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이 모두 돌아가고 혼자만 남은 고요한 시간. 안주를 차려두고 와인을 꺼내 텔레비젼 앞에 앉아 영화를 보았다. 무얼 볼까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넷플릭스에서 로맨스 영화를 보았는데, 이 얘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이제 다 먹고 치우고 설거지를 할시간. 동생네 가족은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영화 <킬러의 보디가드2> 를 볼거라 했다. 치우는 과정에서 그 영화가 시작하길래, 앞부분만 조금 보게됐는데, 그전에 이 영화를 본 적이 없어 줄거리를 모르던 터. 한 여자가 자신의 남편과 결혼을 해야 하는 과정에서 남편이 사라졌다며 안식년을 가진 킬러 주인공(라이언 레이놀즈)을 찾아와 남편을 같이 찾아달라 하는거였다. 주인공은 안식년이라 그럴 수 없다고 했는데 여자는 니가 찾아줘야 한다며 설득했고, 이 과정에서 둘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근데 화면에서는 라이언 레이놀즈의 옆모습이 보이고 그 앞에 앉은 여배우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채로 옷 사이로 조금 드러난 가슴이 계속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보는 화면에서는 일단 맨 앞에 여자의 가슴이 약간 보이고 그 뒤로 라이언 레이놀즈의 얼굴이 보이는거다. 그 장면이 너무 불쾌했고 싫었다. 카메라가 저렇게 찍어야만 했나? 아마 그랬을 거다. 의도하는 바가 있어 여성의 가슴을 스쳐가면서-마치 의도한 게 아니라는듯- 그 뒤에 남자를 보이게 배치했겠지. 나는 이 영화를 가족들 모두 함께볼거라는 동생네가 생각나면서 이거 나의 조카들이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게 될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게모르게 영향을 미칠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이 장면이 상징하는 바를 제대로 풀어준 책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책장 앞으로 갔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을, 그리고 저렇게 구성된 영화의 화면에 대해 분석하고 꼬집어준 책이 있을 것이다, 싶었던거다. 그렇게 책장 앞으로 가 섰는데 어떤 책이 거기에 맞는 책일지 모르겠다. 부드럽게 여성을 죽이는 방법? 이 책이 그걸 말해준걸까? 이래저래 망설이다가 내가 골라 꺼내온 책은 이것이었다. 박정자, 《시선은 권력이다》
그렇게 식기세척기를 돌려두고 분리수거를 하고 온 뒤에 이 책을 펼쳐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는데, 내가 기대한 내용의 책은 아니었다. 아, 이건 살짝 어긋났네, 내가 원하는 내용은 아니야. 그렇지만, 이 책은 이 책대로 너무 좋았다. 이런 부분은 특히 밑줄을 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L Être et le néant》 (1943)에 나오는, 열쇠구멍을 통해 남의 방을 들여다보는 남자의 이야기는 수치의 존재론에 대한 탁월한 예시이다.
나는 열쇠구멍을 통해 어느 방을 몰래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단지 그 방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만을 지각할 뿐, 나 자신을 의식하지 못한다. 나는 주체(sujet, subject)이고, 방안의 장면은 대상(objet, object)이다. 나는 방안을 바라보는 주체로서만 존재할 뿐, 나 자신을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나는 세계의 중심이고, 물론 수치심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가까이 온다. 누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나는 내 행동이 상스럽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진다. 이때까지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타인의 시선이 닿자마자 나는 열쇠구멍에 눈을 대고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는 추악한 내 모습을 인식한다. 혼자 있을 때 자신을 의식하지 않던 나는 타인의 존재가 나타나자마자 나를 대상(오브제)으로 의식하고, 나의 행동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파악한다.
타자는 이처럼 나와 나 자신을 연결하는 필요불가결의 매개자이다.
