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사생활
밥보다 일기 - 서민 교수의 매일 30분, 글 쓰는 힘 밥보다
서민 지음 / 책밥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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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주 일기를 쓴다. 매일 쓰진 않아도 언제나 글을 쓰는 편에 속한다.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과 느낌은 이 곳에 쓰지만, 책과 상관이 없는 사적인 것은 네이버 블로그에 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사적인 내용,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좀 더 깊은 속내에 대해서는 늘상 가방 안에 넣고 다니는 다이어리에 쓴다.



(이것이 나의 다이어리들...)




기록은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다. 내 경우엔 그렇다. 이 책, '서민'의 《밥보다 일기》에서도 일기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스치고 잊힐 수 있었던 것들이 기록해 놓으면 그 때 그 상황과 감정까지 고스란히 생각난다고 말하는데, 나는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한 번은, 딱히 이성적으로 끌리는 건 아닌데, 내가 이 사람과 사귀는 게 맞을까? 라는 고민을 다이어리에 적기 위해 펼쳤다가, 몇 년전에 쓴 다이어리를 꺼내보게 됐다. '그냥' 읽어본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지금과 똑같은 고민이 적혀 있었다. 나는 다른 상대에 대해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던 것. 아,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깊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구나 부터 시작해서, 그래서 그 끝은 어땠었지 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과거의 기록들을 꺼내어 읽어보노라면 내가 잊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것들이 좌르륵 펼쳐지면서 그 때의 감정과 기억들이 불쑥불쑥 나를 건드린다. 그것들은 우울한 지금의 나에게 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말해주기도 하고, 언젠가의 내가 왜 슬펐고 불행했는지 역시도 말해준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동의한 일기의 장점중 하나는 '자기 객관화'이다. 내 감정이 들끓어 오를 때 그것을 적어가노라면, 그 일에 대해 그리고 그 들끓었던 감정에 대해 다시,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보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좀 더 나은 나'를 만드는데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해야할지 방향을 일러준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일기 쓰기는 내가 나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매일 일기를 쓰면 자기소개서도 잘 쓸 수 있게 되어 취업에도 용이하다고 하는데, 그 역시 장점이긴 하고 또 글쓰기를 잘하는 것은 못하는 것보다 여러모로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일기쓰기 즉, 매일의 짧은 글쓰기가 가져오는 장점은 '나를 더 잘 알게 해주는 것'으로도 정말이지, 아주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메모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어쩌면 글을 계속 쓰고자 하는 사람들은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답을 찾아내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에게는 이 책에서 말하는 뮤즈가 자주 찾아들어, 그 순간순간 바로 다다다닥 글을 쓰는 쪽이 편한데, 상황이 언제나 내가 글을 쓰도록 돌아가는 게 아니다. 예전에는 머릿속에 '이거 써야지, 이거 기록해야지' 라고 생각하면 글쓰기를 앞에 두고 죄다 생각이 났었는데 요즘에는 '아 뭐 쓰려고 했더라..' 하고 잊게 되는 거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메모를 한다. 메모지가 있으면 메모지에 키워드만을 써두고, 메모지가 없으면 스맛폰 메모장에 키워드를 써둔다. 키워드만 써두면 내가 뭘 쓰고자 했는지 알 수 있으니까. 혹은 키워드만으로 안되겠다 싶으면 짧게 내용을 쓴다. 이것은 아마도 이 책에서 서민 이 말한 '얼개'에 해당하는 것일테다. 어차피 쓰기와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목적도 가지고 있는 터라, 그걸 쓰기 위한 소재조차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순간순간의 기억을 써두는구나 싶으니 동지애가 느껴졌다.



이 책이 말하는 일기의 장점은 모두다 옳고, 또 글쓰기에 대한 조언들도 유용하다. 그런데, 너무 쉽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는 이 책을 청소년이 가장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청소년을 염두에 두어서 이토록 쉬운 글이 나왔구나, 싶다가 내가 이 글을 '쉽게' 읽는 건, 내가 그동안 계속 일기를 써왔던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미 일기를 쓰고 있는 사람은, 이미 저자가 말한 바들을 실천하고 있을테니, 이 책이 말하는 바가 어려울 리가 없다. 그러나 성인이라 해도 일기를 전혀 쓰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그리고 일단 눈 앞에 노트나 빈 화면을 보고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까' 막막한 사람이라면, 이 책은 바로 그대로의 의미가 있겠구나 싶은 거다. 그러니 이 책의 대상은 이미 일기를 쓰는 사람보다는 일기라는 짧은 글, 자기 자신에 대한 글조차 쓰기가 너무나 막막한 사람이 되어야할 것이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나 좋자고 글을 쓴다. 글을 쓰면서 내가 가진 생각이 정리된다. 그리고 나 좋자고 쓰는 이 글이, 쓰는 순간의 내게도 좋지만, 다 쓴 후의 내게도 좋다. 훗날 과거의 기록을 읽노라면 나는 수시로 과거의 어느 순간에 가서 생생한 감정들을 느끼고 있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과거의 내가 어떤지 알게되면, 미래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더 깊게 생각해보게 된다. 무엇보다 이토록이나 자주 글을 쓰면 자꾸자꾸 쓰면서 글 실력은 좋아진다. 계속하는 사람이 계속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 실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글을 쓰지 못하니까 안쓰면 계속 글을 못쓰게 되지만, 글을 쓰지 못하지만 계속 쓰고 또 쓰고 또 쓰면 잘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거다. 이것도 이 책에서 다 말해주고 있다.



