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전부터 친구들이 내게 일러줬다. [이동진의 빨간책방] 에서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다룬다고. 나는 한 번도 그 방송을 들은적이 없다. 이동진의 팬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싫어한다거나 하는게 아니라, 하루키가 그의 소설에서 수에즈 운하에 대해 말했듯, 아무 관심이 없다), 누군가 일방적으로 책에 대해 하는 얘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승우에 대해서 다룬다고 했을때도 무심히 넘겼는데, 새벽 세시라니, 게다가 건지 아일랜드랑 함께 다룬다니, 한 번 들어볼까, 싶었다. 물론 방송할 때가 되서 내가 기억하게 된다면. 그러니까 꼭 들어야지, 했던건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어제 아침 출근하는데 나의 후버까페로부터 메세지가 왔다. 드디어 올라왔다고. 방송하기 전부터 알려주는 친구가 있고 올라왔다고 알려주는 친구가 있다니, 하하하하, 난 참 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운을 받았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얼마전에는 친구가 김어준의 상담방송에서 정신과 닥터를 불러놓고 강박증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며, 내 생각이 났다고 파일을 첨부해 보냈다. 그때도 잠깐 왈칵, 했었다.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힘들어도 버틸 수 있게끔 주변에서 도와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막상 그 방송을 들었을 때 정신과 닥터의 말은 전혀 내게 도움이 되질 않았고 뭔가 납득이 되지도 않았지만, 친구의 그 마음만은 내게 곱게 남았다. 자, 다시 새벽 세시 빨간책방으로 돌아가서.
오늘 출근길에는 책 읽기를 포기하고 방송을 들었다. 출근길 지하철의 그 집중 잘 되는 시간을 읽기가 아니라 듣기에 사용해버린다니, 자꾸만 아까운 생각이 들어 그냥 책을 읽을까 싶었지만, 아니야 한 번만 듣자, 하고 내내 방송을 들었다. 빨간책방의 김중혁 작가는 새벽 세시를 별로 좋아하질 않았다. 물론 책은 취향이니 누군가는 좋게 보는 책을 누군가는 좋지 않게 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김중혁의 생각에는 별로 동의되질 않았다.
우선 김중혁은 이 책이 서간 소설이라는 틀에 갇혀서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느낌이라고 했다. 본인의 생각에는 절반은 이메일로 다루되, 절반은 풀어서 전했다면 훨씬 좋았을거라고.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만약 이 책이 이메일과 이메일이 아닌 형식을 취했다면 이건 이동진이 말한대로 한낱 흔한 로맨스 소설로 끝맺을 가능성이 크다. 뻔한 로맨스 소설. 나는 이메일 형식을 끝까지 고수한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또 김중혁은 이들의 메일은 그저 연애 이야기 뿐이다, 일을 하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자, 이 부분에서야 말로 그럴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다.
나 역시 이메일로, 문자메세지로, 어느 사이트의 쪽지 등으로 사랑에 빠진 경험이 있다. 그 당시에 그 수단들로 대화를 하는것에 푹 빠져있어서 일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싶었다. 이렇게 여기에 푹 빠져들다가 나는 회사에서 짤리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때로는 그래서 중단하고 싶기도 했다. 내가 여기에 너무 온 신경을 쏟고 있는것 같아서. 그리고 그 수단이 뭐가 됐든(이메일, 문자메세지, 쪽지), 그 수단만으로 사랑에 빠진 상대에게 시시콜콜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해 얘기하지도 않게 될 뿐더러(뭐 이건 개개인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친구에 대한 고민이라든가 세계 평화라든가 지구 온난화라든가 하는 연애 혹은 사랑 이외의 것들에 대해 얘기하지도 않는다. 나는 지금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고, 그 사람의 마음 상태가 궁금하고, 그 사람의 감정이 얼마만큼 내게 기울어져 있는지 궁금한데 대체 어떻게 다른 것들에 대해 얘기한단 말인가. 물론 그런것들로 상대에 대해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을거다. 그가 가진 정치적 소신이 마음에 들어서, 그의 지구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서 그 얘기들을 통해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인지 아닌지 그 상태가 궁금할 때는 다 떠나서 감정을 떠보기에 급급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도 또 읽고나서도 만약 이렇게 상대를 보지도 않은채 글 만으로 사랑에 빠졌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엄청나게 공감하며 잘 읽어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소설 속 이야기들을 모두 경험했기에 공감하는건 아니다. 대부분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고 그래서 대리 만족이나 혹은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메일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수 있지 않을까?
