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평점 :
1.
아이들은 부모나 형제들로부터 독립된 ‘자기 방’이 처음 생기면 너무 행복해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자기 방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한다. 딱히 숨길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타인들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슈필라움’을 지키기 위해서다. 독립된 개체로서의 ‘자의식’을 공간으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공간’은 이렇게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슈필라움’은 바로 이 지점에 있는 단어다.
…중략…
유명 디자이너의 비싼 인테리어 가구로 공간을 가득 채운다고 ‘슈필라움’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 취향과 관심이 구현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은 공간이라도 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공간,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겹지 않은 공간, 온갖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그런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내 ‘슈필라움’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던 나의 꿈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 비록,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거나, 내 소유의 집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나만의 공간에서 글을 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진정한 내 ‘슈필라움’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는 슈필라움이라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져가는 저자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에세이다. 그것도 바다사진 가득한.
저자가 찍은 사진들과 또 때때로 들어가 있는 저자의 그림을 보다 보면, 이 여름, 어딘가 모를 상쾌함이 마음을 촉촉히 적신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보다 보면, 새로운 기운들이 솟아난다! 그래서, 금방 읽어버렸다. 길이가 짧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나의 독서욕구를 자극해 그의 글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허헛! 나 최대한 천천히 읽었다고요……
2.
온 사회가 관음증이다. 소셜 미디어는 내 스마트폰에 저장된 전화번호의 주인들에게 어제저녁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시로 알려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시시콜콜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다. 노출증이다. 관심이 전혀 없는데도 자꾸 보라고 한다. 결국 훔쳐보고야 만다. 관음증과 노출증은 동전의 양면이다.
- ‘눈이 작은 사람은 만만하지 않았다’ 중에서
→ 어쩌면, 에세이를 읽으면서 행복을 느끼는 이유도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관음증을 만족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한번 생각해 본다. 누군가에게 나의 삶을 보이고 싶고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교묘하게 맞물려 에세이가 탄생하고 또한 에세이가 잘 팔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에세이를 쓰는 자체를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에세이를 통해 우리는 삶의 희망을 갖게 되기도 하고, 에세이를 통해 삶의 기쁨을 맛보기도 하고, 에세이를 통해, 사람들의 삶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는다는 인식을 통해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에세이가 마음의 평화를 주기도 한다.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처럼.
이 속에는 바다 같은 평화가 있어서 좋다. 저자의 많은 생각들, 저자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저자의 에피소드 등은 그냥 일상이고 그 속에 평화스런 삶이 있다. 이렇게 보니, 나의 삶도 지극히 평화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격정적으로 살아온 삶은 아니었던 거 같은 이 느낌은 뭘까.
3.
‘나쁜 것’이 분명해야 그것을 제거할 용기와 능력도 생기는 것이다. ‘나쁜 것’이 막연하니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참고 견딘다고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 스스로 아주 구체적으로 애쓰지 않으면 ‘좋은 삶’은 결코 오지 않는다. 아무도 내 행복이나 기분 따위에는 관심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오늘도 계란을 삶는다.
내게 삶은 계란이다!
- 당신의 행복 따윈 아무도 관심 없다 중에서 -
→ 때로는 이건 아니다 싶은데, 눈 감아버릴 때가 있다. 기분은 나쁘고 더럽지만, 내게 아주 큰 피해를 주는 게 아닐 때 그렇다. 그렇게 기분이 더러운 날은 며칠이고 참고 견디지만, 좀처럼 기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럴 때 무언가를 하면 흥분상태가 되어 실수를 하게 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결심한다. 다음번에 그런 상황이 오면 반드시 적절하게 따질 거라고. 또다시 그런다면, 나는 당신을 신고하겠노라고. 식어간, 삶은 계란 두 개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무조건 용서가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세상엔 용서만으로 될 수 없는 것도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4.
한국 사람들이 책을 너무 안 읽어서 큰일이라고 아주 정기적으로 호들갑이다. 독서율에 관한 통계 자료들을 검색해서 자세히 살펴봤다. 뭐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다. 매번 ‘꼴찌 증명의 기준’으로 동원되는 ‘OECD 평균’에도 그리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보다 독서율이 높은 나라는 주로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과 같은 북유럽의 나라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다. 일단 겨울이 무지하게 길다. 오후 두세 시면 깜깜해진다. TV도 너무 재미없다. 대부분 토론프로그램이다. 드라마도 보고 있기가 참으로 딱한 수준이다. 한국처럼 ‘출생의 비밀’ 따위는 그리 큰 문제 안 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 긴 겨울밤, 붉은 백열등 불빛 아래 책을 읽는 것이 우아하게 폼도 나고, 시간도 잘 간다.
