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그 벽 어쩌고 책을 읽고 있는데 너무 괴롭다. 소년 소녀가 등장할 때부터 괴로웠는데 동그란 가슴, 입맞춤, 나는 네 것이야.. 이런 거 나오는데 진짜 너무 괴롭고 오글오글 ㅠㅠ 손발이 오그라들고ㅠㅠ 그만 읽을까 수차례 갈등중이다. 내가 하루키를 좋아한 시간이 얼마나 긴데, 나 하루키 진짜 너무 좋아했고, 하루키만 꽂아두는 책장이 따로 한 칸 있었다고. 한 칸으로 모자라서 막 눕히고 난리가 났었는데 이번에 그 벽 책 읽으면서 너무 괴로워하고 있다. 하루키를 그간 좋아하며 여러권 읽어본 사람이라면 사실 이야기가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림자, 일각수, 꿈을 읽는 주인공.. 이거 다 하루키가 다른 책들에서 했던 이야기들이야. 양 사나이는 안나오나 몰라. 하여간 절반도 안읽고 괴로워하며 그냥 그만두고 팔아버릴까 하고 있다. 하루키 님, 왜이러셨어요. 왜 저 읽기 힘들게 만드시나요. ㅠㅠ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하루키는 어디갔나요. 아니, 변한 건 나인것인가.. 너무 괴롭다 ㅠㅠ 읽다보면 어느 순간 '역시 하루키구먼!' 하는 때가 오나요? (그렁그렁)
우울한 마음 다잡고 2023년 읽은 책들의 베스트를 정해보자. 귀찮아서 안하려고 했는데, 하루키 책 읽으면서 문득, 올해 남은 시간 더 읽어봤자 베스트 갱신은 없겠구먼, 해가지고.. 그냥 해보는 걸로.
2023년 에세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의 《Life Lessons》
이 책은 올해 4월과 5월 두 달에 걸쳐 읽은 책이다.
처음 이 책을 읽자고 마음 먹게 된건 정희진 쌤의 강력한 추천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인생수업》의 제목과 표지 만으로 내가 전혀 읽지 않았을 작품. 그래? 내가 전혀 읽지 않을 종류의 책인데 그렇게 좋다고? 그래서 친구들과 영어책으로 이 책을 시작했다. 당연히 번역본도 함께 했는데, 정희진 쌤은 번역을 칭찬하셨지만, 번역본에 대해서라면 전혀 추천하지 않는다. 두 저자가 번갈아 얘기하는 책에서 번역본은 명확히 구분도 되지 않고 문장 번역도 직역된 게 아니라서 나란히 놓고 보면 이 문장 저 문장과 맞아들어가질 않을 뿐더러, 번역본만 보면 다소 지루한 경향이 있다. 원서 읽고 너무 좋아 번역서 선물했는데 상대가 읽다 포기해버렸다.
책과 내가 만나는 때가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나에게 적절한 시기에 아주 제대로 찾아왔다.
fear 에 대해 읽을 때에도 너무 좋았지만, surrender 는 압권이었다.
작년 연말부터 올해 연초까지 아버지는 계속 병원 신세를 지셔야 했다. 수술, 다시 재수술, 응급실, 입원, 또 수술. 그 과정에서 섬망이 오기도 했던 터라 나는 그 시간들이 두렵고 무서웠다. 어느날은 너무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혼자 침대에서 벌벌 떨었던 밤들도 기억한다. 신경안정제를 처방 받아 먹기도 했다. 나는 아주 많이 두려웠다. 나의 마음을 아는 친구가 그때 내게 문자메세지를 보내주었다.
"너도 잘 알겠지만 아버지는 언젠가 돌아가실거야."
이 문자메세지가 그 순간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아마 다른 때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다면 그때도 위로가 되는 메세지였을까? 그건 모르겠다. 그러나 그 순간 내가 두렵고 무서웠던 건,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실까봐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죽지 않는가. 그래, 우리 아버지라고 예외일 수 없다. 나는 아버지를 예외로 만들고 싶어 이렇게 발을 동동 구르고 무서워하는게 아닌가. 받아들이자. 나의 아버지도 다른 사람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돌아가실 수도 있다. 받아들이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포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용이었고 수용하고나자 내가 통제하지 못할 것들에 대해 초조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받아들인다고 해서 슬픔이 옅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 하지 못함에 대해 가슴 끓이진 않을 수 있다. 그때 LIFE LESSONS 에서 내게 surrender 를 알려주었다.
