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 왔던 시를 태우고 싶었다. 강사 일을 관두고 싶었다. 형근과 형근의 어머니를 그만 이해하고 싶었다. 성연은 이런 사건의 피해자가 트라우마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렵다는 예측과 우려를 벗어나고 싶었다. 유형과 증상을 뛰어넘을 수 있을 듯했다. 진단과 병명에 갇히기 싫었다. 자신이 성폭력 생존자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방치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사건은 없던 일이 되어갔다. 하지만 천막 안의 남자를 본 순간, 가격을 당했다. 사촌과 얼굴이 거의 똑같은 남자였다.- 《지상의 여자들》, 박문영, P171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중에 많은 사람들은 박문영의 소설속에 등장했던 저 문장처럼, 바로 저런 생각으로 살고 있을 것이고 또 살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나에게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너 그런일 때문에 그렇게 되었구나' 같은 말 따위는 절대 듣고 싶지 않아서, 혹여라도 원인과 결과를 그런식으로 생각할 게 두려워서 더 정상적이고 건강한 삶에 매달리려고 노력했다. 나는 나의 정신건강을 자부했고 또 잘 되고 있었다.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에서 트라우마에 도움이 되는 게 사회적지지라고 하는데, 그런점에서 나는 아주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내게는 지지를 보내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내가 하는 행동들의 원인이 내 상처나 과거의 경험을 끌고 오기를 결코 바라지 않았고, 박문영이 말한것처럼 그런 유형에 갇히기 싫었다. 그러나 박문영의 바로 저 문장처럼, 뉴스만 봐도 어김없이 과거로 끌려들어갔다. SNS 로 공유되는 많은 소식들에도 그랬다. 내가 보기 싫은, 듣기 싫은 뉴스들은 하루에도 몇차례씩 사건으로 나와서 나를 어김없이 두드려팼고, 나는 그럴 때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렇게 하염없이 바닥으로 끌려가는 게 싫어 오히려 더 등을 돌리고 싶었다가 나같은 사람이 생길까봐 오히려 더 행동하고 싶어졌다. DSO,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엠네스티 전쟁성폭행 피해자 후원, 한국여성의전화, 유니세프에 정기후원을 하는 이유는 그 행동의 하나였다. 시위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 나는 다른 여성들이 그리고 다른 아동들이 당할 많은 고통과 피해들로부터 그들을 한걸음 더 멀어지게 하고 싶었다. 나는 여성과 아동을 보호하고 싶었는데, 그러다보면 나 역시도 아무도 몰래 나에게 묻게 됐다. 내가 이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약자의 편에 서기 위함인가, 아니면 나의 트라우마는 이것의 원인이 되었는가. 예측과 우려를 벗어나고 유형과 증상을 뛰어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 삶 자체, 티를 내지 않겠다는 매일의 그 다짐 자체가, 그러나, 내가 바로 거기에 갇혀 있다는 거였다.




정신건강 영역에서 '외상trauma'이란 과도한 위험과 공포,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일컫는다.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4판》에 따르면, 외상이란 심각한 죽음이나 상해를 입을 위험을 실제로 겪었거나 그러한 위험에 직면했을 때, 혹은 타인이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하였을 때, 이에 대하여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공포를 경험한 경우를 의미한다. (p.17 서론 中)


하루에도 몇차례나 일어나는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에 바닥으로 끌려들어가면서 나는 그럴 때마다 그 증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트라우마를 건드렸다거나 트리거 눌렸다는 것만으로 표현했었는데, '주디스 허먼'의 이 책, 《트라우마》를 읽으면서 비로소 적합한 단어를 찾았다. 내가 겪고 있는 것은 트라우마의 공포중의 하나인 '침투', 그중에서도 '재경험' 이었다. 재경험이라는 단어를 이 책에서 맞닥뜨리자마자 주저 앉아 엉엉 울고 싶어졌다. 경험 만으로도 힘든데 재경험이라니. 그런데 그 재경험이 나에게는 몇번이나 일어난다. 결코 끝이 나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인지하는 증상이 '재경험' 이었다면, 인지하지 못한 것중에는 '과각성'이 있었다.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 것, 코를 골며 자다가도 작은 소리에 벌떡 깨버리는 것. 주디스 허먼은 이 과각성 역시도 트라우마의 고통중 하나라고 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걸 극복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더 많은 고통을 끌어 안고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외상을 경험한 뒤, 인간의 자기 보호 체계는 영속적인 경계 태세로 들어가는 것 같다. 마치 위험이 어느 순간에라도 되돌아올 것처럼 말이다. 생리적 각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주요증상인 이러한 과각성의 상태에서, 외상을 경험한 사람은 쉽게 놀라고, 작은 유발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며,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카디너는 "외상 신경증의 핵심은 '생리 신경증physioneurosis'"이라고 제안하였다. (p.71)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중 하나도 위에 언급한것처럼 예측과 우려를 벗어나고 유형과 증상을 뛰어넘을 수 있기를 바라서였다. 그러니까, 나 스스로 원인과 증상을 진단하고 또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스스로 극복했다고 자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 그전보다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런 나의 기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충분히 충족되었다. 트라우마에 대해서 설명하는 1부에서 나는 트라우마에 대해 희미하게 내가 파악하고 있던 것들을 정확한 용어들로 설명한 정확한 문장들로 읽게 된다.

무엇보다 '히스테리아' 증상을 설명할 때 프로이트가 까이는 건 웃으면서 읽었다.

여성학을 공부하다 보면 프로이트가 까이고 또 까이는데,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 사실 프로이트는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읽고 있는 히스테릭한 증상의 원인을 그 누구보다 먼저 발견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히스테리아에 관한 모든 사례의 밑바탕에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지나치게 이른 성적 경험'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 발생은 아동기 초기에 일어난 것이고, 수십 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방해하고 있지만, 정신분석을 통하여 밝혀질 수 있다." (p.36)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 어마어마한 발언을, 아동기 성학대로 성인 여성들에게 히스테리아 증상들이 일어난다는 이 최초의 발견을, 이내 철회하고 만다. 왜? 그렇게 많이 성학대가 일어날 리는 없으니까, 그렇게 많이 성학대가 발생할 수는 없으니까, 그건 말도 안되니까.



1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아의 기원에 놓인 외상 이론을 비공식적으로 거부하였다. 프로이트의 대응은 그의 가설이 담고 있는 급진적인 사회적 함의에 스스로 계속 불편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히스테리아는 여성에게 너무 흔한 것이었고, 만약 그의 환자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의 이론이 정확하다면, "아동에 대한 도착 행위"라고 말한 것은 만연해 있는 무엇이 되어 버린다. 그가 처음 히스테리아 연구를 시작한 파리의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개업의로 일하고 있는 빈의 존경받는 부르주아 가족들 사이에서도 아동 학대가 빈발한다고 결론지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딜레마에 빠진 프로이트는 여성 환자에게 귀 기울이기를 그만두었다. (p.36-37)



그만둔 정도가 아니라 차라리 그걸 여성들의 욕망으로 바꾸어 버린다. 아, 이 아저씨야..



십대의 도라는 아버지의 정교한 성적 술책의 볼모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실제적으로 도라를 성적 장난감으로 친구들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도라의 분노와 모욕감을 수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러한 착취 상황이 그녀의 욕망의 충족인 것처럼, 그녀의 에로틱한 흥분을 탐색하려고 하였다. 프로이트가 어떤 행위를 복수로 해석하자, 도라는 치료를 그만두었다. (p.37)




1910년에 이르러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아 환자들이 겪은 아동기 성학대가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지었지만 환자들의 호소가 거짓이라는 어떠한 임상적 기록도 제공하지 않았다. (p.38)



아, 너무 재미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책 읽는 거 진짜 세상 재밌어.. ㅜㅜ



프로이트의 저 연구 뒤로 여성의 외상은 감추어졌고 그 후에 외상에 대한 연구는 참전군인들 때문에 이루어졌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강간 피해자들이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러나 강간에 대해서도 제대로 말하여지지 않았다. 강간의 최초 발언은, 오, 신이시여,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이루어낸 것이었다.




의식 향상을 시작으로, 공공의 지각을 향상시키기 위한 과정이 이어졌다. 강간에 관한 최초의 발언은 1971년 뉴욕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New York Radical Feminist를 통해 형성되었다. (p.61)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 처음에는 욕먹을 거 다 먹지만 결국 맞는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이여....