나는 남에게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을 때만 나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남의 시선이 없다면 인간에게 수치심은 없다. 단순히 수치심만이 아니라 존재의 기초 자체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까지 우리는 유추해 볼 수 있다. -p.30
이 구절에서 생각나는 영상이 있어 검색을 이래저래 해보았는데 오래전의 영상이라서인지 그리고 내가 키워드를 제대로 넣지 못해서인지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몇해전 본 영상속에서는-그것은 아마도 성희롱 예방 광고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남자들이 길에서 만나는 여자들의 신체 일부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러면 상대 여자는 자신의 신체를 바라보는 그 남자에게 그대로 거울을 비춰 '저 여자를 성적으로 바라보는 나'를 보게 한다. 그러면 그 남자들은 부끄러워하는거다.
내가 찾던 책속 구절은 아니지만 와 저 내용이 너무 좋은거다. 게다가 사르트르, 수치의 존재론.. 이런걸 어렵지 않게 바로 설명해주는게 너무 좋은 거다. 내가 기대한 여성주의적 시점에서 쓰여진 책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이 책은 그 자체로 너무 훌륭한 책이었고, 무엇보다 시선과 권력에 관해 풀어놓는데 그걸 너무 쉽게 풀어놓아서, 저자인 박정자가 계속 데려오는 푸코와 사르트르, 헤겔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거다. 아, 푸코가 그랬던거구나, 아 푸코가 그래서 대단했던거구나, 를 되게 쉽게 파악하게 해준달까. 너무 좋아!
자, 우리 좀 더 살펴보자.
대상을 향해 초월적 운동을 하는 우리의 의식은 외부의 대상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의식의 앞에 두고 성찰할 수도 있다.
‘자기와 대면한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대자(對自) 존재라고 부른다. 나무나 돌멩이 같이 초월성도 없고 자기와 대면하는 능력도 없으며 그저 자기 자신으로 자족해 있는 상태의 사물들은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다‘라는 의미에서 즉자(卽自) 존재라고 부른다.
대자존재인 의식은 자기와 자기가 이중으로 분리되어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지만, 속과 겉이 동일하게 단단하여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즉자존재는 대상을 의식할 수도 없고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도 없다. 스스로를 성찰하는 돌멩이는 이 세상에 없지 않은가.
자기와 자기가 이중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그 사이에 가느다란 틈새가 있다는 뜻이다. 틈새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므로 무(無)이다. 대자는 속에 무(無)를 품고 있는 존재양식이다. 이 ‘무‘가 다름 아닌 의식이다. 의식은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앞에 대상이 생기면 그 때에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에게서 인간의 의식은 ‘무이며, 인간은 속에 ‘무‘를 품고 있는 존재이다.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1889 - 1976)는 이것을 ‘벌레 먹은 사과‘로 비유했었다.
의식이 초월적 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무‘ 덕분이다. 속이 꽉 차 있고 빈 공간이 없는 곳에서는 내적 운동이 불가능하다. 장방형의 플라스틱 판 안에서 손톱만한 조각들을 움직여 글자나 숫자를 맞추는 퍼즐 게임을 생각해 보라. 거기에는 조각 한 개분의 빈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조각들을 이리저리 움직여 글자를 맞출 수 있다. 대자존재가 대상을 향해 초월적 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속에 ‘무‘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 P 33~34
아아, 박정자의 이 책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을 만나기 이전에 읽어두면 너무 좋을 책이다. 특히나 푸코를 읽기 전에 읽는다면 완전 울트라 따봉일것이여.
아, 그리고 그러면 안되는데 저기서 자꾸 드립치고 싶어가지고.. 일전에 '너가 개구리의 입장이 되어본 적 있니? 개구리는 이 계절에 악을 쓰고 살아있을 수도 있어' 라고 공대생 애인에게 말했던 나, 그런 나는 여전히 변함없는 나이기에, 대자와 즉자.. 돌멩이 얘기 읽다가, 그렇지만... 당신은 돌멩이가 되어본 적 있나요, 돌멩이 생각을 다를 수도 있잖아요? 라고 넘나 드립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 이런 드립은 누스바움 식의 시적 정의 아니련가... (닥쳐!)