저자는 독서가 깊은 글쓰기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는데, 크- 이건 뭐... 도무지 이견이 있을 수가 없다. 책을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으면 쓰는 게 달라지는 건 정말이지 두말하면 잔소리야. 글 써서 나쁜 점은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정말 없나? 이건 좀 곰곰 생각해봐야하겠다).




마지막으로 덧붙인 저자 아버지의 일기 때문에 이 책은 '일기를 쓰자'는 데 더 설득력을 갖는다. 오래전에 아버지가 써두었던 일기를 읽음으로써 그 당시의 상황과 자신의 생각이 어떤 식으로 달랐던건지 돌아보게 되는데, 이 아버지의 일기 덕분에, 저자가 말한 일기의 모든 장점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나는 이 아버지의 일기 때문에 별 하나를 더 주고 싶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의 일기가 읽고싶어졌는지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제임스 w. 페니베이커'의 《단어의 사생활》이 생각났다. 정확히는 이런 구절이었다.



내 경력으로 말하자면 초기에는 건강, 감정, 트라우마 경험의 특징등을 연구했다. 그러다 1980년대 초반, 나는 우연히 발견한 사실에 마음이 끌렸다. 지독한 트라우마 경험을 혼자서만 간직하는 사람들은 그 경험을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들에 비해 건강상의 문제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 왜 그리 해로울까? 더 중요한 질문을 하자면, 강렬한 감정을 수반하는 비밀을 터놓는 사람들은 더 건강해지는 것일까? 나와 제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금세 알게 되었다. 답은 <그렇다> 였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루 15분에서 20분 정도씩 사나흘 연속으로 자신의 트라우마 경험에 대해 글로 써보라는 실험을 시작했다. 그 결과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글을 쓴 사람들은 아무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주제에 대해 글을 써야 했던 사람들에 비해 건강이 호전되었음이 증명되었다. 이후의 연구들에서는 감정을 표출하는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 가 면역 기능을 높이고, 혈압을 낮추며, 우울한 감정을 줄이는 한편 평소의 기분도 더 나아지게 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최초의 글쓰기 실험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 전역에서 2백 건 이상의 비슷한 실험이 수행되었다. 연구 결과는 그리 대단치 않을 때도 많지만, 감정의 격변을 <언어의 변환>하는 단순한 과정은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과 꾸준히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임스 W. 페니베이커, 『단어의 사생활』, p.26





일기를 쓰자. 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좀 더 건강한 내가 되기 위해서. 나는 일기 쓰는 나를 항상, 언제나 칭찬한다.

잘하고있다, 나여...

뭘 이렇게 다 잘하는건지 모르겠다.






자, 그렇다면 일기를 매일 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날 저질렀던 실수에 대해서는 진지한 반성으로 이끌어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노력하게 해줍니다. 글을 쓰려면 해당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야 하니 사고가 깊어지는 것은 당연하고요. (p.38)

글쓰기 소재는 원래 갑자기 떠오릅니다. 작가들은 그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의 신인 ‘뮤즈‘에 비유합니다. 이 뮤즈라는 분은 워낙 빠른 속도로 왔다가 그냥 가버리는 게 특징입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빈대떡을 보는 순간에는 ‘아, 빈대떡에 대해 쓰자‘고 생각을 하겠지만 1분만 지나면 그 생각은 없어지고 ‘내가 뭘 쓰겠다고 했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중략)
그러니 뮤즈가 왔을 때 잽싸게 뮤즈를 붙잡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게 바로 노트에 써놓는 것이지요. ‘빈대떡‘이라고 쓰고, 뭐에 대해 쓸지 대략의 얼개를 짜놓는 겁니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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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1-0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의 일기 라니깐 <존 치버의 일기>가 생각납니다...ㅎ

다락방 2018-11-07 10:40   좋아요 1 | URL
덕분에 검색해보고 왔습니다. 존 치버 노년의 일기로군요. 자기 아들에게도 읽혔다고 하네요..
나만의 내밀한 일기도 사실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쓰고 있는걸까요?

