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잘한 과목은 거의 없고 못한 과목이 수두룩한데 거기에는 <정치경제>가 있다. <사회문화>도 못했고, 물론 가장 못한 건 <한국지리>, <세계지리>, <국사>... 등이지만. 못한 걸로 치면 이것들이 내가 더 못했다 으르렁 싸우는 판이다. 나는 왜그렇게 저런 과목들이 싫었나 모르겠다. 한국사 같은 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전에 선생님이 주관식 예상 문제를 뽑아주기도 했다. 그래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 그러니까 성적으로 뒷편에 있는 아이들도 국사 과목의 주관식은 거의 다 맞히고 그랬는데, 나는!! 이 나는!! 그래도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지금도 외우는 걸 진짜 못한다. 정치경제, 국민윤리, 사회문화, 세계사.. 진짜 너무 못했고 재미도 없었고 선생님도 안좋고. 내가 뭐 좋아할 구석이 하나도, 코딱지만큼도 없었던거다.
그러나,
미래는 예측 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삼십대가 되고나서부터 내 안의 여행 욕망이 포텐 터지기 시작하더니 나는 들로 산으로 나다니기 시작했고, 사실 내 여행은 먹고 호텔방에 뒹굴뒹굴이 고작이라고 생각해왔고 그렇게 살아왔지만, 다니면 다닐수록 내가 가는 곳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비행기로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지 궁금해졌고, 그래서 갈 때마다 지구본을 돌려보게 되었고, <걸어서 세계속으로>, <세계테마여행>, <스트리트 푸드파이터> 같은 프로그램이 최애 프로그램이 되면서,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지구본을 들고와 어디쯤인가 찾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아아.. 지도 보는 거 할 줄 모르는 나였는데, 만약 지금 다시 세계지리 배운다면 고등학교 때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자신이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금이 많이 난다는 건 지겹게 들어서 알고 있지만 시험문제에 금이 많이 나오는 나라를 지도에서 찾으라고 나오면 답을 맞히지 못하는 나란 슬픈 다람쥐...
학교때 공부 못했던 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슬프다.
웬디 브라운의 남성됨과 정치 읽고 있는데, 정치 영역에서 여성은 배제되어 있었다.. 라는 뉘앙스의 글일 거라고 생각했다가, 아아, 교수님이 박사님이 그렇게 쉽게 글을 써줄 리가 없지. 책을 펼치고 서문에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랑(네?), 마키아벨리, 베버... 라는 이름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름은 내가 안다. 이름만 안다. 그게 전부인 것이다.
이름만 알고 그들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넘기는 이 책은 어렵다. 결코 쉽지 않다.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가장 먼저하는 것이 '이 쉐키들.. 여성을 왜 무시하고 그래!' 하는 것이 아니라, '아, 학교때 공부 좀 열심히 할걸 ㅜㅜ' 이것이다. 어른들의 말은 언제나 맞았다. 공부도 다 때가 있는 것이여... 나는 언제나 반골기질 투철하고 들이박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라서, 공부는 전부가 아니야! 이러면서 공부를 1도 안하다가(걍 공부하기 싫었던 꼬꼬마..) 지금 이 꼬라지로, 아아 그 때 어른들 말씀이 다 맞았어... 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 너무 아깝다고 누가 그랬던가. 휴우.. 박범신이 그런 건 아니길 빈다. 박범신 말 같은 거 가져오고 싶지 않아...
자, 이 책의 서문에서 이미 어느 인물들에 대해 다룰지 얘기하고 또 어떤 순서로 나올지 얘기하지만, 처음 다루는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누구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라는 것만 알고 시작하면 이 책을 읽다가 힘들어진다. 일단 기본적으로 서문에 언급된 용어를 기억하고 가는 게 좋다. 안그러면 읽다가 용어 만났을 때 네이버 사전 뒤지거나 책 앞장을 넘겨야 하는데, 뭐 그렇게 하는 것도 다 좋지만, 친절한 내가 지금 미리 언급해주겠다. 먼저 간 자의 다정함이랄까.
나는 그들이 드러내 말하지 않은, 젠더화된 가정과 속성의 베일을 벗기려고 했다. 나는 그들이 혐오하거나 정복 대상으로 삼는 것 즉 본성 ·욕구·필요에 대해, 그리고 종속과 의존적 존재·정서성·취약성·필멸성·육체에 대해서도 탐구했다. 그리고 그들이 물구나무서듯 전복한 것들에 대해 숙고했다. 즉 공적 영역에 해당하는 폴리스polis가 존재론적으로 사적 영역에 해당하는 오이코스 oikos(집)에 선행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약삭빠르고 야수 같은 비르투virtu의 힘으로 포르투나fortuna를 들어 매치려 한 마키아벨리의 시도, 남성적인 면을 더욱 강화해 남성주의적 합리성으로 지어진 강철 우리를 벗어나려고 한 베버의 시도 등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한국어판 서문, p.18
자, 저기 저 부분.
