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없는 페미니즘 - 메갈리아부터 워마드까지
김익명 외 지음 / 이프북스(IFBOOKS)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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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메르스 갤러리 사이트에 처음 들어가봤을 때 놀란 건 그 미러링 표현들 때문이었다. 그러고보니 많은 남성들로부터 글로 혹은 말로 늘 들어왔던 것들을 여자들이 거기서 되돌려주고 있었다. 와, 이렇게도 할 수 있네? 그때의 통쾌함은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다시 들어가봤을 때는 익명의 여자들이 그곳에서 자신의 성폭행 피해를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었다가, 그것이 자신의 잘못인줄로만 알고 숨겨왔다가, 그곳에서 비로소 익명의 여성들로부터 '네 잘못이 아니다', '가해자가 나쁜놈이다'라는 말을 듣고 위로 받고 있었다. 나는 메갈이 하는 일은 미러링이지만, 미러링 이전에 그동안 억압받았던 여자들의 편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하는 곳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곳에 회원가입을 한 것도 아니어서, 나는 숱한 사람들이 같은 익명으로 글을 쓰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댓글을 단 유저들이 모두 'ㅇㅇ' 란 닉네임을 달고 있었던 것. 그런데 이 책을 읽고서야 그것이 이름에서 올 수 있는 권위에 기대지 않기 위함임을 알았다. 그러니까 나처럼 '다락방' 이라는 이름을 달고 활동하면 결국 나에게 친한 사람이 생길 것이고, 혹여 내가 파워블로거라도 되면 나에게 말하기도 힘들어질텐데, 모두가 다같이 똑같은 닉네임을 사용하면 그걸 방지할 수 있는 거였다. 아니, 이 사람들, 이런 것까지 다 생각하고 있었구나...


처음에 나는 이 게시판 재미있네, 후련하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말을 해, 라는 생각을 갖고 있긴 했지만 내가 그곳에 속해있거나 한 건 아니고 몇 번 들어가본 게 다 였으므로 '아니 나는 메갈회원 아닌데?'라고 말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숱한 남자들이 이제 '너 메갈이냐?'를 혐오 발언으로 쓰며 여자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치 김치녀와 된장녀를 만들어낸 것처럼, 개념녀를 만들어낸것처럼, 그렇게 여자를 또 나누고 있었다. 김치녀를 만들어내면 많은 사람들이 '나는 아닌데?'를 증명하려 하고, 개념녀를 만들어내면 '아, 나는 개념녀가 되어야겠다'가 되어버린다. 그런참에 메갈을 낙인찍어 버리면 또 여자들 내에서 메갈인 여자와 아닌 여자로 나뉘게 되고, 그렇다면 나는 메갈이 되지 말아야지, 하고 생겨버리게 되는 거다. 나는 이 남자들 특유의 낙인 찍기, 여자를 후려치기 하는 것에 반대했고, 그러므로 그 뒤로 '내가 메갈이다' 라고 말하고 다녔다. 내가 메갈이다. 그래, 뭐 어쩔래?



그렇게 말하고 다니면서도 실상 나는 메갈이 그동안 해온 일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고 있었다. 소라넷을 없애려고 시도하고 노력한 게 메갈이라는 것은 알았고, 미러링으로 남자들한테 맞받아친 게 메갈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의 타임라인을 보니, 아주 많이 내가 모르고 넘어갔던 것들 중에 메갈 활동들이 있더라. 이들은 정말이지 전투력을 최고 게이지로 상승시켜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여성혐오를 뿌리뽑기 위해 활동해오고 있었다. 그 표현의 과격함으로 누군가는 굳이 그 사이트에 들어가서 캡쳐를 해오고, 얘네가 이렇게 못됐다!! 하고 기사화 하기도 했지만, 실상 그들이 하지 않은 것에 그들이 한것처럼 낙인 찍힌 것도 있었고, 거기에 대해서는 정정되지 않기도 했다. 소라넷과 몰래카메라를 뿌리 뽑으려하고 임신중단 합법화를 위해 시위를 했던 그들인데, 그들은 '여자일베'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있었다.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건, 여러차례 얘기했지만, '최명희'의 [혼불] 때문이었다. 그전까지는 별 관심이 없었고, 나야말로 페미니스트는 사랑받지 못한 여자들이고 과격하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혼불을 읽다가 여자들이 처한 입장이 너무 말도 안되고 어처구니가 없는 거다. 야, 이거 너무 부조리하고 불공평하고 억울한데... 내가 이 억울함을 어떻게 달래야 하지? 이거 왜 이런거야? 어떻게 해야 돼?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는데?? 하고 생각해서 '페미니즘이 답을 주지 않을까' 하고 시작하게 된거다. 아니나다를까,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페미니즘적인 삶을 살았었다는 걸 알게됐고, 내가 가진 편견이나 고정관념 역시 이 사회가 내게 강압적으로 주입한 것이란 걸 알게됐다. 부끄럽게도 성매매에 대해 '그렇게 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했다가, '당사자가 아니면 말할 수 없지 않나'로 생각하게 됐다가, 이제는 확실하게 '성매매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됐으며 그것은 노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볼수록 내 생각은 변하게 됐고, 그 잘못된 것을 파고 들어가다보면 거기엔 여성혐오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매매는, 노동이 될 수 없었다. 세상 어느 노동이 나이들고 경력이 쌓일수록 노동가가 적어지고 내쳐지는가. 성매매는 성노동이 아닌 성착취였다. 나는 포주와 성구매자만 처벌하는 노르딕 모델을 도입해달라는 청원에 동참했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내가 과거에 얼마나 무지하고 또한 혐오발언에 힘을 실어줬었는지를 깨닫게 됐다. 부끄러운 발언들과 행동들이 수시로 튀어나와 나를 괴롭혔지만, 그렇다고 후회와 반성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나는 여성혐오를 없애자고 말하는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연대하고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 싶다. 초반에는 대부분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다정하게 그들을 이해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다 답이 없다는 걸 알았다. 애시당초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한테 다정하게 이천번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화를 내면 다정하게 말하라 하고 다정하게 말하면 논리나 근거를 가져오라고 헛소리를 한다. 그간 아주 오래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똑똑하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었는데, 최근에야 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논리와 팩트, 이성과 객관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남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얘기를 할 땐 한없이 감정적으로 흥분해서는 냉정한 사고를 하지 못한다. 자, 그 일이 왜 일어났을까? 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그들은 하지 못한다. 세상 멍청하다는 걸 세상 논리적이란 허울로 감추고 있었다. 그렇게 교수가 되고 감독이 되고.... 그렇게 멍청한데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런 세상이 문제가 터지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는 모든 직업에 여성들을 균등하게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 생각에 더 힘을 실어주게 됐다. 그렇지 않다면 남자들끼리 봐주고 밀어주는 이 행태는 계속될 것이다. 지금은 이 행태를 고발하고 체제를 바꾸자고 말하는 모든 여성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연대하고 힘을 실어주고 싶다.