카알벨루치 2018-11-07 11:32   좋아요 0 | URL
존 치버는 자기 일기가 출판되기를 강하게 원했고 아들은 그걸 따랐죠 많이 불편했겠지만 아버지의 뜻이니...만감이 교차했을 듯 싶네요! 글이란게 누군가에게 읽혀질 수 밖에 없는 것인데...일기문제는 여러모로 생각을 해봐야할 부분인듯 ㅎㅎ

카알벨루치 2018-11-07 11:33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주문했는데 머시기 거시기 준비안된 책때문에 벌써왔어야할 책이 더디 오네요 ㅜㅜ

다락방 2018-11-07 11:36   좋아요 1 | URL
머시기 거시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이 책 보고 이사카 고타로의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고요, 요즘 읽는 소설책 때문에 일리아스를 장바구니에 넣어두었고요... 아아.... 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책을 부릅니다, 카알벨루치님... 흙흙 ㅜㅜ

카알벨루치 2018-11-07 12:20   좋아요 0 | URL
이 바닥이 다 그러니 울지마소서! 넘 좋은거 아닙니까! 어제 <백년의 고독> 2권 읽는데 뭉클한게 올라오는데 야 이 맛이구나 싶더군요 ㅋㅋ

단발머리 2018-11-07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보다 일기> 얼른 찾아 읽어보고 싶네요. 인용해 주신 <단어의 사생활>이라는 책도요.
다락방님 다이어리 너무 근사해요.
매일의 내밀한 기록이 이렇게 차곡차곡 쌓여있다는게 정말 이 세상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제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부럽습니다.
저도 예전에 한 일기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어디갔을까요? 새해, 새 다이어리에 시작!해도 3일을 못 넘겨요ㅠㅠ

다락방 2018-11-07 10:42   좋아요 0 | URL
일기를 매일 쓰지는 않아요. 마음 복잡할 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은밀한 일들이 있을 때, 그럴 때만 쓰곤 하는데, 그런 것들이 나중에 읽어보면 ‘아, 이게 나구나‘ 싶더라고요. 그런것들이 저렇게 차곡차곡 쌓였네요.
제가 읽는 저의 역사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아요!!

단발머리님도 매일이 아니라 생각날 때만이라도 부지런히 적으세요!! 나중에 읽어보면 얼마나 재밌다고요!! >.<

2018-11-15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15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2 0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호텔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나랑 친한사람들이 다 안다. 게다가 내가 호텔호텔 하는 얘기를 페이퍼에도 얼마나 많이 썼던가. 더욱이 이국의 호텔이라면 말해 뭐해, 그저 거기에서 주는 낭만이라는 것이 있단 말이다. 어제도 나는 허수경의 이국의 호텔이란 시를 올리지 않았던가. 언젠가 이스마엘 카다레 소설을 읽고서도 낯선 이국으로 성인 남자와 여행하는 것에 대한 상상을 했었고, 박정대의 새들의 북호텔을 읽고서는 내가 호텔을 하고 싶은 상상을 풀어낸 적도 있었다. 그래, 나는 호텔을 갖고 싶었다. 어마어마한 큰 체인 호텔이 아니고 그저 작은 호텔. 조용하고 작은 호텔을 내 것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서 손님들을 받는거다. 대부분은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이겠지만, 어떤 이들은 그러다 친해지기도 할것이고, 내가 가장 바랐던 건, 보고 싶은 사람을 어쩌면 그런 식으로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지 않았나..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내가 운영하는 작은 호텔에서,



너무 좋잖아. 다시 떠나보낼지도 모르지만, 그런 상상을 머릿속에 한가득 안은채로, 나는 언제나 이국에 작은 호텔을 하나쯤 운영하는 걸 상상하곤 했다. 물론 내가 이 꿈을 실현해 이국의 호텔에 자리를 잡고 기다린다 해도,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여행을 겁나 싫어한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지만... 뭐, 그러한 꿈을 꿨다, 그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 루루는 내가 그렇게나 바랐던 것처럼, 마요르카 섬에서 호텔을 운영한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50년간 마주치지도 않았던, 오해로 인해 멀어진 한 남자가 있다. 나는 이 둘이 결국 재회하고 오해를 풀고.. 뭐 그런 거라고 생각했고.... 그러니 이것은 내가 바라는 너무나 아름다운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한거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이야기, 만나야 할 사람들이 어떻게든 만나는 이야기, 그런데 심지어 여자가 호텔을 해. 꺅 >.<

나는 이 책을 좋아할, 이 이야기를 사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거다. 나는 이 책을 읽기도 전에 그 정도의 내용만 대략적으로 짐작하면서 '어쩌면 2018년의 책은 이 책이 될지도 몰라' 기대했던 거였다. 그런데....



아, 남자작가여... 첫문장부터 나는 '이 책이 가장 좋은 책이 되기는 글렀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



그녀를 찾아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탄성을 내질렀다.

"루루, 지금 거짓말하는 거죠? 진짜 80대 맞아요?"