방송중에 이동진이 몇몇 부분을 발췌해서 읽어줬는데, 아, 지하철에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심지어 걸으면서는 소리내서 웃기까지 했다. 혼자서 키득키득 소리내 웃는 여자라니, 어쩐지 살짝 돈 여자 삘이지만, 너무 웃겨서 그만.. 이동진이 언급한 부분은 하하하하 파자마 부분이었다. 파자마 입고자냐고 묻는 에미의 물음에 레오는 금세 답을 보내온다. 에미 너는 벌거벗고 자냐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난 이게 왜이렇게 웃긴지. 이런 얘기를 계속 하다가 김중혁이 침 삼키고 싶다고 하는데 진짜 빵터져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침에도 에로틱할 수 있다니, 아, 세상은 정말 살맛난다. 이게 책 한 권이 가져다준거다. 나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어야한다고 온 마음을 다해 생각한다. 에미는 저런 메일을 보내고 난 다음에 너무 더워서 '뭘 더 벗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 라고도 메일을 보낸다. 이동진과 김중혁은 안경을 벗어야 된다고 그러고 ㅋㅋㅋㅋ 아 쓰면서도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둘 다 에미가 훨씬 매력적인 캐릭터이고 레오는 찌질하다고 하는데, 내 주변인들도 모두 에미가 매력적이라고 말하는데, 맞다, 에미 매력적인데, 난 진짜 레오가 엄청나게 좋다. 두 말하면 잔소리. 엄청나게 좋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책 속에만 존재하는 레오에 대한 사랑을 도무지 멈출수가 없다. 그래서 **랑 섹스한 걸 알았을 때는(스포일러가 될까 이름 감춤) 패닉에 빠져가지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는 에미의 도플갱어가 되어 강동구 천호동에서 분노하고 속상해하고 열받고 짜증나고 잠이 다 안왔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김중혁은 이 책을 읽고 역시 사랑은 말로 시작된다고 했는데, 그러고보니 그렇다. 그렇게 반응했기 때문에, 그런 말투로 그런 억양으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나는 상대와 사랑에 빠지는 것 같다. 나는 아직까지도 어떤 남자들에 대해서는 나에게 말을 거는 말투 때문에 한없이 호감을 품기도 한다. 멜랑콜리한 감정도 그 말로 인해 생긴다. 이 사람을 좋아하길 잘했어, 도 말 때문에 비롯된다. 그러고보니 얼마전에는 며칠 연락이 뜸했던 누군가가 '안부좀' 이라며 메세지를 보내왔을 때, 입이 찢어질 만큼 웃었던 기억이 난다. 만약 그때의 내 표정을 누군가가 봤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 문자냐고 물었을 것이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는 소설일 때 가장 빛나는 작품이다. 그 책을 읽는 독자도 에미나 레오의 상태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그들의 겉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레오가 되어 혹은 에미가 되어 상대를 상상한다. 그러나 이게 영화일 경우에는 다르다. 영화일 경우에는 우리는 레오의 모습을 또 에미의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이야기는 다른식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도 마찬가지. 책으로 접한 독자는 그 마지막 이메일을 읽고나서 책장을 덮으면서 네, 바람이 불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어진다. 그 완벽한 결말은 책으로야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라면 그 서늘함을 전할 때 분명 그런식으로는 성공하지 못할것이다. 에미와 레오의 이야기를 전하는 가장 완벽한 수단은 그래서, 소설, 책일 수밖에 없다.
아직 방송을 다 듣지는 못했는데, 김중혁 작가는 이 책에 대해서는 꽤 만족해했다. 그러면서 돼지고기 먹는 부분에 대한 언급을 했는데, 아....기억이 안나...뭐지 뭐지? 내가 가진 책은 이 개정판이 아니라 구판이고 제목도 다르다. 내가 가진 책의 제목은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 파이 클럽』이다. 난 김중혁의 돼지고기 언급에 그만 집에 돌아가 이 책을 들춰보고 싶었다. 왜 기억나지 않는거야. 흑흑 ㅠㅠ
이 책은 이동진과 김중혁이 말한 그대로 문학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진 작가가 문학에 대한 애정을 가진 캐릭터들을 등장시킨 멋진 소설이다. 둘 중 누가 말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독자가 쓸 수 있는 최고의 소설' 이라고 했는데, 나 역시 거기에 공감한다.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아, 얼른 보고 싶다.
이 책과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를 보고 '찰스 램' 수필선을 사서 읽었다. 그런데 최근에 『굴뚝 청소부 예찬』이라는 에세이가 새로 나와서 사두었다. 얼마전에 읽으려고 하는데 잘 안읽히는거다. 그래서 에이, 다른 책 읽자, 하고 중고샵에 팔아야지 싶어 등록하려했더니 매입가가 고작 1,000원 이거다. 속상했다. 아니, 이 책을 어떻게 천 원에 판단 말인가. 말도 안돼. 내가 가지고 있겠어! 하고 책장에 다시 꽂아두었는데, 오늘 빨간책방을 들으며 팔지 않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역시 책과 내가 만나는 건 운명이로구나.