번역된 이 책의 제목은 《트라우마》이지만 원제는 《Trauma and Recovery》이다. 나는 '트라우마'만 보고 이 책을 구입하긴 했지만 원제의 리커버리를 보고 너무 좋았다. 게다가 이 책의 1부를 읽으면서 미친듯이 밑줄을 그으며 읽었기 때문에 2부의 리커버리는 더 기대됐고. 1부를 읽으면서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책이 될것이다!' 했는데, 2부를 읽으면서 나는 당황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회복은 내가 기대하는 회복이 아니었다. 나는 스스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고, 극복하고,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오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직 다 읽지 않은 이 책의 2부에서 말하는 리커버리는, '전문 치료자'와의 관계를 얘기하고 있다. '복합성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주디스 허먼은 이 용어를 추천한다)'에 시달리는 사람의 고통과 공포는 치료자에게도 전이될 수 있을 정도로 극심한데, 그러므로 치료자가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하는 거다. 외상후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도 사회적 지지는 필요하지만, 그를 치료하는 치료자도 결코 혼자여서는 안된다고 주디스 허먼은 말한다. 아직 다 읽지 못한 뒷부분에서는 생존자가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이 나올런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리커버리에 치료자와의 관계와 방법을 넣은 건, 어쩌면 트라우마에는 반드시 치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확신이기도 할테다. 내가 기대하는 식의 리커버리 내용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게 훨씬 나은 내용들이다. 남은 부분은 계속 열심히 읽어볼 참이다.




복합성 외상을 겪은 생존자 혹은 피해자들은, 성인의 경우 성격이 바뀌기도 하고 아동의 경우 성격이 형성되기도 한다. 그들이 원만한 인간관계를 갖고 일상으로 회복되기까지는 매우 어려운 시간들이 그들 앞에 남아있는데,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사회적 지지가 있다면 더 치료되기가 쉽다고 주디스 허먼은 얘기한다. 굳이 이 책에서 얘기해주지 않아도 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적극적 지지, 공감, 사랑, 신뢰는 누구에게든 다시 일어설 힘이 되지 않는가. 그러니 트라우마의 생존자에게도 그런 긍정적 감정들과 지지가 있다면 생존자가 일상을 회복하고 사회에 자연스레 섞여드는 일은 좀 더 수월할 것이라는 걸, 나 역시 믿는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사회적 지지 혹은 나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의 얘기를 했다고 해서, 나는 궁극적으로 타인에게 기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러니까 그게 틀리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될까?'하는 생각. 나는 물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가족과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라면 언제까지나 믿고 지지할 것이고, 나의 신뢰가 그들이 혹여 받게 될지 모를 세상의 숱한 상처로부터 극복하는데 힘이 되기를 바랄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진심으로 애정을 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놓고 보자면, 내가 타인에게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나에게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사회적 지지'라는 용어가 반복되는 책을 읽고 오히려 나는, '역시 나는 혼자여야 하겠구나'를 더 실감했다. 혼자여야 해. 때때로 재경험 때문에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상대까지 힘들게 하는 일은, 나는 하고 싶지 않다. 그걸..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무너질 것 같은 나를,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가까스로 억지로 지탱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그간 내가 받았던 애정과 신뢰로 이런 성격을 쌓았고 이 성격은 나로 하여금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게 만들었으며 또 극복하게 해줬다. 나는 내가 극복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또 믿는다. 도움을 잘 받는 것이 용기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그렇지만 내가 받을 수 있을지를 모르겠다.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고 다른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받는 것을 해도 될까? 정말 그래도 되는걸까? 물론 여태 그렇게 살아왔고 그 점이 나의 큰 행운이었으며 그래서 감사하지만, 그런데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온전히 나를 다 드러내고 그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버리기도 하는 삶을.. 내가 살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의도한 바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몇 번이고 다짐했다.

혼자 살자. 결국 인생 혼자야. 나를 도와주는 것도 내가 잘하고 내 상처 극복하는 것도 내 몫이다. 내가 알아서 하자. 내가 스스로 하자. 혼자야. 혼자가 답이다. 혼자 잘하면 되니까, 혼자 잘하고 있었으니까. 혼자 졸라 씩씩하게 잘 살면 된다. 혼자 잘 먹고 잘 살자.




정말 밑줄을 많이 그었다. 그리고 아마 남은 부분을 읽으면서도 그럴 것 같다. 색연필로도 그었고 형광펜으로도 그었다. 이 책은 내 책이다. 책장에 꽂아두고 수시로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정말 좋은 책을 만나면 너무 좋고 흥분되고 그렇다. 이 책이 지금 그런 기분을 내게 준다.



주디스 허먼이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잘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트라우마로 공포와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연구하고 회복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 어쩌면 본인과 관계도 없을 일들에 대해서 누군가는 있는 힘껏 도움의 손길을 뻗치려고 하고 있다. '레이첼 모랜'이 자신의 책 《페이드 포》에서 했던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우리가 확실하게 고립되기는 했었지만, 성매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밖에서 우리를 생각하고 우리에 대해 글을 썼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나는 목소리가 없었다.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몰랐던 사실은 저 밖에서 나를 위해 말해주려 하는 큰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 《페이드 포》, 레이첼 모랜, p.401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나와 같은 입장의 사람을 돕는 것이, 그런 움직임이 가장 좋은 치료 방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안나 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프로이트를 거쳐 모든 의사들이 여성환자를 버리게 됐을 때 홀로 남았던 그녀. 그녀는 회복했다. 여성운동을 함으로써.



히스테리아의 탐색을 논리적인 결론으로 이끌고 갔던 초기 연구가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이는 브로이어의 환자였던 안나 오였다. 브로이어가 그녀를 버린 뒤, 그녀는 몇 해 동안 아픈 채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회복하였다. '대화 치료'를 발명한 무언의 히스테리아 환자 안나 오는 여성 운동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건강함을 되찾았다. 그녀는 파울 베르톨트라는 가명으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고전적 논문인 <여성의 권리를 위한 변명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en>을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여성의 권리Women's Rights>라는 연극을 창작하였다. 그녀는 베르타 파펜하임Bertha Pappenheim이라는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탁월한 여성주의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그녀는 지적이었고 훌륭한 조직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풍요로운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소녀들을 위한 고아원을 짓고, 유대인 여성을 위한 여성주의 조직을 세웠으며, 여성과 아이들의 성적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을 유럽과 중동 지역에 전파하였다. 그녀의 헌신적인 태도와 에너지, 현실 참여에 대한 의지는 전설적이었다. 그녀 동료의 말에 의하면, "한 여성안에 활화산이 살아있었다. …… 그녀는 마치 자신이 신체적인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여서와 아동에 대한 학대에 맞서 투쟁하였다. 그녀의 죽음 앞에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다음과 같은 찬사를 남겼다. "그녀를 동경한 것만이 아니라 사랑하였고, 또 내가 죽는 날까지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영혼의 인간이 있고 열정의 인간이 있는데, 이들은 생각하는 것만큼 흔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더욱 드문 이들은 영혼도 있고 열정도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드문 것은 '열정적인 영혼'이다. 베르타 파펜하임은 그러한 영혼을 지닌 여성이었다." (p.45)





강간 생존자에 관한 추후 연구에서, 버지스와 홈스트롬은 가장 훌륭하게 회복에 성공한 여성들은 강간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었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강간위기센터에서즌 자원 상담원이었고, 법정에서는 피해자의 옹호자였고, 재정 운동에서는 로비스트들이었다. 한 여성은 강간에 대해 발언하고 강간위기센터를 조직하기 위해 다른 국가로 나아갔다. 숨거나 침묵에 대한 강요를 거부하고, 강간이 사회적 문제임을 주장하고, 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면서, 생존자들은 자신들만의 살아 있는 기념비를 창조한다. (p.132-133)





그렇게 하는 게 옳다는 스스로의 확신이 백프로 작용한 것인지, 나의 고유한 공감능력인지, 혹은 트라우마가 원인이 된건지, 내가 몇 번이고 내게 물어도 나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다. 사실은 그런식으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고 싶다. 예측과 우려를 벗어나고 유형과 증상을 뛰어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그러나 뭐가 됐든, 나는 내가 돕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 레이첼 모랜이 밖에서 자신을 위해 말해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던 것처럼, 내가 주디스 허먼을 보면서 '나를 위해 말해주고 있구나' 깨달은 것처럼, 어딘가의 다른 누군가들도 '나를 위해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생각해주고 있구나' 하면서 힘과 격려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DSO 의 후원은 1월말로 끝났다. 단체가 해산했기 때문이다. 꼭 그만큼의 돈을 나는 후원하던 다른 단체에 금액을 늘려야겠다. 어린이와 여성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계속 지지할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새삼 책읽는 거 너무 좋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좋았지만 또 좋다. 진짜 좋다. 그래서 책 또 살거다. 책 만세! 나는 진짜 책만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다. 음..책만 있으면 좀 그렇고..술도! 책하고 술만 있으면 다 될 것 같다. 아, 안주도....