이제는 아흔에 접어들었지만, 루루 데번포트는 젊은 여자 뺨칠 정도로 늘씬하고 탄력 있는 몸매의 소유자였다. 평소에는 등까지 길게 늘어뜨린 건강한 모발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땋거나 양 갈래로 넘겨 고리 모양으로 말아서 목덜미에 걸치고 다녔다. 30대에 접어들 대부터 희끗희끗 새어버린 머리카락은 루루 스스로 타고난 수많은 매력 중 하나로 손꼽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지금까지 건강이나 외모에 대해서 딱히 고민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살다보면 그녀처럼 자연의 섭리를 역행하는 행운을 타고나는 사람도 종종 있는 법이니까. (p.10)



아흔에 가까운 여자를 젊은 여자 뺨칠 정도로 '늘씬하고 탄력있다'고 묘사하다니.. 이 남자는 또 판타지 실현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늙은여자에게 탄성을 내지르는 이유를 늘씬하고 탄력있는 것에서 가져오다니, 이런 사람이 내가 '올해의 소설이다'라고 부를만한 내용을 써낼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책속 등장인물인 남자들은 하나같이 처음 보는 여자의 몸매부터 본다.. 작가가 위에 쓴것처럼 물론, 살다보면 자연의 섭리를 역행하는 행운을 타고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왜 없겠는가. 있다. 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한 여자를 칭송하는데 탄력있는 몸매..늘씬함....을 가져오는 건 그다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순 없다. 그냥 여자를 육체로 먼저 인식한다는 것에 불과할 뿐...


그러나 이야기는 끝까지 읽어야하고, 나는 루루와 제럴드 사이의 어떤 사연, 그들이 한 때는 사랑했으나 50년간 만나지 못하고, 그 후에 그들이 재회했을 때의 사연, 그것이 궁금하였으므로 읽고자 했다. 그런데....



이야기는 점차 과거를 보여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루루의 70대. 그녀의 생일파티가 그녀의 호텔에서 열리던 날, 루루는 동네의 15세 소년 찰리에게 생일파티 DJ 를 부탁한다. 루루는 70대이지만 40대라 해도 손색없을 미모로움과 탱탱함이 있엇고(--^), 아무튼 그러다가.. 파티가 끝나고 찰리에게 알바비를 주면서 자신이 너무 피곤하다며 자신의 등에 크림을 발라달라고 하는거다.

.

.

.

네??



뭐 친절하고 다정한 할머니니까, 하고 찰리는 크림을 발라주려 하는데, 루루는 가슴까지 다 보이게 옷을 벗어내는 거다. 찰리는 루루의 등에 크림을 발라주며 루루의 젖꼭지도 보게 되고, 루루는 입으로 신음소리 내고... 하아. 설마 미친 이야기로 진행되는 건 아니겠지....하다가 찰리는 발기하고..... 야, 쌍욕나오게 진행하지마... 하는데, 결국 루루는 찰리를 침대에 눕힌다.


"찰리, 정말 괜찮은거지?" (p.109)



대체, 70세 할머니가 15세 미성년자를 눕히고 뭐하는 짓인가. 찰리가 괜찮다고 해도, 찰리가 원한다고 해도 당신이 하는 건 미성년자 성폭행이다.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야. 찰리는 오늘이 처음이라 말하고 루루는 그렇다면 '오늘 일이 서로에게 아주 아름다운 선물이 되겠구나' 라고 말한다. 이 무슨 개소리 막말이야...어디 이렇게 아무말 하고 자빠진거지... 아..... 물론 찰리는 발기했다. 그러나 찰리가 가슴 보고 발기했다고 해서, 여자랑 해보고 싶었다고 해서, 이것이, 이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이 '섹스'라고 할 수 있을까?



찰리는 루루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만두는 것도 원치 않았다. "네, 괜찮아요. 생신 축하드려요." (p.109)



15세 소년, 미성년자가 성인인 상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해서 그 관계에 응하는 건, 성폭행이다. '그만두는 걸 원치 않았다'고 해도 상대가 미성년자이면 성폭행이다. 어디 거기에다 대고 아름다운 선물 운운하는가. 아 진짜 토할 것 같아. 대체 왜 어른이, 성인이, 미성년자와 섹스를 시도하는가. 안된다. 안돼. 그거 안되는거야. 그거 섹스 아니야. 미성년자가 하고 싶다고 아무리 말해도 '미성년자'인 이상 강간이고 폭행이다.



'토니 콜렛'이 조연으로 나왔던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는 십대 소녀가 옆집 아저씨에게 성적 호기심을 갖게 되고 끌리는데, 그 옆집 아저씨는 그 소녀와 섹스를 시도한다. 결국 그 아저씨는 미성년자 성폭행으로 경찰에 잡혀가는데, 이에 그 소녀는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그런데 저도 원했어요."


라고 말한다. 그 때 그 아주머니가 소녀에게 말한다.


"니가 원했어도 미성년자한테 성관계를 시도하는 건 강간이야." 라고 하는 거다.



