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최고 단편선 - TV 피플
무라카미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삼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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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아는 한 선배도 '상실의 시대와 TV피플을 읽으면 하루키 전부를 읽은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둘을 다 읽었더랬다. 그러더니 하는 얘기는 아무 느낌 없댄다. 상실의 시대와 TV피플이 전부라니, 누가 퍼뜨린 유언비어인가?

단편집 <TV피플>은 하루키답지 않은 건조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건조한 느낌의 원인은 무엇일까? 혹자의 말로 그것은 리얼리티였다. 하루키답지 않은 일상적 리얼리티가 나를 건조하게 만들었다. <댄스 댄스 댄스>니 <태엽감는 새> 등에서의 오컬티즘이 없었다. (여기서의 오컬티즘이란 <상실의 시대]>에서까지 발견된다고 말할 수 있는 광의의 단어다.) 물론 단지 그런 리얼리티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TV피플은 오컬티즘이니 댄디즘이니 그런 논의가 오고갈 여지도 없는, 환상적이니 실험적이니 하는 평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다. 책 표지에 적혀있는 '내면의 흐름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란 카피가 이 책의 가치를 과연 높여줄 수 있는 카피인지조차 의심이 간다. 이건 비약하면 리얼리티로 포장된 다다이즘 아닌가?

물론 환상적이긴 하지만, 흔히들 쓰는 심리분석학으로 분석하면 메이저적인 해석을 내릴 수도 있다. 특히 <TV피플>이나 <비행기>, <잠> 등이 그렇다. 현대인의 심리가 굉장히 특이한 방법으로 표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물론 그것은 한 개도 현실적이지 않은 현실을 아주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는 하루키적 캐릭터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는 한 엘리트의 심리가 매우 잘 드러나지만 아예 환상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그래서 더욱 건조하다.) <가노 크레타>는 오히려 특이하지 않은 방법으로, 즉 메이저적으로 쉽게 해석되어질 수 있는 여러 상징들을 사용해서 내면에 대한 교훈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 <좀비>는 전체가 하나의 환상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다. 오히려 환상이라고 보는 쪽이 여성의 여러 가지 컴플렉스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런 심리학적 해석을, 하루키는 마음에 전혀 두지 않고 썼을지도 모르고, 이런 해석을 내리는 것에 대해서 어쩌면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해석불가능. 그렇다면 참으로 무의미하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 셈이 되겠지만.

산만하게 리뷰를 쓰고 있는데... 그건 책 자체의 영향이기도 하다. 대부분 단편들의 결말이 그렇듯이, TV피플에서의 결말들 역시 대개가 붕 떠버리는 식으로 발산되며 끝나버린다. 정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이 책을 읽고 난 선배가 아무 느낌을 받지 못한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하루키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책을 읽고 하루키를 좋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최고 단편선이라고 잘도 이름을 바꾸는 이 출판사가 얄밉게 느껴진다. <노르웨이의 숲>에 '상실'의 이미지를 갖다붙인 다른 출판사의 상술과 다를 게 없다.

전체적으로, 리얼리티와 환상의 혼재 속에서 부유하고 표류한 기분이다. 피곤해진다. 나라면 하루키의 다른 수많은 작품들을 추천해주겠다.

2001. 1. 3 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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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한양출판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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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럽다. 아니, 허무하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하루키는 말했다지만, 왠지 찬성하기가 싫어지는 것이다. 하루키는 역시나 긍정적인 인간인 것이다.

이 소설은 간단하게는 외도를 피우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여자 시마모토를, 아내와 자식을 얻은 37살이 되어서 다시 만나게 된 하지메.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하룻밤 사랑을 나눈 후 시마모토는 사라져버린다. 남겨진 하지메는 다시 아내와 자식에게 돌아간다.

환상 - 시마모토와 현실 - 아내와 자식. 문제는 하지메가 현실로 돌아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사실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잃어버린 20년을 되찾을 수도 없고, 두 번 다시 '흡인력'에 의한 사랑을 할 수도 없다. 하지메는 단지 안정적인 현실 속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그런 면에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와는 차별된다.)

