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사생활
-
-
밥보다 일기 - 서민 교수의 매일 30분, 글 쓰는 힘 ㅣ 밥보다
서민 지음 / 책밥상 / 2018년 10월
평점 :
나는 자주 일기를 쓴다. 매일 쓰진 않아도 언제나 글을 쓰는 편에 속한다.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과 느낌은 이 곳에 쓰지만, 책과 상관이 없는 사적인 것은 네이버 블로그에 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사적인 내용,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좀 더 깊은 속내에 대해서는 늘상 가방 안에 넣고 다니는 다이어리에 쓴다.
(이것이 나의 다이어리들...)
기록은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다. 내 경우엔 그렇다. 이 책, '서민'의 《밥보다 일기》에서도 일기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스치고 잊힐 수 있었던 것들이 기록해 놓으면 그 때 그 상황과 감정까지 고스란히 생각난다고 말하는데, 나는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한 번은, 딱히 이성적으로 끌리는 건 아닌데, 내가 이 사람과 사귀는 게 맞을까? 라는 고민을 다이어리에 적기 위해 펼쳤다가, 몇 년전에 쓴 다이어리를 꺼내보게 됐다. '그냥' 읽어본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지금과 똑같은 고민이 적혀 있었다. 나는 다른 상대에 대해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던 것. 아,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깊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구나 부터 시작해서, 그래서 그 끝은 어땠었지 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과거의 기록들을 꺼내어 읽어보노라면 내가 잊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것들이 좌르륵 펼쳐지면서 그 때의 감정과 기억들이 불쑥불쑥 나를 건드린다. 그것들은 우울한 지금의 나에게 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말해주기도 하고, 언젠가의 내가 왜 슬펐고 불행했는지 역시도 말해준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동의한 일기의 장점중 하나는 '자기 객관화'이다. 내 감정이 들끓어 오를 때 그것을 적어가노라면, 그 일에 대해 그리고 그 들끓었던 감정에 대해 다시,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보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좀 더 나은 나'를 만드는데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해야할지 방향을 일러준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일기 쓰기는 내가 나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매일 일기를 쓰면 자기소개서도 잘 쓸 수 있게 되어 취업에도 용이하다고 하는데, 그 역시 장점이긴 하고 또 글쓰기를 잘하는 것은 못하는 것보다 여러모로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일기쓰기 즉, 매일의 짧은 글쓰기가 가져오는 장점은 '나를 더 잘 알게 해주는 것'으로도 정말이지, 아주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메모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어쩌면 글을 계속 쓰고자 하는 사람들은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답을 찾아내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에게는 이 책에서 말하는 뮤즈가 자주 찾아들어, 그 순간순간 바로 다다다닥 글을 쓰는 쪽이 편한데, 상황이 언제나 내가 글을 쓰도록 돌아가는 게 아니다. 예전에는 머릿속에 '이거 써야지, 이거 기록해야지' 라고 생각하면 글쓰기를 앞에 두고 죄다 생각이 났었는데 요즘에는 '아 뭐 쓰려고 했더라..' 하고 잊게 되는 거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메모를 한다. 메모지가 있으면 메모지에 키워드만을 써두고, 메모지가 없으면 스맛폰 메모장에 키워드를 써둔다. 키워드만 써두면 내가 뭘 쓰고자 했는지 알 수 있으니까. 혹은 키워드만으로 안되겠다 싶으면 짧게 내용을 쓴다. 이것은 아마도 이 책에서 서민 이 말한 '얼개'에 해당하는 것일테다. 어차피 쓰기와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목적도 가지고 있는 터라, 그걸 쓰기 위한 소재조차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순간순간의 기억을 써두는구나 싶으니 동지애가 느껴졌다.