나는 미성년자랑 하는 걸 미성년자의 당연한 욕망 같은 걸로 그려내는 게 너무 싫다. 미성년자의 욕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이 나이 차이 나는 성인과 벌어진다? 그게 과연 동등한 관계의 섹스인가? 내가 은교를 졸라 싫어하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엿같다고 생각하는게, 한쪽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도 소년이 소녀와 서로 호기심을 가지고 사귀고 섹스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이 없다. 그들은 동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 남자? 훗. 말같지도 않은 소리.



실제로 70세 할머니가 15세 소년을 성폭행 하는 일은 얼마나 일어날까. 그런 일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피터 니콜스'라는 남자 작가는 이 일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툭, 그려냈는데, 뭐랄까, 여자에 대한 판타지... 너무 차고 넘치는 사람같다. 게다가 소설 속에는 '머리가 빈' 여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지가 사귀는 여자면서도 머리가 비었다고 해... 참.......

70세 할머니가 15세 소년을.. 아무리 70세 할머니가 겉으로는 40대로 보인다 해도, 40대 역시 15세 소년에게 그러면 안되는거다. 말같지도 않은 소릴 하지를 말어.... 하아......




그런데 루루가 여자주인공이다. 나는 루루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내가 고작 100페이지 조금 넘게 읽어냈을 뿐이고, 잠깐 책장을 덮고 나는 이 책을 읽어야하나 고민했다. 나는 루루의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젊은 시절 사랑한 남자와 왜 오래 헤어지게 됐는지, 오해는 어떤 것이었는지, 과거에 어떤 사랑을 그들이 했는지 궁금했는데, 그걸 알고 싶은데... 게다가 나는 이렇게 오랜 기간 헤어졌다 만난 사이라면, 그들 사이에 어떤 각자의 성장이 있었을 거라고, 또 살아오는 동안의 각자만의 역사가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15세 소년을 성폭행하는 이 부분을 읽고나니, 이 여자가 '망가졌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혹여 오랜 시간 후에 만나게 됐을 때, 나는 나의 과거에 이런 일을 넣고 싶지 않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국의 호텔을 운영하는 사람이 되어 늙어가고 있을 때, 우연히 그 호텔에 그가 찾아들었을 때, 내가 예순이든 일흔이든, 나는 그 사이에 나쁜 짓을 했던 사람이고 싶지 않다.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해서 후회하고 싶지 않다. 나는 후회없는 삶을 살고 그에게 떳떳하고 싶어. '당신을 그리워하는 동안 기쁜일도 슬픈 일도 있었고 아프기도 했고 그리워도 했고, 의도치 않은 잘못들도 했었지만, 그러나 수치스러운 짓을 하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저런 과거를 내 삶에 불쑥 끼워넣은 상태로 만나고 싶지 않아. 무너지고 싶지 않고 망가지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저런 범죄를 저지르고 싶지 않아. 저게 뭐야...




나는 이 이야기가 근사할 거라고, 우아할 거라고 생각했다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이 책을 알라딘에 넣고 검색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보고 싶어서. 만약 좋다는 평이 있다면, 결국은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쓰여져 있다면 꾹 참고 계속 읽어야지, 계속 읽어야할 어떤 이유가 이 책에는 있을지도 몰라, 생각했다. 그렇게 리뷰를 검색하는데, 친애하는 ㅁ님의 리뷰가 있다. 그리고 그 리뷰에는 이 책이 '막장'이라고 써있었다. 앗!! 그렇구나!! 막장이었어!!


아아, 내가 막장에 클래식을 기대하고 있었구나..그러니까 지금 내가 너무 실망한거야. 맙소사... 그래, 그러면 나는 우아함을 기대하지 않은 채로 이 책을 읽어나가자. 호텔을 운영하는 이 여자와 제럴드 사이의 사연이 어떤건지, 우아함을 배제한체로 읽어보자. 어쩌면 뜻밖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15세 소년 건드린 루루임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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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1-06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드신 여성분이 나이보도 젊어보이는 경우가 사실 없지는 않은것 같아요.예전에 뒷모습이 아주 날씬한 여성분이 하늘하늘한 빨간 드레스에 킬힐을 신으시고 당당하게 걷는 모습을 보고 참 멋진 여성이구나 감탄을 한적이 있는데 그 분앞을 지나면서 살며시 뒤를 쳐다 보았는데 얼굴이 할머니인것을 보고 깜놀한 기억이 나네요^^;;;

레와 2018-11-06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왜 지들 판타지를 저렇게 실현할까요.

과거에 읽었던 책이나 영화들이 생각났어요. 좋아하고 환호했던 작품들인데, 이제보니 쓰레기였어.
나이든 여자와 미성년자의 사랑이라니. 지랄..