최근에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쉴라 제프리스'의 [래디컬 페미니즘] 책을 번역 출간한다고 텀블벅을 열었을 때,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발언했던 남자페미들이 광광대던 걸 봤다. 그 책을 왜 번역하냐, 그 책은 묻힌 책이다, 그 책이 얼마나 나쁜책인데... 라면서 텀블벅 자체를 훼방 놓으려고 했다. 나는 여기에서 또 깊은 빡침이 왔는데, 왜 어떤 책이 나쁜 책이고 아닌지를 자기들이 알려주려고 하는걸까? 나도 한 사람의 독자이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만약 내가 어떤 책을 읽었는데 싫다면, 그때는 싫다고 얘기할 것이다. 그리고 좋다면 좋다고 얘기할 것이고. 대체 다른 여자들을 뭐라고 생각하길래 '니가 읽을 책은 내가 정해준다'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그러면서도 자기가 페미라고 얘기한다. 최근에는 윤김지영 쌤의 [헬페미니스트 선언] 책을 팔지 말라고 출판사에 압박을 넣어서 그 책이 절판된 상태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출판사를 통해 새로 나올 예정이라는데, 어떤 책을 읽을지 말지 정해주려는 태도는, 정말이지 맨스플레인 중에서도 개같고 더러운 맨스플레인 아닌가. 왜 다른 사람들이 독자로서 판단을 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왜 그 능력은 자기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지, 정말 멍청해도 너무 멍청한 게 아닌가. 다른 사람의 주체성을 인정할 줄도 모르면서 무슨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고 다니는 걸까. 어떤 남자들은 페미니스트를 벌레보듯 하고, 어떤 남자들은 여자에게 인기 끌기 위한 껍데기로 쓴다. 그리고 어떤 남자들은 감별사를 자처한다. '너는 진짜 페미가 아니야' 그걸 자기가 어떻게 알고 판단하는걸까?



나는 이 땅에서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계속 살고 있다. 여학생이었고 여직장인이고 지금은 여자상사이다. 내가 겪은 삶을 토대로 그리고 내 주변 여자들의 삶을 토대로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페미니즘을 실천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역시 이 땅에서 살아온 다른 여자들과 연대하며 서로 힘을 주고 받고 지칠 때는 잠시 쉬라고 쉴 틈을 내어주며, 그렇게 페미니즘을 실천할 것이다. 내가 하는 페미니즘에는 누군가의 감별도 필요없고 인정도 필요없다. 나는 같이 갈 나의 동료들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다행스럽게도 이 책안에는 이미 적극적으로 싸우는 여자들이 있었다. 모두 다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어서 인상깊었는데, 그중에서 한 명은 악플러 남자들을 일일이 고소하는 에너지를 보였다. 나 역시 긴 온라인 생활을 하며 악플을 받아보지 않은 게 아닌데, 그 때 대응하는 것 만으로도 진빠지는 일이다. 그런데 그녀는 일일이 고소하고 자기 앞에서 그 악플을 실제로 읽게 했고 반성문을 받아냈다. 그 과정은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을 텐데, 그녀는 그 일을 기필코, 기어코 해내고야 말았다. 그녀가 그렇게 힘들게 이 과정을 겪어냈기 때문에, 아마 그들중에 어떤 사람들은 '야, 잘못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해서 악플달기를 멈칫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분명 그녀가 한 것은 큰 용기이고 큰 에너지였으며 큰 의미를 가진 일이었다. 이제야 뒤늦게 이 책을 읽고 알게되어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이 책에 실린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계속 싸우고 있는 탁수정씨에게도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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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0920 2018-03-19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만 안고가겠다는 용자나셨네. 쯧쯧. 지들이 한 해로운 짓꺼리들은 싹 입 닫고 남(자) 탓만하고 자빠졌으니...이 글에 논리가 있나?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네. ‘성매매는, 노동이 될 수 없었다. 세상 어느 노동이 나이들고 경력이 쌓일수록 노동가가 적어지고 내쳐지는가.‘ 이 대목에서 뿜었음. 막장인생 노가다가 웃겠다. twitter나 여초 커뮤니티 짤로 페미 공부한 티가 팍팍 나네! 세상 해로운...쯧쯧쯧.

섬사이 2018-03-19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혼불>을 읽고 페미니즘 공부로 이어졌다니, 책을 통해 뻗어가는 길은 참 다양하네요. 사진에서 분노를 에너지 삼아 여성운동을 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문장을 봤어요. 평화운동 하시는 분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분이 그랬어요. 분노의 영성을 가진 사람이 평화를 위해 움직인다고요. 여성운동에서 분노의 에너지도 그렇게 쓰이는 게 아닐까요? 부당함과 불의함에 눈감지 않아야 말하고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요.

다락방 2018-03-19 13:42   좋아요 0 | URL
네, 섬사이님. 제가 밑줄 그은 분노에 대한 부분도 바로 그런 얘기를 한다고 생각해요. 분노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운동을 할 수 있을까 싶어요. 그리고 내가 분명하게 분노를 느꼈는데, 그것을 아닌것처럼 하는 것은 또 내 속을 얼마나 타들어가게 하겠어요. 제가 느낀 바 그대로를 얘기하고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어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책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책이 모든 일의 해답은 결코 될 수 없겠지만, 해답으로 가는 길은 안내해주는 것 같아요. 분명히 책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책읽기도 글쓰기도 멈출 수 없는 것 같아요. 여러가지 길로 이끌어주기도 하고 문제의 답을 얻을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누군가와 소통을 할 수도 있게 해주잖아요.
요즘 섬사이님 글 보여서 저 너무 좋아요!! >.<

비공개 2018-03-19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의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댓글을 익명이나 다름없는 아이뒤를 달고 쓰는 이유는 뻔하겠죠. ㅋㅋㅋ 다락방님 글의 모든 부분에 다 동의합니다. 저도 이 책 읽고 싶어요!! 알라딘에서는 품절인데, 곧 다시 나오겠죠?

다락방 2018-03-19 14:09   좋아요 0 | URL
딱 이 책에서 말하는 바로 그런 댓글 되시겠습니다. ㅎㅎㅎㅎ

이 책 왜 나오자마자 품절인지 모르겠어요. 품절 풀려서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라고 리뷰 쓴건데, 그러다보니 뭐 이런 저런 댓글도 받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하핫.

