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아주아주 작은 기업의 사장이었다. 사장도 직원도 오로지 나 하나뿐인. 그런데 이제 조금씩 이익을 내고 있고 그래서 다른 직원을 뽑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남자에게로 갔다. 우리는 아주 작은 방에 함께 있었다. 나는 그 남자에게 나와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근무 조건은 아직 열악하고 내가 줄 수 있는 연봉은 고작 이천만원을 조금 넘길뿐이지만 나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그런데 그가 고민해볼 겨를도 없이, 그 작은 방의 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고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낯선 남자는 꽤 위엄이 있어 보였고, 입고 있는 옷에서는 그의 권위가 드러나고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그는 가진게 정말 많아 보였다. 그는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은채로 그 남자에게 다가가 자신과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니가 유능하다는 걸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다고. 하! 나는 참으로 기가 막혔다. 뭐지, 이건. 어디서 이런 개뼉다구 같은게 갑자기 들이닥친거야? 그는 그에게 제안했다. 근무 시간은 그 남자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줄 수 있다고 했고 억대 연봉을 제안했다. 뭐라고? 억대연봉? 그리고 그는 그남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로또에 당첨된 것 같은 삶을 주겠네.
하아- 이건 이길 수 없잖아. 억대연봉 이라니. 로또에 당첨된 것 같은 삶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가 나와 함께 일하기를 원치는 않겠지. 나는 당연히 포기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은근히 기대했다. 어쩌면, 억대 연봉보다는 나와 함께 일하는 것에 더 관심을 보일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사이에는 신뢰라는게 있잖아? 그러나 그 남자는 천명중에 구백구십구명이 선택할만한 걸 선택했다. 억대연봉, 로또에 당첨된 것 같은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남자는 뭔가 가진게 많아 보이는 낯선 남자를 따라 그 작은 방에서 나갔고, 방문은 닫혔고, 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의 상실, 좌절, 절망, 비참함 기타등등의 지저분하고 너저분한 감정을 추스리기 위해서 혼자 되뇌었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 나라도. 억대 연봉을 선택할 수 밖에 없지. 세상에 어느 누가 로또에 당첨된 것 같은 삶을 마다하겠어. 그건 거절하는게 이상한거지. 거절하는게 또라이라고. 천명중에 구백구십구명은 그 선택을 할거야. 당연한거야. 이건 내가 못나서가 아니야. 다만, 나는 너무 가진게 많은 사람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뿐이지. 난 그 낯선남자보다 돈을 더 주지도 못하고 더 좋은 근무환경을 제공하지도 못해. 심지어 명예도 권력도 줄 수가 없지. 내가 줄 수 있는것 그저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 뿐인데, 그건 전혀 메리트가 없잖아. 어느 누가 그런 미친선택을 하겠어. 그는 당연한 선택을 했어.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한거야.
그리고 알람이 울렸다. 늘 생각해왔지만, 세상의 모든 알람은 제 때에 울리는 법을 모른다.
낯선 남자가 그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혹은 그 제안을 하기 전에, 혹은 낯선 남자의 말을 듣고 따라 나가기 전에, 혹은 방문이 닫히기 전에 울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스투피드 알람. 그래, 책임은 모두 알람에게 돌리자. 알람, 너 때문이야. 너가 모든걸 망쳤어. 니가 제때에 울지 않았기 때문이야.
매 장마다, 다음장을 넘기면 울어버리겠지 싶었던 책을 읽었다. 물론, 그러나 한번도 울지는 않았다. 이 책에서도 복권 얘기가 나왔다. 이렇게.
조지 오빠가 내 이름을 부를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들뜨는지. 마치 복권 추첨에서 내 번호가 호명 되는 기분이었다. (p.55)
이 책에서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 로즈, 그 아이는 자신의 오빠 친구인 조지를 좋아한다. 조지 오빠. 조지 오빠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한사람이다. 너무나 특별하고 너무나 간절히 원하는 사람. 그러나 너무 특별하기 때문에 차마 더 가지고 싶다고 말을 할 수는 없는. 남들에게 보이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그러나 그것이 바라는 것의 전부일 수 밖에 없는. 내가 만약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혹은 마법사라면, 로즈 앞으로 나있는 모든길을 건널목으로 만들어줬을 거다. 기꺼이 그렇게 했을거야.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그때까지도 건널목에서 꼭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건넜다고 했다. (중략)오크우드 애비뉴에서 모퉁이를 돌면서 나는 충동적으로 조지 오빠의 손을 잡아 버렸다. 곧바로, 내 손을 꽉 잡는, 손가락들. 태양. 진분홍 무더기를 이루며 창문 위로 드리워진 더욱 탐스러운 부겐빌레아 넝쿨. 그의 따뜻한 손바닥. 인도에 웅크리고 앉은 오렌지색 줄무늬고양이. 낡은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활짝 열리는, 도시.