다락방 2018-11-06 11:28   좋아요 0 | URL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내가 그렇지 않다는 이유로 그런 사람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거겠지만, 남자 작가들은 뭐랄까, 판타지 실현을 유독 책을 통해 잘 하는 것 같아요. 소녀와 아저씨의 사랑 같은 것도 그렇고 이게 뭐야, 할머니랑 소년이라니.. 아마도 젊어 보이고 탱탱한 할머니에게 동정을 잃고 싶은 소년에게 자신을 이입해 쓴 게 아닐까. 하여간 징그럽기 짝이 없다는. 글 쓰는 거야 자유지만 상상력에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고보면 주말에 집에서 자는 일이 점차 드물어지고 있다. 11월 주말에는 단 한 주도 집에서 자지 않게 되었다. 집이 아닌 곳에서 잠자고 일요일에 돌아오면 몹시 피곤해 꼭 낮잠으로 피로를 풀게 된다. 이런 일상이 익숙해졌어. 하룻밤 나갔다 온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다...


그러다보면 가장 시간이 많을 것 같은 주말에 책을 읽는 속도도 더뎌지고 아예 못읽게 되기 일쑤다. 그래도 우리가 백래시 소모임을 하고 있는 만큼!! 조금이라도 읽어보려고 어제 책장을 펼쳤다.


1980년대에는 여성에게 집에 있으라는, '독신병'을 치료하라는, 아이와 남편이 있는 삶이 완벽한 삶이라는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지만, 그 전에, 197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남자가 손을 잡아 주지 않아도 당당하게 자기 문제 자기가 해결하는 여자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나왔었어. 그런데 왜 그 흐름을 그대로 이어가지 못했는가. 어째서 80년대에는 그런 영화들을 다 뒤집어버렸는가...






70년대에는 이렇게 여자들 스스로가 자신이 얼마만큼 일하는지 알고, 결혼이 나(여성)로부터 무엇을 앗아가는지 잘 알고 그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80년대에는 스윗홈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말하는 영화들이 쏟아지는가...


"누가 뭐라 해도 분노를 포기하지 말아요"


누가 뭐라 해도 분노를 포기하지 말것. 어제 내가 읽은 백래시에서 배운 것이다. 분노를 포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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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안산에 갔더니 조카는 내가 빌려준 니콜라 시리즈를 돌려준다. 너 갖겠다며, 했더니 '아니야 이모 책이니까 가져가' 하며 굳이 내게 안겨준다. 하는수없이 나는 가져왔고 마침 이 책 읽지도 않았던 터라, 읽기 시작했다.


니콜라와 친구들은 얼마나 말썽쟁이들인지, 선생님들도 부모님들도 얘네들 때문에 곧잘 한숨을 쉰다. 그러던 어느날, 니콜라가 거실 양탄자에 잉크를 엎어 엄마로부터 크게 혼난다. 그래서 니콜라는 집을 나온다. 돈이 필요할테니 저금통을 가지고. 내가 집을 나가면 모두들 나를 그리워하겠지, 내가 이담에 자동차도 비행기도 사가지고 큰 부자가 되어 돌아오겠다! 작정하고 길을 나섰다. 그러다가 알세스트의 집 앞을 지나게 되고 알세스트를 만난다. 알세스트를 먹을 걸 엄청 좋아하는 아이고, 하루종일 먹을 걸 끼고 사는 아이인데, 니콜라는 나 집을 나왔는데 같이 갈래? 묻는다. 그런데 알세스트는 싫다고 한다.





소시지와 베이컨을 넣은 양배추 절임... 때문에 알세스트는 집을 나가지 않겠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는데 아...나라도 집을 안나가겠다, 했다. 나도 집 안나가. 소시지와 베이컨을 넣은 양배추 절임을 해준다는데, 그거 먹어야지, 내가 왜 나가..안나가...집에 있을 것이다. 소시지와 베이컨이란..아 뭔지 모르지만..도대체 어떤 요리가 소시지와 베이컨을 넣은 양배추 절임인지..짐작할 수도 없는 맛이겠지만, 소시지도 맛있고 베이컨도 맛있고 양배추는 똥 잘싸게 해주는 거니까 뭐든 먹으면 맛있고 건강에도 좋은 것 아니겠나. 이걸 먹어야지 집을 왜나가...니콜라, 너도 알세스트 집에 가서 소시지와 베이컨을 넣은 양배추 절임을 먹어... 저렇게 맛있는 것 먹고 푹 자면 너무나 해피한 삶..해피 라이프...



니콜라는 결국 집에 돌아오고, 도대체 어디 갔다 온거냐고 엄마한테 또 혼나는데, 그래서 '내일 꼭 집나가야지' 재차 결심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세스트 좋으네... 소시지와 베이컨을 넣은 양배추 절임 때문에 가출하지 않는 어린이여......



맛있는 음식이 이렇게나 중요하다. 집을 나가지 않게 해... 나도 꼭 맛있는 요리 한 개쯤은 완전정복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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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e 2018-11-05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짱 좋은 글입니다. 그나저나...저번에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놓고는...아직 결제를 안한거 있죠....얼른 사야겠어요!