2018-03-19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3-19 21:01   좋아요 0 | URL
힘이 된다 하시니 저야말로 힘이 됩니다!!

boddari 2018-03-20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너무 가슴에 와닿는 글 잘 읽었어요. 왠지 팬이 될거 같아요. 궁금한게 있습니다. 헬페미니스트 선언 언제 나오는지 아시나요?꼭 읽고 싶은데 품절에 중고는 엄청 비싸네요. 곧나올거 같으면 기다리고 아니면 비싸도 중고라도 사려구요.

다락방 2018-03-20 22:20   좋아요 0 | URL
제가 트윗에서 얼핏 여름 전으로 본 것 같은데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지금 당장 읽고 싶으시면 제꺼 빌려드릴까요? 택배로 보내드릴테니 다 읽고 택배로 돌려주시면 어때요? 웬만한 책은 제가 그냥 드릴 수 있는데 이 책은 제가 윤김 쌤께 싸인 받은 책이라 꼭 소장하고 싶거든요! 만약 괜찮으시면 받으실 주소 삼종셋트 비밀댓글로 적어주세요!!

boddari 2018-03-21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그냥 중고 살께요. 제가 기다라는거 잘 못하고 책은 빌려서 못읽는 성격이라. 줄도쳐야하고 도장도 꽝꽝 찍어야해서요.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8-03-21 11:01   좋아요 0 | URL
넵! 잘 알겠습니다!!
 
아주 친밀한 폭력 - 여성주의와 가정 폭력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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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조금은 나 자신에 대해 안다. 그래서 배우를 감히 단 한 번도 동경해본 적이 없다. 세상에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다.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p.73



정희진은 자신의 다른 책, 《혼자서 본 영화》에서, 온 몸으로 예술을 표현하는 한 배우에 대해 얘기하며 자신은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안다고 썼다. 나 역시 마찬가지. 나는 감히 정희진처럼 글을 쓸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아, 세상에 절대로 안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정희진처럼 글을 쓰는 일이겠구나' 싶었다. 이 논문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을 검열한다. 내가 혹시 '연구자'인 나의 입장으로 선악을 가르려고하진 않았나, 일방적으로 누군가의 편을 들지 않나, 증언자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는 건 아닌가, 반복해서 고통을 듣다 보니 고통에 무뎌지는 건 아닌가, 를 끝없이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논문'이며 '연구서'여도 일단 쓰는 사람이 '나'인 이상, 나의 생각과 주관 경험 느낌 사상등이 반영되지 않을 수 없을텐데, 그걸 미리 인지하고 그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너무 인상적이었던 거다. 사람은 누구나 객관적일 수도 없고 객관성을 유지할 수도 없다. 그 '객관'이라는 것도, 내가 살아온 삶 위에 놓여진 것이므로, 다른 사람들에겐 주관적일 수밖에 없을 터. 이미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계속 한 걸음 뒤로 떨어져서 내가 뭔가 잘못하는 건 없는지, 놓치는 건 없는지를 세심하게 생각하는 게 너무 대단하게 느껴지는 거다. 내가 감히 '리틀 정희진' 이라든가 '또 하나의 정희진' 이라든가 하는 걸 꿈꿔본 적도 없지만, 정말이지, 감히 바란 적도 없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백 년을 책을 읽고 공부해도 정희진처럼 될 순 없겠구나' 싶었다. 나 역시, 정희진과 그나마 비슷한 점이 있다면, '아주 조금은 나 자신에 대해 알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정희진이 결론에서도 밝히듯이, '아내 폭력'이 가족안의 문제, 가족이라는 사적인 영역에서의 문제로 다루어져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연구서이자 입문서이다.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면, 그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폭력이, 남편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내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작년에 한창 '경찰이라니 가해자인줄' 해시태그 운동이 일었었는데, 정희진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숱한 사례에서도 여지없이 경찰은 가해자와 한 편이 된다. 남편과 아내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가족이라는 그 사적 영역 내에서 일어난 것이고, 그러므로 그들이 해결해야 할 일인 것이다. 경찰은 신고하는 아내에게 '알아서 잘 해결하라'고 말을 한다. 아니면 '더 맞고 피 터져서 오든지' 라고 말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폭력으로 인정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아내라는 역할을 잘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아내를 때려야 하므로, 그래서 가정을 아름답게 만들려고 하고, 아내는 그런 남편의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에 자꾸 맞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때려서' 가정이 파괴된다면, 그건 원인제공을 한 '아내' 탓이라는 것.








이 책을 읽는 건 그래서 힘들다. 그렇게나 많은 여자들이 '아내'라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폭력에 노출되는데, 그런데 그 많은 아내들이 '내가 참으면..' 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다. 오히려 아내를 때린 남자들은 자신들이 폭력을 썼다고 생각하질 않는다. 자신들이 그러는 건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므로. 그것이 폭력일 리 없다는 것. 이 과정에서 어떤 아내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해서 도움을 못받거나 혹은 여기저기 도와달라 손을 내미는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친정이든 시댁이든 니가 참으라, 하라는 대로 해라, 라고 하고 경찰이나 상담사도 아내 스스로 이겨내고 참고 극복하라고 얘기한다. '구타'로 이혼한다면 세상에 이혼 안하는 사람이 어디있겠냐며 이혼을 말리는 거다.






그렇게 '참자'고 생각하고 '내가 더 잘해보자'고 결심하던 여자들이 끝내 여성단체를 찾게되는 데는, 그러니까 남편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데에는, 자식들의 영향이 컸다.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봐, 가 아니라, 폭력 남편의 많은 수가 자식들을 성적으로도 학대했던 것. 차마 여기에 쓰고 싶지도 않지만, 갓난 아기를 상대로도 그런 짓들을 하는데, 그걸 보게된 아내가 '아, 더 있으면 안되겠구나, 지금도 이러는데 아이가 크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게 되어서 남편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것.



그나마 한국에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된 건, 이렇게 밖으로 드러내려는 증언자 여자들과 여성주의 진영의 노력, 여성 운동의 국제 연대의 성과였다. 이마저도 안됐으면 어떻게 됐을지...