Surrender was a choice, and that it did not mean giving up. -p.168
When we surrender, we accept it just as it is. -p.169
그 뒤로 인생에서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끙끙대는 사람을 볼 때면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고 surrender 를 말해주고 싶은데, 그러나 그 때 상대의 귀에 그것이 어떻게 들릴지를 모르겠다. 자칫하면 포기하라는 걸로 들리지 않을까. 받아들이라는 말을 포기와 같은 의미로 생각하지 않을까. 지금 바꿀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 그렇게 힘든건데, 받아들이라고, 받아들이면 받아들이고나서의 그 다음 일들이 펼쳐질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2023년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는 2019년에도 내가 읽은 최고의 책이었다. 다시 읽기한 2023년에도 내게 최고의 여성주의 책이 되었다. 최근에 읽은 《여전히 미친》은, 나는 그렇게까지 재미있지도 의미있지도 않았다. 역사 속에서 열정적으로 목소리를 냈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흥미롭지만, 그 사실들의 기술은 내게 큰 깨달음이나 사고의 변화를 주진 않았고, 나는 이런 류의 책이 그렇게 재미있지가 않다. 그런데,
레이첼 모랜은 달랐다.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는 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놀라움의 연속이다. 한 사람의 성찰이 얼마나 깊게 그리고 얼마나 멀리 뻗어나갈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 안에 고유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권해 읽은 남자사람도 이 책으로 인해 자신의 사고가 완전히 변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알라딘을 통해 함께 읽은 다른 분들도 모두 별다섯을 주며 이 책에 대해 감탄했다. 물론, 이 책 읽고, 별 하나 준 구매자평도 보았지만, 그 분의 닉네임을 보니 놀랍지는 않았다. 책을 읽은 감상이 모두에게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이 책은 재미없을 수도 의미 없을 수도 있겠지만, 별하나 리뷰를 작성한 사람은 별 하나 주려고 읽은것으로 너무나 당연히 추측이 된다. 더 말하진 않겠다.
2023년의 완독,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와 진짜 다 읽느라 너무 힘들었지만, 언젠가는 읽어야지 다짐했던 책이라 완독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그러나 이 두꺼운 책 완독하고 나의 지식이 놀라울만큼 늘어났느냐 하면 그건 아니고,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그저 슬프기만 했다. 인간은 언제고 소멸한다는 것이 나에겐 큰 슬픔인데, 세상에 지구도 태양도 언젠가 소멸한다는 게 아닌가. 아니, 우리 왜 살아요? 왜 존재하나요? 모두 소멸한 것을... 하아-
2023년의 소설, '슈테판 츠바이크'의 《우체국 아가씨》
페이드 포를 언급하며 얘기했듯이 나는 나를 생각하게 만드는 글을 좋아하고 나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2023년에 읽은 우체국 아가씨는 그런면에서 완전히 나에게 맞춤한 책이었다. 어떤 책이든 읽는 독자가 누구냐에 따라 가져가는 바가 다를 것인데, 나는 이 책에서 내가 고집스럽게 나만의 신념을 가지고 있음을 자각해야만 했다. 이건 일전에 인상적으로 읽었던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에서도 느꼈던 바다. 우체국 아가씨에서는 언제나 나에게 최선의 가치였던 경험이, 그런데 정말 그런가? 라는 의문으로 이어져야 했고, 거기에서 오는 충격은 나에게 정말 신선했다. 나는 정말 재미있어서 소설을 읽는데, 이 재미있는 소설이 그저 재미로 끝나는게 아니라 두고두고 생각할 거리를 준다. 아니, 정말 좋지 않은가? 소설 읽는 거 최고라고 우체국 아가씨를 읽으며 생각했다. 올해 이 책을 여러명에게 선물했다.
2023년의 구원, '윌리엄 피터 블래티'의 《엑소시스트》
영화 《엑소시스트》는 내 인생 가장 무서운 영화였고 그 영화 이후로는 공포영화를 볼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렇게 무서운 영화로만 알고 있던 엑소시스트가 세상에 원작이 있다는 게 아닌가! (시사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 원작이 무려 철학을 담고 있대? 공포 말고 다른 게 있다고? 나는 급박하게 이 책을 사서 읽었는데, 정말로 공포 말고 다른 게 있었다. 그건,
구원이었다.
