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syo 님의 서재에서 '휘파람'이란 단어를 보았다. 아, 휘파람. 내가 최근에, 그러니까 어제나 오늘 언제, 휘파람을 보았다.. 했다. 휘파람을 어디에서 보았지, 그러니까 글자로 나는 휘파람을 읽었는데, 아, 어디었지..답답한 마음으로 출근하면서 나는 시집을 펴들었다. 나는 언제나 내 가방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가방에는 시집 한 권과 소설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소설책을 읽으려고 가방에 넣었다가, 어쩌면 지하철 안에서 시집이 읽고 싶어질지도 몰라, 하고 시집을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책 두 권을 가방에 넣는 일 모두, 내가 내 스스로 했다. 그러니 이 가방의 무게를 나는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시는 언제나 어렵지만, 그래도 내가 조금은 시에 익숙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간의 이별이 나를 좀 더 시를 잘 읽는 몸으로 만들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주에는 진은영의 시집을 읽고 이번에는 허수경의 시집을 읽는데, 허수경의 시들이 아프다. 시를 명징하게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적절하지 않은 일일테지만, 그러니 내가 또렷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것이겠지만, 어렴풋한 슬픔이 내게로 오면서, 나는 어쩌면 시를 좀 더 잘 받아들이는 몸이 되었는가 보다, 햇다.



죽음의 관광객



한여름에 들른 도시에는 장례 행렬이 도자기를 굽

는 집들이 있는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하늘로는

도자기를 굽는 연기가 사막 쪽으로 울었다 동쪽으로

넘어가려다 총 맞은 스물한 살 청년이라고 했다



동쪽에는 지나가지 못하는 나라가 있고



이 도시 사람들은 동쪽을 바라보며 희망은 맨 마

지막에 죽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이라는 것이 너

무나 뜨거워 잡을 수가 없을 때 희망은 사라지는 것

이라고 했다



희망을 신뢰한 적은 없었으나 흠모하며 희망의 관

광객으로 걸은 적은 있었지 별이 인간의 말인 희망

을 긴 어둠의 터널 안에 가두고 먼지로 마셔버리는

것을 본 적도 있었지


눈동자 색깔이 다른 고양이의 고향이라는 도시에

서 택시기사에게 그 고양이를 본 적이 있느냐, 물어

보았으나 그는 미쳤소, 하는 표정으로 숯불에 구운

닭이나 먹다 가시오, 라고만 하더라



그러다가 고양이 고기를 먹게 되는 건 아닐까, 만

화 캐릭터처럼 웃기게 생긴 고양이 기념물 앞에서

저건 사람이 그린 동물일까 동물이 개어놓은 사람의

표정일까를 망설이는 동안 태양이 제 몸을 다 벗다

가 슬그머니 어두운 옷을 집어 입으며 사라지는데



장례 행렬이 지나갈 때 남자들은 울면서 밤하늘을

향하여 총을 쏘았고 하늘에 구멍이 뚫릴 때 청년이

아직 가슴에 피를 흘리며 우주의 난민이 되어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네



동쪽에는 지나가지 못하는 나라가 있고




어젯밤에는 자기 전에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나의 요가선생님들이 나와 있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요가센터에서 주최하는 야유회에 참석했다. 그런 단체 활동 따위 딱 싫은데, 참석했다. 점심을 먹고 화장실을 가려는데 화장실이 너무 지저분해서, 나는 집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혼자 움직였다. 집 앞에서 윤여정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잠시 얘기하자 하시는데, 저 빨리 가야해요, 지금 어디 가는 도중에 여기 온 거에요, 하고는 집에 들렀다가 다시 야유회 장소로 갔는데 행사는 이미 다 끝나 있었고 선생님들만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요. 어쩐지 나는 엄마랑 같이 와있었고, 선생님들은 모여서 나를 앞으로 불렀다. 다섯 명이었다. 엄마도 따라 오려는데, 엄마, 엄마는 거기서 기다려, 듣지마, 라고 했다. 선생님들은 내게 물었다. 너는 그 남자를 아직도 사랑하느냐고. 나는 그렇다고 했다. 선생님은 타로로 점을 봐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타로 카드 한장을 뽑아내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몰랐다. 이건 뭔가요, 사랑과 그리움이란 뜻인가요? 선생님은 말했다. 잊으라는 거예요, 그를 잊어요, 그를 잊으라, 그런 뜻이에요. 내가 보는 카드는 그런 의미가 아닌 것 같았는데,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고, 다른 선생님들도 같이 말했다. 잊으세요.



그런 꿈에서 깨어난 오늘 아침, 내가 지하철 안에서 읽은 시는 이런 것이었다.