다락방 2018-11-06 08:43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아이들이 읽어도 좋은책인가... 잘 모르겠지만, 제 조카가 엄청엄청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ㅎㅎ
 

친애하는 syo 님의 서재에서 '휘파람'이란 단어를 보았다. 아, 휘파람. 내가 최근에, 그러니까 어제나 오늘 언제, 휘파람을 보았다.. 했다. 휘파람을 어디에서 보았지, 그러니까 글자로 나는 휘파람을 읽었는데, 아, 어디었지..답답한 마음으로 출근하면서 나는 시집을 펴들었다. 나는 언제나 내 가방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가방에는 시집 한 권과 소설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소설책을 읽으려고 가방에 넣었다가, 어쩌면 지하철 안에서 시집이 읽고 싶어질지도 몰라, 하고 시집을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책 두 권을 가방에 넣는 일 모두, 내가 내 스스로 했다. 그러니 이 가방의 무게를 나는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시는 언제나 어렵지만, 그래도 내가 조금은 시에 익숙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간의 이별이 나를 좀 더 시를 잘 읽는 몸으로 만들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주에는 진은영의 시집을 읽고 이번에는 허수경의 시집을 읽는데, 허수경의 시들이 아프다. 시를 명징하게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적절하지 않은 일일테지만, 그러니 내가 또렷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것이겠지만, 어렴풋한 슬픔이 내게로 오면서, 나는 어쩌면 시를 좀 더 잘 받아들이는 몸이 되었는가 보다, 햇다.



죽음의 관광객



한여름에 들른 도시에는 장례 행렬이 도자기를 굽

는 집들이 있는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하늘로는

도자기를 굽는 연기가 사막 쪽으로 울었다 동쪽으로

넘어가려다 총 맞은 스물한 살 청년이라고 했다



동쪽에는 지나가지 못하는 나라가 있고



이 도시 사람들은 동쪽을 바라보며 희망은 맨 마

지막에 죽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이라는 것이 너

무나 뜨거워 잡을 수가 없을 때 희망은 사라지는 것

이라고 했다



희망을 신뢰한 적은 없었으나 흠모하며 희망의 관

광객으로 걸은 적은 있었지 별이 인간의 말인 희망

을 긴 어둠의 터널 안에 가두고 먼지로 마셔버리는

것을 본 적도 있었지


눈동자 색깔이 다른 고양이의 고향이라는 도시에

서 택시기사에게 그 고양이를 본 적이 있느냐, 물어

보았으나 그는 미쳤소, 하는 표정으로 숯불에 구운

닭이나 먹다 가시오, 라고만 하더라



그러다가 고양이 고기를 먹게 되는 건 아닐까, 만

화 캐릭터처럼 웃기게 생긴 고양이 기념물 앞에서

저건 사람이 그린 동물일까 동물이 개어놓은 사람의

표정일까를 망설이는 동안 태양이 제 몸을 다 벗다

가 슬그머니 어두운 옷을 집어 입으며 사라지는데



장례 행렬이 지나갈 때 남자들은 울면서 밤하늘을

향하여 총을 쏘았고 하늘에 구멍이 뚫릴 때 청년이

아직 가슴에 피를 흘리며 우주의 난민이 되어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네



동쪽에는 지나가지 못하는 나라가 있고




어젯밤에는 자기 전에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나의 요가선생님들이 나와 있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요가센터에서 주최하는 야유회에 참석했다. 그런 단체 활동 따위 딱 싫은데, 참석했다. 점심을 먹고 화장실을 가려는데 화장실이 너무 지저분해서, 나는 집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혼자 움직였다. 집 앞에서 윤여정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잠시 얘기하자 하시는데, 저 빨리 가야해요, 지금 어디 가는 도중에 여기 온 거에요, 하고는 집에 들렀다가 다시 야유회 장소로 갔는데 행사는 이미 다 끝나 있었고 선생님들만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요. 어쩐지 나는 엄마랑 같이 와있었고, 선생님들은 모여서 나를 앞으로 불렀다. 다섯 명이었다. 엄마도 따라 오려는데, 엄마, 엄마는 거기서 기다려, 듣지마, 라고 했다. 선생님들은 내게 물었다. 너는 그 남자를 아직도 사랑하느냐고. 나는 그렇다고 했다. 선생님은 타로로 점을 봐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타로 카드 한장을 뽑아내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몰랐다. 이건 뭔가요, 사랑과 그리움이란 뜻인가요? 선생님은 말했다. 잊으라는 거예요, 그를 잊어요, 그를 잊으라, 그런 뜻이에요. 내가 보는 카드는 그런 의미가 아닌 것 같았는데,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고, 다른 선생님들도 같이 말했다. 잊으세요.



그런 꿈에서 깨어난 오늘 아침, 내가 지하철 안에서 읽은 시는 이런 것이었다.