남편이 아내를 '가르치기 위해서' 폭력을 휘두른다는 인식이 너무 퍼져있고, 그래서 아내는 '내가 잘하면 된다'라고 생각하게 되어서 이 아내폭력이 계속해 반복되지만, '이혼하기 싫다'는 아내들의 생각도 폭력 남편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게 했다. 이건 생활능력이 없는 여자뿐만 아니라, 자기가 돈을 더 잘벌고 있어도 그러했는데, 이혼하는 여자가 되는 게 싫었던 것. 그것은 사회가 이혼한 여자에 대한 인식이 안좋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자라는 아이에게 '이혼한 가정의 아이'라는 걸 낙인처럼 찍어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니 아내 폭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사회적 의식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이혼이 흠도 아니지만(흠이어서도 안됐고), 내가 '맞으면서'까지 이 가정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아이에게도 '맞고 참고 사는 엄마' 보다는, '혼자서도 행복한 엄마'쪽이 훨씬 안정적이니까. 때리고 맞고 소리지르고 울고 하는 공간이, 단순히 부모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안락한 가정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부모가 다 있으므로 괜찮은 것이 되는걸까. 우리는 아내를 단순히 '남편의 아내' 가족구성원에서 가족을 지켜야하는 사람으로 볼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 봐야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한 '개인으로서' '같이' 가족을 만들고 또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아내를 한 개인으로 볼 수 없다면, 아내의 주어진 역할을 잘 이끌어주기 위해 남편의 가르침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남자들이여, 부디, 결혼하지 마시라. 가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한 사람 이상의 삶을 지옥으로 이끌지 말고, 사회를 쓰레기통으로도 만들지 말길 바란다.



이 같은 연구 결과로 볼 때 여성의 사회적 정체성과 역할을 가족 구성원으로만 한정하여, 여성을 사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현재의 가족 제도에서는 '아내 폭력'이 근절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아내 폭력' 문제를 둘러싸고 여성의 권리가 가족의 유지와 갈등하는 상황 자체가 현재의 가족이 여성에게 억압적임을 보여준다. '아내 폭력'의 발생, 수용, 해석, 대응은 가족 제도를 중심으로 성별화되어 있다. 여성의 아내 역할 수행 여부가 남편에 의해 폭력의 이유가 된다는 사실은 여성의 가족 내 성 역할이 여성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아내 폭력' 해결 방식에서 가족 구조의 성 차별성을 문제화하지 않는 가족 가치에 대한 강조는 오히려 문제의 원인을 강화하는 것으로 '아내 폭력'의 사회적 대책이 되기 어렵다. (p.248)



'아내 폭력'이 가족 유지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 개인의 인권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하는 이유는, 가족을 기반으로 하는 성별 제도(gender system)가 여성이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권리를 갖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인권은 정치적 투쟁의 결과라는 과정의 의미로 생각되기보다는 선언적 진실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즉 한국 사회에서 인권은 관념적으로 긍정적, 진보적 가치로 간주되지만, 여성 인권처럼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한국 사ㅇ회의 주류 가치인 가족주의와 경합할 대는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문화적 상황이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이유이다. 이처럼 성 차별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은 폭력당하지 않을 권리를 포함하여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는 인권 개념이 모순적인 명제가 되어버린다. (p.248-249)






증언자를 구하기는 ‘너무‘ 쉬웠다. 연구자 주변에 ‘아내 폭력‘ 경험자나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피해 여성, 가해 남성들 모두 학력·직업·계층·종교·연령에 상관없이 거의 전 계층을 망라했으며 피해자, 가해자 중에는 전문직은 물론 ‘심지어‘ 여성 운동가, 사회 운동가도 있었다. (p.52)

하지만 폭력을 극복하는 과정이 폭력을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면, 사람들은 그냥 그 상태에 머물려 할 것이다. 나는 피해 여성들의 ‘말하는(말해야 하는) 고통‘을 지켜보면서, 사회를 현재 그대로 두려는 보수주의자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게 되었다. 인간 생활의 어두운 문제(惡)를 ‘들추어내어‘ 연구하고 개선하려는 노력 자체가 악은 아닐까, 악을 파급하는 것은 아닐까, 악이 되기 쉬운 것은 아닐까? 폭력 문제를 연구한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연구자인 나도 폭력에 연루되고 접촉함으로써 부정의(injustice)한 상황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증언자들의 고통은 청자(聽者)의 경험 밖에 있으므로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연주자, 여성 운동가는 그들의 고통을 타자화하기 쉽다. 이것이 바로 악이다. (p.57)

증언자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가 부정되고 의심받았기 때문에 나의 사소한 태도에도 금세 상처받았다. 그들은 비난받는 데 너무나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그들의 입장에 충분히 동의하고 공감하는데도 그들은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고 연구자를 설득했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증언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완전히 믿어주고 분노 표현을 격려하고 자신의 행동에 ‘혐의‘를 두지 않는 청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폭력당하는 아내에게는 제일 처음 자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태도가 이후 그녀의 대응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성이 폭력당한 경험이 수치심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녀가 ‘맞을 짓‘을 했거나 늦은 밤거리를 혼자 걸어다녀서가 아니다. 그것은 남성 중심 사회가 강요하고, 희망하는 해석 체계의 산물일 뿐이다. (p.61)

사례의 폭력 남편들은 자신의 남자다움을 위해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돈을 벌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본 연구의 50사례 49명의 남편 중 약 40퍼센트인 19사례가 무직이었다. 직업이 있다 해도 부인과 함께 자영업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아내 혼자 일했다. 이 문제로 아내가 불만스러워하거나 항의하면 남편은 폭력으로 대응한다. 이는 현대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근본 원리인 성별 ‘분업‘ 논리가 실제로는 분업이 아니라 협박과 강제 속에서 여성의 이중 노동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여성은 세계 공식 노동력의 3분의 1, 비공식 노동력의 5분의 4를 담당하면서, 전 세계 수입의 10퍼센트만을 받으며 세계 재산의 1퍼센트만을 소유한다.) (p.158)

남편과 아내의 폭력 행사는 그들이 각자 다르게 처해 있는 가족 내외의 권력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남편과 아내의 폭력은 서로 다른 이유와 의미를 지닌다. 남편은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만 아내는 ‘이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며 ‘폭력‘을 행사한다. (p.230)

법정, 경찰서, 가족 앞에서 남편은 폭력 행위를 사과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가족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는가를 증명한다. 그러한 노력을 아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남편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가정 파탄‘의 책임은 여성에게 돌아온다. 남편의 폭력 행위가 가족 유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용서 여부가 가족 유지를 결정한다. 이는 ‘아내 폭력‘ 정도로는 가정이 해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 즉 아내가 맞고 사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뜻한다. 가족의 유지를 위해 남편에게 요구되는 책임 수준은 ‘때리고 사과‘하는 것이지만, 아내에게 요구되는 책임 수준은 ‘맞고 남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p.234)

