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동안에는 아홉살 여자조카를 데리고 홍콩 디즈니랜드에 다녀왔다. 나를 위한 여행이 아닌, 디즈니에 가보고 싶다고 했던 조카를 위한 여행이었다. 도착한 날에는 밤 늦게 도착해 호텔에서 씻고 바로 잠을 잤는데, 새벽 다섯시반이었나, 조카는 먼저 깨서는 '이모, 일어나도 돼?' 물었다. 아니, 아직 어두워서 안돼, 날 밝으면 일어나야 돼, 라고 말했다. 한시간 후쯤, 조카는 다시 내게 말했다.


"이모 내가 커텐 열어봤더니 날 밝았어. 이제 일어나도 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진짜 아침부터 빵터져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여동생과 나는 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일어난 것이다. 밤늦게 도착했으니 아홉시나 열시까지 자자고 말해두었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섯시 반에 걍 일어나버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마도 디즈니에 간다는 설레임 때문에 조카는 잠을 못이룬 것 같은데, 어쨌든 그렇게 디즈니에 가서 테마 파크를 가고, 기념품 샵을 가고, 놀이기구를 타고, 퍼레이드를 보고, 밥을 먹고, 걷고 걷고 또 걸어서.... 몸이 부숴질 것만 같은 극도의 피로함을 느꼈다. 저녁은 편하게 호텔 앞에서 먹자, 하고는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서는 씻고 레스토랑에 갔다. 레스토랑 앞은 작은 광장처럼 꾸며놨는데, 차가 다니지 않고 테이블들이 여러개 놓여 있어, 거기서 맥주며 간식을 먹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루종일 돌아다녔던 조카는 조카 먹으라고 시켜준 김치볶음밥을, '조금 맵지만 맛있어' 하면서는 잘도 먹었다. 망고 스무디, 망고 스무디 노래를 불러서 망고 스무디도 시켜주었더니, 같이 잘 먹었어. 중간에 여동생과 내가 주문한 호가든이 너무 커서 모두 함께 웃으면서 사진을 찍고 그러느라 여동생과 내가 스맛폰을 만지고 있으니, 계속 김치볶음밥을 먹던 조카는,


"왜 나만 먹어?"


이래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동생과 빵터져서 우리도 같이 밥을 먹었다.



조카는 밥을 다먹고는 또 좀이 쑤셨는지, 저 앞에 나가서 바다 보고 와도 되냐고 물었다. 우리 숙소는 디스커버리 베이에 있는 호텔이었고, 레스토랑에서도 바다가 보였다. 응, 다녀와, 했더니 바다에 다녀오고, 나 저기서 나가 놀아도 돼? 하고는 레스토랑 앞 광장을 가르키길래, 응 나가 놀아, 했더니, 와, 이 작은 아이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걸까. 분수가 있는 광장에서 혼자서 폴짝폴짝 뛰고 노는 거다. 혼자서 빙그르르 돌기도 했다가, 여기에서 저기로 폴짝 폴짝 건너 뛰었다가, 분수대 주변을 빙빙 돌면서 뛰었다가, 바다를 본다고 뛰어내려갔다 왔다가....어휴.... 나한테 계속 나가자고 하는걸, 안돼, 이모 너무 피곤해...하고 안나가고 레스토랑에 앉아 그렇게 팔짝팔짝 뛰는 조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쟤는 어쩜 저렇게 계속 뛸 수 있을까? 저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걸까?"



그리고 잠시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는데, 조카도 같이 가겠다고 한다. 그래, 하고는 조카 손을 잡고 화장실에 갔다 돌아오는 길, 조카는 내가 식당 안으로 들어가게 내버려두질 않았다. 내 손을 잡고 분수대 앞으로 끌고 가더니, 이모, 우리 달리기 시합하자, 누가 먼저 두 바퀴 빨리 도나 하자, 하는 게 아닌가!!


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조카야, 이모 못뛰어, 이모 진짜 피곤해...하고 안뛰겠다 했더니, 내 손을 꼭 잡고 뛰기 시작한다..덩달아 뛰었어....아아...나의 종아리는 부서집니다...ㅠㅠㅠㅠㅠ




홍콩 가는 비행기에 타기 전에 여동생과 나는 면세점에서 와인을 한 병 샀다. 디즈니에 다녀오면 아이가 피곤할테니 일찍 잘테고, 아이 재워놓고 좋은 와인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자, 하고 준비한 거다. 나는 그 시간을 위해 집에서 치즈도 챙겨갔어.  레스토랑에서 뛰는 아이를 바라보며,


"쟤가 빨리 자야할텐데.."



했는데, 웬걸,



저녁 먹자마자 들어간 우리 셋은 모두 함께 침대에 누워 기절해버렸다....와인은 무슨 와인.......셋 다 뻗어버리고...중간에 조카는 나를 깨웠다.



"이모, 시끄러워, 코 골지마.."



미안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모가 미안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모 오늘 너무 피곤해서 그랬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요가를 6년간 해온 여동생은 굉장히 날씬한 몸을 가지고 있다. 조카가 본 성인 여자의 몸은 여동생의 것일텐데, 조카는 이제 아홉살인데 벌써부터 '예쁜 여자'라는 것에 대한 기준이 세워진 것 같다. 긴 머리, 팔다리 제모, 날씬한 몸... 누가 그렇게 일러준 게 아니지만 또 세상이 그렇게 모두가 하나 되어 알려준 것이기도 할테다.



그런 조카 앞에서 나는 옷을 벗고 돌아다녔다. 조카가 그동안 생각해온 어른 여성의 몸과 나는 아주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일단 나는 내 여동생과 아주 많이 다른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겨드랑이에 털이 있었고, 온 몸에 살이 많았고, 엉덩이가 무척 컸다. 조카는 나를 보고 겨드랑이에 털이 있다고 놀랐다.