아무튼 이 책 넘나 재미있는데, 와, 주인과 하인 부분에서도 최고였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두부류로 나뉘었다. 죽음도 불사하는 도박을 통해 상대방을 노예로 만든 주인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희생시켜 물질적 안위를 택한 노예들이 생겨난 것이다. 주인들은 노예로 하여금 자기 대신 자연의 조야성과 대결하여 사물을 가공하도록 함으로써 자립성이 제거된 사물을 얻게 되었다. 전에는 한 사람이 향유와 노동을 동시에 했으나, 이제부터는 향유만 하는 사람, 노동만 하는 사람으로 갈리게 되었다.
사물과 자기 사이에 노예를 끼워 넣은 주인은 결국 사물의 비자립성과만 관계가 있고, 사물을 가공하는 노예는 사물의 자립성과 관계한다. 주인은 잘 다듬어져 먹기 좋고 쓰기 좋게 된 자연의 사물만을 알 뿐 날 것 그대로의 억센 자연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노예는 인간의 가공에 저항하는 자연의 조야(粗野)한 측면을 안다. 즉 사물의 자립성을 아는 것이다.
노예는 처음에는 생명 때문에 남에게 예속된 비겁한 자였는데 나중에는 결국 자연과의 통일을 이루게 된다. 자아 대신 생명을 택한 까닭에 폭넓은 대자연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노예는 사회의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창조자가 되었다. 이것은 주인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다.
반면에 주인은 자연세계의 물질을 가공하여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대상을 직접 생산할 줄 모른다. 대상세계와 단절되어 오로지 모든 것을 소모하기만 하는 주인의 이러한 욕구와 충족 행위는 대상세계의 실체성과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 자연에 단단히 발을 딛지 못하고 노예의 노동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가상적인 생이라는 점에서 주인은 허공에 떠있는 공중인간 Luftmensch이다. 그의 인생은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부박한 삶이다. 주인은 자신을 주인으로 인정하지만 노예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노예는 자신을 노예로 인정하지만 주인을 노예로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노예는 자신에게 행한 것을 주인에게 행하지 않고, 주인 또한 노예에게 행한 것을 자기 자신에게 행하지 않는다. 따라서 양자 간에는 상호성이 결여되어 불평등한 관계가 수립된다. 한 쪽은 노예이고 한쪽은 주인이다.
주인은 즐기기만 하고 노예는 힘든 노동만 한다. 주인은 노예를 강제하고 노예는 주인의 명령을 따른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주인이 시키면 억지로 해야만 한다. 당연히 주인이 노예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이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반드시 주인은 아니다.
노예는 자신을 노예라고 생각하고 주인도 자신을 노예라고 인정하므로 그는 철두철미하게 노예이다. 그러나 주인이 주인인 것은 노예가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만일 노예가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노예의 노동이 없다면 주인은 주인의 지위를 잃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유지할 수조차 없다. 노예 없이 주인은 주인이 아니므로 주인의 개념은 전적으로 노예에 예속되어 있다. 자신의 존재를 노예에게 의존하고 있는 주인은 자신의 개념을 완성하자마자 노예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다. - P58~60
아니 너무 재미있지 않나. 정말 그렇지 않나. 만약 노예가 없다면 주인이 존재할까? 그러니 표면적으로 주인이 더 위에 있는듯 보이지만, 그러나 노예가 없다면 주인은 주인이 될 수 없다.
노예의 노동이 없다면, 주인은 어떻게 될까?
이 부분을 읽는데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로맹 가리'의 단편 <어떤 휴머니스트> 생각이 났다. 그의 단편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 실린 단편이다.