우리는 인도에 도착했고, 손을 놓았다. 얼마나 바랐던가, 바로 그때,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p.88)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아, 젠장. 시간은 자꾸 흐르고 로즈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것과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깨달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고, 조지 오빠는 로즈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또 조지 오빠의 삶을 살고 있다. 이 둘은 로즈의 오빠 '조지프'와 연결되는데, 조지프 때문에 만난 어느 오후, 둘 다 슬픔에 잠겨 있던 그 날 오후, 그들은 그 둘만으로 주변의 공기를 바꾼다. 공기가, 바뀐다.
그리고 그는, 더 가까이로도 더 멀리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 가벼운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와 꼭 필요한 거리만큼만 우리를 떠민 것 같았다. 그러자 팔꿈치들이, 어깨들이 닿았고, 그의 팔이 나를 감쌌으며, 내 이마가 그의 볼에 닿았다. 겁에 질린 십대였던 나. 그리고 우리는 키스했다. 걱정 혹은 동정이 섞인 고약한 키스. 그러나 조지 오빠였기 때문에, 내 기억이 허락하는 때부터 원해왔던 조지 오빠와의 키스였기 때문에, 아름다웠다. 너무 부드러운, 그저 입술과 입술을 맞댄 가벼운 입맞춤. 그의 입술은 햇살과 열중, 그리고 일렁이는 어른스러움의 맛이 났다. (p.292)
아. 햇살과 열중, 일렁이는 어른스러움.
우리가 함께 방을 바꿔놓은 것 같았다. 무無를 담고 있던 이 방은 이제 서로를 오래도록 알아온 둘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위로였고 초대였다. 그리고 이 모두에는 지독한 달콤함이 묻어 있었다. 깨어나는 내 얼굴의 감각 안에, 그의 손가락들 안에, 어깨와 얼굴과 등을 쓰다듬고 붙잡는 손길 안에, 그리고 이미 멀리로 뻗어가기 시작한 그 길들 안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p.292)
이미 멀리로 뻗어가기 시작한 그 길들.
나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고 그는 나를 꽉 껴안았으며, 그것을 기점으로 우리는 샛길로 내달렸다. 우리를 더 아래로 끌어당기는 중력. 그러나 그때 둘다 멈추기 시작했고, 모든것을 늦추었다. 서로 얼굴을 떼었다. 천천히, 더 천천히 입을 맞췄다. 멈춤. 마무리. 마침표. 나는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이 순간을 잊지 마, 속으로 말했다. (pp.292-293)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 감정들을 어떻게 내가 다 견뎌냈을까. 그것도 내 인생의 이 시점에서. 조지 오빠의 약혼 소식을 듣고, 청첩장을 받는데, 내가 대체 어떻게 울지 않고 이 책을 읽었을까? 기적이구나. 기적은 그러나 늘 내가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일어나는구나.
이 책을 읽으면서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였다. 『호밀밭의 파수꾼』(이건 좋아서),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이건 웃겨서) 다음으로 많이 붙인것 같다. 세어보지 않았으니 뭐, 사실이 아닐수도 있지만.
엊그제 백화점에 가서 목걸이를 샀다. 매장 직원은 나를 보더니 저희 제품 매니아신가 봐요, 적립카드는 만드셨어요? 라고 묻는다. 아니오, 저 여기서 산거 엄청 많은데. 그러자 직원은 이번해부터 생긴거라며 적립해주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난번에 산것도 적립해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묻는다. 반지는 언제 사신거에요? 아 기억이 잘... 이라고 나는 얼버무렸지만, 사실은 너무나 또렷이 기억난다. 작년 크리스마스 였으니까. 올해 사신거죠? 라고 묻는데 나는 네, 아마도 그럴거에요, 라고 답했다. 무슨 소리. 나는 포인트를 적립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요즘엔 장미꽃이 아주 예쁘다. 아파트 단지에 피어있는 장미꽃을 볼때마다 나는 장미가 원래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었나 싶을정도로 감탄한다. 특히나 밤에 피어있는 장미는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하는 것 같다. 멈추어서서 사진을 찍어보려고 했는데, 밤의 장미는 내가 눈으로 보는것 처럼 예쁘게 찍히질 않는다. 장미가 괜히 장미가 아니구나.
나는 다음생에는 장미꽃으로 태어나고 싶다.
>> 접힌 부분 펼치기 >>
(임지규, 이렇게 써놓으면 임지규가 구글창에 자기 이름 넣었을 때 이 글이 검색되고, 나를 알게 되겠지? 검색해봐라, 검색해봐라, 나 알아라, 알아라.) |
<< 펼친 부분 접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