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토요일 오후였다. 아니 나른할 수 있었던 토요일 오후였다. 그런데 오후에 갑자기 그가 쳐들어왔다. 느즈막히 일어나 적당히 밥을 먹고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막 양치와 세수를 끝낸 참이었다. 세수 후에 왔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도대체 그는 갑자기 왜 온걸까.
「뭐야, 갑자기.」
「너 피곤해서 쉰다고 했던건 알고, 나도 쉰다고 했고, 그러니까 우리 그냥 같이 쉬자고. 너네 집에서.」
아 정말 싫다. 이번 한주는 정말 고되었고, 그래서 나는 드라이브 가자는 그의 제안에 노,라고 말했었다. 이번 주말은 푹 쉬고 싶다고. 그런데 이렇게 집으로 쳐들어오다니, 달가울리가 없다. 억지로 조금이나마 웃어보이려던 표정을 그는 읽은걸까. 이내 들고온 검정색 봉지를 들어올리며 말한다.
「너 좋아하는 청포도 사왔어. 같이 TV 보면서 청포도 먹자.」
윽- 청포도, 청포도라니! 갑자기 입안에 침이 돌기 시작한다. 청포도만 받고 그를 그냥 보내면 안될까? 그러면 나는 그에게 너무 가혹한걸까? 그는 내가 청포도를 거부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다. 니가 졌지, 하는듯한 저 눈빛. 윽, 재수없다.
「들어와요.」
문을 잡아주고 있는 내 앞을 지나 그가 내 공간속으로 들어온다. 신발을 벗으며 그는 부엌을 향해 간다.
「청포도 씻어올까?」
어, 라고 나는 말하고 문을 닫는다. 티비를 켜고 거실 소파에 앉으려다가 잠깐 나의 옷차림을 본다. 다 늘어난 트레이닝복 바지, 커다란 박스티. 그리고 아직 감지 않은 머리. 아, 진짜.
나는 내 공간에 누군가 들어오는 것이 싫다. 게다가 그것이 남자라면 말할것도 없다. 나는 남자친구와 두시간동안 침대에서 뒹굴며 섹스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내 공간안에서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옷을 벗든 입든, 그리고 그와 무엇을 하든, 내 공간이 아닌 곳이어야 편하다. 내 공간안에서 나는 오롯이 나 혼자였으면 좋겠다. 저기에 그가 앉아있고, 간혹 내가 거실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화장실로 이동하는 동선을 다 드러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차오르고 나면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된다. 내가 나를 가장 편안하게 풀어놓았을 때, 나를 챙기지 않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옆에 있다는 것에 신경이 곤두선다. 그게 아무리 내 남자친구라고 해도 나는 그것이 영 편하지만은 않다.
그도 알고 있다. 그는 몇번이고 내 집에서 편하고 싶어했고, 나는 그때마다 그를 내몰기에 바빴다. 저녁은 나가서 먹자, 영화는 밖에서 보자 하면서. 어느날 그는 내게 말하는 듯, 아니면 혼자서 다짐하는 듯 이렇게 얘기한적이 있다. 너가 나랑 오랜시간 니 공간에서 같이있는 걸 좀 편하게 생각하면, 그때 청혼해야겠어.
그때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았지만 지금 그가 이러는 것이 그 나름대로의 노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다고 괜찮아질까? 그가 청혼한다면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 공간에만 오면 살짝 어색해지는 분위기. 우리는 둘이 청포도를 먹으며 티비를 보았고 간혹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저녁시간이 다 되어갈때쯤, 그는 불쑥 계란후라이를 해주겠다고 한다. 계란후라이? 왜 갑자기 계란후라이를?
「계란후라이?」
「어. 저녁 먹어야 되잖아. 그런데 또 바깥에서 먹으면 넌 분명 먹고 바로 가라고 할거고. 그러면 나는 너네 집에서 겨우 두시간쯤 있었던 거라고. 그러니까 니가 좋아하는 계란후라이 해줄게. 저녁 여기서 먹자. 계란후라이 다섯개 할게. 너 세개 먹어.」
「......」
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이 남자, 작정하고 왔구나 싶어졌다. 내가 당황한채로 멍청하게 앉아있는 사이 그는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 씽크대를 열고 후라이팬을 꺼내고 가스렌지 위에 올린다. 가스렌지 불을 켜고 다시 씽크대를 열어 포도씨유도 꺼내 후라이팬에 두른다. 그는 포도씨유를 씽크대에 넣어 놓더니 냉장고를 열어 계란을 꺼낸다. 그의 두 손이 계란 다섯개를 다 감당할 수는 없다. 그는 처음에 세개를 꺼내 가스렌지 옆에 굴러가지 않게 놓아두고 다시 두개를 더 꺼내 그 옆에 가지런히 놓는다. 후라이팬 위에 손을 살짝 가져가 보더니 계란을 하나씩 깨기 시작했다. 계란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씽크대 여기저기를 열어 소금을 찾아내더니 계란위에 소금을 뿌린다. 그리고는 또다시 두리번 두리번 한다. 뭘 찾는거지?
「계란 뒤집어야 되는데, 뒤집개 어디있어? 국자는 보이는데 뒤집개는 안보이네?」
아 씨. 우리집엔 뒤집개가 없는데.
「없어. 밥주걱으로 해.」
그는 뒤를 돌아 나를 본다.
「밥주걱으로 뒤집으라고?」
「어. 난 계란후라이 밥주걱으로 뒤집어. 다른것도 그렇고. 」
그는 숟가락통에서 밥주걱을 꺼내 계란을 뒤집는다. 저게 죄다 반숙이어야 할텐데. 가스렌지 불을 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나를 본다.
「당신을 위해 스튜를 만들고 싶은데
내게는 냄비가 없어
당신을 위해 머플러를 뜨고 싶은데
내게는 털실이 없어
당신을 위해 시를 쓰고 싶은데
내게는 펜이 없어」
어엇, 이건 미도리의? 그는 이 노래를 달달 외워 내뱉더니 내 눈을 보고는 씨익 웃는다. 씨익 웃는 그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그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그의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그 다음엔 내가 웃게 되는데. 이 남자 눈동자가 왜, 왜, 반짝이지?
「당신에게 계란후라이를 해주고 싶은데
내게는 뒤집개가 없어」
풋- 이거였어? 하하하하하 눈물나게 웃는 나를 뒤로 하고 그는 계란후라이를 담은 접시를 포크와 함께 가져온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별거 아닌게 되어버린다. 이 공간만큼은 안돼, 하던것도 이런건 싫어, 하던것도 다 뭐 그쯤이야 하게 되어버린다. 그럴수도 있지 뭐, 하게 된다. 아 맙소사. 내가 왜 이러지? 나는 눈앞에 계란후라이가 있는데도 먹지는 않고 그를 보기만 한다. 그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이 어째 사라지질 않는다. 그도 계란후라이를 먹지 않는다.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어째 내려오질 않는다. 그의 눈빛은 어쩐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것도 같다.
맙소사, 지금 청혼하면, 나는 끝장이야, 예스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겠잖아.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