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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 반 아이가 연습장에 낙서를 했다가 담임선생님께 걸렸더랬다. 거기에는 학교는 개집이고 담임은 거지라고 적혀있었다. 담임은 아이를 불러내어 나 어제도 고기 먹었다며 내가 왜 거지냐고 하면서 무지막지하게 그 아이를 때렸다. 뺨이며 머리할 것 없이 한참을 때렸는데, 그것은 담임을 거지라고 말한 학생의 잘못을 고치기 위한 것일까? 역시 같은 선생님이었는데, 당시에 남자아이들하고 밤에 놀다가 학교에 알려졌던건지 기억은 희미한데, 담임은 그 아이를 불러내어 머리며 뺨을 수차례 때린 뒤에 흥분에 겨워 어쩌지를 못하고 가위를 가져와 반 아이들 앞에서 그 아이의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냈다. 니가 머리 믿고 이러지? 예쁘니까 나가지? 이런 뉘앙스로 말을 하며 머리카락을 삐뚤빼뚤 잘라버린 거다. 16살 밖에 안된 아이니까 남자아이랑 놀다 잘못될까봐 선생님은 걱정스런 마음에 아이를 때리다 못해 머리를 자른걸까?
고등학교라고 별반 다를 바 없다. 나는 여고에 다녔는데, 수업시간에 존 아이를 불러내서는 작문과 문학을 가르쳤던 선생님이 몽둥이로 그 아이를 미친듯이 팼다. 검도를 하는 쌤이었는데, 그 몽둥이로 머리를 그렇게나 때리더라. 다시는 수업시간에 졸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였을까?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의 매일까? 선생님이 제자를 때린 것이므로, 사랑이라고 받아들여야할까? 정말?
위에 적은 것 말고도 아주 많이 나는 아이들이 선생님께 무지막지하게 맞는 걸 봐왔다. 아마 내 또래는 그런 걸 수시로 보았을 것이며 또 맞아보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이건 사랑의 매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다른 아이들 모두 그러지 않았을까. 그러나 선생이든 부모든 '잘못했으면 맞아야해' 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때리면 아이들이 잘못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었나 보다. 그러나 더 자라고 나서야 나는 그것은 잘 되라는 믿음도 뭣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잘못을 했을 때 어른을 때리지 않고 아이들은 때리는 것. 그것은 상대가 내게 맞설 수 없는 약자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상대적 약자 앞에서 자신의 힘으로 제압하려는 것, 나는 그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하고, 선생님이 아이를 그렇게 때린 것은 그러므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또한, 이 체벌을 금지하는 것은 가정으로도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 《이상한 정상 가족》의 저자 '김희경'은 가정에서 아이에게 훈육이란 이름으로 체벌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금지해야 하고, 그것을 법에도 분명히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전적으로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사랑의 매라는 걸,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허락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을 아동학대와 어떻게 구분 지을 것인가? 두 대 때리면 사랑의 매이고 세 대 때리면 아동학대일까? 멍이 들면 사랑의 매이고 죽으면 학대일까? 어떤 형식으로든 체벌을 허락하고 용인하는 순간, 그것의 범위를 명확히 구분짓기는 힘들어진다. 모호한 경계에서 그 체벌은 학대로 이어진다. 실제로 아이에게 체벌을 하는 부모가 학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부모의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면 "나도 맞고 자랐는데?" 하고 반론을 펴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여기에는 맞고 자랐기 때문에, 즉 부모가 매를 들고 엄하게 가르쳤기 때문에 오늘날 자신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린 우리 부모가 잘못됐다고 공격하는 것인가 하는 불편한 심리도 있을 수 있다. 흔히들 '사랑의 회초리'를 한국 부모의 전통적 교육방식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다른 나라에서도 부모의 체벌을 감싸는 쪽에선 '사랑의 매Cane of Love'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한국 부모들만의 엄하고 눈물겨운 사랑표현이 전혀 아니다. '사랑의 매'라는 표현은 때리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어떤 폭력은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뜻인데, 이는 전적으로 매를 든 사람의 논리다. 맞는 아이들에겐 체벌의 이유가 사랑이든 분노든 다를 게 없다. (p.35)
가정 내 체벌금지를 법에 명시해야 하는 이유는 부모들을 범법자로 만들려는 게 아니라 아이들도 성인들과 똑같은 정도로 모든 종류의 폭력에서 법적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갖고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체벌을 허용하는 사회는 아이들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며 사회구성원의 자격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는 고통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바라본다. 아이도 개별적 인간이고 권리를 지닌 사람이라기보다 부모의 뜻대로 처분 가능한 소유물처럼 바라본다. 이 뿌리 깊은 부정적 태도를 바꾸자는 것이 체벌금지 입법의 취지다. (p.54)
이 책을 읽는 일은 힘겨운 일이다. 굳이 자극적인 묘사가 아니라도 있어왔던 아동학대에 대한 언급이 나올 때면 너무 힘들어서 책장을 넘기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심호흡을 해야한다. 아이를 체벌하는 것을 가정에서도 금지해야 한다고 하는 것에 나는 처음부터 동의했는데,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이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나아가 국가랑은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스웨덴의 사례를 가져오며 잘 보여준다. 스웨덴은 부모의 아이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는 나라인데, 그 후 30년이 지난 지금은 아동학대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선 '가족' 이라는 견고한 울타리에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게끔 배타적은 성격을 띤다. 아내를 폭행할 때도 집안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고 아이를 학대할 때도 아이가 잘못해서 그러는 거라고 해버리면, 심지어 경찰이 출동을 해도 그냥 돌아서게 되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 남자 아빠와 여자 엄마로 구성되고 그 사이의 자녀로 구성된 바로 그 가족을 '정상'이라고 규정지어 버리는 순간, 그렇지 못한채 구성되어진 다른 가족은 자연스레 '비정상'이 되어버리고, 이 가족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눔으로써 비정상에 대한 혐오가 커진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도 미혼모의 아이도 그리고 조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도 모두 다른 아이들의 혐오의 대상이 된다. 너희들은 '정상' 가족이 아니니까.
