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흥분을 잘한다. 몹시 잘한다. 혼자 흥분하고 혼자 삭히곤 하는 일이 내게는 매우 자주 일어난다. 당연히 혼자 신경질도 냈다가 혼자 웃기도 했다가 한다.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심지어 똘끼있다는 말까지 들어봤다. 혼자 욕하다가 혼자 노래부른다고. 

그래서 이 문장을 책에서 만났을 때 자지러지게 좋았다. 별 것 아닌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내 책인데, 어디다 밑줄 긋든 내 맘이니까. 

아니었어. 나는 그저 착각했을 뿐이고, 도시는 나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는 거였어. 너무 신경질이 나서 더 이상 쓸수가 없어.(p.391)

 아, 정말 미치겠다. 이 책의 줄리엣은 혼자 편지쓰다가,  혼자 착각하고,  혼자 신경질이 나고,  혼자 쓸 수가 없단다. 그녀의 신경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 얼마나 신경질이 나면 너무 신경질이 나서 더 이상 쓸 수가 없어, 라고 쓸까. 예쁘기도 하지. 

 

그리고 이름.  

나는 내가 좋아했던 사람에 대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야기를 듣는 누군가가 그 사람의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말하기를 꺼려한다. 글쎄, 사실 왜 꺼려지는 건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그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다. 그 이름은 입밖에 내어져 다른이의 귀에 닿는 순간, 내가 주려는 의미와 그쪽이 받아들이는 의미가 같지 않음을 알기 때문일까. 아니면 좋아하는 누군가의 이름은 그저 비밀로 삼고 싶기 때문일까.  

 

그러니 이 책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을 때 내가 어떻게 밑줄을 긋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내가 그에게서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그거야. 내 마음속으로 말이야.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날 위해서 이름만은 안 돼. 그걸 말할 수는 없어......」(p.86)

 아 씨- 너무 좋잖아! 이 책을 읽은지 꽤 오래됐는데, 이 문장은 언제나 내 마음에 있다. 

 

 

나와 같은 면을 발견했을 때도 자지러지게 좋지만, 아, 유머가 가득할 때, 나를 키득거리며 웃게할 때, 그때만큼 좋은 순간이 또 있을까!! 

나의 동급생 '사토 아기날드 다케시'는 일본 사람과 필리핀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인데, 필리핀 사람인 엄마 쪽에 스페인 사람과 화교의 피가 섞여 있어 4개국분의 DNA를 지닌 슈퍼 하이브리드 종으로 태어났다. 몇 가지 품종을 섞은 쌀이 찰기가 있고 맛있는 것처럼 아기도 생명력이 강하고 아름다웠다. 그런 데다 고추도 컸다.(p.95)

아, 나는 정말 이 책이 재미있어서 좋은거다. 절대로, 절대로  다케시가 슈퍼 하이브리드 종으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정말이다.  

 

위의 책들에서 저런 문장들을 발견하고 자지러지게 좋았다면, 이 책을 읽을때는 내내 좋았다. 사실 '자지러지게 좋다'는 표현이 적합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제길, 뭐라 마땅히 표현할 말이 없다. 

 

 

 

 

세상에서 어떤 단편집이 제일 좋으니, 하고 누가 물어보면 나는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요!" 라고 답할것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느끼는 건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다고는 해도,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어떤 책에 대해서만큼은 그 누구도 나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 될 때가 있다. 나는 그런책을 몇개 정해놓고 그 책을 좋아하느냐 아니냐로 그 사람에 대한 애정도에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매기곤 한다. 얼마전에도 호감을 품었던 한 사람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읽고 '시간 때우기에 좋은 책'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그에게 가졌던 호감을 거둬들였다. 물론, 내가 호감을 가진것도, 그리고 그 호감을 다시 거두어 들인것도 상대방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만약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 정말 너무 좋지 않나요?" 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애정을 더 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약 이미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 너무 좋아."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조금 더 찐한 애정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을 펼치고 다시 이 책을 덮을 때까지, 그 동안은 내내 '자지러지게 좋았던 순간'이었다.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눈물 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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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9-09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은 정말 지름신 강림 뻬빠 전문이에요.
자지러지게 좋았다! 그 감정을 느끼려면 다 읽어봐야 하잖아요.
하지만 하나는 알아요~~ 줄리엣의 도시에 대한 감정은.^^

다락방 2009-09-10 08:58   좋아요 0 | URL
네, 순오기님. 순오기님도 건지 아일랜드 무척 재미있게 읽으셨죠.
그리고 제가 지름신과 좀 친해요. 후훗 :)

무스탕 2009-09-10 09:43   좋아요 0 | URL
지름신과 좀 친한게 아니고 지름신이 다락방님 이름으로 알라딘에 기거하는거 같아요.