"이모 겨드랑이에 털있네."

"응."

"나는 없는데."

"너도 어른이 되면 털이 나. 아직 아이라서 안나는 거야."

"털 나면 밀거야."

"이모는 털 안밀거야."



나는 털을 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날씬한 몸을 반드시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아이에게 '말해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는 직접 다양한 몸을 보여주는 게 훨씬 나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조카 앞에서 털이 있는 겨드랑이를 챙피해하지 않고 나시 원피스를 입고 같이 외출을 했다. 아무도 내게 신경쓰지 않았다. 또한 커다란 엉덩이를 가지고 조카와 욕조에 들어갔다. 욕조의 마개는 눌러서 열고 또 눌러서 닫는 거였는데, 중간에 내 엉덩이가 눌러버려서 물이 조금 빠진 거다. 나는 '으이크, 이모 엉덩이가 눌러서 물 좀 빠졌네, 얼른 닫아야겠다' 했더니, 조카는 '이모 엉덩이가 왜이렇게 커?' 하는 게 아닌가.



응 이모는 엉덩이가 커.



라고 답했다.




조카는 앞으로 살면서  팔다리 제모를 하고 날씬한 몸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어른 여자들의 모습을 훨씬 많이 접하게 될것이다. 텔레비젼 어디를 틀어도 자연스레 그런 어른 여자들이 보일 것이고. 그렇지만 나 때문에 '그렇지 않은' 어른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것이다. 나같은 사람이 훨씬 수가 적으니, 조카는 앞으로 다이어트를 하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길리고, 겨드랑이와 종아리의 털을 미는 선택을 반복해 하게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는 여자어른이 있다'는 것은 알게될 것이다. 내가 그 앞에서 그 산 증인이 되었다.



온 몸이 살로 가득차고, 겨드랑이엔 털이 가득차고, 엉덩이가 무척 크고 ,시끄럽게 코를 골고, 머리가 짧은 어른 여자.

자신이 그동안 알아온 '예쁜 여자'와는 그 거리가 상당히 먼 여자.



어쩌면 조카는 이런 나를 자라면서 창피하게 여길 지도 모른다. 왜 우리이모는 뚱뚱하고, 털이 있고, 엉덩이가 크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모습으로도 살아가는 여자 어른이 있다는 걸 나는 자연스레 그 앞에서 보여줬다. 나는 아이에게 다양한 어른 여자의 모습이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이 여행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될까?



어제 제 외할머니를 만난 조카는 나에 대해서 계속 조잘조잘 했다고 한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걸어 그 소식을 전했는데, '엄마 걔가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데?' 물었더니, '니 엉덩이 크다고 계속 얘기하더라' 하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조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너 너무 잘운다고...', '그리고 너 인형 사서 이름을 지어줬다고..''너랑 다니는 거 챙피해서 이제 같이 안다닐거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무슨, 여행 내내 내 손만 잘만 잡고 다녀놓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흥!!



아니, 얘 뭐 이렇게 다 말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밀이 없어 이노므 자식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이 어린 여자아이와 나는 홍콩에 다녀왔다.

더 다양한 어른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 책들을 읽으려고 대기시켜둔 참이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민(愚民)ngs01 2018-05-0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으신 이모시네요....
고생하셨어요 ~^^~

다락방 2018-05-08 13:44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고생 많았답니다. 흑흑 ㅠㅠ 고생 많았어요 ㅠㅠㅠ

고맙습니다!

순오기 2018-05-08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아들 어릴 때 제 이모를 우상으로 아는데... 다른 모습으로 사는 여자어른이 있다는 걸 보여준 멋진 이모~좋아요!!♥

다락방 2018-05-08 13:58   좋아요 1 | URL
예전에는 그랬던것 같은데 아홉살이 된 지금은..제가 우상이 아닌 것 같아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렇지만 저는 굳고 단단하게 제 길을 가렵니다. 흐흐흐흐흣

비연 2018-05-09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멋진 이모세요.

제 조카는 이제 중2 남자애인데.. 예전에는 ˝고모가 **을 사랑하는 거 알지?˝ 하면 귀여운 눈으로 ˝응응˝ 했는데, 요즘은 그렇게 말하면 너무나 시크한 무표정함으로 ˝아니? 모르겠는데?˝ 이런답니다... 아흑...

다락방 2018-05-09 09:14   좋아요 0 | URL
제 조카는 이제 아홉살인데...벌써 저에 대한 흥미를 잃은 것 같아요. 이젠 절 사랑하는건지..잘 모르겠어요. 언제나 저를 사랑해주던 아이인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시크한 표정은 벌써부터 잘 보인답니다. 흙흙 ㅠㅠ 중2까지 되면.....저한테 차가워지겠죠? (글썽)

우앙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울음을 터뜨린다)

비연 2018-05-09 12:37   좋아요 0 | URL
................. (저도 같이) 우앙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보슬비 2018-05-14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힝.... 전 조카들에게 이모 사랑해요~라는 말 들어본적이 없어요... ㅠ.ㅠ;;
나도 여자 조카 있으면 좋겠어요.
애정을 구걸해야하다뉘~~ OTL

다락방 2018-05-15 08:10   좋아요 0 | URL
여자조카..이제 9살 됐는데..너무 쿨식해졌어요 ㅠㅠ 시니컬해짐 ㅠㅠ
좋다고 손 잡고 다닐 땐 언제고 또 이제 이모랑 안다닌다고 하고. 아주 그냥 저를 들었다놨다 해요. 엉엉 ㅠㅠㅠ
저 역시 항상 애정을 구걸하고있어요. 엉엉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전자책] 파이와 공작새
주드 데브루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로맨스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할 때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실례인지, 어떤 식의 대화와 행동이 상대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로맨스 소설이야말로 남자들이 읽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다. 남자들은 사랑을 포르노로 배워야 하는 게 아니라, 로맨스 소설을 읽음으로써 좀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거다. 포르노 까지는 아니지만  '19금 성인영화'라는 걸 보았을 때, 나는 그 안에서 여자가 얼마나 성적대상화 되는지에 당황했었다. 그러니까 성인 남자와 성인 여자가 사랑을 느끼고 성적 욕망을 느끼는 게 아니라, 여자는 애초에 성적대상일 뿐인거다. <옥수수>에만 들어가도 그런 영화가 널려있는데, 남자들...이런 영화 보면서 그동안 살았던건가... 여자를 성적대상화 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구나. 그 안에서 성적대상화 하지 않고 하나의 사람으로, 동등한 인간으로 보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겠어. 맙소사..