사진 속의 달



이것은 슈퍼문이다

이것은 언젠가 슈퍼문이 있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이것은 네가 내 옆에서

달을 보았다는 증거는 아니다

왜 얼굴 없는 바람은 저렇게 많은 손가락을 가져서

네가 떠난 자리를 수천 개의 장소로 만드는지

왜 네가 떠났는지 말해줄 수도 없다

다만 사진 속의 달이다

달을 기다리며 저 언덕에 서 있다가

우리가 나누어 마셨던 녹차의 흔적도 없다

술 대신 마셨다

네 건강의 슈퍼문이 다쳤다고 했다

구운 고기도 짠 김치도 없는 녹차 잔 속의 슈퍼문

다만 사진 한 장

그 앞에서 널 생각하는 것은 지병이어서

지난밤 베개에 옴폭 파인 홈처럼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지병의 기원을 슈퍼문 사진 한 장이

알려줄 리가 없다




잠들기 전 나는 사진 한 장을 보았고, 꿈에서는 모두가 내게 그를 잊으라 말했다. 나는 모두가 하나 되어 내게 그렇게 말하는데도, 아팠지만 굴하지 않았다. 아프다고 해서 수락하지 않았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라고 그들에게 말하고 돌아섰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렇게 나는 허수경의 시집을 읽었다.



사진은 오래전의 것이었다. 오래전이라면 오래전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진 속의 나는 웃고 있었고, 이런 때가 내게 있었지, 라고 보며 예뻐했다.



오래된 일



네가 나를 슬몃 바라보자

나는 떨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어린 연두 물빛이 네 마음의 가녘에서

숨을 가두며 살랑거렸는지도

오래된 일

봄저녁 어두컴컴해서

주소 없는 꽃엽서들은 가버리고

벗 없이 마신 술은

눈썹에 든 애먼 꽃술에 어려

네 눈이 바라보던

내 눈의 뿌연 거울은

하냥 먼 너머로 사라졌네

눈동자의 시절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하던

지독한 봄날의 일

그리고 오래된 일




하마터면 엽서를 쓸 뻔 했다. 엽서를 써볼까, 라고 시를 읽다 생각했다. 엽서가,  

조금 시간이 걸린 뒤에야 당도하겠지. 엽서를 써볼까, 하다가. 그것이 내 그리움의 크기만캄 상대에게 반가움으로 다가올까, 생각하며  

조심스레 생각을 닫는다. 내가 보내는 크기와 상대가 받는 크기가 같지 않다면, 한 쪽에겐 슬픔이고 한 쪽에겐 부담일 테니, 기쁨으로 다가서지 않는 것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왜 꽃엽서 라는 단어는 봐가지고.



시집 한 권을 다 읽어내고,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휘파람의 출처를 찾았다. 아, 이거였구나. 내가 그렇게나 휘파람 어디서 봤는데, 했던 그 휘파람이 바로 이것이었어! 이국의 호텔이 내게준 것이었다. 이국의 호텔이 한 일이었어.




이국의 호텔



휘파람, 이 명랑한 악기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에게 날아온 철새들이 발명했다 이 발명품에는

그닥 복잡한 사용법이 없다 다만 꼭 다문 입술로 꽃

을 피우는 무화과나 당신 생의 어떤 시간 앞에서 울

던 누군가를 생각하면 된다



호텔 건너편 발코니에는 빨래가 노을을 흠뻑 머

금고 붉은 종잇장처럼 흔들리고 르누아르를 흉내낸

그림 속에는 소녀가 발레복을 입고 백합처럼 죽어

가는데



호텔 앞에는 병이 들고도 꽃을 피우는 장미가 서

있으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장미에 든 병의 향기가 저녁 공기를 앓게 하니 오

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자연을 과거 시제로 노래하고 당신을 미래 시제로

잠재우며 이곳까지 왔네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밤새 꾼 꿈속에서 잃어버린 얼굴을 낯선 침대에 눕

힌다 그리고 얼굴에 켜지는 가로등을 다시 꺼내보는

저녁 무렵



슬픔이라는 조금은 슬픈 단어는 호텔 방 서랍 안

성경 밑에 숨겨둔다



저녁의 가장 두터운 속살을 주문하는 아코디언 소

리가 들리는 골목 토마토를 싣고 가는 자전거는 넘

어지고 붉은 노을의 살점이 뚝뚝 거리에서 이겨지는

데 그 살점으로 만든 칵테일, 딱 한 잔 비우면서 휘

파람이라는 명랑한 악기를 사랑하면 이구의 거리는

작은 술잔처럼 둥글어지면서 아프다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라는 말을 계속해도 좋아




내가 이토록이나 이국의 호텔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을 미래 시제로 잠재우기 때문이었구나. 자연이 아닌 당신을 과거 시제로 노래하고 또 당신을 미래 시제로 잠재우기 때문에 나는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밤새 꾼 꿈속에서 잃어버린 낯선 얼굴을 찾는다. 과거도 당신이고 미래도 당신이야. 온통 당신으로 가득 차있다.


나는 휘파람을, 이국의 호텔을, 사진 속 얼굴을 시 속에서 찾고 잠 속에서 찾는다.

나는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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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1-05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시네 시야...

다락방 2018-11-05 09:30   좋아요 1 | URL
아이고,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겸손을 아는 다락방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