그런데 과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그런 일상적 현실이 나쁜 것인가? 이른바 소시민적 삶이라고 하는 그러한 삶이 지탄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인간은 늙으면 모두 안정을 추구하게 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하지메가 20년을 되찾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완전한 사랑을 되찾는 길은 동반 자살밖에 없었을 거라고 깨닫는 하지메에게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씁쓸한 일이다. 20년이 상징하는 것은 간단히는 물론 젊음이다. 이 소설에서 하루키는 딱히 끓는 혈기나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등 젊음의 스테레오타입은 언급하지 않는다.(그것은 하루키적 캐릭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대신 흡인력이라고 하는 것이 제시된다. '자신을 위한 숙명적인 냄새'는 아무 때나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결론은 결국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인가. 긍정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아, 젊음이여. 나의 흡인력의 대상이여, 그대는 어디 있는가. 나 늙기 전에 어서 나타나주게.

2001. 2.13 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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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혜원 월드베스트 4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 혜원출판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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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냥 한 번을 읽었다. 작품이 끝날 때쯤 어째서 '위대한 개츠비'일 수밖에 없는지 조금 공감이 가긴 하지만, 완전히 수긍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서 그의 다른 단편들을 읽으며 다시 개츠비를 읽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위대한 개츠비'라고 감탄하게 되었다.

사회적 계급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얻기 위해서 청춘을 자수성가에 바쳐 부를 움켜쥐게 된 개츠비. 그가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해 쏟는 노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작품에 직접 언급되지 않고 개츠비가 죽은 뒤에서야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그러한 노력들이 개츠비를 성공하게 만든 것이었다. 1차 대전 후의 시대 상황은 개츠비에게 기회 아닌 기회였다. 그가 그것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노력의 대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츠비의 그러한 지위 상승의 최종 목표가 단지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이미 결혼해버린 여자에 대한. 성공한 후의 그라면 다른 젊고 아름다운 여자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었던 것이다. 한 여자에 대한 사랑, 그것을 되찾기 위한 노력, 그것이 개츠비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개츠비는 물론 데이지를 되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5년이라는 세월 동안 데이지나 개츠비의 마음이 변해버렸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 데이지를 감싸려고 했던 개츠비에게 닥친 불운 때문이었다.(이쯤 되면 피츠제럴드의 스토리 꼬아놓기에도 감탄을 하게 되게 마련이다.) 아마 후반부에서 개츠비가 데이지를 감싸주지 않고 자수를 설득한다든지 했다면, 그것은 이미 위대한 개츠비가 아닐 것이다. 개츠비의 사랑은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데이지가 과연 그만큼 가치가 있는 훌륭한 여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만약 데이지의 개츠비에 대한 사랑이 개츠비의 그녀의 대한 사랑의 반만큼만 됐었다면, 데이지는 주저없이 개츠비를 선택했어야 옳을 것이다. 애정을 차치하더라도 작품 내에서 묘사되고 있는 데이지는 그다지 교양있는 여성상은 아니다. 물론 당시 미국의 전형적인 사교계 여성상에는 부합될지 모르겠다. 거기에다가 실수라고는 해도 나중에는 뺑소니까지 치고 달아나지 않는가. 그러한 모든 결점을 단지 외적 매력으로 커버할 수는 없을 듯하기도 하다. 어쨌든 개츠비는 그런 데이지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그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나쁘게 말한다면 개츠비는 미련하고 고집불통의 사나이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화자(닉)와 조던의 사랑도 이루어지는 듯하다가 개츠비의 죽음으로 인해 깨지는데, 이는 여기에 대한 작가의 간접적인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모할지라도 도전하는 것이 젊음이고 개척이다. 20세기 미국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것과 무관하지 않게 참으로 미국적인 모토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미국적이기만 한 얘기는 아니다. '용감한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 개츠비는 위대했다. 그리고 용감했다.