그래서 '주드 데브루'의 이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게 유감이었다. 물론 중반을 넘어서면 괜찮긴 하지만, 남자 주인공 '테이트'가 얼마나 매력적인 영화배우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여자 주인공 '케이시'가 얼마나 주체적이고 당당하고 자존감 높은 여자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주드 데브루는 대부분의 여성을 다 골빈여자 취급해 버린다. 연극 <오만과 편견>의 여자주인공 오디션을 보는데, 상대인 테이트 앞에서 아무도 제대로 대사하지도, 연기하지도 못하고 그저 침만 흘리는 걸로 묘사하는 거다. 물론, 전문 배우들이 아니고 마을 주민들 중에서 뽑는 오디션이니 연기가 어설프고 대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거야 당연하달 수 있지만, 어쩌면 다들 그렇게 남자 배우 때문에 정신을 못차리게 만드는가. 여자들이란 잘생긴 남자 앞에서는 제대로 사고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의 여주인공 케이시가, 테이트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케이시가, 편견으로 인해 테이트에게 매력을 1도 못느끼는 케이시가, 요리사이며 연기에는 관심이 1도 없던 케이시가, 우리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역을 맡게 되면서 이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거다. 너무..좀 너무하지 않냐...


너무도 전형적인 패턴이라서 나는 주드 데브루와 나 사이에 세대차이를 느꼈다. 로맨스 소설을 현대를 사는 여성이 현대를 보는 기준으로 써야할 필요를 느꼈다. 모든 여자들이 선망하는 남성을 나는 싫어하면서 생기는 로맨스라니. 게다가 그 남자는 잘생기고 섹시하고 인기도 많은데 돈도 캡 많어....


아무튼 연기나 연극에 대해 주드 데브루는 얼마나 알고 이걸 쓴걸까. 테이트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다아시를 미워하는 엘리자베스 역을 잘한다는 설정이라니, 좀 .. 너무하지 않냐...


게다가 하비 웨인스타인...이라니....





내가 로맨스 소설과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전형적인 패턴-환상적인 남주와 그를 심드렁하게 보는 여자-은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어. 전형적인 패턴보다 더 싫은 건, '특별한 여자주인공'을 만들기 위해 다른 여자들을 모두 똥멍청이로 만들어버리는 거다. 이러지 마세요, 진짜...



아마도 그간 로맨스 소설을 줄기차게 써온 작가인지라 이 전형적인 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세대차이를 느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그저 나쁜 로맨스 소설이었냐 하면 그건 그렇지가 않다. 나는 기억나지 않지만, <오만과 편견>소설 속에서 미성년자와 성인 남자가 사랑의 도피를 떠나는 장면이 있었는가 본데, 그 장면에 대해 현대적 연극에서 재해석을 한다. 미성년자를 꼬이는 건 범죄이며, 그것이 그 당시 미성년자의 '선택'이었다 해도 결코 여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오해와 이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주드 데브루는 '여자'와 '남자'의 성역할이 있는 것처럼 시종일관 얘기하지만, 어떤 것이 나쁘고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를 헷갈리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케이시 스스로가 말한 이 뜨거운 여름의 불장난에 대해, 케이시가 느끼고 결심하고 선택하는 것들이 와닿는다. 한 남자에 대해 오해를 하고 그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에게 처음부터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그의 말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를 판단했던 것, 거기에 이른 후회까지. 또한, 자신이 그에게 정식 여자친구가 아니라 그저 이 여름의 불장난으로 취급되어질까봐 걱정하고 뒤로 물러서는 것까지. 한 사람에게 '당당한 옆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할거라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갈등까지. 사랑에 빠지고 내가 그에게 '내가 생각하는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하는 건 대부분 다 겪어보는 감정의 흐름이 아닌가. 또한, '상처받기 싫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자존감 높은 사람이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나' 부터 시작해서,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나' 하는 것까지, 연애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맞닥뜨리는 감정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과 연애의 시작에 있어서 디테일을 아주 잘 살렸다고 생각한 건, 케이시와 사랑에 빠지게 된 '테이트'의 생각 때문이었는데, 테이트가 케이시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 건,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자신과 웃음 포인트가 같았다는 데 있었다. 자신이 웃는 부분에서 케이시도 웃는다는 것. 나는 이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그걸 표현해준 작가도 좋았고. 또한 육체적으로 어마어마한 성적 매력을 서로 풍기도 또 성관계도 만족했던 그들인데, 케이시가 그 육체적 결합도 좋지만, 대화를 나눈 후에 관계가 더 단단하고 안정적이 된 것 같다고 느끼는 점들도 좋았고.