폭력적인 죽음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에 받게 되는 정서적 스트레스는 남성에게 히스테리아와 유사한 신경증적 증후군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 P47

프로이트는 진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두려움 때문에 이를 거부하였다. 20세기에 이루어진 외상 장애에 대한 지식 체계의 발전은 대부분 참전 군인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였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전쟁을 수행 중인 남성이 아닌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여성에게 더 일반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1970년대 여성 해방 운동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알려지기 시작했다. - P59

여성에게는 사적인 삶의 포악성에 붙일 만한 이름이 없었다. - P59

상담실의 보호된 환경 속에서 여성들은 용기를 내어 강간에 대하여 이야기하려 했지만, 소우 배웠다는 과학계의 남성들은 이들을 믿지 않았다. 의식 향상 집단의 보호된 환경 속에서 여성들은 강간에 대하여 말하였고 다른 여성은 이를 믿어 주었다. - P60

여성주의자들은 강간이란 ‘공포를 통하여 여성의 종속을 강화하는 정치적 통제 기법‘이라고 정의하였다. 수전 브라운밀러는 강간에 관한 획기적인 논문을 통하여 이 문제를 공공의 논점으로 확립시켰고, 강간을 남성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자신의 성기가 공포를 유발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남성의 발견은 최초의 불의 사용이나 돌도끼의 사용과 함께 선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선사 시대부터 지금까지, 나는 강간이 중요한 기능을 했다고 믿는다. 그것은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 혹에 가둬 놓기 위한 의식적인 위협의 과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P63

강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정폭력과 아동 성학대의 초기 작업 또한 여성주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 P64

남성의 숨겨진 폭력에 의하여 여성의 종속은 유지되며 작동되고 있다. 성별 간에 전쟁이 있다. 강간 피해자, 가정폭력 피해 여성, 성적으로 학대당한 아동은 그 희생자이다. 히스테리아는 성 전쟁의 전투 신경증이다. - P65

강간과 구타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성폭력과 가정폭력은 여성의 삶에서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험의 범주 바깥에 있다고 기술할 수 없다. 또한 지난 세기 동안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보자면, 군인들의 외상 역시 일반적인 인간 경험으로 여겨야한다. 오로지 운 좋은 자들에게만 일반적이지 않을 뿐이다. - P67

과각성은 위험이 닥칠 것이라는 지속적인 예상을 반영하고, 침투는 외상 순간의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반영하며, 억제는 굴복되었던 둔감화 반응을 반영한다. - P71

외상 사건은 세상이 안전하고, 자기는 가치 있으며, 세계 질서에는 의미가 있다는, 피해자가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가정들을 파괴한다. - P97

외상 사건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신념을 파괴한다. - P100

‘생존자 죄책감survivor guilt‘은 전쟁, 자연 재해, 원폭 피해를 겪은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경험이다. 강간 또한 동일한 영향력을 지닌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다. - P101

강간 생존자들이 다른 범죄의 생존자들보다 높은 수준의 지속적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추후 연구를 통해서 밝혀졌다. 강간의 해로운 결과는 강간이라는 의상의 특성을 고려하였을 때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강간의 핵심은 사람에 대한 신체적, 심리적, 그리고 도덕적 침해에 놓여 있다. - P107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발생하게 되는 일차적 가능성은 경험한 사건의 특징에 달려 있다 해도, 장애가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에는 개인적인 차이가 중요하다. 같은 사건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외상 증후군은 일관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 P108

외상 사건의 결과는 개인이 어떠한 회복 요인을 가졌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

사회성이 매우 높고, 사려 깊고 적극적인 대처 양식을 지니며, 운명을 자기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강하게 지각하는 사람들은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P108

여성들에게 높게 나타나는 사회성은 강간의 경우에 자원이기보다는 짐이었다. 많은 여성들은 강간범의 인간성에 호소하려고 노력하거나, 강간범에게 공감대를 형성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이러한 노력의 거의 대부분은 무익했다.
비록 회복력이 높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상처가 적게 남고 생존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가진다고 할지라도, 개인의 속성에 그 원인을 전가시키는 것은 보호 요인으로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 P111

남성 중심적인 규범이 굳어진 까닭에, 많은 여성들은 합의된 성관계 속에서도 파트너의 욕망에 순응하고 자신의 욕망을 부차적으로 여기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강간 이후에, 많은 생존자들은 이러한 조정을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 - P120

의식 향상의 첫 번째 과제는 강간을 단지 강간이라는 그 실제 이름으로 부르는 데 있다. - P123

생존자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다고 해서 강간범의 범죄가 면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 P125

자신의 ‘내적 목소리‘를 간과했다고 생각하는 생존자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순진함‘을 가혹하게 질책한다. - P126

법체계는 국가의 우월한 권력으로부터 남성을 보호하지만, 남성의 우월한 권력으로부터 여성과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가해자의 권리는 강하게 보증하지만, 피해자의 권리를 위해서는 사실상 어떠한 보증도 하지 않는다. - P132

포르노 영화의 중점적인 원동력은 다른 사람에 대한 완전한 통제에서 온다. 무섭도록 멀쩡한 수백만 명의 남성을 겨냥한 선정적인 환상이 지닌 호소력은 환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여성과 아이들을 학대하는 거대한 산업을 키워 낸다. - P137

어른이 된 아동피해자에게는 마치 늘 외상 경험을 반복해야 하는 운명이 주어진 것만 같다. 단지 기억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삶에서조차. - P194

대부분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는 소수는 명백히 있다. 외상은 일반적인 젠더gender의 전형성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아동기 학대 과거력이 있는 남성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공격성을 풀어내려는 경향성이 높은 반면에, 여성은 자해하게 되거나 다른 이의 피해자가 될 경향성이 높았다. - P197

‘학대의 세대적 순환‘이라는 유명한 언급과는 반대로,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학대하지도 방임하지도 않는다. 많은 생존자들은 아이가 자신과 비슷한 운명으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을까 무참히 두려워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무엇이든 하고자 한다. 아이들을 위하여, 생존자는 스스로에게는 절대 베풀지 못했던 보살핌과 보호의 능력을 끌어 모으기도 한다. 다중 인격 장애를 가진 어머니들에 대한 연구에서, 정신 의학자인 필립 쿤스Philip Coons는 말하였다. "나는 다중 인격 장애를 가진 많은 어머니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가진 긍정적이고, 건설적이고, 또한 보살피는 태도에 늘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아이였을 때 학대받았고, 이제는 유사한 불행에 맞서 자신의 아이를 보호하고자 애쓴다." - P198

"여성을 피해자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여성의 성격을 탐색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 남성의 폭력은 남성에 의한 행동이라는 사실은 자주 잊히곤 한다. 그만큼, 이들의 행동을 가장 생산적으로 설명해 준 연구는 남성의 성격에 초점을 둔 연구였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다. 여성의 성격을 통해서 남성의 행동을 설명하고자 했던 어마어마한 노력에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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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트라우마》완성된 회복은 없지만 일상을 회복할 순 있다.
    from 마지막 키스 2020-03-05 08:00 
    책의 원제가 《Trauma and Recovery》인만큼, 나는 리커버리를 기대하며 읽었다. 외상의 피해자가 고통을 극복하고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들이 있을까, 를 기대한 것. 책은 기대와 달리 '치료자'와 피해자의 관계, 치료자가 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생존자가 해나가야 하는 방법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으나 그렇다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치료자에게 조력자도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또 집단 치료의 효과에 대해서 말해주기 때문에,
 
 
비연 2020-03-03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만세! 이 책 내일 와요 ㅎㅎㅎㅎ

여성들이 가지는 트라우마, 재경험.. 이런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정의해주는 이 책이 정말 읽고 싶어집니다. 읽고 있는 여성주의 관련 책들이 하나하나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놀랍고 좋고. 그리고 항상 늘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에 힘을 얻고. 그래서 더욱 읽는 재미가 더해집니다. 다락방님이 소개해주는 책들, 주옥같아서 책장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언젠가 다 읽으리라.. 헛둘헛둘.

다락방 2020-03-03 12:08   좋아요 3 | URL
저는 방금 책 주문 마쳤습니다. 다크룸 단가가 세서 ㅋㅋㅋ 오늘 사려니 여러권을 못사지 않겠어요? 다크룸은 10일에 월급받으면 주문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다크룸도 안샀는데 대체 무슨 책을 산거란 말인가, 나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튼 책 주문 마쳤습니다. 씐나요~~

누군가가 먼저 연구하고 행동해주어서 저도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는데 도움을 많이 받아요. 그리고 어떤 게 옳은건지 고민하면서 나아가는 것도 너무 좋고요. 그 길에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도 제 복입니다. 우리 함께 열심히 읽고 말하고 생각하고 씁시다! 만세!