2001. 3. 3 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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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소설 메피스토(Mephisto) 17
카렌 두베 지음, 박민수 옮김 / 책세상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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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맘에 들어서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샀다. 그리곤 몇 달이 지나서야 읽게 되었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다. 아는 선배는 이 소설이 <목화밭 엽기전>보다 더 심하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잔혹한 묘사나 외설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 이상이 들어 있다. 이런 센세이셔널한 요소와 어느 정도의 작품성도 갖추고 있는 소설이, 사람들이나 평론가들로부터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비교적 생소한 유럽 작가의 소설이라는 점도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소설은 주인공 레온이 늪지로 이사를 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 주인공이란 남자가 꽤나 속물적이다. 속물적이긴 하지만, 또한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작가 카렌 두베의 심리 묘사가 매우 치밀하게 정곡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이른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일'은 나쁘게 말하면 속물근성에 지나지 않는다.) 아내 마티나는 처음에는 아무 문제도 없는 보통 여자로 보이지만, 곧 가정에 대한 컴플렉스(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게다가 습관적으로(?) 몰래 음식을 마구 먹은 후에, 곧 토해버리는 데에서 일종의 쾌감을 느끼는 여자다. 그리고 이웃에 사는 자매 이사도라와 카이, 그리고 마을의 상인 케르벨 등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인간들이다.

이러한 등장인물들과 더불어 늪지라는 배경 역시 음침함 그 자체다. 지금까지 늪지에 대해서 이 작품만큼 세세하게 묘사한 소설은 보지 못했다. 거기에 비가 내린다. 책 처음부터 끝까지 비는 계속 내린다. 그야말로 '비의 소설'이다. 이런 음습함 속에서 소설은 진행된다. 배경과 등장인물, 그리고 마침내는 스토리까지 후반부에서 결국 절정에 이른다. 이건... 읽어봐야만 안다. ^^;

음침하고, 끈적거리고, 엽기적인 소설이다. 역자의 말을 빌리면, 모든 인간적 가치를 비웃고 삶의 본질적 비속함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단순히 요즘 유행하는 '엽기' 소설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더 많이 알려졌을 것이다.) 물론 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읽게 됐으면 좋겠다.

2001. 4. 5 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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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퇘지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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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소개로 읽게 되었다. 과연 듣던대로, <비의 소설> 만큼이나 엽기적이었다. 처음만 말이다. 엽기가 엽기일 수 있는 것은 최소한만큼이나마 현실성이 전제될 때뿐이다. 후반부부터는 이 소설은 아예 SF가 되어버린다. 그것으로 작가는 책임을 피하려 한 건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 때문에 이 소설은 단순히 '선정적이고 엽기적인' 소설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프랑스 미디어들의 찬사가 괜히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져서 재미가 그다지 없었다. 작가가 얘기하려는 사회의 부패라든지 인간의 추잡함(?)은 초중반부에 걸쳐서 이미 충분히 묘사되었고,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보름달을 보면 늑대인간이 되는 남자의 출현으로 소설은 그나마 남아있던 현실성을 잃어버리고, 독자로 하여금 긴장을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그 외에도 가끔씩 끼어들어 말하는 작가의 말들 - '내가 하게 될 이야기가 난잡해 지더라도 용서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따위의 것들 - 도 조금 짜증이 난다. 물론 끝까지 읽고 나면 그 이유를 알게 되긴 하지만, 짜증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것들은 그냥 덜 성숙된 처녀작이라는 이유로 덮어두기로 하자.

어쨌거나 이 작품이 굉장히 매력적이라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초중반부의 긴장도 그렇고, 다분히 선정적인 묘사들도 그렇고, 무엇보다 '변신'을 소재로 했다는 것이 기존의 소설들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분명히 끌릴 만한 요소가 될 것이다. 책 뒤 한 서평 중 '소재 자체에 외설의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 다리외세크는 저속성이라는 암초를 피하는 데 성공했다'라는 서평이 있는데, 동감하는 바이다. 분명 이 소설이 매우 묘사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세세하지는 않다. 오히려 조금 추상적이거나 너무 간단히 지나쳐 버려서 그 뜻이 혼동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역자의 책임으로 묻고 싶다.

전체적으로, 꼭 읽어야만 하는 책 정도로 추천할 수는 없다.(사람에 따라선 이런 책을 매우 혐오스럽게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엽기'라는 코드를 '저속'과 혼동하지 않을 정도의 내공이 쌓인 사람이라면, 뭔가 새로운 것에 갈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은 얼마든지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

2001. 4. 8 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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