나 역시 대화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연애를 시작하면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반하고 사랑에 빠지는 건, 대화가 아닌 다른 것들이어도 가능하지만,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다른 무엇보다 대화가 중요하다. 어떤 모습에도 사랑에 빠지다가 질려버릴 수 있지만, 대화가 잘 통하는 데에야 뭐 버릴 게 없다. 나는 사람이란 본디 외로운 존재라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외로운 영혼을 달래주고 채워줄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혼자인 게 편한 사람도 있고 또 혼자인 게 익숙한 사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랑 대화가 잘 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런 사람을 얻기란 너무나 힘든 법이고, 그렇기 때문에 만났다면 그 손을 놓지 말아야 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뿐만 아니라 상대 역시도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또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하다 여길 수 있다. 쭉쭉빵빵하거나 근육이 불룩불룩한 몸을 최우선으로 칠 수도 있고,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최우선으로 칠 수도 있다. 이성을 볼 때 돈을 가장 먼저 볼 수도 있고, 얼굴을 가장 먼저 볼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맞춤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런 상대를 만났어도, 시간이 흐르면 헤어지게 되는 이유는 결국 대화가 잘 되지 않아서이다. 여기에서 대화라는 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어도, 어느 방향을 어떻게, 왜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서로에게 말하고 또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나중엔 엄청 열중해서 읽었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한 마음, 그래서 상처 받을까 두려운 마음,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상황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내것 같아서 엄청 열중해서 읽었어.


이래서 로맨스 소설을 남자들이 읽어야 한다. 어느 부분에서 여자가 혹은 남자가 괴로운지, 어떤 지점들에서 사랑하는 상대가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지또 행복해 하는지를 이런 식으로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집중하는 건 육체와 육체로 맺는 관계일 수 있지만, 그것보다 내밀하고 더 친밀한 무엇이 있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찾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니까. 심지어 툭하면 팬티를 찢어버리던, '크리스티나 로런'의 《잘생긴 개자식》에서도, '이야기를 나누니까 참 좋다'고 말한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우리를 얼마나 가깝게 이어주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끝으로,

케이시가 이 여름의 불장난으로 상처 받지 않게 되어서 나는 너무 좋으다...

그래, 당신이라도 행복하세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8-05-08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이북 활용 잘 하고 계시군요. 저도, 요즘 이북 시즌^^
사랑과 연애의 시작을 아주 잘 그려낸 소설이라고 칭찬하시니, 이 책도 제 스타일이예요.
전, 연애의 꽃은 썸이라고 생각하는 1인으로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8-05-08 11:20   좋아요 0 | URL
이북은 밑줄긋기가 연동이 되어서 세상 편합니다. 너무 좋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이 처음에 여자들을 멍청하다고 후려치기 해서 짜증이 났지만, 막판에 상처받기 싫은 마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을거라는 두려운 마음을 잘 그려내서, 그 부분에서는 공감이 많이 됐어요. 사랑은 너무 어렵고, 해도 해도 계속 모르는 게 나오는 것 같아요, 단발머리님. 사랑에 대해서도 계속 공부가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어쨌든 이북 만세! ㅋㅋㅋㅋㅋ
 
180502Wed

이별이 오면


                                                  문태준



이별이 오면 누구든 나에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후련하게 들려주었으면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면서
바지락과 바지락을 맞비벼 치대듯이 우악스럽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들려주었으면
그러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틀어막고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겠지
가장 아픈 데가 깔깔하고 깔깔한 그 바지락 씻는 소리를 마지막까지 듣겠지
오늘은 누가 나에게 이별이 되고 나는 또 개흙눈이 되어서




















여름의 끝

                                 박연준



오래된 시간 앞에서 새로 돋아난 시간이 움츠린다

머리에 조그만 뿔이 두 개 돋아나고

자꾸 만지작거린다

결국 도깨비가 되었구나, 내 사랑



신발이 없어지고 발바닥이 조금 단단해졌다

일렁이는 거울을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수천 조각으로 너울거리는 거울 속에

엉덩이를 비추어 보는 일은

이젠 그만하고 싶다



두 손으로 만든 손우물 위에

흐르는 당신을 올려놓는 일

쏟아져도, 쏟아져도 자꾸 올려놓는 일



배 뒤집혀 죽어 있는 풀벌레들,

촘촘히 늘어선 참한 죽음이

여름의 끝이었다고

징- 징- 징-

파닥이는 종소리





















이별

                                     -박연준


천 날의 밤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밤이었다
그가 내게 이유를 물었다
구두굽으로 그저 모래를 콕콕 찍었다
모기 한 마리가 내 슬픔을 염탐하듯
발목에 슬쩍 달라붙었다
갑자기 머리 위로 비가 쏟아졌다
키 작은 나무들이 금세 흠뻑 젖었다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내 이름을 부르는 다급한 소리가 발밑으로 툭,
떨어졌다
흐느적흐느적 빗속을 걸었다
나무들이 일렁이며 저희들끼리 수군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1-12-29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다락방님, 방금 전에 시집 다 읽고 독후감 쓰려 검색했거든요.
저도 <이별이 오면>은 반드시 인용하겠다고 마음 팍 먹었는데, 다락방 님도 제일 앞에 소개하셨네요! 무지 반갑습니다.
다락방님 용어로 해서... 쒼나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12-29 14:38   좋아요 0 | URL
아니, 폴스타프 님! 2018년 페이퍼에 어쩐 일이세요? ㅋㅋㅋ 아 너무 재미있네요.
저 바지락 씻는 소리 너무 찰지지 않나요. 화악 오는 공감각입니다. 폴스타프 님, 얼른 독후감 써주세요! 폴스타프 님 글에 제가 아는 책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ㅋㅋㅋㅋㅋ
 















