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늦가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늦은 나이에 혼자서 떠난 영국. 새로운 환경에 아직도 완전히 적응이 안된 상태에서 생일을 맞게 되었다. 저녁이라도 함께 할 친구도 없었고, 긴장된 날의 연속이라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때였다.
그 때 나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으로 왔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공부하고 있던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말에 자기가 사는 곳에 와서 학교도 구경하고, 기숙사 구경도 하지 않겠냐는. 그 후배가 내 생일을 알고서 초대한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기차를 타고 서너 시간을 가는 동안 조금도 지루한 줄 몰랐다.
후배는 내게 자기 학교 구경도 시켜주었고, 함께 시내 구경도 했으며 저녁때가 되자 자기 기숙사로 나를 데리고 왔다. 자기는 나가서 저녁 준비를 할테니 나보고는 방에서 쉬면서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잠시 후, 후배가 차린 저녁 상에는 따뜻한 미역국과 흰 쌀밥, 그리고 영국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김치까지 올려져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후배가, 그것도 남자 후배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게 될 줄이야. 김치는 어디서 났느냐고 했더니 직접 담그었단다. 그러면서 기숙사 뒤로 나를 데려가더니 땅에 묻은 아주 작은 항아리 비슷한 통을 보여준다. 김치가 저 속에 들었다고. 아마도 기숙사를 함께 쓰는 다른 친구들에게 냄새가 날까봐 밖에다 묻었는지 모른다. 후배가 차려준 생일 저녁상을 받으며 나는 미안하고도 고마워서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저녁을 잘 먹고 그날 나는 깨끗하게 정돈된 그 후배 방에서 편하게 자고, 그 후배는 기숙사의 다른 친구의 방에 가서 불편한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기차역으로 가는 길, 길가의 가게들마다 특이하게 생긴 동물 인형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저건 무슨 인형이냐고 했더니 그것이 그 지방의 상징인 상상 속의 동물이란다. 빨간 색과 초록 색으로 옷을 입고 있는, 귀엽게 생긴 인형들 구경을 하고 시간에 맞춰 내가 탈 기차에 올랐다. 겨우 잘 있으라는 인사만 하는 나에게 그 후배는, 돌아가서 씩씩하게 잘 지내라고 자상하게 말해주었다. 누가 선배이고 누가 후배인지.
기차가 막 떠나려고 하는데 누가 내가 앉은 좌석 옆 창문을 막 두드리길래 내다보니 그 후배가 손에 방금 전에 본 그 인형을 들고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새 가서 그 인형을 사온 것이다.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 나는 그 인형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아쉽게도 그 후배와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는다. 어디선가 또 그 누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며 잘 살고 있겠지. 그 날의 감동을 난 지금까지 제대로 그 후배에게 표현하지도 못했다. 고마웠다고, 그보다 더한 감동은 지금까지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그 말을 해주고 싶은데. 

OO야, 잘 지내고 있지? ^^ 

 

흥얼흥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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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02-2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후배를 두셨네요.^^ 다시 연락이 된다면 참 좋겠어요.^^

hnine 2010-02-27 18:09   좋아요 0 | URL
요즘 말하는 훈남이랄까요 ^^
나이만 제가 좀 위일뿐 제가 선배노릇 해준 건 아무것도 없고 받기만 했어요.

울보 2010-02-27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멋진 후배분이신데요,,

hnine 2010-02-27 18:10   좋아요 0 | URL
이런 남자가 정말 멋진 남자인데 말이지요. 요즘은 왜 그리 외모만 따지는지 모르겠단말입니다 ^^

순오기 2010-02-27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살짝 이슬이 맺혔어요.
이렇게 진정으로 마음을 써 주는 이들이 의외로 있더라고요.
hnine님 행복하셨겠어요.^^

hnine 2010-02-27 18:11   좋아요 0 | URL
그때 정말 집생각도 많이 나고 외로왔는데 이 후배가 그걸 알아본것이지요.
다른 사람의 외로운 구석을 알아보고 채워주려고 하는, 그런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 이후에도 이 후배에게 제가 받은 것이 참 많아요.

stella.K 2010-02-27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고마운 후배로군요. 멋있는데요?
그런 사람은 꼭 붙어있어야 하는데 왜 이래저래 멀어지는지 모르겠어요.
많이 생각 나시겠어요.^^
에치나인님 글 보고 짠 나타나면 좋겠당...ㅎ

hnine 2010-02-27 19:32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그 후배가 에이치나인이라는 닉네임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거든요? 이 글을 보면 자기 얘기인줄 알까 모르겠어요 ^^

무스탕 2010-02-27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렇게 생각하면 안되는데 막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져요..
그 후배분 나인님 좋아했던거 아니에요? 꺄아~~~~~~ >0<
정말 감동스러운 사건(?)이었네요 ^^

hnine 2010-02-27 20:21   좋아요 0 | URL
낄낄...^^
안그래도 다시 만나면 한번 물어볼려고요.
저 사건(?)이후에도 저 애는 저를 여러번 감동시켰지요.

stella.K 2010-03-01 10:2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좋아한 거 맞구나! 글치않아도 저도 무스탕님처럼 쓸까하다
찍힐까봐 못 썼는데...
지나놓고 보면 다 낭만이고 아름다운 추억이죠.^^

hnine 2010-03-01 13:23   좋아요 0 | URL
찍히기는요~ ^^
'지나놓고'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는 것 같아요.

상미 2010-02-27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 무렵 참 힘들었을 때였지?
내 생각엔 널 흠모했던건 아니었을까 싶다.ㅋㅋ
꼭 다시 찾고 연락이 닿으면 좋겠다.
우리 써클송을 들으니 20대로 가고 싶단다...

hnine 2010-02-27 22:17   좋아요 0 | URL
저 노래는 너때문에 알게 된 노래인데 처음 듣는 순간부터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마노아 2010-03-01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큰 위로와 감동을 느꼈을까요.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에요.^^

hnine 2010-03-01 13:24   좋아요 0 | URL
잘 둘러보면 지금 우리 주위에도 저런 따뜻한 사람들이 분명 있을거예요. 또 지나가고 나서야 깨달으려나요...

같은하늘 2010-03-02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따뜻한 분이시네요. 아마도 지금은 어느 한분을 감동시키며 잘 살고 계시겠지요.^^

hnine 2010-03-02 12:45   좋아요 0 | URL
위의 후배를 저의 다른 여자 후배에게 제가 소개시켜준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여자후배는 너무 자상해서 싫다고 하더군요. 참~

비로그인 2010-03-0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 공연을 영국에서 직접 보신거군요~ 전 별생각 없이 올리는데 hnine 님 덕분에 뭔가를 더 알아가네요 ㅋ

그나저나. 남자가 너무 자상하고 그러면 밖에서 줏대없이 살까봐 여자들은 싫어하나봐요..ㅎ

hnine 2010-03-06 21:32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