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는 외할머니의 94세 생신을 축하했다. 보청기를 착용하시고 딱딱한 음식은 씹을 수 없는 할머니는 몸이 점점 쇠약해지시고 이번에 뵀을 때도 컨디션이 안좋으셨다. 이제는 다리도 허리도 다 안좋으시다고.
외할머니 생신이라고 내가 매번 함께 밥을 먹는건 아니었는데, 이번엔 생신이 돌아오기도 전부터 '나도 이번에 같이 밥 먹어, 엄마' 했다. 내심 마지막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아니어도 몇 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 생각을 동생들에게 말했더니 남동생은 얘기했다.
"우리 할머니는 내 생각에, 우리들보다 더 오래 살 것 같은데?"
식구들 모두 남동생의 말에 그럴만하다며 웃었다. 그래서 같이 능이오리백숙을 먹고 들어와 집에서 케익에 초를 꽂았다.
그리고 할머니께 용돈을 드렸다. 함께 자리에 있었던 나도, 남동생도 드리고 참석하지 못한 여동생의 것도 챙겨 드렸다. 이모는 이모 아들 딸의 봉투까지도 전달해, 할머니는 돈봉투를 여러개 챙기셨다.
할머니는 내가 우려준 차를 드셨다. 저 멀리, 시애틀에 사는 친구가 보내준 차인데 티백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내면 향이 기가 막히다. 나는 내가 향기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는데, 우울한 기분들이 때로는 좋은 향기로 별 거 아닌 일이 되는 경험을 종종 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의 커피 향기가 모든걸 괜찮은 걸로 만들어주기도 했고, 며칠전에 친구가 보내준 차의 향기가 과중한 업무로 잔뜩 스트레스 받아 있는 나를 달래주었다. 친구가 보내준 차통이 사무실에 있었는데, 나는 그걸 가방에 챙겨넣었다. 주말에 할머니랑 이모 오면 타드려야지, 하고. 그래서 할머니도 타드리고 이모도 타드렸다.
금요일에는 화분들에 물을 주었는데, 물뿌리개의 물이 너무 셌기 때문인지 풀들이 다 엎드려버렸다. 곧 살아나겠지 싶으면서도 걱정되었다. 분무기로 줘야 하나. 그렇지만.. 아니야, 살거야. 들판의 모든 풀들은 이보다 더 센 빗줄기도 맞고 살아가잖아?
토요일 아침 베란다 문을 여니 와, 열자마자 고수향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요며칠 잘 안나던데 본잎들이 제법 많이 나기 시작하니 또 향이 진동을 한다. 너무 좋아. 베란다 문만 열면 웃게 된다. 그리고 가까이 가니 더 진동하는 고수 향기.
아 너무 설렌다 진짜 ㅋㅋㅋ 고수 잎 삐죽삐죽 제법 많이 나있다. 으하하하. 얼마나 향기가 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고 히죽히죽 웃는다. 으하하하하. 내가 가만 지켜보고 있노라면 이내 엄마가 따라 나오신다. 그리고 같이 들여다보신다.
이 콩에 대해서라면 참 복잡한 마음이 드는데, 그러니까 어떤 기분이냐면, 평범한 집에 태어난 영재의 느낌... 같은 거랄까. 최선을 다해 교육 시키고 싶지만 부모가 가진 지적 능력이나 재산은 영재 의 재능에 못미쳐 결국 영재가 제 뜻대로 더 크게 되지 못하는 그런 느낌적 느낌 이랄까...
나는 내가 그런 아이라고 늘 생각해서 부모님을 원망했었다.
내가 아무리 영재면 뭐해, 부모가 나를 제대로 교육을 못시켜서 이렇게 평범해졌는데!!!
라고 부모를 원망하면 우리 엄마 아빠도 그렇고 동생들도 그냥 쟤 또 저러네, 이러고 요즘엔 대꾸도 안한다.
나는 내가 평범한 집에 태어나 자라다 만 영재..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흠흠.
아무튼 이 콩 보면 그런 느낌이야. 콩아, 네가 뿌리 내린 화분이, 토양이, 그리고 무엇보다 널 심은 내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쑥쑥 자라는 너에 비해서... 고작 이정도의 창조주라 미안하다...
천천히 예쁘게 자라는 고추. 얘도 가운데에 잎이 쏙 내밀었다.
방울토마토인데 얼른 쑥쑥 자라 토마토 열렸으면 좋겠다. 아가 조카 오면 보여주고 싶다. 아가야, 이거 네가 한 번 따보렴, 하고.
싹은 제법 잘 피우더니 자라는 속도는 더딘 것 같은 바질. 너도 얼른 자라라. 근데 네가 자라면 페스토 만들 만큼의 양은.. 안되겠지? 내가 키운 바질로 내가 직접 바질 페스토 만들어 보는 로망.. 실현은 가능할까?