아무런 정보없이 이 책을 꺼내들었다. 아무런 정보가 없는 건 아니었지. 어딘가에서 에로틱하다는 평을 본 것도 같았다. 그래, 에로틱한 걸로 가주자, 하고는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 실린 「만」이 동성애 이야기여서 깜짝 놀랐다. 아니, 동성애 이야기였어? 이미 결혼한 여성과 아직 미혼인 여성이 사랑에 빠지는 내용인데, 미혼 여성이 너무 아름다운 육체를 가지고 있어서 기혼 여성이 반하고...뭐 이러면서 이들 사이에 미혼 여성의 남자 애인이 끼어들어 이들의 사랑을 훼방놓고 질투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거짓말과 오해, 음모..같은 얘기들이 나오다가, 갑자기 기혼 여성의 남편이 기혼 여성을 거기서 빼내오려고 하다가 미혼 여성과 또 사랑에 빠지게 되고...여튼 복잡하고 이해가 될듯하다가도 아아 무슨 막장이냐..싶은 그런 이야기..인 것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아마도 이 책으로 처음 만나는 것 같은데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자였다는 얘기가 책 뒷편에 실려있다. 대체, 이런 작품을 쓴 것이 왜 노벨문학상에 거론되는 것인가.... 하다가, 다음 단편,「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를 읽었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시게모토의 어머니는 왜 나오지 않는가 의문을 가질 정도로 처음에 육욕과 방탕한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판을 친다. 책에서는 '색욕'으로 표현되는데, 빼어나게 잘생긴 두 미남자가 세상 여자들을 다 건드린다는 얘기인 것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도대체 무엇이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도대체 여기 어디에서 노벨문학상이 나온단 말인가...하고 갸웃거리며 읽고 있었다.



일단 이 책에 첫 등장인물 헤이주는 세상 여자를 다 건드린 바람둥이인데, 그러다가 자기 마음대로 잘 안되는 여자, '지쥬노기미'를 만나게 된다. 아무리 유혹해도 좀처럼 넘어오지 않고, 넘어 와서도 제 맘대로 되지를 않아, 아아, 뭐 이런 여자가 다있담, 하며 그녀를 포기하고자 하는데, 그런데 잘 포기가 안되니까, 아아, 어떻게 그녀를 포기하지, 하다 생각해낸 방법이 그녀의 배설물을 보고 냄새를 맡는 것이었다. 그녀의 배설물을 본다면 그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 지저분한 걸 배설해내는 사람임을 확 깨닫게 될것이고, 그러니 나는 그녀를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하는 생각인 것이다.

.

.

.

.

네?





아아, 이 남자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굳이 똥과 오줌을 봐야만 포기가 된다니.... 아, 너무 변태스럽다. 이런 것은 .. 변태가 맞는거겠지? 굳이 왜... 왜 똥과 오줌을... 그것도 변기를 훔쳐내서....그러니까 이 때의 시대적 배경은 책에서 몇 번이나 '덴교 *년' 이러면서 나오는데, 이게 몇 년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대가 아닌 엄청 옛날임은 알겠다. 그래서 변기를 치워주는 심부름꾼 아이가 따로 있는 것. 어쨌든 저렇게 마음 먹은 헤이주는 변기를 훔쳐내기에 이른다. 그런데,




변기에서는 똥냄새도 오줌 냄새도 나질 않는 거다. 애초에 거기까지 짐작하고 여자는 변기에 오줌과 똥대신 다른 것을 넣어둔 것. 그래서 똥과 오줌에서 향기가 나고 맛도...


아니, 그런데, 헤이주는 몰랐잖아. 일단 포기하려고 똥과 오줌을 본거잖아. 그런데 향기를 맡고 왜 향기롭냐..이러면서 맛까지 보는 거다. 똥과 오줌이라고 알고 있던 그 때에도 찍어서 맛을 봐..


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러지마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나는 진짜 나를 포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건 좋지만, 나를 포기하기 위해 내 똥과 오줌까지 냄새 맡고 찍어 먹는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 아 .... 지구에서 사라지고 싶다 진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러지마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왜그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랑은 뭘까.

사랑은 사랑 그대로의 사랑.

헤이주는 이미 그걸 짐작하고 다른 걸 넣어둔 여자의 기지에 그녀를 더욱 원하게 되는 것이다. 책에서는 그것을 '그리움만 더 용솟음 친다'고 표현한다. 하아.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밖에...

사랑, 그것은 아무리 거부해도 찾아들고 아무리 거부해도 좀체 달아나질 않아.

넌 뭐니..

왜 거기에서 훅 다가와서 이렇듯 머무는 거니..



그러다 완전 기가차는 것이,

헤이주가 이미 그 미모를 증명해낸 불륜 상대 '그 분'에 대해 시헤이가 그 여자를 탐을 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는 이미 오십살 연상의 늙은 남편, '구니쓰네'가 있는 것. 남편보다 40세정도 어렸던 시헤이는 자신의 높은 지위를 이용해 그 남편에게 먼저 다가가서 호의를 베풀고, 그 호의에 감사하는 남편에게 '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으라' 하는 것이다. 이에 남편은 술에 잔뜩 취해서는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를 선물로 내어주는 것이다. 애초에 그 선물을 받기 위해 작정하고 간 것이니만큼 시헤이는 이에 '그 분', 즉 구니쓰네의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

.

.

.



아내는... 뭘까?

물론, 이제 스무살이 될까말까한 젊은 여자였고, 남편은 일흔이 넘어 오십살 이상 나이차이가 있다지만, 어떻게 된 게 아내의 의도는 1도 없이... 아내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로 이렇게 남편이 다른 남자에게 아내를 건넬 수가 있나. 선물..로 줄 수가 있나. 시대적 배경이 옛날..이라,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모양이었지만,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거다. 게다가 더 어이없는 건, 구니쓰네는 자신의 아내를 진짜 너무나 열렬히, 뜨겁게 사랑했던 거다. 너무 사랑해서 좀체 잊지를 못하는데, 그런 아내를 줘버린 거다... 아, 너무 어리석다 진짜...



