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여자들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5
박문영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구주 시의 남자들이 사라진다. 아내를 때리다가, 아이를 성폭행 하려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여자들을 향한 폭력성을 드러냈을 때 그래서 여자들이 공포에 질려있던 그 순간에, 괴물같던 그 남자들은 사라져버린다. 사라지는 남자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그 남자들의 공통적인 특성이 무엇이었는지 따져본다. 이내 그들의 폭력성이 세상에 알려지고 남자들은 이제 자신 안의 분노를 다스려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자를 죽을때까지 때리던 남자들이 사라진 세상은, 그간 여자들이 살기를 원했던 그런 세상이다. 남자들이 사라지면서 빈 공간을 여자들이 채워나간다. 여자들은 이제 밤늦게 거리를 걷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더 많은 일자리를 얻게 되고 승진을 하게 된다. 옷차림도 자유로워진다. 길거리에서 시비를 거는 남자에게 무조건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도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것도 이제 사라졌다. 해방감을 느끼고 자유로움을 느낀다. 진작에 이렇게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 세상이 왔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들이 사라지는 세상이라면 나 역시 원하던 바다. 그런 남자들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하나도 아쉬울 거 없다고 나 역시 계속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라짐이 알수 없는 정체에 의한 것이라면, 마냥 그들의 사라짐을 기뻐할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그들의 사라짐이 없이도 여자들이 안전하게 밤거리를 걷고, 평등하게 일자리를 얻고 승진을 하며, 돌봄노동에 있어서도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일테다. 그러나 그렇게 원하던 세상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 힘의 정체를 알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남자 인간과 여자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어떤 무언가가 끼어들어서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거라면, 그것은 과연 옳은 혹은 정당한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마냥 환영해야 할것인가.



박문영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세상이 된 것같아, 그래 그런 남자들이 사라진다면 세상은 좀 더 좋아지겠지, 하며 따라가다가 어느틈에 '그런데, 그래도 될까?'를 수시로 던져준다. '외계의 빛무리'라 부르는 그것이 폭력적인 남자들을 사라지게 만든다면, 그것이 언젠가는 폭력적인 여자들을 향해서도 휘둘러지지 않을까.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정하려는 것은, 우리가 원했던 세상이기 때문에 괜찮은 것인가?


그런 남자들이 사라진 세상이라고 해서 모든 여자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여자들은 자신을 때렸던 남편일지언정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도한다. 해방감을 느끼는 여자들에게 그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 잘못된 것 같다는 얘기를 하는 여자들도 있다. 이런 세상을 원했다고 환영한다는 여자들이 있고 그러면 안된다고 하는 여자들도 있다. 여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한마음으로 연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들을 둔 어머니들은 아들이 가해자가 될지언정 아들의 편을 들기도 하니까. 아들이 하는 짓이 옳지 않다는 걸 알아도 침묵을 택하기도 하니까. 



여전히 딜레마다. 갈등할 수밖에 없다.

그래, 이런 알 수 없는 힘이 남자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해, 그런데 그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이 많은 여자들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맞고 움츠려있을거야, 그런 세상이기를 원한거야? 그런 세상이면 안되는 거잖아?

그렇게 이런 세상이 더 낫지 않느냐는 주장과 이런식으로 안정적인 세상이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서로 부딪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다시 부딪친다. 



폭력적인 남자들이 사라지고 그 빈공간을 여자들이 채우는 걸로 끝맺었다면 이 소설은 그저 판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박문영은 계속 거기에 의심과 질문을 던짐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멈춰서서 '정말 그런가', '이것이 과연 옳은가'를 생각하게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도 놓지 않으려고 애썼고 혹여라도 창살에 갇힌 동물이 되는 건 아닐까도 고심했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판단이 내가 살아온 환경에서 나온 것일텐데, 그러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상상력 역시 마찬가지. 상상력도 내가 살아온 환경과 내가 가진 지식을 바탕으로 뻗어나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 여자작가들의 사이언스 픽션 소설을 앞으로 크게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바라던 것들이 기대이상의 이야기로 펼쳐질 것 같다.  





