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지에서 혼자 기숙사 생활을 하던 때, 오늘 같은 휴일 오전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학교에 갈 일도 없고 읽을 우리 소설 한 권 없고 신문, 잡지 더구나 없고, 도 닦는 흉내를 내느라 그랬는지 내 방에는 TV도, 인터넷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가끔 혼자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훌쩍 떠나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그저 방안에서 음악만 내처 들었다가, 밖으로 나가 휘 한바퀴 둘러보고 들어오거나 친구나 가족들로부터 받은 편지나 카드를 읽고 또 읽곤 하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었다. 어쩌다 하루가 아닌, 그곳에 혼자 머무르던 3년 반동안 대부분의 주말과 학교가 문을 닫는 휴가 기간을 이렇게 보내면서, 혼자 사는 삶에 대해 예행 연습을 해본 셈이다. 15년 전 이야기이다.

어제 남편이 일이 있어 강원도 어느 지방 (떠나는 순간까지 행선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냥 따라가면 된다면서.) 에 가야한다면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워낙 금요일엔 나도 다른 일이 없는 날인데, 아이와 남편이 짧으나마 여행을 가준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침 6시 30분에 집을 나서주니 이런 날이 일년에 몇번이나 있겠는가. 책 읽으며 오전 시간을 다 보내고 점심으로 호박과 양파만 채썰어 부침을 해먹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 혼자 먹는데 간단히 빵도 아니고 평소에 즐겨 먹는 것도 아닌 부침을 하고 있다니. 밖을 내다보니 바람은 많이 부는데 햇살은 봄햇살이었다. 버스 타고 나가 영화를 보았다. 백화점 윗층에 있는 영화관이었는데 영화를 다 보고서 여유있게 백화점 구경이라도 할까 둘러보아도 도무지 별로 눈길을 끄는 것들이 없어 그냥 집으로 왔다. 탐나는 것이 없으니 나는 이 백화점에 있는 물건을 다 가지고 있는 것 만큼 부자인가봐 생각하며. 

저녁이 되자 남편이 전화 하고 아이가 전화 하여 심심하지 않냐고 한다. "전~혀"라고 대답하긴 뭐해서 그냥 심심하지 않다고만 했다. 사가지고 온 호두 껍질을 벗기며 TV를 보다 잠을 잤다. 

오늘 아침, 늘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났다. 이불을 그냥 한쪽으로 쭉 밀어놓고 사과부터 먹고.
욕실 천장 시트지를 바르러 오기로 한 9시 30분까지는 최소한 집에 있어야 한다. 빨래를 개키고, 구멍 난 양말을 기우며 TV를 보았다. 보고 싶은 프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켠 TV에서 '풍경이 있는 아침' 인가 하는 영상 프로그램이 마침 나오고 있는데 전라도 우도, 고창 일대를 취재하고 김 세원이 나레이션을 하고 있었다. 귀화하여 작은 미술 갤러리를 열고 11년 째 살고 있다는 어느 화가 (아, 그 갤러리 이름이 벌써 생각이 안난다.), 고기 잡는 할아버지 이야기, 비구니만 거주하는 절의 주지 스님의 차 이야기 등등, 잠시 바느질 하던 손을 허공에 둔채 한참을 화면에 시선을 두기도 했다. 

남편에게 또 전화가 왔다. 강원도엔 지금 눈이 오고 쌀쌀하다며 여긴 날씨가 어떠냐, 아침은 먹었느냐, 잠은 잘 잤냐, 내 남편 맞나 하는 질문들을 하는 것으로 봐서 그곳 잠자리가 별로 편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더 있다 와도 된다고 내가 장난을 쳤다.  

방으로 들어와 성미정의 시집을 펴고 읽었다. <사랑은 야채 같은 것>
제목부터 참 소박하지 않은가? 폐부를 꿰뚫는 어휘를 사용하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보면 매일 밥상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걸레질을 하고, 그렇게 나와 비슷한 일상을 사는 것 같으면서 이렇게 소탈하며 또 소탈하지만은 않은 시들을 쓸 수 있었는지. 