자기가 가장 필요로 하면서, 자기가 가장 사랑하면서, 그런데도 그 손을 놔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놓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이 삶을 감당하나, 눈물을 주르륵 흘릴거면서 손을 놓는 거다. 아, 너무 바보야. 어떻게든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냈어야지. 계속 자기가 옆에 있었어야지. 왜 보내.


물론 구니쓰네는 자신의 성생활이 예전같지 않음에 젊은 아내에게 미안해했다. 그러니 자신보다 훨씬 젊고 또 신분도 높은 남자에게 보내는 것이 아내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잘한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닥쳐온 큰 아픔에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오랜만에 심규선의 <아라리>를 듣는데, 젊은 청년1이 내게 '왜그렇게 눈물 나는 노래를 듣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결국 가지말라고 말해서' 라고 답했다. 그래, 심규선은 자신의 노래 <아라리>에서 잘 가라고, 행복하라고 해놓고서는, 사실은 가지말라고, 나를 두고 가지 말라고 하는 거다. 아아, 이것이 본마음이다!! 물론, 그렇게 가지말라고 부르짖는 심규선 조차도, 속으로 외치는 말이긴 하지만...








왜 나도, 구니쓰네도, 심규선도, 다 속으로만 울부짖을까. 왜 가지말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저렇게 손을 놓고나서, 그게 너를 위한 것이다, 라고 한 뒤에, 그러면서 처절하게 우는걸까.




어느 밤, 구니쓰네는 아들에게 이런 시를 들려준다.





아아, 이것은 내가 쓴 시인가요... 나에게로 빙의해 쓴 시인가요.. 어떻게 이런 시가 있지. 이 책에서는 이 시의 제목을 <밤비>라고 말하던데, 구니쓰네가 울 때 나도 운다...심규선도 같이 운다... 엉엉 운다...






구니쓰네는 이별 후의 과정을 충실히 밟는다. 미친듯이 술에 취한다. 그렇게 해야 아내를 잊을 수 있다는 듯. 그렇게해도 아내를 잊을 수가 없어, 그는 이제 불교에 빠져든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다 못해 술의 힘으로 잊으려 해보았으나 술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부처님의 자비심에 의지하려 한 게 아닐까.' (p.293)



나 역시 이별 후의 과정을 충실히 밟았던 적이 있다. 이별 후에 미친듯이, 매일 술을 마셨던 것. 매일 울기도 했고. 덕분에 육체의 여기저기가 고장이 났었다. 영화 《러브, 비하인드》에서의 여자도 폭음을 하고 폭식을 하고 마약도 한다. 우리는 잊기 위해 이렇게나 기를 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드플레이의 노래에서처럼,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널 잊는 방법은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런데 부처님의 자비심이라니! 아아, 나도 부처님의 자비심에 기대야 했던걸까? 부처님의 자비심에 기댔다면, 나 역시 모든 아픔을 잊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부처님의...자비심은.....그렇게 해주나요?





처음부터 끝까지 막장인가, 에로틱인가... 생각하게 만든 이 책이,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의 끝으로 갈수록 분위기가 바뀌어버린다. 시게모토는 구니쓰네와 아내의 아이인데, 그렇게 다른 남자에게 엄마를 뺏겨버려 평생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거다. 어릴 적에야 가끔 엄마를 찾아가 엄마 품에 안기기도 했지만, 엄마가 그 집에서 아들을 낳고 나서는 그 집에 찾아가지도 못하고 평생 그리워하는 것. 이 그리움이 표현되면서부터 책은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데, 야, 이러기 있긔없긔. 비바람에 벚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듯, 아름다운 문장들이 와락 쏟아져 내리는 거다. 그리움과 풍경묘사가 고요하고 아름다워서, 야, 갑자기 이러면 날더러 어떡하랴는 거냐, 싶어지는 거다. 일전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으면서도 풍경 묘사에 아름답다 생각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는데, 시게모토가 쉰이 넘어 그리워하는 어머니를 찾아가는 데에는, 와, 정말 '와락' 아름다움이 쏟아지는 거다. 발길을 어머니에게로 이끄는 힘이 느껴지고 그 신비한 힘에 나조차 끌려가는 느낌이랄까. 뭐죠...뭡니까, 다니자키 준이치로.... 책의 분위기가 이렇게 갑자기 확 바뀌어도 되는겁니까......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그 후반부 때문에, 갑자기 좋아지고 말았다.....




기다리던 윤김쌤의 책이 나왔다. 기존에 내가 리뷰를 쓰기도 했던 책, 《헬페미니스트 선언》의 개정판인데, 내용을 더했다고 한다.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오자마자 다정한 친구가 내게 선물로 보내주었어. 그래서 내게로 오고있다. 꺄울! >.<


















그나저나,

나는 오늘부터 부처님의 자비심에 기대어볼테다.


아라리를 들으면서...

구니쓰네, 같이 들어요.... 이리와서 나랑 아라리를 들읍시다.....




그리도 찬, 서리 같은 마음 어찌 품었나
너는 하오에 부는 바람만큼 온화했는데
우는 날 떼놓고 걸음 어찌 걸었나
하염없이 비 내릴 때 너도 억수처럼 울었나

떠나가소, 아주 가소 지금보다 더 멀리 가소
이내 이런 기다림은 헛된 희망 또 품음이라
나를 두고 가신 임 천리만리 더 멀리 가소
발병일랑 나지 말고 누구보다 더 행복하소
행복…. 하소

연무처럼 흩어지는 맘 어찌 붙잡나
너는 그믐에 피는 손톱달처럼 저무는데
기어이 돌아서는 널 어찌 탓할까
너는 아무도 몰래 받을 벌을 다 받았는데

떠나가소 아주 가소 지금보다 더 멀리 가소
이내 이런 기다림은 헛된 희망 또 품음이라
나를 두고 가신 임 천리만리 더 멀리 가소
발병일랑 나지 말고 누구보다 더 행복하소

