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여행의 흔적
통로 건너편의 남자는 킬리가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감지했지만 용기 있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사실, 그는 자신보다 조금 늦게 자리를 잡은 그 여자의 모든점이 몹시 마음에 들었던 터였다. 그녀에게는 감탄할 만한 점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중략)
그 순간 비행기가 난기류에 들어가게 되어 기체가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졌다. 비행기를 많이 타본 사람이라면 전혀 당황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통로 건너편의 여성은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커다랗게 뜬 그녀의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무의식적인 명령에 복종하고 말았다. 곧장 통로를 건너 그녀 옆자리로 가서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싼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난기류와 만난 것뿐입니다.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pp.10-12)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노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난기류를 만나게 된다. 누구나 다 난기류를 만나지만, 누구나 다 난기류를 만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안심하라며 손을 잡아주는 근사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건 아니다. 그건, 말그대로, 소설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로맨스' 소설이니까.
나는 비행기 타는것을 몹시 좋아한다. 버스보다 비행기가 덜 무섭다. 그렇지만 이런 나라도 난기류 앞에서는 속수무책. 나의 무력함을 실감한다.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난기류를 만나 휘청이게되면, 아, 나란 인간은 도무지 아무런 해결책을 찾아낼 수가 없는것이다. 뭐야, 무서워서 이제 그만탈래, 내려줘! 라고 말할 수 있는것도 아니고 바로 다음정류장에서 내려야지, 하는 결심을 하게 될 수 있는것도 아니다. 그저 그 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 그게 전부다.
비행기안에서 난기류를 만나 의자의 손잡이를 꼭 쥐면서 이 책의 이 부분이 생각났다. 난기류를 만나 무서워하는 킬리, 그녀의 손을 쥐어주기 위해 거침없이 그녀에게로 오는 남자 닥스. 나는 의자의 손잡이를 꼭 쥐어도, 으악, 하고 작게 비명을 질러도, 그래도 그 누구의 위로를 받을 수가 없다. 나는 소설속의 여자주인공이 아니니까.
뭐, 괜찮다. 난기류는 지나갔으니까. 그리고 나는 프란세시냐를 먹었으니까.
고기는 맛있었고 베이컨은 짰다. 햄도 들어가있는데 빌어먹을 치즈도 열나 많이 들어가있어서 전체적으로 짰다. 프란세시냐를 먹는 순간보다, 이제 곧 프란세시냐를 먹을거라는 기대가 나를 들뜨게 만들었고, 레스토랑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내 앞에 프란세시냐가 담긴 접시가 놓여지는 순간, 나이프를 들고 자르기 직전, 흥분을 이기지 못해 와인을 한 모금 삼킨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이 행복의 절정이었다.
늘 그랬다. 갖고 싶은 욕망이 간절해지고, 그것을 곧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예감은 절정의 쾌락을 가져다주지만, 막상 가지고 나서는 시들해져버리고 만다. 프란세시냐가 시들해져버린 건 아니지만,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한 번 더 먹을거라는 다짐은 그 짠맛에 묻히고 말았다. 그토록 먹고 싶었던 걸 먹었으니,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것이다. 버티는데까지 버텨보다가 나는, 포르투갈로 날아가서 진짜를 먹어볼테다.
맥주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이 여름을 맥주가 아니라면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요즘에는 맥주를 마시지 않고 잠드는 날이 단 하루도 없을지경이다. 그건 여기가 아닌 곳에서도 마찬가지. 홍콩에 있는 남자사람을 마카오에서 만나서 맥주를 마셨다. 뭔가 대단히 멋있고 보람된 일이다. 처음 보는 사람을 처음 가는 장소에서 만나다니. 그런 일을 내가 하다니. 훗. 멋져.. 한국과 홍콩에 있던 사람들이 마카오의 호텔 로비에서 만나다니. 아우.. 나는 소설속의 여자주인공은 결코 될 수 없지만, 뭔가 참..영화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움화화핫.
여행도 끝났고 휴가도 끝났다. 여행과 휴가가 끝났다는 것을 오늘 아침 출근길 버스안에서 느꼈다. 아, 이 버스를 또 타는구나, 그리고 다 끝났구나. 다시 일상이구나.
일을 때려치던가 해야지,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