참 한가로운 주말이다. 15년 전엔 이런 날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지금 15년 전 그날들을 추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상이 좀 짐스럽고 불평스럽더라도 오늘의 이 여유로움을 여유로 느끼게 해주는 15년 전의 경험과, 지금의 내 생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  

욕실 천장 일 하시는 분이 거의 다 오셨다고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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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3-27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ood morning, hnine님! 평화로운 풍경이군요. 저도 어제 숙취로 꾸물거리는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 이른 점심 먹이기 전 잠깐 한갓진 시간이에요.
주말 잘 보내시기를~

hnine 2010-03-27 13:52   좋아요 0 | URL
평화로움과 심심함은 아주 작은 간격만 있는 것 같아요.
이 정도면 충분히 평화로움이지요.
지금은 슬슬 오늘 저녁 식구들이 들어와서 먹을 밥상을 뭘로 차려야 하나 생각하기 시작했네요.

숟가락 2010-03-27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은하고 아름다운 글이네요.^^ 물기를 머금고 소쿠리에 담겨 있는 채소 같아요. 아침에 좋은 글을 읽고 오랜만에 Return to Love도 들어서 기분 좋은 토요일이 될 듯해요. 고맙습니다-*

hnine 2010-03-27 13:50   좋아요 0 | URL
숟가락님, 저 음악 알고 계셨군요. 저는 어제 라디오에서 처음 들었어요.
오늘은 집에서 꼼짝 안하고 있는 중인데도 시간이 참 잘 가네요.
서울이라면 지금 덕수궁 미술관엘 가겠어요. 아니면 인사동에, 아니면 숟가락님 서재에서 본 방산시장에... ^^

sweetrain 2010-03-27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외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방에는 티비도 없고 인터넷도 안되고 심지어 거울도 없어요...

저는...가끔씩, 제가 과연 나중에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 많이 두렵기도 하네요.

hnine 2010-03-27 17:02   좋아요 0 | URL
혼자 있다보면 생각은 생각대로 많아지지요. 저도 그런 생각 했었어요. 행복한 가정까지 아니더라도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생활이 내게도 올까.
미래는 누구도 장담 못하지만 결국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요.
혼자 기숙사 생활 하던 그 당시에는 무척 외로왔지만 그러면서 얻은 것도 많은 것 같아요.

상미 2010-03-27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는것만으로도 신나지...
근데 그거 길어지면 심심하다.

hnine 2010-03-27 17:03   좋아요 0 | URL
맞아. 지난 여름에 다린이랑 남편이 여행가있는 동안 정말 얼마나 적적하던지.
이런 날은 1박 2일 정도로 충분한 것 같아.

비로그인 2010-03-28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빈 컨.. 가끔 했던 곡인데요. 반갑네요

저 중간에 조가 바뀌는 부분은 조금 손가락이 어렵기도 해요 ^^

hnine 2010-03-28 06:49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도 아시는 곡이군요.

곡 제목처럼 바람결님도 언젠가는 Return to aladdin...아시죠? ^^

순오기 2010-03-28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박 2일 정도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은 정말 좋지요.
애들 크면 집에 식구들이 다 있어도 한가로운 시간이 널널하답니다.^^

hnine 2010-03-28 15:0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식구들이 다 있어도 한가로운 시간이 널널한, 그런 때가 오는군요.
오늘도 순오기님의 짧은 댓글 한 줄에서 모르던 것을 깨우칩니다.
 