이 책이 말하는 일기의 장점은 모두다 옳고, 또 글쓰기에 대한 조언들도 유용하다. 그런데, 너무 쉽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는 이 책을 청소년이 가장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청소년을 염두에 두어서 이토록 쉬운 글이 나왔구나, 싶다가 내가 이 글을 '쉽게' 읽는 건, 내가 그동안 계속 일기를 써왔던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미 일기를 쓰고 있는 사람은, 이미 저자가 말한 바들을 실천하고 있을테니, 이 책이 말하는 바가 어려울 리가 없다. 그러나 성인이라 해도 일기를 전혀 쓰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그리고 일단 눈 앞에 노트나 빈 화면을 보고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까' 막막한 사람이라면, 이 책은 바로 그대로의 의미가 있겠구나 싶은 거다. 그러니 이 책의 대상은 이미 일기를 쓰는 사람보다는 일기라는 짧은 글, 자기 자신에 대한 글조차 쓰기가 너무나 막막한 사람이 되어야할 것이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나 좋자고 글을 쓴다. 글을 쓰면서 내가 가진 생각이 정리된다. 그리고 나 좋자고 쓰는 이 글이, 쓰는 순간의 내게도 좋지만, 다 쓴 후의 내게도 좋다. 훗날 과거의 기록을 읽노라면 나는 수시로 과거의 어느 순간에 가서 생생한 감정들을 느끼고 있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과거의 내가 어떤지 알게되면, 미래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더 깊게 생각해보게 된다. 무엇보다 이토록이나 자주 글을 쓰면 자꾸자꾸 쓰면서 글 실력은 좋아진다. 계속하는 사람이 계속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 실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글을 쓰지 못하니까 안쓰면 계속 글을 못쓰게 되지만, 글을 쓰지 못하지만 계속 쓰고 또 쓰고 또 쓰면 잘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거다. 이것도 이 책에서 다 말해주고 있다.
저자는 독서가 깊은 글쓰기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는데, 크- 이건 뭐... 도무지 이견이 있을 수가 없다. 책을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으면 쓰는 게 달라지는 건 정말이지 두말하면 잔소리야. 글 써서 나쁜 점은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정말 없나? 이건 좀 곰곰 생각해봐야하겠다).
마지막으로 덧붙인 저자 아버지의 일기 때문에 이 책은 '일기를 쓰자'는 데 더 설득력을 갖는다. 오래전에 아버지가 써두었던 일기를 읽음으로써 그 당시의 상황과 자신의 생각이 어떤 식으로 달랐던건지 돌아보게 되는데, 이 아버지의 일기 덕분에, 저자가 말한 일기의 모든 장점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나는 이 아버지의 일기 때문에 별 하나를 더 주고 싶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의 일기가 읽고싶어졌는지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제임스 w. 페니베이커'의 《단어의 사생활》이 생각났다. 정확히는 이런 구절이었다.
내
경력으로 말하자면 초기에는 건강, 감정, 트라우마 경험의 특징등을 연구했다. 그러다 1980년대 초반, 나는 우연히 발견한
사실에 마음이 끌렸다. 지독한 트라우마 경험을 혼자서만 간직하는 사람들은 그 경험을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들에 비해 건강상의
문제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 왜 그리 해로울까? 더 중요한 질문을 하자면, 강렬한 감정을 수반하는 비밀을
터놓는 사람들은 더 건강해지는 것일까? 나와 제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금세 알게 되었다. 답은 <그렇다> 였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루 15분에서 20분 정도씩 사나흘 연속으로 자신의 트라우마 경험에 대해 글로 써보라는 실험을 시작했다. 그 결과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글을 쓴 사람들은 아무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주제에 대해 글을 써야 했던 사람들에 비해 건강이
호전되었음이 증명되었다. 이후의 연구들에서는 감정을 표출하는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 가 면역 기능을
높이고, 혈압을 낮추며, 우울한 감정을 줄이는 한편 평소의 기분도 더 나아지게 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최초의 글쓰기 실험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 전역에서 2백 건 이상의 비슷한 실험이 수행되었다. 연구 결과는 그리 대단치 않을 때도 많지만,
감정의 격변을 <언어의 변환>하는 단순한 과정은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과 꾸준히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임스 W. 페니베이커, 『단어의 사생활』, p.26
일기를 쓰자. 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좀 더 건강한 내가 되기 위해서. 나는 일기 쓰는 나를 항상, 언제나 칭찬한다.
잘하고있다, 나여...
뭘 이렇게 다 잘하는건지 모르겠다.
자, 그렇다면 일기를 매일 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날 저질렀던 실수에 대해서는 진지한 반성으로 이끌어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노력하게 해줍니다. 글을 쓰려면 해당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야 하니 사고가 깊어지는 것은 당연하고요. (p.38)
글쓰기 소재는 원래 갑자기 떠오릅니다. 작가들은 그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의 신인 ‘뮤즈‘에 비유합니다. 이 뮤즈라는 분은 워낙 빠른 속도로 왔다가 그냥 가버리는 게 특징입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빈대떡을 보는 순간에는 ‘아, 빈대떡에 대해 쓰자‘고 생각을 하겠지만 1분만 지나면 그 생각은 없어지고 ‘내가 뭘 쓰겠다고 했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중략) 그러니 뮤즈가 왔을 때 잽싸게 뮤즈를 붙잡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게 바로 노트에 써놓는 것이지요. ‘빈대떡‘이라고 쓰고, 뭐에 대해 쓸지 대략의 얼개를 짜놓는 겁니다. (p.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