비연 2020-03-03 15:22   좋아요 2 | URL
다크룸도 안 샀는데 무슨 책을 산 거란 말이냐에서 빵..ㅎㅎㅎㅎ
무슨 책을 샀는 지 무지하게 궁금해지네요.. ㅋㅋㅋ
저도 그냥 <트라우마>만 사려고 들어갔다가...흠흠.. 왜 돈이 그렇게나 많이 지불된 것일까요? 갸우뚱~ ㅠ

다락방 2020-03-03 15:29   좋아요 2 | URL
저 사실..구판으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있는데... 개정판으로 읽으려고 다시 샀어요. 여러분 다 개정판으로 읽을것 같아서 같이 읽어야지, 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게 무슨 돈낭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거랑 소설책 한 권이랑, 조카랑 볼 책 한 권이랑 ㅋㅋㅋㅋㅋㅋㅋㅋㅋ커피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난리난리 대난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03-03 14: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쩜... 이 방은 글은 말할 것도 없고 댓글과 대댓글까지 이렇게 고급지고 다정하고 희망차나요. 아~~ 아름다운 방이야~~😍

비연 2020-03-03 15:21   좋아요 0 | URL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단발머리님~^^ 아웅... 좋아요~

다락방 2020-03-03 15:29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방이고
아름다운 낮이고
아름다운 밤을 맞이합시다.
브라보~

공쟝쟝 2020-03-05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좋으셨나봐요. 저도 리뷰를 허둥허둥 뒤따라 읽는 데 그것만으로도 좋네요~! ‘나는 사람글 보다 더 많은 걸 극복하고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더 많은 고통을 끌어안고 살고 있었던 것 같다’라는 글에서 한번 회복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부분에서 또 한번- ‘ 결국 인생은 나 혼자여’ 뭔가 맘이 찡 해졌습미다. ㅠㅠ ... 그러게나 말이죠, 사회적 지지라니 최고 위험하쥬.

다락방 2020-03-05 08:44   좋아요 1 | URL
타인에게 얼마만큼을 기대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하면 저는 음... 그렇게 높게 보질 않아요. 무엇보다 제가 혼자여야 겠다고 생각한 건,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고통 받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자기가 아플 경우 바깥으로 표출되어 나오면서 가까운 사람들을 괴롭히게 될 때가 있잖아요. 저도 그런 사람 때문에 몹시 지치고 피로했던 경험이 있거든요. 저는 제가 그런 사람이 될까봐 너무 무서워요.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요. 그러지 않으려면 역시 혼자가 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공쟝쟝 2020-03-05 20:12   좋아요 0 | URL
괴롭히지 않기 위해 혼자가 되겠다는 다락방님만의 윤리. 동감이 되기도 하면서 안타깝기도 하고 그래요~ 그러고 보니 저도 언젠가 부터 타인에게 정말 조심스럽게 주저하며 다가가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내속엔 내가 너무나 많아~~서~~ (bgm 가시나무)

2020-03-06 0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6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5 0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5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5 2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6 0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0-03-05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유해주신 프로이트의 딜레마는 정말 웃기고 슬퍼요. 너무 빈번해서 그게 말이 되냐고 생각해서 여성의 외상에 대한 발견 자체를 부정하다니... 억압을 이론화한 그 자신이 억압의 왕 프로이트 ㅋㅋ

다락방 2020-03-05 08:47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쟝쟝님. 프로이트가 남자니까 ‘이건 말도 안돼‘ 하면서 무시해버린 것입니다. 그 말도 안되는 일이 이렇게나 빈번하게 일어났다니까 이 아저씨야!!

공쟝쟝 2020-03-05 20:21   좋아요 0 | URL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아저씨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3월의 도서는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입니다. 그동안 같이 읽기 해오셨던 분들이라면 3월도서를 이미(!) 준비하셨으리라 생각하지만, 아직 안하신분들은 빨리빨리 하세요. 이 책은 매우 어려워보이므로 좀 일찍 시작해야 할듯합니다. 자, 여러분, 고고!! 함께 읽어요!!



아울러 2월의 도서를 함께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 2월 도서도 아주 주옥같은 글들이 나왔으니 다들 찾아 읽으시기 바랍니다. 아이고, 이분들, 막 뭐랄까, 독서력도 좋아지고 필력도 좋아지고 막 그러고 있어요. 혹시라도 지금 같이 읽기에 참여하지 않으시지만 같이읽기 도서중 읽고 싶은게 있으시다면, 읽으면서 과거 같이읽기 참여했던 분들의 글을 찾아 읽는 것도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미리미리 준비해야 마음 편한 분들을 위해 4월~6월 도서 안내합니다.



4월, 베티 프리단, 《여성성의 신화》

















5월,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6월, 마리아 미즈 & 반다나 시바, 《에코 페미니즘》


















참여방법은 해당 도서 읽으시고 글을 한 편 이상씩(가급적 자주!) 써주시면 됩니다.


[책 제목] 글 제목


이렇게 써주시면 됩니다.



자, 3월도 열심히 읽어봅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니, 벌써부터 가슴이 탁- 막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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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3-02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리 사두었고.. 책상 위에 살포시 둔 상태로.. 곧 시작.. 하기로 ㅎㅎ;;

다락방 2020-03-02 12:49   좋아요 1 | URL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으으 저는 이걸 읽기도 전에 겁부터 나요. 어렵겠죠? ㅜㅜ

블랙겟타 2020-03-02 1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부지런한 다락방님 ^^ 이제 막 사고 있는데 이 글을 발견했네요. 미미..리 시작해야겠죠? ㅎㅎ

다락방 2020-03-02 18:05   좋아요 2 | URL
사실 저도 일찍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은 예전부터 하고 있었는데 아직... 책장에서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03-02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리미리 준비해야 마음 편하분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확실히 아는 두 분 있거든요.
ㅂㅇ님과 ㅂㄹㄱㅌ님이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디선가 많이 뵌듯한 그런 분들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블랙겟타 2020-03-02 18:46   좋아요 1 | URL
초성인데도 뭔가..흐릿하게 보이는 건 저의 착각이겠죠? (・-・)

단발머리 2020-03-02 18:55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네에~ 너무 흐릿하면 100원짜리 동전으로 살살 긁어주시면 잘 보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3-03 07:51   좋아요 2 | URL
저는 개인적으로 미리미리 준비하는 분들을 매우 좋아하는 편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0-03-03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저 2월 책도 안 읽었어요 ㅜㅜ 2월 책 읽고 3월 책 읽도록 할게요. 2월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3월 책 구입 먼저 하러 ^^

다락방 2020-03-03 11:54   좋아요 1 | URL
아아, 그러면 너무 순차적으로 밀리지 않을까요? 3월이니까 3월책 먼저 읽고 2월 책 읽으시면 어때요? 아아 그러나 물론, 수연님의 결정이 수연님에게는 최선입니다!!

수이 2020-03-03 12:39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이 3월 책 진짜 어려워! 하셔서 막 불안해서 ㅋㅋㅋ 그럼 두 권 다 동시에 읽어볼게요. 정신 차렸으니_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또 패스하면서 읽으면 되니까.

nonagir 2020-03-04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읽기 모임이네요! 응원합니다:)

다락방 2020-03-04 17:06   좋아요 1 | URL
ㅎㅎ 감사합니다!!
 

나는 여중,여고, 여대를 다녔다. 여중,여고를 다닌 사람이라면 아마 다들 그런 일을 보거나 경험했을 것이다. 같은 학교의 멋있는 동성 선배를 좋아하는 일. 그것은 사랑이라 이름 붙여진 것일 수도 있고 모르겠다, 그저 관심이나 호기심일 수도 있을 것이고.


중학교는 여상과 붙어 있었는데 그 여상은 농구부가 아주 유명했다. 우리반 아이 h 는 그 농구부의 스케쥴을 죄다 기억하고는 따라다녔다. 그리고 한 명에게 특히나 열중하며 선물을 주고 연락을 했다. 나는 사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내가 그러지를 않아서. 나는 농구에도 관심이 없었고 운동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선생님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국어 선생님을 좋아했고 과학 선생님을 좋아했다. 국어 선생님과 과학 선생님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은 그 h가 내게 편지를 썼다. 친해지고 싶다고, 좋아한다는 거였다. 나 역시 어린시절 그런 편지를 친구들과 곧잘 주고받았으므로 그것이 이상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 친구 앞에서는 내가 좀 이상해졌다. 더 친해지고 싶다는 편지였는데 우리는 더 어색해졌다. 그건 매우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 친구가 나를 너무나 좋아해줘서 고마웠는데 그런데 불편하고 어색했다. 친구들과 놀다가 친구들이 장난으로 나를 놀리면 어김없이 우리 락방이를 괴롭히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항상 내 편이 되어주었는데, 나는 그게 그렇게나 어색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는 그게 뭔지 잘 몰랐다.