유대계 독일인 장난감 공장 사장은 히틀러가 아무리 압박해도 인간은 선하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자기 주변 사람들이 피난을 가도, 인간은 결국 선하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믿고 있었는데, 그러나 전쟁은 점점 더 그를 압박하고 장난감 공장에 출근도 못하게 되었다. 그는 한참 고민을 하다 자신의 집 일을 충실히 봐주고 있는 하인 부부에게 집과 공장을 맡긴다. 그리고 자신은 지하에 공간을 만들어 숨어들고, 그곳에 자신이 좋아하던 여러 사상가들의 책을 옮겨둔다. 자신의 서재를 꽉 채웠던 그 책들을 읽었던 바, 그들은 인간이 선하다고, 결국은 선의 길로 간다고 말해오지 않았던가. 하인 부부는 그를 위해 책을 옮겨주고 매일 식사를 챙겨주고 라디오를 챙겨주었고 또 신문도 매일 갖다 주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점점 더 어두운 뉴스만 찾아오는 바, 그는 이제 신문을 가져오지 말라했고 라디오도 치우라고 했다. 매일 하루의 끝자락에 남자 하인은 그에게 찾아와 그와 인간과 철학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올라간다. 여자 하인은 그에게 언제나 맛있는 식사를 차려다준다. 장난감 공장 사장은 역시 인간은 선하다고, 이들이 내게 베푸는 걸 보라고 감탄하지만, 그러나 지하에서 차려주는 밥만 먹으면서 점점 더 살이 찌고 쇠약해진다.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후, 장난감 공장 사장의 친구가 그의 집에 찾아가 벨을 누른다. 하인이 문을 열어서는 자신도 주인을 본지 한참 되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사장의 친구를 돌려보낸다. 그러나 사장은 여전히 지하에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이제는 몸져 눕게 되었다. 그동안 하인 부부는 장난감 공장의 매출을 두 배로 늘렸고 여전히 지하의 주인에게 음식을 챙겨다주고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고, 그 지하를 벗어나는 순간 이 집의 주인이 되며 또 장난감 공장의 주인이 된다. 지하에 있는 주인은 이렇게 오래 자신을 잘 챙겨주는 하인 부부에게 감사한다.
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주인이기 때문에 하인에게 이런 일을 부탁할 수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하인이 주인이 되었고 주인은 하인이 없다면 살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당시에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너무 놀랐고 로맹 가리를 다 읽어버리겟다 결심하게 되었는데, 어제 박정자를 읽으며 로맹 가리 생각이 난것이다. 크-
좋은 독서였다. 모두에게 읽기를 권하고 싶은데 이 책이.. 품절이지롱~ 나는 일전에 너무 읽고 싶어서 중고로 사두었다. 책은 역시 사두는게 약이다. 언제 어떻게 읽게될지 모른다니까? 없었어봐? 그럼 못읽었다. 그러니 미리미리 진작에 사둔 나를 칭찬한다. 그런데.. 이 책을 왜 읽고싶었었는지, 어떻게 알고 사게 된건지를... 모르겠네? 이거 사둔 나 정말 잘했지만, 그런데 왜 사둔거야??? 알 수 없다. 다만 그 때는 그 때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생각한다. 아무튼 잘했다, 나여. 뭐든 이렇게 잘해서 이걸 어쩐담? 책도 잘 사놔. 기특하다. 여러분 책 사두세요, 나중에 다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고 막 그래요. 사라, 사야합니다!!
참 ㅋㅋㅋㅋㅋㅋㅋ 쓰기도 챙피한데 ㅋㅋㅋㅋ '중학생도 안 볼 영화 내가 본다' 시리즈라도 만들어야 할까. ㅋㅋ 포스터만 봐도 아무도 안 볼 것 같은 영화 <크리스마스 캐슬>을 보았다. 혼자 와인 마시면서 볼 때는 이런게 좋다니깐요? 게다가 영화의 중간까지는 최근에 봤던 대부분의 영화보다 좋았다.