결국 여기서 나는 ‘아내 폭력‘을 여성 인권 침해가 아니라 가족 해체의 문제로 인식하는 기존의 시각에 도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여성의 정체성을 사회적 개인이 아니라 아내, 어머니 등 가족 구성원으로서만 규정하는 한국 사회 구조가 어떻게 ‘아내 폭력‘을 발생시키고, 해석, 대응, 재생산하는지를 가족 내 성 역할 규범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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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 반 아이가 연습장에 낙서를 했다가 담임선생님께 걸렸더랬다. 거기에는 학교는 개집이고 담임은 거지라고 적혀있었다. 담임은 아이를 불러내어 나 어제도 고기 먹었다며 내가 왜 거지냐고 하면서 무지막지하게 그 아이를 때렸다. 뺨이며 머리할 것 없이 한참을 때렸는데, 그것은 담임을 거지라고 말한 학생의 잘못을 고치기 위한 것일까? 역시 같은 선생님이었는데, 당시에 남자아이들하고 밤에 놀다가 학교에 알려졌던건지 기억은 희미한데, 담임은 그 아이를 불러내어 머리며 뺨을 수차례 때린 뒤에 흥분에 겨워 어쩌지를 못하고 가위를 가져와 반 아이들 앞에서 그 아이의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냈다. 니가 머리 믿고 이러지? 예쁘니까 나가지? 이런 뉘앙스로 말을 하며 머리카락을 삐뚤빼뚤 잘라버린 거다. 16살 밖에 안된 아이니까 남자아이랑 놀다 잘못될까봐 선생님은 걱정스런 마음에 아이를 때리다 못해 머리를 자른걸까?


고등학교라고 별반 다를 바 없다. 나는 여고에 다녔는데, 수업시간에 존 아이를 불러내서는 작문과 문학을 가르쳤던 선생님이 몽둥이로 그 아이를 미친듯이 팼다. 검도를 하는 쌤이었는데, 그 몽둥이로 머리를 그렇게나 때리더라. 다시는 수업시간에 졸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였을까?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의 매일까? 선생님이 제자를 때린 것이므로, 사랑이라고 받아들여야할까? 정말?



위에 적은 것 말고도 아주 많이 나는 아이들이 선생님께 무지막지하게 맞는 걸 봐왔다. 아마 내 또래는 그런 걸 수시로 보았을 것이며 또 맞아보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이건 사랑의 매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다른 아이들 모두 그러지 않았을까. 그러나 선생이든 부모든 '잘못했으면 맞아야해' 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때리면 아이들이 잘못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었나 보다. 그러나 더 자라고 나서야 나는 그것은 잘 되라는 믿음도 뭣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잘못을 했을 때 어른을 때리지 않고 아이들은 때리는 것. 그것은 상대가 내게 맞설 수 없는 약자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상대적 약자 앞에서 자신의 힘으로 제압하려는 것, 나는 그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하고, 선생님이 아이를 그렇게 때린 것은 그러므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또한, 이 체벌을 금지하는 것은 가정으로도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 《이상한 정상 가족》의 저자 '김희경'은 가정에서 아이에게 훈육이란 이름으로 체벌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금지해야 하고, 그것을 법에도 분명히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전적으로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사랑의 매라는 걸,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허락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을 아동학대와 어떻게 구분 지을 것인가? 두 대 때리면 사랑의 매이고 세 대 때리면 아동학대일까? 멍이 들면 사랑의 매이고 죽으면 학대일까? 어떤 형식으로든 체벌을 허락하고 용인하는 순간, 그것의 범위를 명확히 구분짓기는 힘들어진다. 모호한 경계에서 그 체벌은 학대로 이어진다. 실제로 아이에게 체벌을 하는 부모가 학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부모의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면 "나도 맞고 자랐는데?" 하고 반론을 펴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여기에는 맞고 자랐기 때문에, 즉 부모가 매를 들고 엄하게 가르쳤기 때문에 오늘날 자신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린 우리 부모가 잘못됐다고 공격하는 것인가 하는 불편한 심리도 있을 수 있다. 흔히들 '사랑의 회초리'를 한국 부모의 전통적 교육방식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다른 나라에서도 부모의 체벌을 감싸는 쪽에선 '사랑의 매Cane of Love'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한국 부모들만의 엄하고 눈물겨운 사랑표현이 전혀 아니다. '사랑의 매'라는 표현은 때리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어떤 폭력은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뜻인데, 이는 전적으로 매를 든 사람의 논리다. 맞는 아이들에겐 체벌의 이유가 사랑이든 분노든 다를 게 없다. (p.35)



가정 내 체벌금지를 법에 명시해야 하는 이유는 부모들을 범법자로 만들려는 게 아니라 아이들도 성인들과 똑같은 정도로 모든 종류의 폭력에서 법적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갖고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체벌을 허용하는 사회는 아이들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며 사회구성원의 자격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는 고통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바라본다. 아이도 개별적 인간이고 권리를 지닌 사람이라기보다 부모의 뜻대로 처분 가능한 소유물처럼 바라본다. 이 뿌리 깊은 부정적 태도를 바꾸자는 것이 체벌금지 입법의 취지다. (p.54)




이 책을 읽는 일은 힘겨운 일이다. 굳이 자극적인 묘사가 아니라도 있어왔던 아동학대에 대한 언급이 나올 때면 너무 힘들어서 책장을 넘기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심호흡을 해야한다. 아이를 체벌하는 것을 가정에서도 금지해야 한다고 하는 것에 나는 처음부터 동의했는데,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이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나아가 국가랑은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스웨덴의 사례를 가져오며 잘 보여준다. 스웨덴은 부모의 아이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는 나라인데, 그 후 30년이 지난 지금은 아동학대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선 '가족' 이라는 견고한 울타리에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게끔 배타적은 성격을 띤다. 아내를 폭행할 때도 집안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고 아이를 학대할 때도 아이가 잘못해서 그러는 거라고 해버리면, 심지어 경찰이 출동을 해도 그냥 돌아서게 되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 남자 아빠와 여자 엄마로 구성되고 그 사이의 자녀로 구성된 바로 그 가족을 '정상'이라고 규정지어 버리는 순간, 그렇지 못한채 구성되어진 다른 가족은 자연스레 '비정상'이 되어버리고, 이 가족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눔으로써 비정상에 대한 혐오가 커진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도 미혼모의 아이도 그리고 조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도 모두 다른 아이들의 혐오의 대상이 된다. 너희들은 '정상' 가족이 아니니까.




언젠가 누가 그런건지 기억이 잘 안나는데, 나랑 대화를 하던 사람중에 누군가가, 로또 당첨이 되면 아이들을 위한 곳을 만들고 싶다고 했었다. 갈 곳 없는 아이들, 학대 받는 아이들, 그 어떤 아이들이라도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는 공간.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들어야 할 곳은 그런 곳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에게 나 역시 기꺼이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책장을 덮고 나니 그런 공간을 '따로' 만드는 게 아니라, 세상을 전부 아이들을 위한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어디를 가면 아이에게 좋다'가 아니라, 어디든 걱정없이 그냥 다녀도 될 수 있게 만들어놓는다면 되지 않겠는가. 필리핀에서도 한국에서도 아이를 낳기만 하고 키우는 데는 관심이 없어 버리고 가는 아버지들이 이렇게나 수두룩한데, 나는 너무 이상적인 걸 바라고 있는 것 같아 헛웃음이 난다.