고등학교때는 더했다. 고등학교 때는 사회체육과를 지망하기 위한 운동부 학생들이 반마다 한두명씩 꼭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유명한 아이는 우리반의 y였다. 운동을 잘해서 유명하기도 했지만, '멋있어서' 유명했다. 체육대회가 열렸던 날은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다. y가 달리면, 아이들은 기절할듯이 함성을 질러댔고, 그 후에는 우리 교실 앞에 여자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모두 y와 친해지고 싶어했다. 내가 봐도 그 친구는 되게 멋있었는데, 멋있다고 하는 이미지가 이 친구를 더 거기에 갇히게 만든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니까 운동하는 아이, 짧게 숏컷한 머리 같은 것은 그당시 그 아이를 더 인기있게, 더 멋있게 보이게 만들었는데, 그래서인지 y는 점점 더 그런 모습이 되어가는거다. 한 번은 머리를 삭발로 밀고 왔고, 사복을 입는 날이면 제오빠 옷을 빌려입고 왔다. 다른 아이들과 쉬는 시간에 얘기를 할 때면 한 손을 벽에 두고 그 아이를 가둔 채 얘기하는 걸 본 것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 역시 그 아이를 멋지다고 생각했고 좋아했지만, 그러나 그런 모습들은 허세가 가득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에 나랑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 중 두 명도 그 아이를 너무 좋아해서 울곤 했다. 너무 좋아해서, 너무 짝사랑해서. 그런데 그런 마음이 잘못된 것 같고 또 그 아이가 너무 인기가 많아서 괴로워했다. 나는 그아이들만큼 심각하게 y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한순간 그 친구랑 사이가 멀어지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건 돈 때문이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웃겨. 그러니까 y가 내게 천 원을 빌려달라고 한거다. 나는 빌려줬다. 그런데 이자식이..갚지를 않아 ㅋㅋㅋㅋㅋㅋ 돈을 빌려줘본 사람은 갚으라고 말할 때 오히려 더 말하기 민망해지는 그런 기분 다 뭔지 알쥬? ㅋㅋㅋㅋ 그러다 소풍 갈 때 그 아이에게 가서 '내 돈 갚아' 라고 했더니 그 아이가 되게 싫은 표정으로 갚은 거다. 소풍에 왔는데 돈이 없을 리가 없잖아? 천 원을 꺼내 내게 주면서 찡그렸던 그 아이의 얼굴이 기억난다. 나는 천 원을 받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아이를 좋아하던 마음이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워낙 운동을 잘하던 아이어서 좋은 대학에 진학했는데,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머리를 길리고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었다. 




중학교때 같이 등하교를 하던 친구는 전교 1등을 하던 친구였다. 나는 공부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팝송 가사를 외우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소설책을 읽는 걸로 시간을 채우던 아이었는데, w는 그런 것보다는 공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 친구랑 나랑은, 당연하게도 '잘한다' 혹은 '못한다'의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 당시 나는 영어를 잘하는 아이라고 스스로 자부했고 내 친구들도 나에게 영어를 잘한다고 했더랬다. 그런데 이 친구는 '너는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냐, 나는 영어가 어렵고 점수가 잘 안나온다'고 하는 거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내 영어점수는 그 친구보다 낮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를테면 이 친구는 다른 건 100점인데 영어를 97점 받아서 속상한 아이었고, 나는 다른 건 80점인데 영어를 95점 받는 아이었달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친구가 항상 나보다 영어 점수가 높았지만, 그런데 우리 사이는 이상하게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영어 잘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인생 뭘까..


이런 경험은 그러니까 ㅋㅋㅋㅋㅋ 나중에 성인이 되어 데이트 할 때도 나타났는데, 서른한살에 알게된 남자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내가 '나 학창시절 영어 잘했다'고 자랑자랑을 한거다. 상대는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는데, 오 영어 잘하셨구나, 하면서 ㅋㅋㅋ 나는 그래서 너무 자랑하면서 '나 수능 영어 40점 만점에 언제나 30점 이상이었다' 고 자랑을 한거다. 이런 머저리 같으니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상대는 내 자랑에 호응하며 다 들어주더니 '저는 외국어 만점 받고 대학갔어요'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만점자 앞에서 30점 이상이라고 영어 천재라고 그러고 있었던 거다, 내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역시 사람은 겸손해야 해.


아니, 근데 이 얘기 하려던 게 아니고.

편지쓰는 걸 좋아하던 나여서 하교길에 항상 문구점(아트박스)에 들러 편지지를 고르고 사는 게 나의 즐거운 취미였다. 전교1등 w는 편지지를 사는 것도 아니었지만 하굣길에 나랑 같이 들러 내가 사는 걸 기다려주곤 했는데, 어느날은 이 친구가 갑자기 '나 오늘 편지지를 좀 살건데, 그런 걸 한 번도 사본적이 없어서...니가 좀 골라줬으면 좋겠어' 하는 게 아닌가. 오호, 내가 이 친구랑 다니면서 이 친구가 편지지 사는 건 처음 보는데..그렇게 우리는 문구점에 들렀고 커다란 편지지 매대 앞에 섰다. 친구는 한참을 고르지 못했는데, 나는 그중 몇 개를 '이건 어때?'하며 들어올려 보이다가, 영어가 가득 채워진 편지지를 들고서는 친구에게 말했다.


"니가 영어를 잘하는 사람에게 보낼거라면 이게 좋지 않을까."


그러자 친구는 내게 말했다.


"너 왜 그렇게 말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진짜 공부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았고 특히 사람과 감정에 관심이 많아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 친구가 아무런 말도 안했고 어떤 기척도 준 적이 없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친구가 편지를 보낼 사람이 영어선생님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ㅋㅋㅋㅋ 우리반 담탱이었던 남자 영어 선생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학교에서 잘생겼다고 인기 많은 선생님이었는데 나는 이 선생님한테 관심 1도 없었어 ㅋㅋㅋㅋ 아무튼 나는 w가 이 선생님에게  편지 쓸거라는 느낌이 갑자기 그냥 뽝 온것이었고 ㅋㅋㅋㅋ 그래서 저렇게 말을 했는데 내 말이 맞았던 것. 아무튼 이 친구는 그렇게 편지지를 샀고 영어 선생님에게 편지를 썼다. 그 사실이 부끄러웠으나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내게만 말했는데, 그러면서도 궁금해했다.


"너 진짜 어떻게 알았어?"


나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이런건 그냥 아는 거라서...




저녁 급식을 먹은 뒤 나는 혼자서 편지지를 사러 갔다. 날은 따뜻했고,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교문을 나와 횡단보도에 서서 바깥 공기를 마셨다. 노란 등을 켜고 이동하는 자동차들의 흐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고 마음이 들떴다. 문구점의 커다란 노랑 간판에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우리는 필요한 모든 물건을 그 문구점에서 샀다. 넓은 매장엔 벽과 천장까지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갖가지 물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p.61)


















'김세희'의 [항구의 사랑]은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차있다. 그러니까 여중과 여고를 다녔던 그 때의 학생들에게 늘상 있었던 일들. 여중과 여고를 다녔던 학생들이라면 경험하거나 아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다. 


그당시의 나는 이런 환경이, 여자들만 있는 환경이 여자를 여자가 좋아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남녀공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의 기저에는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고. 이런 잘못된 사랑을 하게 하는 건 이들만 한공간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거다. '버지니아 앤드류스'의 [다락방의 꽃들] 시리즈에서 다락방에 갇힌 크리스와 캐시가 사랑한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던가. 한 공간에 갇혀서 다른 사람을 전혀 볼 수 없었던 남녀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환경의 제약 때문이 아니던가. 나는 여중,여고생들의 동성애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봤던 거다. 그러니까 이성과 한공간에 두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 하고. 



그 시절의 일들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된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학교를 졸업하고나서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누가 누구를 사랑하든,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듯이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여중시절에 여고시절에 누군가 좋아했다면, 남자가 없어서 좋아한 게 아니라 그저 그 상대가 그 순간 좋았을 수 있었던 거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 때 나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그렇지만 이건 좀 이상한거잖아' 하고 고민했던 것이, 스스로에게 그리 괴로울 게 없을 일이었는데, 이건 안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고통이었다. 



나는 요즘 우리가 가지는 고민의 일부 아픔의 일부가, 사실은 동성애에 대한 혐오만 없었어도 진작에 없어졌을 것들, 애초에 생기지 않았을 고민과 고통들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김세희는 이 책에서 그 학창시절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러나 '사랑'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니까 '여자가 여자를' 사랑했다는 것에 방점이 찍힌 게 아니라 여자가 여자를 '사랑했다'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니까, 결국은, 사랑 이야기. 나는 그 사랑이 그저 사랑일 수밖에 없음을, 후광 때문에 깨닫는다. 후광. 상대에게서 반짝거리는 그 후광.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시절 그녀의 모습이 더 잘 보인다. 선배는 사실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내 생각과 달리 그리 인기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연극 동아리에 가입해 연기를 하고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된 건 그녀의 인생에서 손꼽을 만큼 중대한 사건이었을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인생에 처음 일어난 중대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경험은 그녀로 하여금 자기 안의 에너지를 깨닫게 만들었고, 그녀에게 후광을 덧씌웠다. 그 후광이 내게도 작용했다. 내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후광에 감싸여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게 그녀에겐 놀라운 일이었을 테고, 재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깨닫게 된 사실들을 동원해 지금 그녀를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서 더없이 매력적이던 그 시절 민선 선배의 인상까지 훼손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당시 난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그녀를 사랑한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광채에 빨려 들어갈수록 나 자신은 점점 희미해지는 느낌이었는데, 또 그럴구록 나를 뺀 사람들은 생기발랄해 보였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사랑하기에, 그녀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해 보였다.