맷 데이먼은 내가 한때 좋아하던 배우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하버드 대학 재학 당시 벤 애플렉과 함께 과제로 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Good WIll Hunting>.  아마 그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 일 것이다. 또래 아이들 속에 섞이지 못하고 혼자 겉도는, 가난한 수학 천재로 나왔던 그의 모습은 1997년이긴 하지만 참 풋풋한 소년의 모습 그 자체였었다. 이후로 <스쿨 타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본 아이덴티티> 등의 영화를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한동안 나의 영화 공백기.
며칠 전에 아이와 함께 < 인빅터스 >를 보고서 예전 기억이 다시 새록 새록 되살아오던 중이었으니 이 영화를 안 볼수 없었다. 영화의 내용도 나를 극장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했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공격.
이라크 내에 숨겨져 있는 대량살상무기를 찾아서 제거한다는 목적아래 이라크로 파견된 미 육군 부대의 팀장 로이 밀러 (맷 데이먼)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량살상무기 프로젝트 속의 예상치 못하던 음모와 실상을 알아낸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따다다다' 총소리와 폭파음이 끊이질 않는 가운데, 세계평화라는 명분 아래 시작된 이 전쟁에서 미국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차별 난사에, 이라크 포로들의 머리에 검은 두건을 씌우고 고문하는 모습까지.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것을 또 이렇게 공개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있으니 영화 내용이 아이러니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란 나라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중 "우리 이라크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게 두어라. 당신들 미국이 나서서 해결하려 들지 말고." 라는 대사는 절실함과 동시에 허망하게만 들리고. 

 

‘그린존 (green zone)’ 이란? 

2003년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뒤 후세인이 사용하던 바그다드 궁을 개조한 미군의 특별 경계구역으로
미군 사령부 및 이라크 정부청사가 자리한 전쟁터 속 안전지대.
고급 수영장과 호화 식당, 마사지 시설, 나이트 클럽뿐 아니라 대형 헬스 클럽과 댄스 교습소가 존재 했으며
이슬람 국가에서 금지되었던 술이 허용되었다.

이 곳의 미군 장교들은 ‘그린존’ 담 너머의 유혈 사태에는 관심이 없었다.  

-- Daum영화 사이트에서 퍼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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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3-26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린존이 그런 곳이군요.ㅠ
'디파티드'에서도 나와요. 맷 데이먼이요.^^

hnine 2010-03-27 06:37   좋아요 0 | URL
디파디드는 못봤어요.
중간 중간 다른 영화들을 좀 보긴 했지만 처음의 <굿 윌 헌팅>에 비하면 이 영화에서 맷 데이먼은 중년의 무게감이 제대로 나더군요 ^^
이 영화의 제목이 <그린 존>인 것, 영화의 메시지와 관련이 있었어요.
 

 

자기 자신을 알면
도대체 인생이 진행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군말이여
내가 살기 위해서
나는
나를
결단코 알지 않겠습니다.) 

 

정 현종 시인의 '걸음걸이3' 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뭐라고 구체적인 설명을 하기는 어렵지만 읽는 순간 감히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는게 아니다. 나는 계속 변하는 실체. 계속 변하고 있는 '나'라는 실체의 선입견에 얽매여, 즉 자기 생각에 갖혀서 더 큰 걸음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 외에 집착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도토리나무에서 도토리가
툭 떨어져 굴러간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토리나무 안부가 궁금해서 


이것은 같은 시인의 '안부'라는 시 전문.
뒤돌아보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옮겨 적어 보았다.  

아래 시에 나타난 마음과 위의 시의 마음은 서로 통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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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3-2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마음 모두 공감되네요. 통하는 건지 반대되는 마음인지는 글쎄요. 글적^^
오늘 여긴 봄비 내리다 그치고 촉촉해요.
도서관 입구에 목련이 반쯤 피었더군요.
화사했어요, 나인님^^

hnine 2010-03-25 21:47   좋아요 0 | URL
여기도 오늘 하루 종일 하늘이 심통이 났었어요. 금방 비가 올듯 말듯 했지요. 저도 아이 데리고 도서관 다녀왔는데 있는 동안 비가 오기 시작할까봐 불안불안했답니다.

다락방 2010-03-25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을 깨물었더니

-정현종


하늘을 깨물었더니
비가 내리더라.

비를 깨물었더니
내가 젖더라.

hnine 2010-03-25 21:48   좋아요 0 | URL
와, 외우고 계신 시인가요?
정 현종 시인의 시 중에는 이렇게 짧은 화두 같은 시가 많더라고요.
결국 나를 젖게 만든 건 나 자신이군요.