미혼모가 혼자 이고생을 하는 동안 미혼부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박영미 대표에 따르면 파트너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절반가량의 미혼부들이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소식을 감춘다고 한다. 미혼부나 그들의 가족은 자녀에 대한 권리를 미혼모에게 쉽게 떠넘겨버리거나 부모 자녀관계를 부정해버린다. '가족 제도' 주변에 둘러쳐진 금 밖으로 한 발만 나가면 그 강력한 가족주의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출산에 동의한 미혼부조차 출산 후에는 소식을 끊거나 책임을 방기한다. 아무도 미혼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여성들에게 성관게는 임신,출산,육아까지 이어지는 고민을 안겨주지만 많은 경우 남성들에게 성관계는 그저 욕망일 뿐이다. (p.118-119)



보편적 공공보육의 비판자들은 과도한 공공보육이 가족생활을 갉아먹거나 어린이의 정상적 양육을 저해하고 가족 해체로 나아가게 될 거라고 비판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다시피 스웨덴은 보편적 공공보육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자녀와 보내는 시가닝 줄기는커녕 되레 늘었다. 스웨덴의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하루 평균 300분이고, OECD 국가 평균은 47분이다. 한국은? 6분이다. (p.231)




문화 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사랑의 매, 아이들을 때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여성의 성기를 절단하고 꼬매버리는 할례까지. 그것이 그 나라의 '문화'라고 그저 넘길 수 있는 것일까? 어느 한 대상을 고통스럽게 하는데, 그것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용인되어야 하는걸까? 아프고 죽는데, 그것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사랑의 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다 자기네 문화적 전통이라고 말해요. 그걸 문화적 특성, 종교적 가르침이라고 생각 하는 것이야말로 체벌을 옹호하는 가장 끈질긴 논리죠. 스웨덴에서도 그랬어요." (p.204)




국가가 가정의 일에 끼어드는 게 아니라 개인으로 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 그래서 아이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 그것은 약자를 보호함과 동시에 개인을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혼자 사는 게 아니라 가족들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사는 사람들이라, 한 아이를 보호하는 것에서부터 많은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것, 육아에 스트레스 받지 않게 나라에서 지원을 해주는 것, 그리고 스웨덴의 경우처럼, 아이들이 갈 수 있는 어디든 좀 더 안전하게 만드는 것. 이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차분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설득력이 있다. 아이를 존중하지 않는 것부터 얘기를 꺼내도 독박육아와 모성신화와 뿌리깊은 이 사회의 약자혐오가 만난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책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들을 대통령이 읽었다면, 좋군, 하고 생각했다. 사실 대통령보다는 국회의원들이 읽어야 되지 않을까 싶고, 그리고 세상의 많은 부모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물론, 비혼인 사람들, 아이와 상관없는 사람들도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자를 한 개인으로 똑같이 존중하는 것, 그것은 그래야 마땅한 것이니까, 그런 마땅한 것들을 지키고 산다면 엉망진창 세상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궁극적으로 우리는 아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 기본적으로 약자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일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비정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족은 없다. 정상 가족이란 말이 이상한 이유다. 가족은 단지 가족일 뿐이다.






내 혈연이 아니더라도 세대를 이어 인류가 계속 존재하리라는 기대가 사라진다면, 개인의 삶은 유한해도 나보다 더 크고 지속되는 전체에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다면, 그 모든 추구와 삶의 의미도 빛을 잃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미래의 낯선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존재의 의미를 다음 세대에, 아이들에게 빚지고 있다.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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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2 1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2-02 12:14   좋아요 5 | URL
진심어린 체벌은 당하는 아이가 잘 안다고 하셨는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진심어린 체벌이라 하면, ‘아 내가 잘못했고 그래서 나 잘되라고 때리는 거구나‘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그것이 폭력을 인정하는, 다시 말해 ‘맞을짓을 했다면 맞아도 싸다‘를 인식시키는 거라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아이는 자라서 다른 약자를 향해 ‘맞을 짓 하면 맞아야지!‘라는 사고를 자연스레 갖게 될거고요. 결국 폭력은 대물림되겠죠. 저는 아이가 사랑의 훈계를 알것이다, 라는 것 역시 때리는 사람의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때리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죠. 말씀하신 것 같은 욕설을 포함해 비하발언도 있을테고요, 성희롱은 여전히 교사로부터 당하는 학생들이 있고요. 이건 제가 리뷰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모두가 약자에 대한 혐오로부터 비롯됐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약자를 혐오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 같아요.

2018-02-02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2-02 12:44   좋아요 3 | URL
이 책에도 그런 사례가 나와요. 내가 ‘맞아서‘ 이렇게 잘되었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요. 저자는 그 말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맞아서 잘된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큰 거라고. 개인의 역량이란 것은 다르니까 누군가는 같은 환경에 놓여졌을 때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상처를 받지만 극복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상처를 받고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잘 극복해냈다고 해서,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일이 해도 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때린 선생님을 다시 찾아오는 아이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것이 체벌의 긍정적인 효과라거나, 긍정적 체벌이 있을 수도 있다고 설득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붕붕툐툐 2018-02-02 1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우 공감합니다. 어떠한 폭력이든 폭력은 폭력일 뿐이며,폭력은 재생산되기 쉽죠.

다락방 2018-02-02 16:46   좋아요 2 | URL
네. 어떤 폭력이든 허용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다른 폭력에 대해서 다 받아들이기 쉬워지죠. 그렇게 대물림 되고요.
 
저체온증 에를렌뒤르 형사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 지음, 김이선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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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를렌뒤르는 우연이란 삶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간악한 술책을 펴거나 기분 좋은 놀라움을 선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연이란 비와 같아서,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도 바르지 않게 사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내린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때로는 소위 운명이라는 것을 형성하기도 했다. 우연이란 난데없이 등장했다. 예상치 못하게, 기이하게, 설명할 수 없게. (p.272)




영화 《엘리자베스 타운》에서 '올랜도 블룸'은 자살을 결심하는데, 자살을 실행에 옮기기 직전 핸드폰이 울린다. 그 전화를 받을까 말까를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기 너머로 누나가 그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에 올랜도 블룸은 자살하려던 걸 중단하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된다. 그러다가 '커스틴 던스트'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오랜 시간 대화를 지치지도 않게, 매일 하게되고, 그러다가 그녀와 함께 뜨는 해를 바라보기도 하고, 그렇게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나간다.