일단 책 속 여자가 중년의 여성인데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런데 그 베스트셀러 소설이 무엇이냐? 로맨스 소설이다. 그녀는 로맨스 소설을 열권 이상 낸 베스트셀러 작가라서 돈을 엄청 잘 벌었고 뉴욕에 큰 집이 있으며 그 집안에 서재도 있고 자신의 책 표지로 액자를 만들어 벽을 채워두기도 했다.
와, 나는 진짜 이 장면이 너무 좋았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어느 순간 내가 글 써서 번 돈으로 큰 집을 사고 한 쪽 벽면을 내가 쓴 책의 표지로 채우게 된다면.. 와우- 인생 진짜 간지작렬일텐데..
그런데 이 작가 '소피'(브룩 실즈)는 지금 안티팬들이 생겼다. 왜냐하면 그녀가 열한번째 소설에서 남주를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이에 팬들이 들고 일어났다. 아무리 니가 작가라지만 그를 죽일 자격은 없어! 사람들이 막 시위를 하고,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토크쇼에도 나가 변명을 해보지만, 토크쇼 진행자인 '드류 배리모어' 조차 '아무리 그래도 니가 남주 죽인건 좀 심했어' 라고 하는 것. 이에 소피는 폭발해버려서 '나는 그를 토막내서 죽일수도 있었고 상어 먹이로 줄 수도 있었는데 안그랬다고!' 소리질러 버린다.. 상황을 악화시켜버렸..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일했다던 성에 간다. 할아버지로부터 예전부터 이야기를 들었던 바, 아 휴가를 내가 나에게 주겠다, 하고는 스코틀랜드로 슝- 날아가버리는 거다. 크- 돈 있는 자의 여유. 역시 사람은 베스트셀러를 써야 해.. 나는 왜 못쓰는가...
소피가 스코틀랜드로 날아가 그곳의 성에 당도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서, 아 나는 이래서 영화를 보는구나 깨달았다. 나는 어릴때부터 영화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렇다고 영화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처럼 그런 어떤 비평적인 시선이라든가 하는 걸 갖지도 않았고 영화에 대한 전문적 지식도 쌓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영화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냥 약간 좋아하는건가 보다, 하고 말았는데, 연휴동안 이 영화를 보면서, 아니 나도 그들만큼 영화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과는 다른식으로 좋아할 뿐이다,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게 좋은거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스코틀랜드의 풍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 나는 이게 좋다. 내가 쓴 책의 표지로 벽면을 채울 수 있다는 것. 나는 이게 좋다. 일전에도 굉장히 가벼운 영화(아마도 올슨 자매가 나왔던 것 같은데)를 보면서도, 별 내용 없는데 맨하튼 거리가 나오는 걸 보고 심장이 뛰었던 적이 있다. 나는 이런게 좋다. 영화속에서 지금의 여기가 아닌 지금의 저기를 보여주는, 그런 장면이 좋다.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동네의 풍경, 도시이든 전원이든(도시가 더 좋지만)을 보여주는게 너무 좋다. 나는 그런게 너무 좋다. 자다 일어나서 커피를 내려 마시는 장면도 좋아하고 바깥에 나가 까페에 들러 커피를 주문하는 장면을 보는 것도 좋다. 사람들 각자가 저마다 하고 싶은 행동을 하고 그것이 나의 선택과는 다르고, 그것을 영화속에서 볼 수 있는게 너무 좋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드라마는 잘 못보면서 영화를 보는건 그동안 영화가 더 짧아서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즉각적인 다른 곳의 풍경과 인생을 보여주는 건 영화라서 내가 영화를 더 좋아하는가 보다. 영화 좋다 너무 좋아. 이래서 남들이 안볼것 같은 영화도 나는 계속 보는것 같다. 아무리 허접한 영화라도 나는 그 안에서 뭔가 좋은게 있어!! 스코틀랜드를 보다니, 오래된 성의 뜰을 자전거 타고 다니는 여자를 보다니. 아니, 너무 좋잖아? 나는 이런게 진짜 너무 좋은거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좋은 영화는 아니다.