우리 아빠는 평생 반찬 투정을 하지 않는 분이시다. 드라마에 나오는 '반찬이 이게 뭐냐'며 타박하는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시고, 김치만 딸랑 하나 꺼내줘도 콧물 흘리며 밥 잘드시는 분이시다. 어제 저녁은 열무김치만 하나 꺼내달라 하셔서 거기에 슥슥 비벼 드셨다. 반찬이 많으면 많은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맛있으면 맛있는대로 맛없으면 맛없는대로 엄청 맛있게 정말 잘 드신다. 사실 식탐.. 이 너무 심해서 그런가? 이런 생각도 해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가 가리는 음식이 없는 건 아니다. 물론 비슷한 연령대의 분들보다 햄버거나 돈까스 이런것도 좋아하시긴 하지만, 피자를 별로 안좋아하시고 술도 안드신다. 그리고 당뇨를 앓고 계셔서 나름 단 걸 피하시고 또 신장이 안좋아 최근엔 짜게 먹는 것도 자제하려고 하신다. 사실 아빠가 자제한다기 보다 식구들이 잔소리를 미친듯이 한다. 짜게 드시지 말라고... 여튼, 치커리가 그런 아빠 같다. 씨 뿌리니까 일주일도 안돼 싹 내밀더니 막 자라. 내가 딱히 신경 쓴 것도 아니고 걍 씨 뿌리고 베란다에 가만 두며 간혹 물이나 준 게 다인데, 이거봐라~ 하면서 겁나 잘 자라고 있다. 그리고 가만 보면, 저기 오른쪽 어떤 잎은, 치커리 모양의 본잎도 나오기 시작했다.
상추는.. 처음에 싹은 빨리 나오더니, 그리고 키워본 친구들이 상추는 그냥 막 잘 자란다고 하던데, 우리집 상추는 딱히 그런 느낌은 아닌 것 같다. 콩이 너무 치고 나가고, 치커리랑 고수가 잘 자라서 상추는 의외로 뒤로 쳐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름 공부 잘하는 아이인데 집에 큰누나가 너무 공부를 잘해서 별로 빛을 보지 못하는... 큰누나 나다.
그렇지만 우리 삼남매 중에서 내가 제일 공부 못했던 건 함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에 이모가 와서 구몬영어 하는 엄마를 보고 응원해주었다. 나는 구몬영어를 열심히 하는 엄마를 보며 여러가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야, 엄마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엄마의 의지만큼 외워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어떤 공부의 '때' 라는 것이 복잡하고, 그것은 노화.. 와 연결된 것일테고, 그렇지만 계속 하다보면 공부의 감각이라는 것도 나름 터득될 터이니 낫지 않을까. 그리고 나에게 학습지를 시켜주었던 아주 먼 과거의 일도 떠올랐다. 당시에 총.. 총어쩌고 하는 학습지도 하다가, 엄마 공부 잘하는 애들은 다 에이플러스 한대, 해서 엄마를 졸라서 엄마가 나와 여동생에게 에이플러스 학습지를 시켜주었던 거다. 우리 집은 결코 넉넉한 집이 아니었고, 아빠가 열심히 돈 버는 집도 아니었는데, 내가 이렇게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 엄마는 어떻게든 해주려고 하셨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집으로 학습지가 왔는데, 나는 처음 한 2주 정도만 그걸 풀고 나머지는 풀지 않고 쌓아둔 채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쌓이고 쌓이고.. 나는 그걸 책상 밑으로 숨기고 숨기고... 나중에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엄마 몰래 다 버렸던 기억이 난다. 이게 너무 엄마한테 미안한거다. 내가 너무 철이 없었던 게. 하지도 않을 걸 해달라고 조르고, 그래서 없는 돈에 기껏 해주었더니 그냥 종이 쓰레기 만들어 버리고... 그 당시에 철이 들어 문제집을 꼬박꼬박 풀었다면, 내 미래는 그 때와 조금 더 달라졌을까? 설사 달라지지 않았어도 엄마한테 덜 미안하지 않을까. 엄마는 내가 시켜주는 문제집 꼬박꼬박 잘하는데, 심지어 엄마가 너무 열심히 하시는 바람에 추가비용 내고 문제집 한 권을 더 사셔야 했다. 엄마가 공부하는 거 보면 내가 다 뿌듯한데, 나는 왜 그 때 문제집을 쓰레기 만들어 버렸나..