어쩌면 올랜도 블룸에게는 자살하려는 생각이 그리 크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만약 컸다면, 전화가 오는 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자살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필 그때 전화가 왔고, 결코 무시할 수 없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한다는 거다. 이런 일들이 겹쳐 그는 자살하지 않았고, 그리고 소중한 인연도 만들어내게 된다. 그러니까 '나'라는 한 사람이 매일 아침에 눈을 뜨고 다시 세상 바깥으로 걸어나가는 데는, 나 하나만의 의지로 되는 게 아닌 것이다. 우린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고있고, 그 사람들로 인해서 절망하기도 하지만, 또 그 사람들 때문에 그 절망을 이겨내기도 한다. 에를렌뒤르는 이런 우연에 대해 말하고, 그 우연에 기댄다. 그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후세계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믿음을 받아들인다. 아이를 잃고 혹은 동생을 잃고 오랜 세월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가족들을 위해, 에를렌뒤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들을 찾아야할까를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우연은 우연을 만나고 그 우연은 또 우연을 만들어내서, 결국은, 조금 늦긴 해도 간절한 마음에 닿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우연은 그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억지수단이었을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에를렌뒤르가 경찰로 있는 지역에서 한 여자가 자살한다. 자살에 한 점 의심도 없고 그렇게 그 일은 지나가는 듯 보였는데, 그녀의 절친한 친구가 에를렌뒤르를 찾아와서는, 그 애가 자살할 애가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이미 끝난 일에 대해 에를렌뒤르는 한 번 개인적으로 조사해보기로 한다. 한 사람이 직장에서 자기의 보직에 맡은 바 일을 다할 때, 그것이 하나의 일만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에를렌뒤르가 자살사건에 대해 혼자 조용히 조사하려고 하지만, 아직 30년 전에 잃어버린 아들의 소식을 모르는 할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찾아와 새로운 소식이 없는지를 묻는다. 30년전에 행방불명된 여대생은 또 어찌된일일까. 이 일들이 책장을 넘길수록 조금씩 얽혀나간다.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일들이 조금씩 섞여서 각각의 사건에 실마리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은 죄책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살한 마리아는 평생을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그리고 큰 돈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한 남자는 분명 죄를 저지른 터. 그가 그 돈을 차지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벌을 받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죽게 했다는 사실이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누가 그의 옆에서 계속해서 속삭이는 게 아니라도, 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우디 앨런'의 영화 《매치 포인트》에서 남자는 부유한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는데, 아무도 모르는 채로 전망 좋은 부유한 아파트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지만, 끊임없이 자기가 죽인 여자의 유령을 본다. 내가 한 나쁜 짓은 내가 가장 잘 알것이다.



자살과 실종사건, 그것을 풀어나가는 것이 이 소설의 전부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에를렌뒤르를 포함한 그 가족의 각각의 상처. 에를렌뒤르가 어릴 적에 잃어버린 동생, 에를렌뒤르를 최선을 다해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돌려받지 못한 전아내, 부모가 다정하게 함께 있는 걸 보지 못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딸, 사랑하는 남자의 옆에 공식적으로 서고 싶었던 여자, 그리고 평생을 잃어버린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아버지까지. 이 책 속에는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감정과 그에 섞인 상처들까지 조용하게 보여준다. 실종사건이 차가운 겨울에 일어났던 것처럼, 소설은 시종일관 서늘한 분위기이지만, 에를렌뒤르가 자꾸만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으려고 해서 결코 춥지가 않다. 결국, 조금 늦었지만, 간절한 마음이 바라는 곳에 닿았을 때는, 잠깐 울컥 하기도 했다.


우리가 자신의 상처에 집중하고 그걸 치유하는 데 애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그렇게 잘 되는 건 아니다. 나만해도 내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당하고 엉엉 주저앉아 울었던 경험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일에는 거침없이 나설 때가 있었으니까. 에를렌뒤르는 사건을 해결하는데 최선이었고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최대한 귀를 기울였지만, 자신의 상처에 맞닥뜨리는 일은 피해왔다. 그러나 그가 이 모든 사건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종국에는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볼 생각을 한다. 이 조용하고 차분한 소설이, 추운 분위기를 계속 보여주면서도(얼음 얘기가 나올 때마다 너무 추웠다!), 결국 목도리 하나 두른 것 같은 느낌을 주고야 만다.




뜬금없이, 엘리자베스 타운도 다시 보고싶어졌다. 이 영화와 이 책은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올랜도 블룸과 커스틴 던스트가 계속계속 계속계속 이야기하던 장면들, 밤새 이야기하던 장면들을 보고싶다.

우리는 결국 누군가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러니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차갑지만 아름다운 소설이다.








우리는 비밀리에 만나기 시작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랑에 빠졌어요. 처음에는 그가 안됐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을 거예요. 그러다 같이 살고 싶어지자 레오노라에게 알려야 했죠. 저는 레오노라 모르게 그와 불륜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작당하고 싶지 않았어요. 모든 걸 밝히고 싶었어요. 저는 견딜 수가 …… 우리 사이를 비밀로 둘 수가 없었죠. 마그누스는 말하는 걸 미루고 싶어 했지만 제가 밀어붙였어요. 결국 그 사람이 레오노라에게 그 주말 싱그베들리르에서 진실을 말하기로 했죠.(p.325)

그는 그녀에게 평소보다 조금 많은 양의 수면제를 주었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다른 약물도 주었다.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환각제였다. 마리아는 그를 믿었기에 약을 먹었다. 그는 남편인데다가 의사였다.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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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겸손을 배우는 방법
    from 마지막 키스 2018-01-31 09:55 
    책을 잘 읽는 아이었다. 초등학생(사실 나는 국민학생 이었지만)때는 책을 글자도 틀리지 않고 잘 읽어서 선생님이 똑순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일어나서 책 읽게 시키면 나는 더듬거리지도 않았고 어려운 글자도 막힘없이 읽었으며 책장이 넘어가서 나오는 글자까지도 매끄럽게 읽어냈다. 발음도 좋았던 나는, 한마디로 똘똘함 그 자체였던 거다. 자, 내가 왜이렇게 잘난척을 하냐면,이런 내가 성인이 되어서도 어디 안가고 책을 읽다 좀 낯선 단어가 나오면 소리내어 읽어
 
 
 