남편은 느억맘 소스에서 나는 생선 냄새가 역하다고 했다. 하지만 여자에게 그 향취는 한국의 멸치 액젓과도 비슷했다. 남편은 자신이 고국 음식을 그리워하는 게 싫은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탐탁잖은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꾸준히 무시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여자는 출산 직후에 더 자주 생각했다. 그러나 엎질러진 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그것들을 일일이 반추하며 되돌려 놓는 작업을 하려면 아예 다시 태어나는 게 나았다. - P14

성연은 동아리방 구석에 앉아있던 희수를 회상했다. 날선 미소, 장난기 어린 눈빛이 생생했다. 20년 정도는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다. 해가 간다고 해서 관계가 반드시 성숙하는 것도 아니었다. 십년지기, 이십 년 지기. 사람들은 누군가와의 막역한 관계를 강조하고 싶을 때 이런 말을 썼지만, 사이가 볼품없고 앙상해도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었다. 어쩌면 함께 한 시간의 누추함을 덮기 위해, 내용 없는 대화를 견디기 위해 십년지기라는 표현이 필요한 지도 몰랐다.
성연은 강조할 것이 시간의 길이뿐이라면, 그게 서로를 비추는 유일한 수식이라면 관계를 단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 P47

형근의 의식과 무의식에는, 자신처럼 문제 주변을 골똘히 맴도는 사람이 절대 가질 수 없는, 원대한 직진성이 있었다. 형근은 눈앞에 놓인 유무형의 장해물을 세세히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그래서일까. 몸짓도 크고 가벼웠다.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었다. 성연은 그런 특질을 공유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알고 지낸 남자들 대부분이었다. - P50

"어쩌면 실종자들의 잘못을 화를 너무 투명하게 분출한 것일지도 모르죠. 이걸 약하다고 합의해봅시다. 그 약자들은 우리 사회 구조를 익히 체득하고, 통념과 위계 유지에 앞장 서 복무한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여성들이 만 년이 넘는 이 폭력을 언제까지 이해해야 할까요. 강력범죄에 의해 살해되는 전국 각지의 여성 수가 구주의 실종 남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남자들이 먼저 화를 냈습니다. 여자들은 스스로를 검열해왔습니다. 자아비판과 회한이 우리 자신입니다. 같이 반성하고 성찰하자고 종용하지 마십시오. 기울기가 다른 땅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지 마십시오." - P154

써 왔던 시를 태우고 싶었다. 강사 일을 관두고 싶었다. 형근과 형근의 어머니를 그만 이해하고 싶었다. 성연은 이런 사건의 피해자가 트라우마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렵다는 예측과 우려를 벗어나고 싶었다. 유형과 증상을 뛰어넘을 수 있을 듯했다. 진단과 병명에 갇히기 싫었다. 자신이 성폭력 생존자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방치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사건은 없던 일이 되어갔다. 하지만 천막 안의 남자를 본 순간, 가격을 당했다. 사촌과 얼굴이 거의 똑같은 남자였다. - P171

느리지만 선명한 변화가 있었다. 남자가 사라진 자리에 여자가 들어갔다. 승진이 막혔던 여자들 앞에 크고 푹신한 의자가 주어졌다. 실종자가 앉던 곳을 차지하고 싶은 남자는 드물었다. 오작동이 잦던 시설은 나날이 안정적으로 복구되고 있었다. 여자들의 모임이 매일 늘어났다. - P191

"포궁이 있으면 동경 받아야 했어요. 사회는 잉태할 수 있는 존재를 존중해야 했어요. 거꾸로죠. 남자들은 여자들을 인간 아래로 뒀어요.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어요. 여자들의 관용은 강요에 가까워요. 길들여진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가진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충성과 숭배예요. 이 구도를 내리찍은 게, 우리가 목도하는 실종이에요. 이게 혁명이 아니면, 여성운동이 아니면 뭐죠?" - P271

"문제가 있으면 그렇게 지워져도 된다고? 도태되었으니 죽어도 괜찮다고?" - P197

"처음엔 좋았어요. 네, 홀가분하기도 했어요."
희수가 성연의 팔을 잡았다. 장작 불똥 몇 개가 젖은 흙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사라진 남자들 옆에는 참고 참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아픈 여자들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젠 두려워요. 누군가 거슬리는 이들을 간편히 지워나간다는 게 점점 무서워요. 여기 계신 분들은 우리가 계속 남아있을 거라고 확신하세요?" - P259

다급할 때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보통 엄마, 아빠 순이다. 부모라는 단어의 배치와 반대다. 형제자매라는 한자어가 익숙하지만 역시 실제로 뱉는 말은 언니, 오빠다. 몸에서 먼저 튀어나오는 이름은 이상하게도 지면에서 항상 뒤로 밀린다. -작가의 말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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