세실 2010-03-25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을 보고 간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뒤는 내가 걸어온 길이지요..
반대인듯 통하는듯 아리송송 합니다.
산책삼아 걸어서 점심 먹고 오는 길에 비가 후두둑 내려 마구 뛰어왔습니다.
한치 앞을 모를 하늘이더군요^*^

hnine 2010-03-26 05:35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앞과 뒤가 서로 다르지 않듯 무관심과 관심은 어쩌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일주일이 후딱 후딱 지나는 요즘입니다. 3월 한달 내내 날씨가 자리를 못잡고 방황하는 것 같지요.
 
신기한 시간표 보림문학선 1
오카다 준 지음, 윤정주 그림, 박종진 옮김 / 보림 / 200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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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를 읽다 보면 이 정도면 누구도 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순간의 착각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책이 있는가 하면, 아이들 대상으로 한 책이라도 이런 스토리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 있다. 얼마 전에 읽은<The Mysterious Benedict Society>가 그랬고 오늘 읽은 이 책도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신기한 시간표'라는 제목부터 기발하다. 표지를 넘기고 두어 페이지 넘겨 보면 '서로 다른 초등학교에서 다른 계절, 서로 다른 시간에 생긴 이야기'라는 작은 글씨가 적힌 장이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교실에서 보는 그런 시간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열개의 독립적인 이야기들에, 그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따라 아침, 첫째 시간, 둘째 시간, 셋째 시간, ...,방과 후, 한 밤 등으로 소제목을 붙였을 뿐이다.
다섯 명 이상하고 매일 아침 인사를 하자는 목표를 세운 2학년 어느 반. 그 다섯을 채우는데 교실의 금붕어, 새장의 앵무새도 동원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보통 어른들의 상상력으로 해볼 수 있을까? 양호실 까지 혼자 가는 길이 무서운 미도리가 자기와 관련된 색깔의 타일을 밟으며 앞으로 나가는 고양이를 만나 건너 뛰기 방식으로 무사히 양호실까지 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 그 고양이는 아마도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미도리의 상상력이 불러낸 고양이 일 것이다. 교실 바닥 틈새로 떨어뜨린 지우개를 도마뱀이 주워가지고 나오는데 특수한 지우개를 함께 가지고 나온다. 내가 쓴 글에서 나쁜 뜻의 단어만 지울 수 있는 지우개. 그러니까 내가 쓴 문장은 모두 좋은 뜻으로 고쳐지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마음 속으로 몰래 바라던 일들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경험을 겪게 된 어느 날, 원망 삼아 돌멩이가 되라고 속으로 빌었던 친구가 없어지는 사건이 일엊나자 순진한 아이는 정말로 그 친구가 돌멩이로 변했다고 생각하고 어쩔 줄을 모른다는 이야기도 어린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독특하게 잘 그려냈다고 보여진다. 어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면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는 똑바로 있는 물건이 휘여져보이거나 뒤죽박죽 보이게 되는 현상, 아마 어떤 아이를 놀려서 그 아이가 울먹이게 되자 어린이다운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에서 발동한 상상력이겠지. 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어둠의 유혹을 듣지 않고 눈을 꼭 감고 있던 아이의 이야기, '누가 치즈를 먹었을까'에 나오는 여러 명이 동시에 할 수 있는 가위 바위 보 방식은 참 기발하지 않은가? 양손이 모자라면 입을 사용하여 세개의 가위, 바위, 보를 동시에 낸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점심 배식이 끝나고 나면 급식실의 아주머니들은 마녀가 된다는 상상은, 나도 예전에 가끔 점심 시간이 아닐 때 식당의 아주머니들은 무얼 하고 계실까 궁금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더 실감이 났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경험때문인지 저자는 학교를 무대로 한 환타지 동화를 많이 썼다고 한다. 낯설은 시간과 공간으로의 이동과 관련된 환타지가 아닌, 친숙하고 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잠시 경험하는 상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아이들의 두려워 하는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게 바라는 염원이랄까,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바램이 상상력의 문을 열고 눈 앞에 나타나게 되는 공통점을 안고 있는 이야기들 속에는, 아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읽어낼 수 있는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하겠다. 정말 이런 책은 아무나 쓰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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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0-03-26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다른 일 하느라 다 못 읽고 반납했네요 ㅠㅠ

hnine 2010-03-26 17:40   좋아요 0 | URL
환타지 동화로 분류가 되어서 저한테는 별 재미가 못느껴질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았는데 하늘바람님도 다시 기회가 되면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ㅁㄴ 2010-05-0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
 