하아- 일단 한숨 한번 쉬고,
넷플릭스가 추구하는 어떤 영화 타입이 있는 것 같다. 페미니즘 적당히 묻혀가면서 당당한 여주인공, 다양한 여주인공 내세우지만, 어떻게 이렇게 여자들이 하나같이 슈퍼 오지라퍼인지.. 영화속에서 소피는 자신이 머물게 된 호텔의 직원과 동네 사람들과 친해지는데 나중에 크리스마스 파티 할 때 뉴욕에서 드레스를 다 한벌씩 주문해주고(네?), 그곳을 떠날 때는 '여러분들의 빚을 내가 다 갚아줄게요' 한다.
네??
난 좀 어이가 없...
네??
며칠전에 넷플에서 본 영화도 여주가 동네 사람 모두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고 그랬는데 이 영화에서도 그래. 나는 그것이 내 성향과 너무 안맞는 것 같아서.. 어쩜 그렇게 술집에 가도 모두 다 알고 친하고 함께하고 그럴까. 까페에서 혼자 구석에 앉고 싶은 그런 마음 같은거, 없어요? 좀 당황.
게다가 남자주인공.. 여기에서 공작으로 나오고(duke!), 소피의 딸도 처음 보고는 '와우' 할정도로 잘생기게 나오는데... 나는 당황합니다. 그래요, 미에 대한 관점은 주관적이니까... 그런데 잘생겼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예고를 가져올게요, 여러분.
그런데 유독 외국영화에서 이혼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게 너무 좋다. 응 일년전에 이혼했어~ 이러고 나도 결혼한 적 있어~ 이러고 말하는 거 좋다. 인생사 살다보면 그런 일도 있고 이런 일도 있지, 하는 것 같아서 좋다.
그리고 중년 로맨스도 좋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그렇다는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음 그리고 로맨스 소설에 대해서 대한민국이랑 좀 많이 시선이 다른것 같다. 영화속에서 로맨스 소설 작가인데 베스트셀러이고 토크쇼에도 출연하며 사람들은 그녀의 소설을 읽은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하고 시위도 하고 그런다. 국내에서는 로맨스 소설 읽는다고 하면 뭔가 좀 무시하는것 같은 경향이 있는것 같은데, 뭐 그래봤자 나는 잘만 읽고 잘만 보지만 ㅋㅋㅋ 잘생긴 개자식 같은거, 낯선 살냄새 같은 거 나는 대놓고 읽으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소피가 자신의 책 표지 진열해둔거 보니 저 책들 나도 읽어보고 싶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영어 겁나 잘해가지고 영어 로맨스 정복해버릴거얏!
그나저나 새해가 되었고 나는 친구들과 원서 읽기를 계속하고 있는 바, 혼자 도전한 책이 생겼다.
