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짓말을 하고있다.
나는 어린 여자아이가 자기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자전거를 빼앗기는 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손으로 챙을 만들어 눈을 반쯤 가려 두었는데 벤자민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서,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앞을 보고소 얘기를 했는데, 이런 말을 했다. 모나 그레이, 당신을 보면, 내 심장이 왠지 모르게 부풀어요. 연쇄살인범은 흰색 밧줄로 여자를 결박했다. 나는 굉장히 큰 목소리로, 뭐라고요? 라고 말했는데, 내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우리 자리에서 세 열 뒤쪽에, 혼자 앉아 초콜릿 박하사탕을 먹던 여자가 쉬이 하고 말했고, 잔뜩 긴장을 하고 있던 나는 그 때문에 다시 웃었다. 이제 그가 나를 바주보고서, 했던 말을 다시 해야 하는지, 내 표정을 살폈고, 나는 그가 그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공기가 변했다. 이제 공기는 다른 모습으로, 뭉쳐졌다-연기 같아, 곧 알아볼 수 있었다. (pp.196-197)
작년 여름, 내가 아주 힘들었을 적에 '에이미 벤더'의 『레몬케이크의 특별한 슬픔』을 읽고 폭풍 공감을 했었다. 그때 그 상황에 그 책을 만났기 때문에 나는 위로받았고, 그랬기 때문에 그 책에 별 다섯을 줬던걸지도 모른다. 책을 만나는 것도 타이밍이 중요하니까. 얼마전에 문득, 에이미 벤더의 다른 책은 없을까, 하고 검색해보다가 이 책, 『보이지 않는 사인』을 알게됐고, 망설임없이 읽었다. 읽으면서 나는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슬픈 감정이 들어있을까. 이런건 어떻게 하는걸까? 그러면서 작가가 궁금해졌다. 이 작가는 자신이 우울해서 이런 글을 쓰는걸까, 아니면 우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걸까.
고작 두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에이미 벤더는 '공기'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알겠다. 레몬케이크에서도 그녀는 조지오빠와 나 사이에 달라진 공기를 느끼지 않았던가. 이 책에서도 벤자민과 모나 사이에 공기는 벤자민의 고백을 기점으로 달라진다. 입밖으로 내는 순간 모든것들은 확실해지고 확연해진다. 당신을 보면 내 심장이 부풀어요, 라고 말하고나면 그 감정은 더욱 진해지는데, 나를 보면 심장이 부풀어오른다고 말해주는 남자와 한 공간에 있다는 걸 알게되면, 그러니까, 이 남자는 나 때문에 심장이 부풀어, 하는걸 인식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의 공기는 그 전까지의 공기와는 전혀, 같을수가 없다. 에이미 벤더는 그걸 알고, 그걸 말해준다.
그의 허벅다리. 그의 척추 위로 흐르는 물결. 얇은 종이 같은 그의 눈꺼풀. 그의 머리칼에서 나는 머리칼 냄새. 말도 안 되게 이럴 순 없을 만큼 얼이 빠질 정도로 미치도록 완벽하게 군살이라곤 없이 좋은 몸. (p.316)
제기랄. 욕이 튀어나올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말도 안 되게 이럴 순 없을 만큼 얼이 빠질 정도로 미치도록 완벽하게 군살이라곤 없이 좋은 몸'을 가진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그건 어떻게 가능한걸까? 오래전에 브래드 피트의 파파라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뒷모습이었는데, 나는 그의 등에 홀랑 반해버렸었다. 저렇게 멋진 등을 가진 남자를 만나고 싶다면, 저 등을 쓰다듬고 싶다면, 그렇다면 여자도 저런 등을 가져야 하는거겠지? 그래서 그는 안젤리나 졸리를 만나는 거겠지? 그런 생각으로 쓰디쓴 침을 삼키며 그렇다면 나도 예쁜 등을 가진 여자가 되는거야! 라고 결심했었는데, 그 결심은, 그 결심의 순간만 반짝 했던것. 나는 여전히 내 등의 소유자다. 말도 안 되게 이럴 순 없을 만큼 얼이 빠질 정도로 미치도록 완벽하게 군살이라곤 없이 좋은 몸과 나란히 누워서, 그러다가 결국은 서로를 향해 돌아누워서 눈을 보고 얘기하고 싶다. 결코 말도 안 되게 이럴 순 없을 만큼 얼이 빠질 정도로 미치도록 완벽하게 군살이라곤 없이 좋은 몸을 어루만지고 싶어서 그러는게 아니라, 그냥 얌전히 누워있고 싶다는 거다. 진짜다.