언젠가 누가 그런건지 기억이 잘 안나는데, 나랑 대화를 하던 사람중에 누군가가, 로또 당첨이 되면 아이들을 위한 곳을 만들고 싶다고 했었다. 갈 곳 없는 아이들, 학대 받는 아이들, 그 어떤 아이들이라도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는 공간.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들어야 할 곳은 그런 곳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에게 나 역시 기꺼이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책장을 덮고 나니 그런 공간을 '따로' 만드는 게 아니라, 세상을 전부 아이들을 위한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어디를 가면 아이에게 좋다'가 아니라, 어디든 걱정없이 그냥 다녀도 될 수 있게 만들어놓는다면 되지 않겠는가. 필리핀에서도 한국에서도 아이를 낳기만 하고 키우는 데는 관심이 없어 버리고 가는 아버지들이 이렇게나 수두룩한데, 나는 너무 이상적인 걸 바라고 있는 것 같아 헛웃음이 난다.
미혼모가 혼자 이고생을 하는 동안 미혼부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박영미 대표에 따르면 파트너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절반가량의 미혼부들이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소식을 감춘다고 한다. 미혼부나 그들의 가족은 자녀에 대한 권리를 미혼모에게 쉽게 떠넘겨버리거나 부모 자녀관계를 부정해버린다. '가족 제도' 주변에 둘러쳐진 금 밖으로 한 발만 나가면 그 강력한 가족주의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출산에 동의한 미혼부조차 출산 후에는 소식을 끊거나 책임을 방기한다. 아무도 미혼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여성들에게 성관게는 임신,출산,육아까지 이어지는 고민을 안겨주지만 많은 경우 남성들에게 성관계는 그저 욕망일 뿐이다. (p.118-119)
보편적 공공보육의 비판자들은 과도한 공공보육이 가족생활을 갉아먹거나 어린이의 정상적 양육을 저해하고 가족 해체로 나아가게 될 거라고 비판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다시피 스웨덴은 보편적 공공보육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자녀와 보내는 시가닝 줄기는커녕 되레 늘었다. 스웨덴의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하루 평균 300분이고, OECD 국가 평균은 47분이다. 한국은? 6분이다. (p.231)
문화 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사랑의 매, 아이들을 때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여성의 성기를 절단하고 꼬매버리는 할례까지. 그것이 그 나라의 '문화'라고 그저 넘길 수 있는 것일까? 어느 한 대상을 고통스럽게 하는데, 그것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용인되어야 하는걸까? 아프고 죽는데, 그것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사랑의 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다 자기네 문화적 전통이라고 말해요. 그걸 문화적 특성, 종교적 가르침이라고 생각 하는 것이야말로 체벌을 옹호하는 가장 끈질긴 논리죠. 스웨덴에서도 그랬어요." (p.204)
국가가 가정의 일에 끼어드는 게 아니라 개인으로 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 그래서 아이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 그것은 약자를 보호함과 동시에 개인을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혼자 사는 게 아니라 가족들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사는 사람들이라, 한 아이를 보호하는 것에서부터 많은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것, 육아에 스트레스 받지 않게 나라에서 지원을 해주는 것, 그리고 스웨덴의 경우처럼, 아이들이 갈 수
있는 어디든 좀 더 안전하게 만드는 것. 이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차분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설득력이 있다. 아이를 존중하지 않는 것부터 얘기를 꺼내도 독박육아와 모성신화와 뿌리깊은 이 사회의 약자혐오가 만난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책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들을 대통령이 읽었다면, 좋군, 하고 생각했다. 사실 대통령보다는
국회의원들이 읽어야 되지 않을까 싶고, 그리고 세상의 많은 부모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물론, 비혼인 사람들, 아이와 상관없는
사람들도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자를 한 개인으로 똑같이 존중하는 것, 그것은 그래야 마땅한 것이니까, 그런
마땅한 것들을 지키고 산다면 엉망진창 세상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궁극적으로 우리는 아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 기본적으로 약자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일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비정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족은 없다. 정상 가족이란 말이 이상한 이유다. 가족은 단지 가족일 뿐이다.
내 혈연이 아니더라도 세대를 이어 인류가 계속 존재하리라는 기대가 사라진다면, 개인의 삶은 유한해도 나보다 더 크고 지속되는 전체에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다면, 그 모든 추구와 삶의 의미도 빛을 잃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미래의 낯선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존재의 의미를 다음 세대에, 아이들에게 빚지고 있다.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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