많은 책들중에 이 책을 선택한 건 첫 문장이 너무 쉬웠기 때문이다. 지금 책이 없어 가져올 수가 없지만 'Keever'같은 덩치의 사람을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같은 문장이었던 것 같다. 오호라, 할 수 있겠는데? 하고 들고왔고 번역본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서 도전하면서 번역본을 가급적 나중에 펼쳐보자, 늘 먼저 봐왔지만 이번엔 그냥 부딪혀보자, 했다. 그렇게 고작 몇장 읽었고 대충 넘긴 부분도 많지만 현재까지 대략적인 줄거리 파악은 가능했다. 늦은 밤 잭 리처는 전시장 간판에 이끌려 기차에서 혼자 내렸다. 기차역에는 어떤 여자가 자신의 친구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잭 리처는 그녀에게 이 기차에서 내린 사람은 나뿐이야, 이 근처에 모텔 있니? 물었고 그 모텔에 가 주인과 가격을 흥정한 뒤 방을 하나 얻었다. 잭 리처가 기차에서 내리기 전 그곳에는 시체를 묻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리고 잭 리처가 모텔에 도착하고 잠을 자고 다음날 박물관 찾기 위해 동네를 쏘다니는 걸 동네 사람들이 서로 전한다. 후훗. 여기까지 파악한 상태인데, 나는 이 책을 번역본의 도움 없이 읽어낼 수 있을까? 한 번 도전해보겠어! 이 책을 완독하는 것이 2022년의 목표다. 천천히, 단어를 찾고 싶으면 찾아가면서 아니면 그냥 넘기면서, 가급적 번역본의 도움 없이 책을 읽어보는 걸로, 한 번 해보자! 다 읽으면 번역본 읽으면서 내가 이해한게 얼마만큼 정확한지 비교해봐야지. 이거 몇 장 읽고 아 너무 두꺼운 책 골랐네, 얇은 걸로 할걸.. 후회했지만, 뭐 한 번 해보자. 그전에 내가 잭 리처를 여러차례 읽어두었기 때문에 이 책을 그나마 이정도까지 파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도전!!
얼마전에 서재에 처음 오시는 분이 올해 자신의 롤모델이 다락방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아니, 왜 저를.. 왜때문에.. 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힘이 났다. 좋아써!! 더 열심히 살아보는거야!! 더 멋져지는거야!! 막 이렇게 되었다. 나는 그저 나로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누군가 나에게서 좋은 모습을 보고 닮고 싶어한다니, 인생 진짜 개멋지게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럼 이만.
시선은 타자와의 관계이고, 나와 세계를 맺어주는 기본적인 매체이다. 따라서 시선이 인간관계의 기본인 권력관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 P6
우리의 의식은 대상 없이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어떤 대상 앞에서만 스스로 형성되는 그런 존재이다. 처음에는 투명하여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무(無)의 상태이다가 앞에 어떤 대상이 나타나면 그 순간에 작동을 시작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의식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항상 ‘그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 이다. 이것이 후설Edmund Husserl(1859 - 1938) 현상학의 기본 원리인 지향성(指向性)의원리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도 여기에 기초해 있다. 향일성(向日性) 식물이 언제나 해가 있는 쪽으로 줄기의 방향을 돌리듯, 의식도 언제나 대상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의식의 지향성이다. - P32
우리가 타자의 시선 속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그의 의식 앞에서 내가 대상, 즉 사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타자에게있어서 나는 주체가 아니고 대상이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왠지 불편하거나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는 내가 그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방적으로 그에게 바라보임을 당할 때 나는 그의 의식의 대상이 되는데, 대상이 된다는 것은 주체인 타자가 나를 객체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동시에 내가 물질성을 띠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도 속에 의식을 품은 어엿한 인간이건만 그 인간성이 부정되고 한갓 물건으로 전락한 것이다. 대상이란 곧 물체이기 때문이다. - P36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와 인식을 갖고 있다. 남들이 하찮게 보고 있지만 실은 뛰어난 장점도 갖고 있고, 지금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겨우 고시원 쪽방에서 살고 있지만 앞으로 얼마든지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그 많은 견해와 인식들이 타인의 시선 앞에서 되고 마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은 나의 여러 가지 실존적 가능성 가운데 하나만을 대상으로 고착시킨다. 그것은작가 김영하의 말마따나 ‘앞으로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될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 그런 시선이다. - P36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건 그것은 이미 타인이 존재하는 세계, 다시 말해서 내가 타인에 대해 잉여적인 존재인 그런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죄란 우리가 사물의 한가운데에 떨어졌다는 것‘이라는정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르트르는 ‘원죄란, 이미 타인이 존재하는세계 속에 내가 나타났다는 사실‘ 이라고 말한다. 타인은 이처럼 나를 물체로 만드는 사람, 나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사람,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이고, 나의 세계를 빼앗아 가는 사람이다. 사르트르의 희곡 《밀폐된 방 Huis - clos》(1944)에서 타인의 시선에 고통스러워하며 주인공이 내뱉는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야" 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인간들 사이의 화해는 존재론적으로 아예 배제된다. - P48