기대만큼 재미있지도 않았고 엉성했던 영화 『제이니 존스』에서 내가 유일하게 건질만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장면은 거의 앞부분에 나온다. 열세 살의 제이니 존스를 길에 버려두고 엄마는 도망가버린다. 제이니 존스는 911에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경찰이 제이니 존스의 아빠를 만나 이러이러한 상황인데 위탁가정에 맡기는 것보다는 니가 맡는것이 더 좋을거란 말을 한다. 그가 제이니의 아빠를 상대로 하는 말들을 듣고 있노라니 경찰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싶었는데, 제이니 존스를 대하는 걸 보니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멋있다. 저기 너의 아빠가 너와 얘기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자 제이니 존스는 (아빠를 만나 얘기하는 것을)못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경찰차에 나란히 타고 있던 그 경찰은 제이니 존스에게 니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조곤조곤 제이니 존스에게 그러나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 더 좋다고 얘기해준다. 그러면서 내가 여기 있을거고, 혹시라도 얘기하던 중에 그만 얘기하고 싶어지면 자기에게 오라고 말한다.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나를 부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아. 그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따뜻해서, 그는 경찰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렇게 대해야 했겠지만, 그래도 그 태도가 무척 다정해서, 나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중 그 경찰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는 앞에만 잠깐 나오는 슈퍼조연이지만, 와, 엄청 좋아, 당신같은 경찰만 이 세상에 가득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너가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무슨일이 생기면 나를 부르렴, 해주는 경찰이라니. 아! 진짜 짱 멋진거다!! ㅜㅜ
몇 년전까지의 나는 아기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간혹 말그대로 '예쁘게 생긴' 아기들을 보면 예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기들을 좋아하는 사람의 부류에 속하진 않았다. 내게 아기들을 좋아하는 '아기 없는' 사람들은, 뭐랄까, 천국같은 마음을 가진, 나와는 뇌의 구성이 다른 부류에 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빽빽 소리지르고 울기나 하는 아기들을 대체 무슨수로 좋아한단 말인가, 하고. 아기는 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 무엇 하나도 단정지을수 없다. 조카가 태어난 뒤의 나는 확실히 그 전의 나와는 달라졌다. 이제는 지하철안이나 버스안에서 그리고 길에서도 우연히 아기들을 마주치게 되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고 말을 걸고 싶어진다. 손을 잡아보고 싶고 안녕? 하고 인사하고 싶기도 하다. 지난달이었나, 친구 중 한 명이 아기들이 정말 싫다고 말을 하는데 나는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애틋해졌다. 달라질텐데. 한 아기의 탄생부터 그 아기가 고개를 가누고 뒤집는 걸 보게된다면, 그 아기가 혼자 앉을수 있게되고 설 수도 있게 되면서 사이사이 아프기도 한 걸 보게된다면, 그 아기가 방싯 웃고 내 손을 잡고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걸 보게된다면, 그 아이가 이제는 말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의사표현 하는걸 듣게 된다면, 그러니까 한 아기의 성장 과정을 바로 옆에서 계속 보게 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에 대해서 마냥 사랑이 샘솟게 될텐데. 그렇지만 친구에게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 말을 듣기만 했다. 어쩌면 이런 감정은 모두 '(조카를)가진 자'의 여유에서 나오는 걸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어쩌면 그 과정들을 지켜보게된다 한들, 모두 그렇게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되지는 않을지도 모르니까.
위의 그림책, 『꼭 잡아주세요, 아빠!』는 자전거를 배우는 한 소녀의 이야기다. 자전거를 타고 싶지만 언덕에 오르는 것이, 차들이 지나다니는 길로 가는것이 무섭기만한 소녀가 아빠에게 자전거 배우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아빠에게 손을 놓아도 된다고 말하게 되면서 소녀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녀에게 자전거타기는 결코 무서운게 아니라는걸 알려주려던 아빠는, 그러나, 소녀가 혼자 자전거를 탈 수 있게되자, 너의 자전거를 붙잡았던 손을 놓는것은 끔찍이 힘들더구나, 하는 고백을 한다. 그 장면에서 울컥, 해버렸다. 어쩌면 가장 힘든건, 내가 사랑하는 아이가 혼자 설 수 있도록 내 손을 놓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나도 들었으니까.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자꾸만 구속하고 참견하고 옆에 있기 위한 핑계를 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혼자서 학교에 가고 혼자서 여행을 가고 하는것들을 나는 이자리에 선 채 보고있을 수 있을까. 아, 나는 그걸 내가 잘해내지 못할 것 같다. 내 조카는 내 여동생의 몫이니 여동생이 감당해야겠지만, 나는 그 모녀가 어떤 삶을 살지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이 내것이 될 경우, 내가 지혜롭고 현명한, 그리고 겁먹지 않는 보호자가 될 수 있을까, 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자신이 없다.
아우.. 말도 안 되게 이럴 순 없을 만큼 얼이 빠질 정도로 미치도록 완벽하게 군살이라곤 없이 좋은 몸이 되기 위해 어제 뽈록뽈록한 훌라후프를 조금 돌렸더니 지금 너무 아프다. 다 멍들어버린 것 같아.. ㅠㅠ 스텝퍼는 썩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