어느 날은 수돗가를 지나다 우연히 선배를 보았다. 누군가와 둘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극 동아리 1학년 학생으로 나도 얼굴을 아는 아이였다.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환한 햇살의 웅덩이 안에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급작스러운 통증을 느꼈다. (p.80-81)




여기서부터가 나의 아픈 지점이었다.


2010년 6월 24일에 만났던 남자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사랑했던 상대에게 했던 칭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최상의 칭찬이 뭐냐고. 그 당시 나는 '당신의 추리닝 입은 모습도 멋지다'는 거였고, 내게 그 질문을 던졌던 남자는 '너가 너무 빛나서 네 주변까지 빛나' 라고 대답했던 거다. 그 칭찬은 당시에도 멋졌다고 생각했는데, [항구의 사랑] 읽는 순간 갑자기 그 날의 만남이 내게 훅 다가왔다. 그 때 만났던 그와는 나중에 연인이 되었고 다정하게 지내다 지금은 헤어졌는데, 어제 항구의 사랑을 읽으면서, '그가 연애했던 상대 중에 가장 사랑한 사람은 내가 아니겠구나, 그 때 그 빛난다는 칭찬을 받던 사람이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버린 거다. 



[항구의 사랑]에서 주인공은 사랑에 빠진 선배로부터 후광을 본다. 그 후광이 빛나서 그걸 다른 사람들도 볼까봐 전전긍긍한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이 선배를 본 누구라면 다 이 선배를 사랑하지 않을까.

그러나 화자의 친구는 그 선배를 도대체 왜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추녀라고 화까지 낸다. 

나는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지점이 그 후광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빛을 나는 보는 것. 

그 후광 때문에 반짝반짝 빛이 나서 다른 사람들도 보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 저렇게 반짝이고 환한 사람을, 주변까지 환하게 만드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하면서 고민하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의 시작이고 절정이 아닐까. 2010년 6월 24일에 만난 남자는 다른 상대로부터 그 후광을 느꼈다고 얘기하는 거다. 나는 그 후광을 당신으로부터 느꼈는데.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 게 내내 애를 태우는 일이었는데. 이렇게 멋진 남자를 다른 사람들도 보면 다 사랑할텐데, 이 사람의 시선을 어떻게 나한테만 고정시킬까, 나는 그걸 고민했는데. 나는 당신의 후광을 봤는데, 당신 자체로 빛이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하지 못한 일들과 스스로 못난 점들에 대해 아무리 얘기할 때에도, 나는 당신이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살 걸 확신하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나는 당신으로부터 그 후광을 본,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그 날, 당신이 다른 사람의 후광을 봤던 일에 대해 얘기했던 게 생각나면서, 아아,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한 건 내가 아니었겠구나, 하게 되어버린거다. 



맙소사, 2010년의 일을 떠올리며 슬퍼하다니. 벌써 십년전의 일인데! 

나란 여자가 이렇구먼...




마찬가지로 사랑의 소멸은 그 후광의 소멸과 같이 온다고 생각한다. [항구의 사랑]속 화자가 먼 시간이 흘러 그 날의 후광이 모두가 볼 수 있었던 빛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러나 자신이 봤던 빛까지 부인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 사실 내가 상대의 후광을 봤던 일은 좀처럼 없다. 후광을 보지 못했던 상대와 연애를 했을 때는 그다지 '다른 누군가가 저사람을 사랑하지 않을까' 에 대한 고민도 한 적이 없고. 그건 아마도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도 괜찮다고 은연중에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내가 후광을 본 상대에 대해서는, 책 속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그의 후광을 다른 사람들도 본 건 아니다, 모두에게 보이는 후광은 아니었다, 는 것을 알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내가 본 후광이 사라졌다거나 잘못 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는 그 후광과 함께 다닐 것이고, 그 후광이 그의 미래까지 비출거라고 믿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 같았다. (p.157)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의 후광은 환할 것이고 마지막으로 돌려도 내게는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






어제는 술 마시고 늦은 밤 채널을 돌리다가 '김혜수' 주연의 [하이에나]라는 드라마를 보게됐다. 우와- 김혜수 캐릭터 너무 좋은 거다! 상대 변호사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자기가 변호사인 거 숨기고 사랑에 '가짜로' 빠져서 결국 재판에 이기게 되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좋은 캐릭터고, 거대한 로펌에 다니는 주지훈이 자꾸 김혜수에게 발리는데 너무 보기 좋은 거다. 흐뭇해.... 이것도 이제 봐야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 발라버렸!! 포쓰넘치는 여자가 연하의 남자들 발라버리는 거 세상 좋은 장면이야. 사실 연상의 남자들 발라버리면 더 좋을 것이고. 다 발라버렸!!

그리고 김혜수 님, 제가 좋아하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면 저랑 북플 친구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북플.. 아세요? 알라딘에서 만든 sns 인데,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 김혜수님은 그보다는... 알라딘 서재쪽을 더 좋아하실 것 같은데, 아무튼지간에 제가 여기 서재 변방에서 김혜수님을 응원하고 있음을 알리는 바입니다.


갑분김혜수....

규인은 유난을 떨지 않으면서도 최고의 성적을 받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상냥했다. 일단 친구가 되면 부족한 모습도 한없이 너그럽게 받아 주었지만 친구가 아닌 다른 아이들에게는 냉랭하게 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규인에게 감탄했다. 주도적으로 친구를 사귀고, 친구와 친구가 아닌 사람을 구별한다는 점이 내겐 놀라운 일이었다. 모든 아이들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는데도 그 이유 때문에 아이들은 오히려 규인에게 잘 보이려는 듯했다. - P23

이후로 내 삶에 대해 생각할 때 그 부분을 건너뒤곤 했다. 그때의 나도 나이데 빼 버리고 싶었다. 앞뒤와 연결되지 않는 그런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그 부분까지 포함한 나 자신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 P53

이후로 선배와 나는 하루에 몇 번씩 문자를 주고받았고, 전화 통화도 했다. 일요일에는 같이 도서관에 가서 마주 앉아 공부하기도 했다. 그녀에게 이런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없었다. 내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3학년이고, 나는 2학년이었으니까. 난 무엇보다 선배가 나와 어울리는 게 즐거운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난 선배와 함께 있으면 더없이 행복하면서도 고통스러웠다. 평상시에는 의식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일들, 이를테면 걸음걸이마저 신경 쓰였고, 선배의 농담에 재치 있는 대답은 커녕 대꾸할 타이밍을 놓친 채 멍하니 서 있곤 했다. 마침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때가 늦었을 뿐 아니라 상대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곱씹을수록 끔찍해서 당장 머리를 벽에라도 부딪쳐 기억상실에 빠지고 싶어지는 그런 말들이었다.
선배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난 좌절감에 휩싸여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 P68

"난 이런 사람이 아니에요. 사실은 상당히 재치 있고 매력적인 아이에요. 정말이에요. 진짜 내 모습을 보면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안 되겠어요. 시간이 필요해요. 제발 조금만 더 시간을 줘요. 지금 모습만 보고 나에 대해 판단을 내리면 안 돼요..." - P69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시절 그녀의 모습이 더 잘 보인다. 선배는 사실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내 생각과 달리 그리 인기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연극 동아리에 가입해 연기를 하고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된 건 그녀의 인생에서 손꼽을 만큼 중대한 사건이었을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인생에 처음 일어난 중대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경험은 그녀로 하여금 자기 안의 에너지를 깨닫게 만들었고, 그녀에게 후광을 덧씌웠다. 그 후광이 내게도 작용했다. 내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후광에 감싸여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게 그녀에겐 놀라운 일이었을 테고, 재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깨닫게 된 사실들을 동원해 지금 그녀를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서 더없이 매력적이던 그 시절 민선 선배의 인상까지 훼손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당시 난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그녀를 사랑한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 P80

그녀의 광채에 빨려 들어갈수록 나 자신은 점점 희미해지는 느낌이었는데, 또 그럴구록 나를 뺀 사람들은 생기발랄해 보였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사랑하기에, 그녀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해 보였다.
어느 날은 수돗가를 지나다 우연히 선배를 보았다. 누군가와 둘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극 동아리 1학년 학생으로 나도 얼굴을 아는 아이였다.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환한 햇살의 웅덩이 안에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급작스러운 통증을 느꼈다. - P81

왜 누군가를 사랑하면 갑자기 주변 모든 사람들이 위협직일 만큼 매력적인 존재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름다움은 도처에 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나는 울고 싶어진다.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모두 나의 적이다.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들의 매력을 알아볼 것만 같아서 나는 애가 탄다. 그들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어 보인다. - P82

그녀를 앞에 두고 있는데, 나의 내부에서 어떤 목소리가 말했다. 지금도 당신을 좋아해. 활기찬 목소리, 특유의 에너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네. 그녀를 보는 순간 빠져드는 마음 상태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창밖이 어둡고 조용히 비가 내리고 있을 때 같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 같았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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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2-2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초중고대학까지 모두 공학을 나왔지만 중1 때 여자 아이만 모아 놓은 반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물론 저는 좋아하는 쪽... ㅋㅋㅋ그 일로 소설까지 썼었는데 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는 감정이었죠...