자신이 믿는 신 혹은 종교에 대한 강한 신념, 그걸로 인해 인간으로서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행동도 했는데, 그것이 과연 옳은지, 내가 믿는 당신은 정말 존재하는지, 제발 나에게 응답을 해달라는 간절한 부름을 이 책 속의 등장인물이 갖고 있단 말이다. 결국 악령이 몸에 들어와있는 소녀를 구해주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면서 그는, 그가 그토록 원하던 응답을 받는다. 나는 그 장면에서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는데, 믿는 것은, 믿는 자에게 강력한 힘이고,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당연한 명제, 그러나 의심스러운 명제가 참이 되는 걸 목격해버리고 말았다. 엑소시스트 책을 사서 펼칠 때만 해도, 내가 책장을 덮으며 울 줄은 몰랐다. 그리고 악은 아주 비겁하다는 것도 더불어 다시 새긴다.
2023년의 고정관념 타파, '하마노 지히로',《성스러운 동물성애자》
와 진짜 책을 들기까지 너무나 힘들었던 책이고 읽으면서도 정말 읽기 싫었던 책이다. 내가 이걸 왜 읽어야 하지? 라는 생각을 또 얼마나 했는지. 그러나, 결과적으로 읽기를 잘했다. 이 책을 읽은 후의 가장 큰 수확은, 지구상 어딘가에 동물과 섹스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결코 아니다. 우리가 동물을 귀엽게 혹은 불쌍하게 보는 그 모든 관점은, 당연하게도 인간중심적 이라는 것. 그렇게 느끼는 것은 누구인가!! 마침, 다음 책과도 주제 파악이 겹쳐버리고 마는데...
2023년의 포스트 휴머니즘,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
이 책 한 권을 읽으면 놀랍게도 버섯의 생애를 알 수 있지만 자본주의도 만나게 된다. 인간이 비인간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게 다른 인간의 끼어듦이 필요하듯이, 인간에게 비인간과의 얽힘도 필요하다.
2023년의 팟빵, 정윤수의 <고독한 고전음악방>
사실 김혜리의 <조용한 생활> 속의 한 코너에 불과하지만, 나는 이 코너를 듣는게 너무 즐거웠다. 그래서 클래식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김석란'의 《에릭 사티》도 사서 읽었다. 에릭 사티 웃김.. 자기가 종교도 만든 사람, 그리고 교주이자 유일한 신도인 사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윤수 님 너무 좋아서 신작으로 에세이 한 권 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고독한 고전음악방을 과거의 것부터 다시 듣고 있지만, 요즘 뭐 들을 시간 없어서 어느 순간 멈춰있긴 하다.
2023년의 액체, 쉼
잠을 잘 자지 못했다는 내 말에 친구가 <쉼> 한박스를 보내주었다.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거였다. 이 음료 한박스를 들고 검색해보니 스트레스 해소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는게 아닌가. 받자마자 하나 쭈욱 마시고 그 날밤 푹 잤다. 음료의 도움인지, 며칠간 못자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 이 음료는 존재 자체로 위안이다. 혹여라도 내가 스트레스 잔뜩 받으면, 나에겐 쉼이 있다!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다. 존재 자체로 그저 도움이 돼. 친구는 혹여라도 효과가 없다면 플라시보 라도 있기를 바랐는데, 이미 충분히 플라시보 효과 대박이다. 세상에 스트레스를 완화해주는 음료가 존재하다니, 숙면에 도움이 되는 음료가 존재하다니, 나에게 이게 있다!!
2023년에는 아버지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고 응급실 방문도 반복하셨다. 우는 날이 여러날 이어졌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엄마와 이모를 모시고 네덜란드를 다녀왔고, 여동생과 함께 하노이를 방문했다. 나 혼자서는 호치민을 다녀왔다. 어떤 날들은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했지만, 대체적으로 잘 견뎌냈다. 할 수 있는 게 늘어나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그러니까 불안하거나 답답하거나 우울함에서 나를 건져내줄 수단을 좀 더 많이 마련해두는 것이 낫다고 늘 생각하는 내게, 파김치를 만들어본 것은 너무 좋은 해답이 되어주었다. 바질을 키워 페스토도 만들어보았고 고수와 치커리도 재배했다. 쑥쑥 자라는 바질을 볼 때마다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바질을 키우는 것이 낫다고 이 연사, 강력하게 외칩니다!! 요가도 다시 시작했다. 열심히 다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는 날이면 또 크게 만족한다. 팔을 위로 뻗어보고 몸을 앞으로 숙이는 것은 할 때마다 내 몸을 감각하게 한다. 유독 심하게 외롭고 고독한 날도 있었지만, 그런 감정들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잘 하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마음들은 전해진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너를 생각해' 라고 부러 말하지 않아도 '나를 생각하는구나' 가 느껴질 때면, 내가 인생에 참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알라딘을 통해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도 잘 이어져오고 있다. 함께 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오래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 여러분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내년에도 잘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