사진 속의 달



이것은 슈퍼문이다

이것은 언젠가 슈퍼문이 있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이것은 네가 내 옆에서

달을 보았다는 증거는 아니다

왜 얼굴 없는 바람은 저렇게 많은 손가락을 가져서

네가 떠난 자리를 수천 개의 장소로 만드는지

왜 네가 떠났는지 말해줄 수도 없다

다만 사진 속의 달이다

달을 기다리며 저 언덕에 서 있다가

우리가 나누어 마셨던 녹차의 흔적도 없다

술 대신 마셨다

네 건강의 슈퍼문이 다쳤다고 했다

구운 고기도 짠 김치도 없는 녹차 잔 속의 슈퍼문

다만 사진 한 장

그 앞에서 널 생각하는 것은 지병이어서

지난밤 베개에 옴폭 파인 홈처럼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지병의 기원을 슈퍼문 사진 한 장이

알려줄 리가 없다




잠들기 전 나는 사진 한 장을 보았고, 꿈에서는 모두가 내게 그를 잊으라 말했다. 나는 모두가 하나 되어 내게 그렇게 말하는데도, 아팠지만 굴하지 않았다. 아프다고 해서 수락하지 않았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라고 그들에게 말하고 돌아섰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렇게 나는 허수경의 시집을 읽었다.



사진은 오래전의 것이었다. 오래전이라면 오래전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진 속의 나는 웃고 있었고, 이런 때가 내게 있었지, 라고 보며 예뻐했다.



오래된 일



네가 나를 슬몃 바라보자

나는 떨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어린 연두 물빛이 네 마음의 가녘에서

숨을 가두며 살랑거렸는지도

오래된 일

봄저녁 어두컴컴해서

주소 없는 꽃엽서들은 가버리고

벗 없이 마신 술은

눈썹에 든 애먼 꽃술에 어려

네 눈이 바라보던

내 눈의 뿌연 거울은

하냥 먼 너머로 사라졌네

눈동자의 시절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하던

지독한 봄날의 일

그리고 오래된 일




하마터면 엽서를 쓸 뻔 했다. 엽서를 써볼까, 라고 시를 읽다 생각했다. 엽서가,  

조금 시간이 걸린 뒤에야 당도하겠지. 엽서를 써볼까, 하다가. 그것이 내 그리움의 크기만캄 상대에게 반가움으로 다가올까, 생각하며  

조심스레 생각을 닫는다. 내가 보내는 크기와 상대가 받는 크기가 같지 않다면, 한 쪽에겐 슬픔이고 한 쪽에겐 부담일 테니, 기쁨으로 다가서지 않는 것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왜 꽃엽서 라는 단어는 봐가지고.



시집 한 권을 다 읽어내고,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휘파람의 출처를 찾았다. 아, 이거였구나. 내가 그렇게나 휘파람 어디서 봤는데, 했던 그 휘파람이 바로 이것이었어! 이국의 호텔이 내게준 것이었다. 이국의 호텔이 한 일이었어.




이국의 호텔



휘파람, 이 명랑한 악기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에게 날아온 철새들이 발명했다 이 발명품에는

그닥 복잡한 사용법이 없다 다만 꼭 다문 입술로 꽃

을 피우는 무화과나 당신 생의 어떤 시간 앞에서 울

던 누군가를 생각하면 된다



호텔 건너편 발코니에는 빨래가 노을을 흠뻑 머

금고 붉은 종잇장처럼 흔들리고 르누아르를 흉내낸

그림 속에는 소녀가 발레복을 입고 백합처럼 죽어

가는데



호텔 앞에는 병이 들고도 꽃을 피우는 장미가 서

있으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장미에 든 병의 향기가 저녁 공기를 앓게 하니 오

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자연을 과거 시제로 노래하고 당신을 미래 시제로

잠재우며 이곳까지 왔네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밤새 꾼 꿈속에서 잃어버린 얼굴을 낯선 침대에 눕

힌다 그리고 얼굴에 켜지는 가로등을 다시 꺼내보는

저녁 무렵



슬픔이라는 조금은 슬픈 단어는 호텔 방 서랍 안

성경 밑에 숨겨둔다



저녁의 가장 두터운 속살을 주문하는 아코디언 소

리가 들리는 골목 토마토를 싣고 가는 자전거는 넘

어지고 붉은 노을의 살점이 뚝뚝 거리에서 이겨지는

데 그 살점으로 만든 칵테일, 딱 한 잔 비우면서 휘

파람이라는 명랑한 악기를 사랑하면 이구의 거리는

작은 술잔처럼 둥글어지면서 아프다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라는 말을 계속해도 좋아




내가 이토록이나 이국의 호텔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을 미래 시제로 잠재우기 때문이었구나. 자연이 아닌 당신을 과거 시제로 노래하고 또 당신을 미래 시제로 잠재우기 때문에 나는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밤새 꾼 꿈속에서 잃어버린 낯선 얼굴을 찾는다. 과거도 당신이고 미래도 당신이야. 온통 당신으로 가득 차있다.


나는 휘파람을, 이국의 호텔을, 사진 속 얼굴을 시 속에서 찾고 잠 속에서 찾는다.

나는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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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1-05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시네 시야...

다락방 2018-11-05 09:30   좋아요 1 | URL
아이고,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겸손을 아는 다락방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