언약과 증표 가련한 맹세여 다시없을
사람
마침표 없는 문장을 가득히 눌러 안고
안으로 외치는 말

가지 마소 가지 마소 나를 버리고 가지 마소
이내 이런 기다림은 멀리 멀리 저 고개로 넘어 간다
나를 두고 가신 임 십 리도 못 가 발병 나소
아라리요, 아라리야 끝내 떨치고 가신 임아
돌아보소…


간 밤에 꾼 꿈결인 듯 전부 다 잊고 행복 하소
나를 두고 가신 임아 누구보다 더 행복 하소
행복…. 하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lavis 2018-05-13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입학시험을 모두 다 마치고 릴렉스하려고 락방님 글 찾아들어왔지요 근데 아라리를 들을 수가 없어ㅠ너무 듣고 싶은데ㅠ전에도 유튭이 안들려줘서 못듣고 말았는데ㅠ부처님의 자비심에 저도 기대고 싶을만큼 딱히 생각나는 분이 없다는게 더 마음 아립니다..여긴 여전히 덥고 굿즈 보니 사고싶고 한국말 책보고싶고 그래요♡아라라,아라리두요

다락방 2018-05-14 08:54   좋아요 0 | URL
클래비스님, 한국어 책 파는 곳 없나요? ㅜㅜ 있으면 탁 찜해두고 우울할 때마다 가보면 될텐데요. 그러면 뭔가 힘도 나고 좋을텐데... (시무룩)

시험 다 마친것 축하합니다. 시험 치르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토닥토닥 좀 쉽시다. 릴렉스~
주변에서 한국어책 파는 서점 찾았으면 좋겠어요. ㅠㅠ

clavis 2018-05-14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음식 파는곳을 한번씩 보면 심 본듯 기뻐하지만 한국말책은...ㅠㅠ그래서 알라딘님에게 절하는 중이에요 무료 전자책을 무조건 보고 있어요ㅋㅋㅋㅋㅋ
 















내가 어떤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작가의 사생활까지 알고 싶은 건 아니다. 나는 작가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사실 딱히 관심도 흥미도 없을뿐더러, 작품을 떠나 작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질 않는다. 그러니 정미경에 대해서도 책이 아닌 다른 삶, 그녀의 다른 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그녀가 세상과 작별하기 전까지 가족들에게 헌신했었다는 것, 남편과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하고 마지막날까지 사이좋게 지냈다는 것들을 알게 됐다. 이어령이 그녀의 재능을 몹시 아꼈다는데, 이 책속에서 정미경의 남편은, 그 재능을 가정과 가족을 돌보느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건 아닌가 내내 미안해했다. 뒤편에 실린 추모산문중 '정지아'의 글을 읽어도 그녀는 가정에 헌신적이었다. 추모 산문을 기록한 건 본인들에게도 또 고인에게도 의미있는 일이었겠지만, 나는 그 추모산문들을 읽지 않는 쪽이 좋았을거란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타인이 말을 보태서는 안되는 것이니 더 적진 않겠지만, 내게는 추모산문을 읽지 않는 쪽이 정미경을 더 정미경답게-물론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정미경이겠지만- 기억하는 방법이었을 것 같다. 



마지막 산문은 그녀의 남편, '김병종'의 것이었는데, 글 자체로는 역시 정미경의 소설만 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로 나에게는 인상 깊은 산문이었다. 그것은 정미경의 남편이 정미경의 최초의 독자이며 마지막 독자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정미경은 소설을 발표하고 그것을 남편이 읽어주기를 바라고, 또 남편이 그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를 기대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으로부터 별 말이 없다면 '이번 건 별로지?' 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 그녀는 그녀의 글에 대한 평가에 남편의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물론 저마다 쓰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반드시 읽어줄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읽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쓴다. 즉, 한 사람의 뚜렷한 대상을 두고 쓴다는 것. 그렇기에, 그 사람이 읽으면 이 글을 뭐라고 할까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러니 정미경이 남편의 평가를 기다리는 그 마음이 무언지 너무나 잘 알겠는 거다. 남편을 만나기 전부터 글을 써오던 사람이니, 어쩌면 정미경에게는 글의 대상이 단순히 남편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편을 만나고난 후부터는 가장 중심적으로 남편을 생각했던 게 아닐까.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두 대상을 선정해놓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같은 경우에는 불특정 다수가 읽는다는 걸 인지하면서, 그러나 당신에게 쓴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의식하고 글을 쓰는 대상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고 싶고.



나는 항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열심히 하는 일이 읽고 쓰는 것 뿐이라면, 읽고 쓰는 걸로 인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자랑스러워 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 글을 잘 쓰려고 꾸미지는 않지만, 내가 솔직하게 쓴 글을 내가 원하는 대상이 제대로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 그리고 그 글이 그대로 그 대상에게 가 닿고 제대로 읽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아홉살 조카와 홍콩에 가기로 했다. 나는 별 흥미가 없지만, 조카가 디즈니랜드를 너무 가고 싶어해서 함께 가기로 했는데, 어제 만난 조카는 내 손을 잡고


"홍콩 가면 이모랑 같이 시를 쓰려고 준비했어."


라고 하는 거다. 시를...쓰다니, 홍콩에서? 아니..거기까지 가서 왜...라고 생각했지만, 일전에 조카와 함께 남동생 결혼에 관해 시를 썼던 것이 조카에게는 꽤 인상깊은 경험이었나보다. 준비했다는 건 무얼 준비했다는 걸까, 그 날의 시의 주제를 준비했다는 걸까. 아니면 전에 그랬듯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라고 색연필을 준비했다는 걸까.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이번엔 시를 쓰고 와야 한다. 시여...



같이 놀이터에 가던 길, 시를 쓰겠다고 말하고선 이내 내 손을 놓고 제 동생을 향해 달려가던 조카를 보며 내 여동생은 말했다.