=3=3=3=3=3

다락방 2009-09-10 12:34   좋아요 0 | URL
아, 그럼 저는 지름신의 또다른 모습? 그래도 신은 신이네요 ㅎㅎ 여신 ㅎㅎ

... 2009-09-09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에 대한 이야기- 동감 !00%
저 부분에 저도 밑줄 긋기 위해서 (아니, 형광펜으로 박박 그어버릴 테다!) 다락방님께 땡스투 드리고 거미여인의 키스를 장바구니에 집어넣어야 할 것 같아요...

다락방 2009-09-10 08:59   좋아요 0 | URL
하하, 브론테님. 백프로라는 거에요, 빵프로라는 거에요? 하하하핫. 백프로 치려다가 오타난 것 같아요.

거미 여인의 키스는 저 부분에도 밑줄을 그었지만, 영화 캣피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때도 으윽, 완전 좋았어요. 아, 나 이거 알어 알어, 나 이영화 봤단 말이야, 이러면서 어찌나 흥분을 했었는지!! 브론테님도 정말 좋아하실거에요, 정말!!

라로 2009-09-10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 정말 너무 좋지 않나요?(이미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길 바라지만 소심함으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라 가정한,,,,,아 소심한 나비..)

다락방 2009-09-10 09:00   좋아요 0 | URL
nabee님.
제 앞에서는 소심하지 않으셔도 되요. nabee님은 이미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훗 :)

Forgettable. 2009-09-10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거미여인의 키스는 정말 소장가치 200퍼센트죠. 너무 좋아요 ㅠㅠ 저도 이 책 읽는 내내 흥분해서 숨을 몇번이나 내쉬었지요. ㅠ

다락방 2009-09-10 09:01   좋아요 0 | URL
「넌 거미여인이야. 네 거미줄에 남자를 옭아매는......」(p.344)

아, 정말 좋지요? 전 심지어 저자의 이름까지 마음에 들더라구요. 마누엘 푸익!

느린산책 2009-09-10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다는 건 마치 나만의 비밀 연애에 빠지는 거?.. 더군다나 마음에 꽂히는 문구를 만났을 때의 그 아스라히 피어오르는 희열이란..가끔 주변에서 책을 왜 그리 많이 읽어라고 물어보면 '넘 좋아'라고 말할뿐 더 할 말이 없었는데 '자지러지게 좋아' 좋네요 ㅎ

다락방 2009-09-10 09:03   좋아요 0 | URL
저도 글쎄요, 특별한 이유를 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저 재미있고, 그저 좋아서 책을 읽는거니깐요. 가끔 이렇게 자지러지게 좋은 글들을 만날 때는 특히 더해요. 책 읽는 스스로가 막 좋아진다니깐요, 글쎄. :)

머큐리 2009-09-10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페이퍼는 중독성이 강해요...이런 감성이 부러울 뿐입니다..ㅎㅎ

다락방 2009-09-10 09:03   좋아요 0 | URL
중.독.성. 이라니! 와, 멋져요, 머큐리님. 저는 감성은 조금 가지고 있지만, '이성'이 전혀 없는걸요. orz

얼룩말 2009-09-10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지금 방금 검색해봤어요
당장 읽어야겠어요

다락방 2009-09-10 09:32   좋아요 0 | URL
아, 얼룩말님께는 어떤 책이 될까요? 얼룩말님의 감상이 기대되고(두근두근) 겁나기도 해요.

레와 2009-09-10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일이 있어도, 끝까지 춤추는 거야!!!!'


나는 다락방님이 자지러지게 좋더라!! ^^

다락방 2009-09-10 12:34   좋아요 0 | URL
레와님도 참..부끄럽게 ㅎㅎ

마노아 2009-09-10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는 이 페이퍼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다락방님이 으스러지게 좋아요! 으스러지도록 꼭 안아주고 싶어효!!

다락방 2009-09-10 12:35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그러니까 말입니다. 으스러지도록 꼭 안아주고 싶을때는 참지 안으셔도 됩니다. 참지 마시고, 그냥 원하는만큼 안아주십쇼. 후훗.

