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지에서 혼자 기숙사 생활을 하던 때, 오늘 같은 휴일 오전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학교에 갈 일도 없고 읽을 우리 소설 한 권 없고 신문, 잡지 더구나 없고, 도 닦는 흉내를 내느라 그랬는지 내 방에는 TV도, 인터넷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가끔 혼자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훌쩍 떠나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그저 방안에서 음악만 내처 들었다가, 밖으로 나가 휘 한바퀴 둘러보고 들어오거나 친구나 가족들로부터 받은 편지나 카드를 읽고 또 읽곤 하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었다. 어쩌다 하루가 아닌, 그곳에 혼자 머무르던 3년 반동안 대부분의 주말과 학교가 문을 닫는 휴가 기간을 이렇게 보내면서, 혼자 사는 삶에 대해 예행 연습을 해본 셈이다. 15년 전 이야기이다.

어제 남편이 일이 있어 강원도 어느 지방 (떠나는 순간까지 행선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냥 따라가면 된다면서.) 에 가야한다면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워낙 금요일엔 나도 다른 일이 없는 날인데, 아이와 남편이 짧으나마 여행을 가준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침 6시 30분에 집을 나서주니 이런 날이 일년에 몇번이나 있겠는가. 책 읽으며 오전 시간을 다 보내고 점심으로 호박과 양파만 채썰어 부침을 해먹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 혼자 먹는데 간단히 빵도 아니고 평소에 즐겨 먹는 것도 아닌 부침을 하고 있다니. 밖을 내다보니 바람은 많이 부는데 햇살은 봄햇살이었다. 버스 타고 나가 영화를 보았다. 백화점 윗층에 있는 영화관이었는데 영화를 다 보고서 여유있게 백화점 구경이라도 할까 둘러보아도 도무지 별로 눈길을 끄는 것들이 없어 그냥 집으로 왔다. 탐나는 것이 없으니 나는 이 백화점에 있는 물건을 다 가지고 있는 것 만큼 부자인가봐 생각하며. 

저녁이 되자 남편이 전화 하고 아이가 전화 하여 심심하지 않냐고 한다. "전~혀"라고 대답하긴 뭐해서 그냥 심심하지 않다고만 했다. 사가지고 온 호두 껍질을 벗기며 TV를 보다 잠을 잤다. 

오늘 아침, 늘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났다. 이불을 그냥 한쪽으로 쭉 밀어놓고 사과부터 먹고.
욕실 천장 시트지를 바르러 오기로 한 9시 30분까지는 최소한 집에 있어야 한다. 빨래를 개키고, 구멍 난 양말을 기우며 TV를 보았다. 보고 싶은 프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켠 TV에서 '풍경이 있는 아침' 인가 하는 영상 프로그램이 마침 나오고 있는데 전라도 우도, 고창 일대를 취재하고 김 세원이 나레이션을 하고 있었다. 귀화하여 작은 미술 갤러리를 열고 11년 째 살고 있다는 어느 화가 (아, 그 갤러리 이름이 벌써 생각이 안난다.), 고기 잡는 할아버지 이야기, 비구니만 거주하는 절의 주지 스님의 차 이야기 등등, 잠시 바느질 하던 손을 허공에 둔채 한참을 화면에 시선을 두기도 했다. 

남편에게 또 전화가 왔다. 강원도엔 지금 눈이 오고 쌀쌀하다며 여긴 날씨가 어떠냐, 아침은 먹었느냐, 잠은 잘 잤냐, 내 남편 맞나 하는 질문들을 하는 것으로 봐서 그곳 잠자리가 별로 편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더 있다 와도 된다고 내가 장난을 쳤다.  

방으로 들어와 성미정의 시집을 펴고 읽었다. <사랑은 야채 같은 것>
제목부터 참 소박하지 않은가? 폐부를 꿰뚫는 어휘를 사용하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보면 매일 밥상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걸레질을 하고, 그렇게 나와 비슷한 일상을 사는 것 같으면서 이렇게 소탈하며 또 소탈하지만은 않은 시들을 쓸 수 있었는지. 

참 한가로운 주말이다. 15년 전엔 이런 날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지금 15년 전 그날들을 추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상이 좀 짐스럽고 불평스럽더라도 오늘의 이 여유로움을 여유로 느끼게 해주는 15년 전의 경험과, 지금의 내 생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  

욕실 천장 일 하시는 분이 거의 다 오셨다고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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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3-27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ood morning, hnine님! 평화로운 풍경이군요. 저도 어제 숙취로 꾸물거리는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 이른 점심 먹이기 전 잠깐 한갓진 시간이에요.
주말 잘 보내시기를~

hnine 2010-03-27 13:52   좋아요 0 | URL
평화로움과 심심함은 아주 작은 간격만 있는 것 같아요.
이 정도면 충분히 평화로움이지요.
지금은 슬슬 오늘 저녁 식구들이 들어와서 먹을 밥상을 뭘로 차려야 하나 생각하기 시작했네요.

숟가락 2010-03-27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은하고 아름다운 글이네요.^^ 물기를 머금고 소쿠리에 담겨 있는 채소 같아요. 아침에 좋은 글을 읽고 오랜만에 Return to Love도 들어서 기분 좋은 토요일이 될 듯해요. 고맙습니다-*

hnine 2010-03-27 13:50   좋아요 0 | URL
숟가락님, 저 음악 알고 계셨군요. 저는 어제 라디오에서 처음 들었어요.
오늘은 집에서 꼼짝 안하고 있는 중인데도 시간이 참 잘 가네요.
서울이라면 지금 덕수궁 미술관엘 가겠어요. 아니면 인사동에, 아니면 숟가락님 서재에서 본 방산시장에... ^^

sweetrain 2010-03-27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외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방에는 티비도 없고 인터넷도 안되고 심지어 거울도 없어요...

저는...가끔씩, 제가 과연 나중에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 많이 두렵기도 하네요.

hnine 2010-03-27 17:02   좋아요 0 | URL
혼자 있다보면 생각은 생각대로 많아지지요. 저도 그런 생각 했었어요. 행복한 가정까지 아니더라도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생활이 내게도 올까.
미래는 누구도 장담 못하지만 결국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요.
혼자 기숙사 생활 하던 그 당시에는 무척 외로왔지만 그러면서 얻은 것도 많은 것 같아요.

상미 2010-03-27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는것만으로도 신나지...
근데 그거 길어지면 심심하다.

hnine 2010-03-27 17:03   좋아요 0 | URL
맞아. 지난 여름에 다린이랑 남편이 여행가있는 동안 정말 얼마나 적적하던지.
이런 날은 1박 2일 정도로 충분한 것 같아.

비로그인 2010-03-28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빈 컨.. 가끔 했던 곡인데요. 반갑네요

저 중간에 조가 바뀌는 부분은 조금 손가락이 어렵기도 해요 ^^

hnine 2010-03-28 06:49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도 아시는 곡이군요.

곡 제목처럼 바람결님도 언젠가는 Return to aladdin...아시죠? ^^

순오기 2010-03-28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박 2일 정도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은 정말 좋지요.
애들 크면 집에 식구들이 다 있어도 한가로운 시간이 널널하답니다.^^

hnine 2010-03-28 15:0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식구들이 다 있어도 한가로운 시간이 널널한, 그런 때가 오는군요.
오늘도 순오기님의 짧은 댓글 한 줄에서 모르던 것을 깨우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