  

내가 알라딘 서재에 끄적거리고 댓글 달고 읽고 하는 것을 벌써 몇년째 옆에서 보고 있는 아이가 자기도 해보고 싶었나보다. 자기도 블로그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예전에 아이가 더 어릴 때 내 아이디로 블로그를 하나 만들어두고 그곳에 아이의 독후감 같은 것을 내가 대신 올려주곤 했었는데 이번에 아예 아이의 아이디로 새로 블로그를 만들어주고 아이 스스로 관리하게 가르쳐 주었더니 요즘 블로그에 재미붙였다. 좋아하는 축구 얘기에, 책 얘기에,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 얘기에, 일기도 가끔 블로그에 쓰고 있으니.
어제 올린 글을 살짝 옮겨와보았다. 

   
  내 엄마는 예쁘다.
아주 착하다.
혼낼때도 있지만 그래도 좋다.
나는 내 엄마를 사랑한다.

내 엄마는 나랑 산책하는것을 좋아한다.
같이 비밀도 털어놓는다.
같이 재미있는 얘기도 나눈다.
나는 내 엄마를 사랑한다.

내 엄마는 나랑 먹을것을 사서 같이 먹는 것을 좋아한다.
국화빵도 먹는다.
아이스크림도 먹는다.
나는 내 엄마를 사랑한다.
 
   

 

'내 엄마'가 아니라 '우리 엄마'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했더니, 자기는 형제도 없는데 '우리'라고 쓰는 것이 이상하다며 꼭 저렇게 내 엄마라고 쓴다. 

저 글만 보면 내가 아주 다정다감한 엄마인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바로 전 날에는 '엄마가 화가 나서 속상하다, 나랑 말도 안하려고 한다, 슬프다, 우리 엄마는 왜 맨날 화만 낼까...' 뭐 이런 내용의 일기를 썼었으니까.  그걸 보고 당장 켕기는 이 엄마, 아이에게 한마디 안 할수 없었다. 공책에 쓰는 일기에는 어떤 글이든 써도 상관없지만 블로그에 올리는 글은 네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누구든 그것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써야 한다고. 그 말을 듣더니 당장 가서 썼던 글을 지운 일도 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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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Journey 2010-03-25 0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예쁜 글이에요. ^^

hnine 2010-03-25 07:52   좋아요 0 | URL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그냥 웃기기만 하네요 ^^

2010-03-25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5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10-03-25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엄마'가 맞아요 ^^
(어려서 my mother 라고 말해버릇해서 입에 배서 그럴지도 모르죠.ㅎㅎ)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계신 엄마세요.

hnine 2010-03-25 12:10   좋아요 0 | URL
친구의 어머니보고도 우리가 흔히 '어머니'하고 부르듯이 우리 말에는 개인 소유보다는 '공유'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ㅋㅋ 절대적인 신뢰 아니랍니다. 부분적 신뢰 정도 될까요 ^^

순오기 2010-03-25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스런 내엄마'로 읽히는데요.^^
저는 엄마들은 모두 '천의 얼굴'을 가진 마녀쯤 된다고 생각해요.ㅋㅋ
학교에서 아이들이 일기를 쓰면서 엄마가 보면 화낸다고 쓸 얘기를 제대로 못 쓰는 아이들 많아요. 그건 아이들 글쓰기에 정말 안 좋다고 생각해요. 일기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다면 그 일기를 쓰고 싶을까요?
우리 큰딸은 5학년 때 어찌나 일기에 심하게 써댔는지 담임이 무슨 일 있냐고 상담을 청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그런 사춘기를 겪었기에 일기에 자기 속내를 털어놓는 거 지지한다, 일기에 그렇게 쓸 수 있다는 건, 건강하다는 증거다...엄마 입장에서 쪽 팔리긴 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ㅋㅋ