기억의집 2009-09-10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료에게 똘끼가 있어보인다는 소릴 들었다고요, 전 졸리가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레블루션과 페루는 진짜 좋았어요. 작가들중에는 독자에게 의도된 감동을 주려는 작가가 있는데 가즈키가 그런 것 같아요. 이 작가의 작품 다 읽었는데, 의도된 감동이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침체되었던 저한테 기운이 불끈 솟더라구요^^

다락방님 페이퍼도 물론 저한테 기운을 불끈! 준다는...^^

다락방 2009-09-10 13:09   좋아요 0 | URL
저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GO』를 읽다가는 눈물이 또르르 흐르기도 했어요. 레볼루션 시리즈를 읽었을 때는 정말 기운이 솟죠. 최근작 『영화처럼』도 가슴이 따뜻해지더라구요. 기억의집님도 페루를 좋아하시는군요,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에요. 근사한 소설이죠. 그런 단편을 쓸 수 있다는게 놀라워요. 그런 작품을 써준 로맹 가리한테 감사하는 마음이랍니다.

비로그인 2009-09-1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댓글부터 들이대기-저 다락방 님이 말씀하신 이 책들 다 읽었어요 헤헷

다락방 2009-09-10 13:10   좋아요 0 | URL
오옷 Jude님이 레벌루션을 읽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오옷-

비로그인 2009-09-10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주 오랜만에 레벌루션 no.3를 말씀하셨군요. 저 책을 읽을 때, 친구가 옆에서 `대체 왜 그렇게 혼자 키득거리는 것이냐'라고 물어서 낭독해준 적이 있어요. 다락방님이 박스에 넣은 저 글귀도 낭독했었지요. 아주 심심한 일본 남자의 억양으로 읽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웃긴 걸 어쩝니까. 전 공중그네 부류보다는 저런 패배자적 유머도 좋아요.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 좋아요 좋아요 정말 좋아요(무한반복중)

다락방 2009-09-10 13:11   좋아요 0 | URL
전 공중그네의 유머도 좋았어요. 그치만 레벌루션 no.3 를 따를수는 없지요. 레벌루션은 아 진짜 완소책이에요. 읽으면서 책장이 줄어드는게 마냥 아쉽기만 했다니깐요. 막 가슴에서 열정이 들끓는것 같기도 하고 기운이 차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후-

Jude님은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를 좋아하지 않으셔도, 더이상 어떻게 좋아할 수가 없을 정도로 좋아하는걸요. 흐흐흐흐 :)

perky 2009-09-10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누엘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 정말 너무 좋아서 책 읽다가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글을 이렇게 파격적으로 잘 쓰는 작가가 세상에 존재한다는게 도저히 믿기 어려웠고..암튼 완전 흥분했었죠. 마지막 장면에선 꺼이꺼이 목놓아 울기까지 했었던 책이었어요. 이 책 읽은 후로 마누엘 푸익에 완전 반해버려서 그의 책은 나오는즉시 다 읽었고 다 소장하고 있는데요. (조그만 입술,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 천사의 음부) 솔직히 거미여인의 키스가 가장 좋더군요.

다락방 2009-09-10 15:05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왜 한번도 마누엘 푸익의 다른 작품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을까요? 저는 이제부터 찾아서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조그만 입술, 하며 천사의 음부라니! 제목부터 흥미롭잖아요!!

Arch 2009-09-10 15:17   좋아요 0 | URL
저는 신경숙이 어느 글에선가 추천해서 '거미 여인의 키스'를 읽었는데 저 역시 무척 재미있게 봤었죠. 다른 작품, 제목은 흥미로운데 진도가 나가지 않아요. 다른 느낌이야, 좋아는 있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아.. 흑.

다락방 2009-09-10 15:38   좋아요 0 | URL
아, 이런. 마누엘 푸익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신분이 또 있다니!! 저도 한번 읽어봐야 겠어요.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면..음..어려운걸까요?

Arch 2009-09-11 11:50   좋아요 0 | URL
어려운 것도 있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 제목은 기가 막힌데^^ 둘 다 어렵다는 말이로군요~ 다락방님이 진도 나가서 '아치, 생각보다 재미있던데.'라고 귀뜸해주세요.

다락방 2009-09-11 15:31   좋아요 0 | URL
네, Arch님. 제가 읽게 된다면, 그리고 그 책이 괜찮다면, 거침없이 말씀드릴게요!!!!

비연 2009-09-10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미여인의 키스를 읽으면서 느꼈던 그 감상이 고스란히 다시 느껴지는 페퍼입니다^^
마누엘 푸익이라는 작가, 넘 잘 쓰는거 아냐? 막 이러면서 쫘악 읽어버렸죠..

다락방 2009-09-11 08:16   좋아요 0 | URL
오옷, 마누엘 푸익이 대세군요. 이 페이퍼 쓰고 나니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요. 거미 여인의 키스를 무척 좋아하는 분이 많다는 것, 마누엘 푸익의 다른 작품이 있다는 것(이건 당연한건데 왜 생각을 못했던건지!), 심지어 그 다른 작품을 읽어보신 분들도 많다는 것. 저 역시 마누엘 푸익에 도전해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