다락방 2020-03-01 13:05   좋아요 1 | URL
좋아한다는 감정은 사실 어른이 되어서도 이해가 잘 안되는 감정이 아니던가요? 왜 너무 좋을 때는 이 사람이 왜 좋은가, 하고 따져보기도 하지만 백개의 이유를 댈 수도 있고 이유따위 없을 수도 있고 또 그렇잖아요. 좋아한다는 감정은 나쁜 게 아닌데 그런데 좋아해서 막 힘들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걸 보면 좋아한다는 감정은 우리가 살면서 결코 명쾌하게 이해될 감정은 아닌 것 같아요.

이 책에 팬픽 얘기도 나오는데요, 중학교때 팬픽 쓴 친구들도 있었어요. 우리반 아이가 읽어보라며 줬는데 여주인공의 모델은 자신이었고 남주인공의 모델은 서태지... 였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내용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3-01 14:21   좋아요 0 | URL
서태지와 로맨스라니...그런 이루지 못한 마음들을 사심 가득하게 푸는 것도 소설쓰기의 용도가 될 수 있겠네요. 써보십시다요 사심풀이...현빈도 멕켄지도 다 내거 하면서...ㅎㅎㅎ

다락방 2020-03-01 16:43   좋아요 1 | URL
헤밍웨이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 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 한 여인이 카페로 들어와 창가의 테이블에 홀로 앉았다.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빗물에 씻긴 듯 해맑은 피부에 얼굴은 방금 찍어낸 동전처럼 산뜻했고, 단정하게 자른 머리카락이 새까만 까마귀 날개처럼 뺨을 비스듬히 덮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존재는 내 집중력을 흩어 놓고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에, 혹은 다른 글에라도 그녀를 등장시키고 싶었지만, 거리와 카페 입구가 잘 보이는 방향으로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는 다시 글쓰기를 계속했다. (p.13)>


글 쓰는 사람들은 말씀하신 것처럼 원하는 사람을 원하는 방식으로 등장시킬 수 있죠. 원하는 이야기를 진행하면서요. 저는 현빈이 나오는 가벼운 로맨스...를 써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재미있고 가벼운 로맨스로 진행되지만, 그러나 결국 현빈은 차일것입니다. .왜냐하면..그 이유는.......... 비밀입니다. (벌써 재미있는 전개 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3-01 17:51   좋아요 0 | URL
아악 인용하신 부분도 재미있고 현빈 나올 가벼운 로맨스도...왜 차이는데 왜! 왜!!! 벌써 애독자 한 명 확보하셨으니 꼭 써주셔야 되요 ㅎㅎㅎ

잠자냥 2020-02-29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운동부도 아니었지만 좋아함당하는 쪽이었는데요, 지금 돌아보면 정말 진심이었던 아이들도 많았던 거 같습니다.

그나저나 막 웃다가 슬퍼지다가 갑분김혜수 ㅋㅋㅋㅋ 역시 다락방 님 특유의 글쓰기가 어우러진 포스팅입니다요.

다락방 2020-03-01 13:11   좋아요 0 | URL
운동부는 인기가 많고 유명했고요, 운동부 아닌 경우에도 당연히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희 반에도 학생1이 학생2를 좋아해서 되게 힘들어하고 그랬어요. 1,2, 모두 저랑 친구였는데 저는 그걸 알고 있었고... 아아..... 여학생들 가슴에 사랑 너무 충만한 것 같아요.
저는 그 당시에 그걸 우정이라고 생각했고 또 욕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경우에도 저한테 남자 같다고 하면서(??) 엄청 붙어다니려고한 친구가 있었는데요 저는 그 친구를 울리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은 그냥 그 시절의 우정... 뭐 이런거였나 싶고.
그렇지만 잠자냥 님 말씀처럼 그 순간 정말 진심이었던 친구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한때 일어났던 현상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진심인거요. 사회가 동성애 혐오를 하지만 않았어도 세상은 지금과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거란 생각을 해요. 이렇게 미친 이성애세상이 되진 않았을텐데.....


김혜수 얘기는 지금 나올 얘기가 아니었는데 ㅋㅋㅋㅋ 이 글 쓰던 중에 갑자기 친구한테 김혜수 좋다는 톡이 와서 의식의 흐름대로 쓰다보니 그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20-03-0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혜수 멋져서 <하이에나> 보고 있는 중임다 ㅎㅎㅎ

다락방 2020-03-01 13:12   좋아요 1 | URL
으앗 비연님도 보시는군요! 저는 지금 띄엄띄엄 봐가지고 내용 파악이 잘 되는 건 아니지만, 김혜수가 트레이닝복 입고 다니는 게 너무 좋아요. 저도 위아래 셋트 트레이닝복을 좀 사야되나 싶고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중에 트레이닝복 다같이 입고 더덕단 엠티를 가도 좋을것 같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망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20-03-01 13:16   좋아요 0 | URL
오홋. 저도 그 트레이닝복, 내가 입어도 저렇게 멋질까 하고 있었는데 ㅎㅎㅎㅎㅎ 트레이닝복 장착 더덕단 엠티. 생각만 해도 재밌고 기대되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3-01 16:45   좋아요 0 | URL
저도 트레이닝복 입고 멋지게 소화할 자신이 너무 없어요 ㅋㅋㅋ 그렇지만 입고 싶다. 트레이닝복 위에 코트 입고 다니고 싶다 ㅋㅋㅋ 다같이 모여서 트레이닝복 입고 바베큐 구워 먹으면서 술 마시면 좋을 것 같아요! 밤이 깊도록 책 얘기하고(이건 아닐 수도 있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인생 재미있게 살고 싶습니다! >.<

공쟝쟝 2020-03-02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갑분 김혜수 ㅋㅋㅋㅋㅋㅋ
이 글 너무 좋아요 ㅋㅋㅋㅋ 아 너무 재밌어 ㅋㅋㅋㅋ 갑자기 여고시절 폭풍 소환 ㅋㅋㅋ 항구의 사랑 읽다 말았는데 마저 읽어야겠어 ㅋㅋㅋㅋ

다락방 2020-03-02 09:22   좋아요 1 | URL
쟝쟝님이 좋아해주니 저는 너무 좋습니다. 아 역시 누군가 내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면 넘나 행복해.....

공쟝쟝 2020-03-02 09:26   좋아요 0 | URL
이렇게 구체적인 기억 소환이 어떻게 안재밌을 수 있나요 ㅋㅋㅋ 진짜 학원물 한편 본 느낌ㅋㅋㅋ

단발머리 2020-03-14 1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 이야기를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확실치가 않아서요. 나중에 댓글 달아야지 했으니까 안 한 것 같기도 하구요.
전 올해 읽은 글 중에 이 페이퍼가 제일 좋아요. 정말 너무 너무 좋아요. 오늘까지 네번 읽었어요.

<항구의 사랑> 이야기도 그랬지만 다락방님 이야기가 너무 맘에 와닿아서요. 20년 전, 비슷한 저의 경험이 떠오르기도 하구요. 소설을 읽으면서 과거로 돌아가 그 때의 경험, 생각, 나눴던 말이 생각하는 그런 지점이 너무 좋아요. 우리 모두 책을 좋아하고 책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락방님의 이런 글은 책읽기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만져가는지, 책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다시 만들어지는지 생각하게 해요. 다락방님, 고마워요..... 그리고 다락방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

다락방 2020-03-16 08:04   좋아요 0 | URL
아,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은 그렇게나 많은 글을 읽으시는데, 이 페이퍼가 제일 좋다 하시니... 정말이지 ㅠㅠ 눈물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 페이퍼 딱히 막 그렇게 정성스레 쓴 것도 아닌데.. 사실 뭐 제가 정성스레 글 쓰는 타입은 아니고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이 날의 제 의식은 단발머리님의 취향에 꼭 맞았네요. 감사합니다.


과거로 돌아가는 건 때때로 힘들고 슬프지만 또 너무 좋기도 해요. 이별만 해도 그렇지요. 이별한 상태가 힘들고 이별한 상대를 그리워하다가도, 또 어떤 과거로 들어가면 ‘아 참 좋았지, 참 행복했어‘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사람은 어쨌든 과거를 붙잡고 사는 동물인 것 같아요. 그리고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더 그런것 같습니다.

제 글이 기쁨을 드렸다니 너무 좋네요, 단발머리님.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뽜샤!
 
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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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학창시절 우리들에게 분명히 존재했던 일-도 충분히 작가의 입을 빌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는 걸 환영하고 응원하지만 이 책은 그러기엔 지나치게 작가의 일기장 같은 느낌이다.
부족하고 미완성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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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02-28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이 <여수의 사랑>이랑 자꾸 헷갈려요.