"언니, 쟤는 자기가 글 되게 잘 쓰는 줄 알아."


나는 아이의 자신감이 놀라워, "그래?" 라고 되물었는데, 이에 동생은 답했다.


"자기가 글 잘 쓴다는 자신감이 되게 큰데, 그 뒤에 언니가 있어. 이모가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자기가 잘 쓰는 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조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넌 누구 조카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조카는 학교에서 독서왕 상장을 받고서는 내게 전화해 한껏 자랑을 하기도 했다. "역시 이모 조카지?" 이러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어떻게든 조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나 좋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열심히 글 쓰는 일인데, 그걸로 인해서 어린 조카의 마음에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면, 그건 그대로 좋지 않은가.



나는 베스트셀러를 쓸 수도 없는 사람이고 또 쓰지도 못하겠지만, 내 글이 특정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계속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출판사 대표님은 나에게 '글로 덕을 많이 쌓았다'고 하셨는데, 나 역시 그걸 계속 실감하는 바다. 글을 쓰면서 친구를 사귀고 애인을 만났고, 글을 쓰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격려와 위로도 받는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들이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글이 좋다는 칭찬을 해주고, 책을 보내주고 커피를 보내주고 간식거리를 보내준다. 팬임을 자처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단지 글만 읽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 내게는 무척 놀랍고 또 고맙다. 글로 덕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한다. 이것이 내가 가진 복이구나, 생각한다. 내가 좋아 쓰는 글을 좋다고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정말 뿌듯하고 가슴 벅찬 일이다.



내가 애정해마지 않는 상대는, 내 글을 가장 재미있다고 해주었었다. 다른 사람들 글 아무리 다 읽어봐도 나는 네 글이 제일 좋아, 라고. 나는 이정도면 딱 좋다고 생각한다.



정미경이 남편에게 자신의 글을 읽어주기를 기대하고 바라고 또 그로부터 나올 평가를 기다리는 그 기분 같은 것들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글이란 건 대체 뭘까, 정미경 남편의 산문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했다. 정미경의 삶에 대해 조금 알게되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지만, 정미경의 삶에, 정미경의 글을 가장 먼저 읽어주는 사람이 함께였다는 건, 사실, 좀 부럽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내 글의 가장 큰 응원자가 되어준다는 건, 그렇게 흔하게 가질 수 없는 행운이란 생각을 한다.



나의 엄마는 내 책이 나오면 읽긴 하지만 내가 글 쓰는 이곳까지 찾아오진 않는다. 내 가족들도 마찬가지. 내가 어딘가에 계속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아예 이런 블로그 쪽으로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오히려 읽고 싶어하지 않는다. 정미경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항상 같이 하면서, 오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미경이 쓰는 글을 가장 먼저 읽고 또 정미경이 가장 평가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꽤 오래 내게 남는 일이다. 정미경에 대한 추모의 글을 읽다가, 정미경이 결혼하지 않고 글만 썼다면 어땠을까를 수십번 생각했는데, 그건 철저히 내 중심적인 생각이라는 걸 안다. 아무리 이렇게 생각하는 나라도, 본인의 글을 가장 잘 읽어주고 평가를 해주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부럽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가장 인정받고 싶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고 싶다. 늘상 선택 앞에서 '나를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의 선택이, 나의 능력이 그들로 하여금 나를 자랑스럽게 만들것인가, 하고.


나는 계속 읽히는 글을 쓰고 싶고, 그 글이 나로부터 나오는 진솔한 것이기를 원한다. 또한, 내가 글을 쓴다는 것으로 내 자신이 가장 기쁘고 편할 것이고.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글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아주 가끔은,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라는 말을 듣고 펑펑 울고 싶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8-04-30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과 가족, 친구들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거지만, 다락방님이 주변에 좋은 영향을 주는 만큼, 주변에서 또 다락방님께 이런 다정한 글을 계속 쓸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아름다운 선순환이네요...

다락방 2018-05-02 15:3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인복을 타고났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사람이 내 주변에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데, 그건 또 내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렇구나...하게 되고 말이지요.
잊지마세요, 2017년에 저에게 좋은 사람으로 쨘- 하교 쇼님이 나타났다는 사실을요!
:)

단발머리 2018-04-3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다락방님이 자랑스러워요.

다락방님식 독법, 다락방님식 글쓰기, 다락방님식 유머, 다락방님식 티브이 시청, 다락방님식 요리, 게다가 다락방님식 요가까지.
사랑할 수 밖에요~~~~~~~^^

다락방 2018-05-02 15:31   좋아요 0 | URL
흙흙 고맙습니다,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의 애정이 느껴지고 또 제 애정을 그에 못지않게 돌려드립니다. 흙흙 ㅠㅠ 단발머리님은 진짜 최고야! ㅠㅠ


clavis 2018-04-30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저는 오늘 락방님 글에서 ˝나를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을 한다˝가 제일 좋았어요 엊그제 한 여성 동지의 미투를 들으면서 락방님께 달려가 이르고 함께 분노하고 싶었는데..글 쓰기 뿐 아니라 ˝빅 시스터˝로서 락방님은 제게 그러한 분이 되셨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락방만만세♥입니다

레와 2018-04-30 15:09   좋아요 0 | URL

어므나, 빅시스터 다락방! 너무 좋네요! ^^


다락방 2018-05-02 15:31   좋아요 0 | URL
크- 멋지네요, 빅 시스터라니..
기대에 부응하는 멋지고 강하고 큰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빠샤!!!

레와 2018-04-30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빅 시스터, 내 친구 다락방 ♡

다락방 2018-05-02 15:32   좋아요 0 | URL
응 계속계속 자랑스러운 친구가 되도록 내가 열심히 읽고 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