반면 여동생은 달랐다. 전교1등 했던 내 여동생은 에이플러스는 전혀 밀리지 않았고 나중에 우리가 더이상 그 학습지를 하지 않을 때에도 문제집 한 권 사면 일단 연필로 다 풀어보고 한 권 다 풀면 그걸 다 지우고 다시 푸는 아이였다. 전교 1등, 그거 그냥 되는게 아닌 거다. 게다가 용돈을 나보다 더 적게 받는 내 여동생은 늘 용돈이 남았고, 여동생보다 많이 받는 나는 용돈 받으면 일주일도 안되어 다 써버리곤 했다. 나는 용돈 받자마자 일단 떡볶이랑 쫄면 사먹어버려....흑흑 ㅠㅠ
그때 문제집 쌓아두고 안푸는 아이는 커서 책 쌓아두고 안읽고 또 쌓아두는 어른이 되었다. 제버릇 개못주는 거 맞아요. ㅠㅠ
아무튼 그래가지고 책이 왔다. (네?)
《퍼핏 쇼》는 리뷰대회 있다고 해서 샀는데, 그동안 리뷰대회 항상 미끄러진 나로서는 참가할 의지가 사실 별로 없다. 그래도 참가할 의지가 생길지도 모를 나를 위해 일단 갖추어두었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는 최근에 시사인에서 장하준의 인터뷰 읽고 오오, 경제학 레시피 읽어봐야지 해서 샀는데, 사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였나.. 그 책도 갖춘지 오만년 되었는데 안읽고 있...
《아메리카의 비극》을 ㅈㅈㄴ 님 리뷰 읽다 보니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 사두었는데, 이렇게 그 분의 리뷰 읽고 덮어놓고 주문했다가 역시 또 쌓이고 있어가지고. 일단 상권만 샀다. 너무 지혜롭지 않나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영재의 blood...
오늘 아침에 엄마가 교회 새벽 기도를 가셨다. 어제 가시기 전, 내일 엄마 교회 새벽기도 갈테니 아침 잘 챙겨먹고 가라 이르셨고, 그런 걱정 말고 엄마 잘 다녀오시라 했는데. 아하하하. 내가 세상에, 오늘 알람 끄고 더 자버린 부분.. 그래서 평소보다 너무 늦게 일어났고 헐레벌떡 씻고 나오는 바람에 아침을 먹지 않았다. 그렇게 평소랑 비슷한 시간에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한참후 엄마로부터 단톡방에 톡이 왔다.
"너 오늘 아침 안먹고 갔더구나."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여동생이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언니는 다 계획이 있을 거예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맞다. 사무실에 도착한 나는 일할 준비를 다 마치고 나가서 샌드위치와 김밥을 사서 ㅋㅋㅋㅋㅋㅋㅋㅋ 다 먹고 배가 부른채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마 배불러요, 걱정마삼 ㅋㅋㅋㅋㅋㅋ 했더니 남동생이,
"도대체 왜 배가 부른거냐?"
물어왔고... ㅋㅋ
아, 맞다. 나 책상 샀다.
그러니까 서재방에 식탁으로 사용하던 책상이 이미 있는데, 거기에 제대로 된 침대를 들여놓고 퇴원하신 아빠의 침실로 쓰는 중이라, 밤에는 들어가 책상을 쓸 수 없었다. 주말밤에는 특히 내가 그래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데, 그렇게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자세가 점점 미끄러지고 정말 허리에 무리가 가는 자세가 아닌가.
나는 이제 더이상 화장을 하지 않아 화장대가 별로 쓸모가 없고, 그걸 책상으로 사용하려고 했더니 너무 작고 너무 낡기도 했던 바, 일전에 조카가 알려준 독서실 책상을 사기로 했다. 일단 몇 개 안되긴 해도 스킨 로션 같은게 화장대에 있는데 정리 못하는 나는 또 엄청 지저분해. 조카가 알려준 독서실 책상은 문 달린 수납장이 잇어 그 안에 화장품 때려넣자, 하고 책상을 주문했다. 그렇게 짠-
으하하하하하하하 덕분에 저 문 열고 화장품 다 때려넣었고(화장대는 폐기물 수거 신청해서 완료되었다), 아니, 세상에 위에 책장이 또 있기 땜시롱 바닥에 늘어진 책들 몇 권도 꽂을 수 있었다. 일단 저 책상 위에는 한나 아렌트 싹 다 옮겨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젯밤에는 저 책상에 앉아 등을 켜두고 《런어웨이》를 다 읽고 잤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성장이 어느순간 노화로 변하는 건 아닌것 같다. 노화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성장 역시 계속 진행되고 있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화와 성장은 같이 갈 수 있으며, 같이 가는 것이 더 낫다.
아니 그런데, 화장대 내다버리고 책상 사는 중년 여성 어떤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