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잔치는 끝났다 / 최영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다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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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마감하는 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누군가에겐 말도 되지 않는 패배적인 자조였을 터이고, 누군가에겐 씁쓸한 상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시였을 터다. 나에겐 자조였고 상처를 되돌아보게 되던 시였다.

비판도 인정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 그 상태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저 마지막 구절만

되뇌이곤 했다.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영미가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에 실은 시가 다시 논란(?)이 된 모양이다.

그동안 숨겨져 왔거나 문제를 제기해도 묵살된 문단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쉬쉬하던

문제들.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벌어지는 그 동안의 못된 관행들을 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을 사회의 어른이라고 생각하면서 대접하고 부당한 행위

를 쉬쉬하고 덮어 줌으로 우리들은 '괴물'을 키워온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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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은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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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이 하도 많아서...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이 먹는 물이 똥물이라는 걸 불쌍한 대중들이 깨달아야 방법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그 불쌍한 대중들에게 똥물을 먹이는 걸 감내한 대가가 바로 괴물이니...

그냥... 올해부터는 그놈의 노털상 후보로 뉴스에 나오는 En의 모습을 보지 않았음한다.

지겹다 못해 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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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8-02-05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은 문단 뿐 아니라 어디서든 그럴 것 같았어요. 이제 연애계도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고 직장에서도 그래야 할 것 같은데 한국은 너무 조용한 것 같아 이상해요. 비록 도망쳐 나오더라도 교활한 늙은이라고 한마디라도 한 최영미에게 박수를!

순오기 2018-02-05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n이 고은이라는 걸 확실하게 드러낸 최영미의 용기~ 칭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