감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을거야. 머리가 지끈지끈, 결국 타이레놀 한알 먹고 다린이는 우동 먹이고. 이번엔 우동 끓이면서 다음엔 혼자 끓여보라고 다린이에게 방법을 전수해주기까지 했네.

꿈꾸는섬 2010-02-24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절기라 그런걸까요? 저도 요새 퍼져서 살아요.^^ 매일 아이들 재우며 저도 같이 잠이 들어요. 왠 잠을 그리 자는지 남편도 좀 걱정하더라구요. 아이들 없었으면 아마 하루종일도 누워있었을 것 같아요.ㅜ.ㅜ

hnine 2010-02-24 19:48   좋아요 0 | URL
저는 잠을 자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누워있네요. 아이 재우면서 잠 든날은 꼭두새벽부터 눈이 떠지고요.
며칠 이러면 또 반짝 일어나겠지, 이렇게 핑계대며 마냥 뒹굴거리고 있습니다 ^^

비로그인 2010-02-2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봄엔 몸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데요. hnine님도 그러신지 궁금하네요. 힘내세욥!! ^^

hnine 2010-02-25 17:47   좋아요 0 | URL
네, 함께 힘 냅시다! ^^

순오기 2010-02-24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엄마가 귀엽게 보인다는 아들, 나중에 엄마 닮은 아가씨 만나서 결혼할지도...
남자들은 본인도 모르게 자기 엄마 스타일을 추구하는 거 같아요.^^
아빠가 아들한테는 허풍을 좀 떠는군요.ㅋㅋ
푹 쉬는 날도 있어야지요. 3월이면 또 힘차게 일하셔야죠?

hnine 2010-02-25 17:48   좋아요 0 | URL
ㅋㅋ 저 닮은 아가씨랑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하면 남편이 뭐라고 할까요.
순오기님 기를 받아 힘이 날겁니다.

2010-02-25 0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5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6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0-02-26 14:07   좋아요 0 | URL
예, 맞아요 ^^
 

  

어제 저녁 아이에게 엄마가 너에게 어떻게 해주면 좋겠느냐, 어떤 엄마였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구체적인 경우도 제시하면서 (아래의 1번에서 4번까지) 잘 생각해서 한번 적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일기장에 열심히 쓴다.

<엄마가 나한테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가> 

* 화낼때 소리 안지르기
* 화를 낼때 아주 오랫동안 안 속상하기
* 배가 불러서 잘 못 먹는건데 맛없어서 억지로 먹고 있다고 하지 않기 

<이럴 경우에 엄마가 나에게 어떻게 해주는 것을 원하나> 

1.  내가 할 일을 안하고 있을 때 : 세번까지 얘기를 해주고 안하면 내버려 두기

2.  내가 음식을 골고루 안 먹을 때 (싫어하는 음식을 안 먹으려고 할 때) : 싫어하는 음식이니 내버려 두거나 안 만들어주기

3.  내가 늦게 자고 싶다고 할 때 : 늦게 자면 OO 못 만난다고 하기 (OO는 아이 학교에 새로 전학 온 아이인데 아침마다 함께 같은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 아이가 요즘 제일 친하고 싶어하는 아이이다.)

4.  내가 아침에 밥을 너무 천천히 먹어서 지각할 것 같을 때 : 밥 빨리 안 먹으면 OO 못 본다고 하거나 밥 치워버리기 

다 쓰더니 나에게 읽어봐도 좋다고 한다.
읽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웃음이 마구 나오는 것을 참고 진지하게 말해주었다.
쓴대로 해줄 수 있는데 단,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다린이 네가 져야 한다고.
예를 들면 싫어하는 음식인데도 먹으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너에게 꼭 필요한 영양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텐데,  네가 그것을 계속 안 먹는다면 키가 잘 안 클 것이고, 그래서 나중에 네가 원하는 축구 선수 조건에 자격 미달로 안 될수도 있고 등등. (축구 선수는 요즘 아이의 희망 사항이다.)

그 말에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그래도 좋다고 한다.

 

아이와 지내다 보면 하루도 심심할 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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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22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참..재밌어요 ^^)

hnine 2010-02-23 16:17   좋아요 0 | URL
저기 OO라는 아이를 요즘 제 아이가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남편이랑 저는 아마도 다린이가 사랑에 빠졌나보다고 장난처럼 얘기한답니다.
아이때문에 울고 웃어요.

하늘바람 2010-02-23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와 다린. 참
다린이는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원하는 것도 얻어내고^^.
혹시 친하고 싶어하는 친구는 여자친구?
그 나이에는 부모보다 친구가 더 좋을 수 있을 거 같아요

hnine 2010-02-23 16:18   좋아요 0 | URL
아직 여자친구 남자친구 개념이 없나봐요. 위의 아이는 남자 아이이고 학년도 두 학년이나 위라고 하더군요. 어릴 때부터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에게 좀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난티나무 2010-02-23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치나인님~ 안녕하세요? 넘 오랫만...ㅠㅠ
어젯밤에 잠자리에 누워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다른 거 다 말고 아이들에게 늘 웃는 얼굴의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

"화낼때 소리" 엄청 지르고
"화를 낼 때 아주 오랫동안" 속상해하는
못난 엄마의 바람이지요...ㅠㅠ

다린'씨' 대답을 보니 착한 것 같아요.ㅎㅎ

hnine 2010-02-24 02:30   좋아요 0 | URL
난티나무님, 정말 반가와요. 잘 지내셨지요?
사진 속의 귀염둥이들이 저를 향해 메롱~하는 것 같아 달려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이 생기네요.
나중에 아이가 엄마를 떠올릴때 화내는 모습부터 떠오르면 어떻하나, 저는 그 생각하면 제일 겁나더라고요. 늘 웃는 얼굴의 엄마는 책이나 영화속에서만 가능한 것인지, 저도 늘 반성하며 삽니다.

순오기 2010-02-24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와 이런 쪽지를 쓰고 대화하는 엄마는 분명 좋은 엄마예요.
다린군, 키가 안커도 결과를 책임진다고요~ 엄마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는데요.ㅋㅋ

hnine 2010-02-24 02:33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키에 별로 신경 안쓰거든요.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는건데 요즘은 왜 들 그렇게 키에 연연하나 생각하는 사람인데 아마도 다린이 본인은 엄마와 생각이 다를텐데 결과에 책임진다니, ㅋㅋ...
이렇게 글로 쓰기를 하면 기록으로 남아서 좋더라고요. 대부분 야단친 후의 마무리로 할 때가 많아서 좀 유감이지만요 ^^

꿈꾸는섬 2010-02-24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와 소통하는 법을 매일 배워가고 있어요.^^ 고마워요.^^

hnine 2010-02-24 19:43   좋아요 0 | URL
제게 무슨 배울 게 있다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화쟁이 엄마인걸요. 저 스스로도 한심한 생각이 들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답니다.

같은하늘 2010-02-25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지난 저녁에도 아이에게 소리지르고 화내면서 속상해했어요.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ㅜㅜ

hnine 2010-02-25 17:56   좋아요 0 | URL
저도 점점 다정한 엄마보다는 엄격한 엄마의 모습으로 굳어져가고 있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엄마의 기질과도 상관있지만, 아이의 기질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