신체형의 정치경제학적 의미에서 짚어 보았듯이 인간의 몸은 직접적인 정치의 영역이다. 신체를 공격하고, 낙인을 찍고, 훈련을 시키고, 고통을 주고, 노역을 강제하고, 의식(儀式)을 강요하고, 여러 가지 기호를부여하는 등 인류 역사 이래 권력이 표적으로 삼은 것은 언제나 몸이었다. 유혈적이고 폭력적인 왕조시대의 처벌은 몸을 직접 대상으로 삼았고, 18-19세기의 감금과 교정의 온화한 방법은 몸을 간접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여하튼 권력의 대상은 언제나 몸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육체를 파괴해 온 역사에 다름 아니다. - P123
요즘은 자유롭기 그지없지만 과거 우리의 중· 고등학교에서는 귀밑몇 센티미터로 머리 길이를 제한하고 규율 부장이 교문에서 학생들의리 길이를 자로 재던 시대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규율이다. 귀밑머리가3센티미터가 아니고 왜 하필 2센티미터인가, 또 감옥에서 기상 시간이왜 6시 반이 아니라 꼭 6시여야 하는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다만그것을 지키도록 만드는 과정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인 것이다. 미세한 규칙들은 권력이 스며들어가는 모세혈관이다. - P130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이 푸코를 비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점에서이다. 감시하는 시선을 절대시하는 푸코와 달리 그는 감시자의 시선이 항상 전능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감시자는 대상을 감시하지만 동시에 그 대상이 또한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불안해한다. 감시하는 자의 이런 불안은 감시당하는 자의 불안을 능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Slavoj Zizek, 《Tarrying with the Negative), Durham, North Carolina: Duke University Press.) - P195
타인의 시선 앞에서 얼어붙은 듯 꼼짝 못하게 된다는 것은 타인과 나 사이에 지배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선은 권력의 관계이다. 타인이 우리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우리를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은 모두 시선을 통해서이다. 페미니즘에서 시각을 비판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우리의 지각중에서 시각이라는 지각은 하나의 주체가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바라보는 주체와 바라보이는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 사이에는 얼마간의 거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라보는주체가 대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므로 주체는 대상에 대해 우세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그런데 남성과 여성 사이에도 이런 관계가 형성된다. 종래의 여성에대한 모든 관점은 주로 남성들이 만든 것이다. - P221
즉 주체로서의 남성이 여성을 대상으로 보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여성의 모든 것을 재단하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남성적인 시선이 여성을 대상화하고, 주체와 객체와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 그러나 객체인 여성도 역시 자신의 견해와 생각을 갖고 있는 주체이다. 다만 남성적인 시각에 의해 대상으로 떨어졌을뿐이다. 여권론자들이 응시(바라봄)를 남성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든전통적인 과학과 철학을 비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과학, 철학 등 서양의 모든 근대학문은 관찰을 중시하고 대상과의 비판적 거리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는데, 이것이 바로 시각의 성격이다. 근대 사회는 시각을 강조함으로써 인간 주체가 배제된 자연과학과 철학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 P222
우리의 지각 중에서 여권론자들이 새롭게 관심을 갖는 영역은 촉각이다. 촉각은 청각이나 시각 등 다른 지각과는 달리 유일하게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가 없는, 주체와 대상이 밀착되어 있는 지각 형태이기 때문이다. 남성적인 시각 대신 여성적인 촉각을 강조하고, 주체와 객체의분리가 아닌 합일에 기초한 새로운 과학과 철학의 필요성을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미래의 시대는 여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미래학자들이 ‘터치‘ 라는 말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하이테크의시대가 남성의 시대였다면 앞으로의 사회는 여성적 감각이 중시되는 하이터치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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