마지막 패리시 부인 미드나잇 스릴러
리브 콘스탄틴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은 굉장히 똑똑한 소설이다. 1장은 빼앗는 여자의 시점에서 그리고 2장은 빼앗기는 여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데, 1장만 읽어나갈 때 이 소설은 별다를 바 없는, 그저 뻔한 내용으로 진행이 되는 거다. 가난하게 자란 여자 그래서 부자가 되고 싶은 여자. 그런데 자기 능력으로는 도무지 그렇게 될 수 없으니, 이미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여자의 자리를 뺏어 부자가 되려는 여자. 너무 뻔한 내용이라 대체 이 소설이 어떻게 진행되려는가 싶어지려는 찰나, 나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빼앗기는 여자의 시점에서도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거다. 그래서 알 수 있는 건,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해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 나만 해도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고, 착한 사람일 것이고(이건 좀 아닌가...),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일 테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오만하고 잘난척하고 재수없고 다시는 상종하기 싫은 사람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에게 흠없는 사람이 될 순 없다.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를 다른 사람은 싫어할 수도 있고, 내가 다정하다고 보는 사람을 누군가는 쌀쌀맞다고 볼 수도 있다. 저 사람은 정말 완벽한 것 같아, 라는 누군가의 평가에 나는 '그 사람은 좀 아닌 것 같은데?'라고 말하게 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친구가 결혼할 남자를 내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친구가 만나지 말라는 남자를 내가 좋아하기도 하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나. 우리 모두가 한 사람만 같은 크기로 같은 식으로 보게된다면 세상은 아마 지금보다도 훨씬 훨씬 부조리해졌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바로 그걸 자연스레 보여준다. 한 사람에 대해 엇갈린 평가. 물론 한 쪽은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완벽하다고 평하는 남자를, 다른 쪽에서는 처음부터 '어쩐지 뭔가 어딘가는 찜찜한' 사람이라 생각했었고, 주변에서도 '그 새낀 좀 이상한데... 어딘가 찜찜한데' 하고 생각했었다는 것. 이것들은 아마도 사람이 자기가 보고싶은 대로 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게 화려한 생활과 넉넉한 돈이라면, 그걸 이미 갖추고 있는 잘생긴 남자가 완벽해 보이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내가 가장 높게 평가하는 게 돈이 아닌 다른 것, 이를테면 자기 자신을 잘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나의 소중한 사람에게 잘 대해줄 것인가' 에 있다면, 우리가 보는 방향은 아예 달라질 테니까, 한 사람에 대해 전혀 다른, 엇갈린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난히 강한 촉이 있다. 어? 이 사람은 좀... 아닌 것 같은데? 그간 살아본 내 경험에 의하면, 나는 이 촉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닌 것 같다. 그 촉이 생겼다면, 그 촉을 무시하거나 깊이 눌러담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속 옆에 두고, 왜 내가 이런 느낌을 받았는지, 왜 내 촉이 내게 이런 말을 했는지 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이렇게 한 사람에 대해 엇갈린 평가를 하게 되는 두 사람의 입장에 대해 자연스레 보여주는 소설이 나는 꽤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1장을 읽을 때는 뻔했던 것이 2장을 읽으면서 오호라- 하게 됐달까. 잘했는데? 싶어진 거다. 그런데,



이 결말이 이런 식으로 흐른 것에 대해서는 '꼭 이래야만 했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책을 나보다 먼저 읽은 친구와 토요일에 만나 이 책에 대한 얘길 했는데, 친구 역시 나처럼 찜찜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 여자는 화려한 생활을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미 화려한 생활에 깊이 들어가있는 여자의 자리를 '빼앗고자' 했다. 그녀가 가진 집이며 자리 재산 그녀의 남편까지도.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 것은 나쁜 일이고, 그 나쁜일에 이르기까지 또 여러가지 나쁜짓들을 한 여자는 계속 저지른다. 물론 그전에도 그녀가 나쁜 짓을 했다고 나온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악녀'라 불러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고 또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여자라면 그 죄에 대해 벌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그 벌의 성질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거다. 나 역시 그녀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것은 나쁘니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받은 그 벌이란 것은, 그러니까, '그래도 그 벌은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 벌 속으로 그녀를 밀어넣기 위해 부러 그녀를 악녀로 설정한 것이 아닌가 싶어진 거다. 그러니까, 이 상황으로 밀어 넣은 것에 대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것. 그 벌에 대해 쓰면 이 책에 대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스포일러를 말하지 않으려 하다 보니 이야기가 뭔가 애매모호해지는데, 빼앗긴 여자가 빼앗는 여자를 응징한다는 이야기가 , 이 책에서는 속시원하지 않은 거다. 게다가 결말에 이르고 나면, 빼앗은 여자에 대해서 '그러니까 착하게 살지 그랬어'라는 생각보다는, '이야기를 너무 과하게 풀어내버리는군' 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이 얘기까지 가진 않았어도 됐을텐데, 하는 것.



그래서 끝나고나서도 찜찜하다. 어느 순간 분명히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책장을 덮고 나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됐을텐데, 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게다가 말끔히 해결된걸까, 감옥에 평생 갇히는 게 아닌데 모두가 다 괜찮아지는 걸까, 생각하게 되는 거다.



자, 빼앗긴 여자는 사실 나쁜 상황에 처해있었다. 어떻게든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빼앗는 여자가 자기에게 접근했다. 알고보니 자기에게 접근한 그녀는 나쁜 여자였다. 그러므로 자기가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데 이용해도 괜찮았다. 그래서 빼앗기는 여자는 자신의 나쁜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고 그 상황에 빼앗는 여자를 밀어넣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나쁜 여자니까, 그녀가 원했던 것이 어떤 일로 닥쳐올지, 빼앗은 뒤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얘기는 후련할 수 있는 이야긴데, 이 책은 후련하지가 않다.



이 후련하지 않음은, 빼앗으려하고 빼앗기게 되는 것이 '돈과 명예를 모두 가진 육체적 힘도 센 남자'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남자가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그 남자가 힘을 가진 사람이어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왜 힘을 가진 사람은 그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할까.



빼앗는 여자에게 내려진 벌은 너무 가혹했고, 힘이 센 남자에게 내려진 벌은 너무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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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1-29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포일 하지 않으려고 애쓰다보니 리뷰가 망했네... 제기랄......
추리 소설 리뷰는 앞으로 쓰지 않는 걸로....
에잇.....

다락방 2018-01-29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만 이것은 추리 소설인가? 잘 모르겠다. 친구는 로맨스 소설같다고 했다.

다락방 2018-01-29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면 스포일 해도 되지 않나?

다락방 2018-01-29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됐어..이미 등록을 마친 글이니 내버려두자...

비연 2018-01-29 10:1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이걸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는 시점요

다락방 2018-01-29 10:55   좋아요 1 | URL
전 무조건 경험주의라, 읽어보고 판단하는 게 낫다고는 생각하지만, 또 이 책을 굳이 읽어 뭐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리뷰 보니까 재밌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 ˝)

(역시 도움 안되는 댓글 죄송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8-01-29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지 위의 이 4다락방토론회는......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18-01-29 10:55   좋아요 1 | URL
자아분열 일어났다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lavis 2018-01-2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의 실시간 의식의 흐름 대탐구♡흥미로바요

다락방 2018-01-29 17:21   좋아요 1 | URL
실시간 의식의 흐름 대탐구.... 라니. 자아분열을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