오늘 방송에서 들은 찰스램 에피소드 중에 이런게 있었다. 찰스램가 찰스 디킨스가 공통점이 많다. 그들은 글을 잘썼고 글을 써서 성공했다. 물론 찰스 디킨스가 더 크게 성공하긴 했지만, 찰스램은 성공한 뒤에도 삶의 태도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찰스 디킨스는 달라졌다고, 사람들을 차별했다고 했다. 흐음, 디킨스가? 어쨌든 찰스램의 수필을 다시 시도해야겠다.
아, 그런데 내가 사실 이 얘기를 하려고 했던게 아닌데...내가 얘기하고 싶었던건 이 책에 대한거였다.
좀 오래전에 뉴스에서 충격적인 영상을 봤다. 아마도 호주였던것 같은데, 술에 취한 청년이 캥거루와 권투를 하는거였다. 말이 권투를 '하는'거지, 캥거루는 일방적으로 맞고 있었다. 그리고 청년의 친구는 이 광경을 동영상으로 찍어 올렸다. 낄낄대고 웃는 그들을 보며 나는 엄청 충격을 받았더랬다. 어떻게 상대가 안되는 약자를 앞에 두고 폭력을 휘두를 생각을 했을까, 그러면서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했던것. 술에 취했다는 것이 그에 대한 면죄부가 될까?
이 책에서도 열여섯살 청소년(밖에서 보기엔 어른이랄수 있고 부모가 보기엔 아이일 수 밖에 없는)이 살인을 한다. 두 명의 청소년이 살인을 하고 그래서 그 두 청소년의 부모가 만나 식사를 하기로 하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이 일을 어떻게 풀어갈것인가.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는 그 청소년이 저지른 건 분명 살인이고 잘못이니 그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고의에서 온 것이니만큼 그 아이에게 어떤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건 아닌지도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부모는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한다. 이 아이들을 위기에서 구해내야 한다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정상적으로 성장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 두 아이의 부모, 즉 아빠 둘 엄마 둘이 만나 식사를 하는데 한 아빠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놀랐다. 이제부터 혼란이 찾아온다. 아 뭐지. 내가 타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건가? 왜 당연한게 이들에게 당연하지 않은거지? 막상 나한테 닥친 일이라면 모든게 달라지는걸까? 영화 『아무르』에서 죽어가는 여자가 말했던것처럼, 생각과 현실은 다른걸까?
그중 한 아이의 아버지는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 폭력적인 성향을 참지 못한다. 아이 앞에서도 아이의 편이 되어 아이의 잘못을 지적하는 상대에게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른다. 이 질환은 유전될 수 있다고 나오는데, 그렇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으로 커가는지는 유전적인 영향이 큰걸까. 그렇지만 덱스터의 경우에는 환경적인 것도 컸는데. 같은 장면을 목격한 쌍둥이 형과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됐는데.
『디너』는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힌다. 무엇보다 놀랐던 건 그 인물들 각자의 숨겨진 면이었다. 겉으로 보이는걸로 그 사람은 이렇다, 라고 판단하게 됐는데, 웬걸,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아,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되는구나 싶어졌다. 우리는 한 사람을 '안다'고 말할 때 정말 '제대로' 아는건 아닐것이다. 내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모르는 면들이 속속 발견되서 놀라기 일쑤인데, 타인에 대해서는 오죽할까.
아 씨..페이퍼가 길어졌는데, 마지막으로 반값 도서에 대해서 언급하고. 아, 글쎄, 오늘 알았는데 이렇게 좋은 책들이 겨우 반값이다. ㅠㅠ
아직 건지 아일랜드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말것을 얘기하고 싶고(소이진님, 참고하삼!!), 필립 클로델의 저 책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동안 필립 클로델의 책을 읽고 실망한 적이 없어서 얼른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했다. 아 젠장 맨날 결제해. 필립 클로델의 국내 번역된 소설중 내가 딱 저 책만 읽지 않았는데, 어쩜 반값일 수가 ㅠㅠ 좋다는 기분보다는 서운함이 앞선다.
어제는 업무로 인해 엄청 지쳤었다. 오후 다섯시쯤에는 너무 힘들어서 아, 힘들다, 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알라딘 박스를 뜯지도 않고 발치에 처박아두었다. 그런데 오늘 또 한박스를 결제했다. 이러면 안된다는걸 알았는데, 이번해에는 이제 그만좀 사자고(읭?) 결심했는데, 현금이 아니라 신용으로 사는거니 이 짓을 좀 그만하자고도 생각했는데, 자꾸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딱 한 번만 더
하는 생각이 나를 짓눌러서....또 결제해버리고 말았다. 이거 중독인가, 쉬바, 이렇게도 중얼거렸다.
새벽 세시 때문에 웃으면서 강남역 계단을 올라왔을 때, 눈이 내리고 있었다.
(페이퍼가 너무 길어 미안합니다. 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