hnine 2010-03-25 12: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천의 얼굴을 가진 마녀 ㅋㅋ 아이들이 보여주는 모습 역시 여러 가지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요.
5학년이면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했을 무렵일테니 불만도 많아질 때이겠지요. 감정을 숨길 자신이 없어서 저도 아이의 공책일기장은 아예 보지도 않아요. 선생님께 드린 말씀,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다락방 2010-03-25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엄마'라고 하니깐 뭔가 더 단단한 느낌인데요. 그러고보니 저는 한번도 '내 엄마'라고 해본적이 없는데, hnine님 아이의 말대로라면, 형제가 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당연히 '우리 엄마'가 맞는 표현이었기 때문일까요?

내 아이가 나에 대해 쓴 글을 읽는다는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요?

hnine 2010-03-25 12:31   좋아요 0 | URL
단단한 느낌이란 단단한 '결속력'의 느낌이겠지요. 언젠가 풀어서 내보내야할 결속인데 말이지요.
내 아이가 나에 대해 쓴 글을 읽는 기분은, 그야말로 하루 차이로 이랬다 저랬다 하기 때문에 그냥 재미있는 만화를 보는 기분이랄까요 ^^

무해한모리군 2010-03-25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 같아요.
쭉 저렇게 엄마와 밀접하게 지내길 바래봅니다.

hnine 2010-03-25 12:32   좋아요 0 | URL
아마 제 딴에는 시의 형식으로 쓴다고 썼을 거여요.
형제가 없어서 그런지 엄마와의 관계에 특히 많은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엄마를 사랑한다는 말을 세번씩이나 쓴 것 좀 보세요 ㅋㅋ

마노아 2010-03-25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뻐요. 아이의 사랑이 담뿍 전해져요. '내 엄마'란 표현도 참 마음에 듭니다. 애정이 가득 묻어 있어요.

hnine 2010-03-25 12:34   좋아요 0 | URL
저나 남편이나 별로 표현을 잘 하는 성격들이 아니라서 아이는 감정 표현을 제대로 잘 할 수 있었으면 하고 늘 바라고 있지요. 예쁘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

세실 2010-03-2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엄마, 나만의 엄마 좋아요^*^
많은 부분을 함께 공유하네요.
한편의 예쁜 동시예요.

hnine 2010-03-25 14:05   좋아요 0 | URL
혼자이다보니 많은 부분을 엄마와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매일 저녁 공원에 나가 축구에 럭비에, 운동꽝인 제가 요즘 별것을 다 하고 있답니다 ^^

프레이야 2010-03-2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귀여워요. 아이와 엄마 모두요.ㅎㅎ
내 엄마, 내 엄마 이러면서요..^^

hnine 2010-03-25 21:49   좋아요 0 | URL
ㅋㅋ 둘이 길에서 국화빵 사먹는 모습을 떠올리신거죠? ^^

상미 2010-03-25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린이는 네가 어린 시절 그렇게 자랐으면 하는데로 자라고 있나보다...

hnine 2010-03-25 21:50   좋아요 0 | URL
역시 베프의 댓글답군... ^^

L.SHIN 2010-03-26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국 사람 앞에서 한국식으로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를 그대로 'Our mom said..'
라고 해버리면 당장 오해받잖아요. '너와 나의 엄마가 아닌데, 왜 '우리' 엄마?'하고.^^
그러니까 '내 엄마'가 맞는 표현이죠.

hnine 2010-03-26 17:42   좋아요 0 | URL
그게 언어의 관습인지 저는 영어로 할때는 my mom이라고 자연스럽게 나오는데 우리 말로는 '우리 엄마'라고 나오더라고요. 논리적으로는 말씀하신대로 내 엄마라고 하는게 맞겠지요 ^^

울보 2010-03-26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류도 그러는데 내 엄마라고,
아빠한테도 ,,내엄마야,,"라고 말을 해서 한참 웃었는데 류만 그런것이 아니군요,,

hnine 2010-03-26 17:43   좋아요 0 | URL
하하~ 아빠한테 "내 엄마야~" ^^
'내' 엄마라고 하면 소유의 의미가 더 강하게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