다락방 2020-02-28 15:36   좋아요 0 | URL
전 여수의 사랑 안읽어봤지만 여수의 사랑이 더 좋을것 같아요 ㅎㅎ

다락방 2020-02-28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0년 6월 24일에 대해서 주말에 페이퍼 쓸거야. 읽으러 와.
 
지상의 여자들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5
박문영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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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구주 시의 남자들이 사라진다. 아내를 때리다가, 아이를 성폭행 하려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여자들을 향한 폭력성을 드러냈을 때 그래서 여자들이 공포에 질려있던 그 순간에, 괴물같던 그 남자들은 사라져버린다. 사라지는 남자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그 남자들의 공통적인 특성이 무엇이었는지 따져본다. 이내 그들의 폭력성이 세상에 알려지고 남자들은 이제 자신 안의 분노를 다스려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자를 죽을때까지 때리던 남자들이 사라진 세상은, 그간 여자들이 살기를 원했던 그런 세상이다. 남자들이 사라지면서 빈 공간을 여자들이 채워나간다. 여자들은 이제 밤늦게 거리를 걷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더 많은 일자리를 얻게 되고 승진을 하게 된다. 옷차림도 자유로워진다. 길거리에서 시비를 거는 남자에게 무조건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도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것도 이제 사라졌다. 해방감을 느끼고 자유로움을 느낀다. 진작에 이렇게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 세상이 왔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들이 사라지는 세상이라면 나 역시 원하던 바다. 그런 남자들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하나도 아쉬울 거 없다고 나 역시 계속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라짐이 알수 없는 정체에 의한 것이라면, 마냥 그들의 사라짐을 기뻐할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그들의 사라짐이 없이도 여자들이 안전하게 밤거리를 걷고, 평등하게 일자리를 얻고 승진을 하며, 돌봄노동에 있어서도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일테다. 그러나 그렇게 원하던 세상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 힘의 정체를 알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남자 인간과 여자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어떤 무언가가 끼어들어서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거라면, 그것은 과연 옳은 혹은 정당한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마냥 환영해야 할것인가.



박문영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세상이 된 것같아, 그래 그런 남자들이 사라진다면 세상은 좀 더 좋아지겠지, 하며 따라가다가 어느틈에 '그런데, 그래도 될까?'를 수시로 던져준다. '외계의 빛무리'라 부르는 그것이 폭력적인 남자들을 사라지게 만든다면, 그것이 언젠가는 폭력적인 여자들을 향해서도 휘둘러지지 않을까.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정하려는 것은, 우리가 원했던 세상이기 때문에 괜찮은 것인가?


그런 남자들이 사라진 세상이라고 해서 모든 여자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여자들은 자신을 때렸던 남편일지언정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도한다. 해방감을 느끼는 여자들에게 그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 잘못된 것 같다는 얘기를 하는 여자들도 있다. 이런 세상을 원했다고 환영한다는 여자들이 있고 그러면 안된다고 하는 여자들도 있다. 여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한마음으로 연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들을 둔 어머니들은 아들이 가해자가 될지언정 아들의 편을 들기도 하니까. 아들이 하는 짓이 옳지 않다는 걸 알아도 침묵을 택하기도 하니까. 



여전히 딜레마다. 갈등할 수밖에 없다.

그래, 이런 알 수 없는 힘이 남자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해, 그런데 그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이 많은 여자들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맞고 움츠려있을거야, 그런 세상이기를 원한거야? 그런 세상이면 안되는 거잖아?

그렇게 이런 세상이 더 낫지 않느냐는 주장과 이런식으로 안정적인 세상이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서로 부딪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다시 부딪친다. 



폭력적인 남자들이 사라지고 그 빈공간을 여자들이 채우는 걸로 끝맺었다면 이 소설은 그저 판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박문영은 계속 거기에 의심과 질문을 던짐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멈춰서서 '정말 그런가', '이것이 과연 옳은가'를 생각하게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도 놓지 않으려고 애썼고 혹여라도 창살에 갇힌 동물이 되는 건 아닐까도 고심했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판단이 내가 살아온 환경에서 나온 것일텐데, 그러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상상력 역시 마찬가지. 상상력도 내가 살아온 환경과 내가 가진 지식을 바탕으로 뻗어나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 여자작가들의 사이언스 픽션 소설을 앞으로 크게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바라던 것들이 기대이상의 이야기로 펼쳐질 것 같다.  





남편은 느억맘 소스에서 나는 생선 냄새가 역하다고 했다. 하지만 여자에게 그 향취는 한국의 멸치 액젓과도 비슷했다. 남편은 자신이 고국 음식을 그리워하는 게 싫은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탐탁잖은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꾸준히 무시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여자는 출산 직후에 더 자주 생각했다. 그러나 엎질러진 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그것들을 일일이 반추하며 되돌려 놓는 작업을 하려면 아예 다시 태어나는 게 나았다. - P14

성연은 동아리방 구석에 앉아있던 희수를 회상했다. 날선 미소, 장난기 어린 눈빛이 생생했다. 20년 정도는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다. 해가 간다고 해서 관계가 반드시 성숙하는 것도 아니었다. 십년지기, 이십 년 지기. 사람들은 누군가와의 막역한 관계를 강조하고 싶을 때 이런 말을 썼지만, 사이가 볼품없고 앙상해도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었다. 어쩌면 함께 한 시간의 누추함을 덮기 위해, 내용 없는 대화를 견디기 위해 십년지기라는 표현이 필요한 지도 몰랐다.
성연은 강조할 것이 시간의 길이뿐이라면, 그게 서로를 비추는 유일한 수식이라면 관계를 단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 P47

형근의 의식과 무의식에는, 자신처럼 문제 주변을 골똘히 맴도는 사람이 절대 가질 수 없는, 원대한 직진성이 있었다. 형근은 눈앞에 놓인 유무형의 장해물을 세세히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그래서일까. 몸짓도 크고 가벼웠다.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었다. 성연은 그런 특질을 공유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알고 지낸 남자들 대부분이었다. - P50

"어쩌면 실종자들의 잘못을 화를 너무 투명하게 분출한 것일지도 모르죠. 이걸 약하다고 합의해봅시다. 그 약자들은 우리 사회 구조를 익히 체득하고, 통념과 위계 유지에 앞장 서 복무한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여성들이 만 년이 넘는 이 폭력을 언제까지 이해해야 할까요. 강력범죄에 의해 살해되는 전국 각지의 여성 수가 구주의 실종 남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남자들이 먼저 화를 냈습니다. 여자들은 스스로를 검열해왔습니다. 자아비판과 회한이 우리 자신입니다. 같이 반성하고 성찰하자고 종용하지 마십시오. 기울기가 다른 땅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지 마십시오." - P154

써 왔던 시를 태우고 싶었다. 강사 일을 관두고 싶었다. 형근과 형근의 어머니를 그만 이해하고 싶었다. 성연은 이런 사건의 피해자가 트라우마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렵다는 예측과 우려를 벗어나고 싶었다. 유형과 증상을 뛰어넘을 수 있을 듯했다. 진단과 병명에 갇히기 싫었다. 자신이 성폭력 생존자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방치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사건은 없던 일이 되어갔다. 하지만 천막 안의 남자를 본 순간, 가격을 당했다. 사촌과 얼굴이 거의 똑같은 남자였다. - P171

느리지만 선명한 변화가 있었다. 남자가 사라진 자리에 여자가 들어갔다. 승진이 막혔던 여자들 앞에 크고 푹신한 의자가 주어졌다. 실종자가 앉던 곳을 차지하고 싶은 남자는 드물었다. 오작동이 잦던 시설은 나날이 안정적으로 복구되고 있었다. 여자들의 모임이 매일 늘어났다. - P191

"포궁이 있으면 동경 받아야 했어요. 사회는 잉태할 수 있는 존재를 존중해야 했어요. 거꾸로죠. 남자들은 여자들을 인간 아래로 뒀어요.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어요. 여자들의 관용은 강요에 가까워요. 길들여진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가진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충성과 숭배예요. 이 구도를 내리찍은 게, 우리가 목도하는 실종이에요. 이게 혁명이 아니면, 여성운동이 아니면 뭐죠?" - P271

"문제가 있으면 그렇게 지워져도 된다고? 도태되었으니 죽어도 괜찮다고?" - P197

"처음엔 좋았어요. 네, 홀가분하기도 했어요."
희수가 성연의 팔을 잡았다. 장작 불똥 몇 개가 젖은 흙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사라진 남자들 옆에는 참고 참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아픈 여자들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젠 두려워요. 누군가 거슬리는 이들을 간편히 지워나간다는 게 점점 무서워요. 여기 계신 분들은 우리가 계속 남아있을 거라고 확신하세요?" - P259

다급할 때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보통 엄마, 아빠 순이다. 부모라는 단어의 배치와 반대다. 형제자매라는 한자어가 익숙하지만 역시 실제로 뱉는 말은 언니, 오빠다. 몸에서 먼저 튀어나오는 이름은 이상하게도 지면에서 항상 뒤로 밀린다. -작가의 말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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