…중략…
책을 꼭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버려야 한다. 띄엄띄엄 골라서 읽으라고 목차도 있고, 색인도 있는 거다. 하루에도 수만, 수십만의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어느 세월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을까? 골라 읽는 ‘발췌독’이야말로 가능해지는 주체적 독서법이다. 책은 진짜 재미있고, 정말 중요한 것만 끝까지 읽는 거다.
- 우리는 ‘귀한 것’에 꼭 침을 바른다 중에서
→ 나도 공감한다.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하는데, 보이는 곳에서 읽지 않아서 그렇지, 책 읽는 사람들은 내 주위에도 많다. 드러내질 않을 뿐이지. 책을 읽는 사람은 최소한 1주일에 한권은 읽는 듯 하다. 도서관에 가도 카페에 가도 전철에서도 책 읽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핸드폰을 들여다본다고 하는데, 이북을 읽는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서점도 많고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우리나라 독서인구는 작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문제는, 책을 안 읽는 게 아니라, 책을 안 읽는다고 한탄하고 있는 부정적인 시각이 문제다. 책의 종류는 다양하고, 다양한 책 중 어느 책인가를 읽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이제, 우리도 패러다임 전한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 책 많이 읽어요! 그러니, 보다 더 많이 응원 좀 하자구요~ 책 권하는 사회, 어떤가요!
5,
난 살면서 ‘올 한 해 경기는 아주 좋겠습니다“라고 하는 경제 전문가의 에측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 경제의 미래는 항상 나쁘고 어렵다. 그들의 예측이 옳았다면 한국 경제는 이미 망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켜보면 우리 경제는 매년 성장했고, 여전히 잘나가고 있다.
골프 드라이버 광고야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런다고 하지만, 경제 전문가는 왜 그따위 ’거지 같은 미래 예측‘을 하는 걸까? 욕먹지 않으려는 거다. ”나빠질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가 경제가 좋아지면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좋아졌으니 남 탓할 이유가 없는 거다.
- 냉소주의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 경제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어렵다 어렵다 하는데, 아무리 경제가 좋아도 누군가에게는 항상 경제가 어렵고, 누군가에게는 항상 경제가 좋다. 하루하루 풀칠하기도 어려운 이들에게는 그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내미는 사회단체나 정부의 정책이 풍요로운 경제고, 사업하다 망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망친 경제다. 그러니까, 경제가 어렵다느니 하는 전문가의 말에는 신경써야 할 이유는 없다. 어떻게든, 지금의 나에게서 풍요의 법칙을 찾아보려 노력해야 할 것만 같다. 나도! 그렇다. 지금의 경제? 나쁘지 않은데, 뭐가 나쁘다는 건지? 실감할 수 없으면, 공감도 가지 않는다. 상황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냥, 내가 지금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나에겐 풍요로운 경제라 할 수 있는 긍정적 인식, 그것이 중요하다.
6.
’자기만의 방‘ 출입문은 꼭 밀어서 여는 문이어야 한다. 조금씩만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당겨 열면 방 안이 한번에 다 들여다보인다. 그래서 침실 문이 죄다 밀어 여는 방식인 거다. 한 번에 다 보이면 서로 낭패다.
타인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아주 천천히 밀어 여는 거다. 사랑할수록 조금씩 밀어 여는 거다.
- 인생을 바꾸려면 공간부터 바꿔야 한다 중에서
→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던 나의 꿈은 나의 프라이버시와도 직결된다.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고 나의 할 일을 하고 싶었다.누군가의 사랑이란 걸 받는다는 걸 느끼지 못했던 청소년 시절, 나는 정말 나만의 방이 아니라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에서야 꿈을 꿀 수 있었단 거겠지!
7.
지금 내 삶이 지루하고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지금의 내 관점을 기준으로 하는 인지 체계가 그 시효를 다했다는 뜻이다. 내 삶에 그 어떤 감탄도 없이, 그저 한탄만 나온다면 내 관점을 아주 긴급하게 상대화시킬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멀리 봐야 한다. 자주 올려다봐야 한다. ’저녁노을 앞에서의 하염없음‘과 같은 공간적 오리엔테이션의 변화는 긍정적인 심리적 변화를 동반한다.
- 멀리 봐야 한다, 자주 올려다봐야 한다 중에서
→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를 읽고 난 후의 지금은 난 아주 느낌이 좋다. 나만의 ’슈필라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이 공간에서 멀리 볼 수 있는 나의 삶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 날의 아픔, 지난 날의 불쾌함, 지난 날의 서러움, 그런 것들 모두 이 공간에서 날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당당하게 내게 주어진 길을 향해 걸어야겠지. 나만의 작업실에서도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나만의 공간에서는 전혀 다른 공기가 흐른다. 내 삶을 돌아보게 했던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는 내게 그렇게 시간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나의 생각과 저자의 생각이 어우러져 또다른 시간의 흐름이, 또 다른 슈필라움이, 이 글을 보는 그대에게도 전해져 흐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