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이 책을 시작했는데 하아- 책장 참 안넘어간다. 그건 내가 컨디션이 안좋아서 책에 집중을 못하는 까닭도 있지만,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래도 오랜 세월에 걸쳐 그들의 이야기가 진행되니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성숙한 그들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미국과 영국의 베스트셀러라는데 넘기다보면 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꾸역꾸역 읽고 있다가, 7분의 1쯤 읽은 현재상태로 그냥 침대 위에 던져두고 오늘은 다른 책을 집어들고 나왔다. 책이 무거운데 들고 다니기도 귀찮고 그런걸 감당할만큼 재미도 없어..넌 나중에 내가 집에 가면 읽든가 하마. 어제도 읽으려고 했는데 두장 읽고나니까 또 읽기 싫어져서... 여튼 너 포기 안하고 읽어볼테니 재미를 좀 주렴.
컨디션도 메롱에다가 무거운 거 들기도 싫고 그래서 꺼내가지고 나온 책은 이것.
출근하는 버스와 지하철안에서 책장을 넘기며 시를 읽는데..이것도 재미가........역시 나는 시를 잘 못읽는구나. 그래도 이 시는 좀 괜찮다.
술 한잔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하는 구절이 참 좋은데 그 좋다는 느낌이 막연하다.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랄까. 은유적인 표현인것 같은데 나는 더 깊게 생각할 수가 없다. 시를 이해하는 능력의 부재랄까. 그리고 제목이 반가웠던 이런 시.
강변역에서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산에서
저녁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너의 운명이 더 슬픈 까닭은 너의 운명에 내가 함께하지 못함을 알기 때문일까. 그리고 이 시집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시는 이것이다.
새벽편지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이건 시 내용 자체에는 내가 크게 공감하지 못하지만 제목이 근사해서-무려 새벽편지!- 좋았던 시인데, 이 시집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친구로부터 선물받았던 바, 그 친구는 이 시집의 어디가 좋았을까, 어떤 시가 좋았을까 읽으면서 갸웃갸웃 해보았지만 좀처럼 알아낼 수는 없었다. 일전에 다른 친구로부터도 정호승의 시집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를 선물 받았던 적이 있다. 시들이 기억나지 않아 지금 읽은 시집의 시들과 겹치는 시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때도 그 시집 역시 나한테 와서 닿지 못했다. 서로 다른 두 친구가 정호승의 시집을 좋다고 말하면, 정호승의 시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것 같은데, 그런데 내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뭐, 할수없지.
일전에 송혜교의 전화번호가 필요하다던 남자에게 내 전화번호를 준 적이 있었는데(응?), 얼마전에 그 남자를 만나 대화를 하던도중 그는 내게 내 조카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는 내 조카의 이름을 가장 먼저 알았고, 태어난지 얼마 안된 사진을 나로부터 받기도 했던 남자였는데, 내가 휴대폰에서 조카의 사진을 터치하여 그에게 내밀자 그는 내 조카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예쁘다고 했다.
조카의 사진을 보며 예뻐요, 라고 말하는 걸 듣는데 심장이 막 따뜻해지고 말랑말랑해지고 또 가슴속이 꽉 차오르면서, 나는 마치 사랑손님에게 옥희를 빗질하여 보내던 옥희엄마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몰랑몰랑 몽글몽글해지는 그런 기분. 옥희를 빗질시키고 예쁜 옷을 입히고 그리고 그렇게 사랑손님에게 보내어 인사시켜야지 하는 옥희엄마가 된 기분이랄까. 그렇게 뭔가 아련하고 애틋한 상념에 잠겨있는데, 그는 내 핸드폰 사진첩의 사진을 하나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응? 내 사진첩에 어떤 사진들이 있었더라? 보여줘도 상관없던가? 일단 나는 이제는 누드사진 찍는 취미는 없고, 셀카를 찍지도 않고, 인물사진은 찍는 족족 지워버리니 크게 상관 없겠군, 하며 내버려두었다. 옆에서 어떤 사진들이 있나 같이 보다가 뭔가 놀랄만한 사진이 나오면 핸드폰을 뺏어버리면 되니까. 그런데 아뿔싸. 이런 젠장. 그는 한 사진 앞에서 이건 뭐에요? 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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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 ㅠㅠ 내가 이거 왜 안지웠지? ㅠㅠ 얼마전에 지울건 다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또 시켜먹을라고 안지웠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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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족발시켜먹으려구요" 라고 대답했다. 하아-
나는 내가 주고 싶었던 이미지가 있었다. 도도하고 세련되고 차갑고 냉정하고 지적이고 ... 블라블라~ 그런데 갑자기 족발사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하아- 옥희엄마 됐던 기분이 순식간에 박살나고 말았다. 이게 왜 거기있어가지고 ㅠㅠ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표지를 찍어둘걸.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 표지 같은게 있었으면 좀 좋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라든가. 하다못해 시집 표지라도 찍어둘걸. 왜 거기에 하필 족발보쌈세트가 있었을까. 시켜먹었으면 지울걸 ㅠㅠ
안녕, 사랑손님. 그리고 안녕, 옥희엄마. 모두 굿-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