'공적 영역에 해당하는 폴리스polis가 존재론적으로 사적 영역에 해당하는 오이코스 oikos(집)에 선행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이 아리스토텔레스 부분을 읽는데 필요하다. 폴리스와 오이코스가 수시로 나온다. 그러니 여기 이 부분, 공적 영역에 해당하는 폴리스(네이버에서 검색하며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라고 나온다)와 사적 영역에 해당하는 오이코스를 기억하고 책을 읽기 시작하자.
오만년전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읽었었는데, 마키아벨리 부분 읽을 때 내용이 기억나며 도움이 될까? 모르겠네. 나는 한마리의 무식한 짐승이여..
아니,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읽는데 아렌트가 등장한다. 웬디 브라운은 한나 아렌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그러나 더 극단으로 밀어붙인다고 얘기한다. 아렌트.. 에 대한 책, 그러니까 입문서만 일단 몇 권 읽어본 나로서는 웬디 브라운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 아아 역시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겠구나 결심하게 되었다. 웬디 브라운은 사실 한나 아렌트의 어떤 지점들을 비판하긴 하는데, 나는 한나 아렌트에 대한 부분을 읽을수록 한나 아렌트가 너무 좋은거다.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것처럼 말과 행동이 탁월해지도록 노력해 이를 다른 이들이 보고 들을 수 있게 하고 후대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 아렌트는 그것만이 우리가 불멸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역설했다. -p.77
아렌트가 보기에는, 피할 수 없는 죽음에 극렬히 향하는 것을 목표로 행동하는 이들만이 온전한 인간이다. 자신의 선택 때문이든 상황 때문이든 간에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사이에서 지루하게 노력해야 하는 괴로운) 삶이라는 진흙투성이 진실에 갇힌 이들은 결코 인간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저 생물일 뿐이다. 아렌트는 이런 사람들을 '노동하는 동물' (그리스어 '이디온idion'에서 따온) 백치 idiotic' 또는 그냥 '빼앗긴 자' 등으로 불렀다. 그녀는 그리스인에게 사생활, 즉 혼자 있는 상태는 그야말로 박탈을 뜻했다고 지적한다. "사적인 삶만 사는 사람은 마치 공적 영역에 출입할 수 없는 노예 또는 그런 영역을 만든다는 생각도 못 한 미개인(그리스인이 아닌 사람)이 인간 지위를 거부한 것이 그들 사회의 공동체 부재나 자유의 결핍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보았다. 노예와 '미개인'이 스스로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이유는, 강제 때문이든 선택 때문이든 어느 쪽도 자기 집단에서 탁월함을 보이며 불멸을 추구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78
노동하는 동물? 백치? 이런 부분은 비난받을 부분인 것 같은데 사적인 삶만 사는 사람과 공적 영역.. 부분에 대해 읽어 보노라면 저렇게 말한 흐름을 알고 싶어진다. 대부분의 용어나 문장을 아직까지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 가져왔던데, 인간의 조건을 가장 먼저 읽어봐야겠다. 사실 나는 읽게 된다면 예수살렘의 아이히만.. 을 먼저 읽어보고 싶었는데.
그녀가 『인간의 조건』에서 활동적 삶viva activa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펼치면서도 고대 그리스에 대해서든, 현대 우리 시대에 대해서든 진정한 행동의 확고한 예를 들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행동이 (…) 없는 삶은(…) 말 그대로 세계에서 죽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행동이란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주도권을 가진다는 것을 뜻하고", 인간적 특수성을 드러낼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행동에는 그 무엇보다 타자의 존재가 필요하고, 고립된 채 행동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행동은 "늘 관계를 수립하고, 따라서 모든 한계 지점을 강제로 열고, 모든 경계를 가로지르는 내재적 경향이 있"으며, 진실한 정치적 행동은 동기로부터 그리고 결과에 대한 모든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정치적 행동은 삶을 위한 것도, 삶에 대한 것도 아니어야 하고, 물질적 존재의 어떤 측면을 위한 것도, 그에 대한 것도 아니어야 한다. 그것의 기능 또는 에토스는 자기 노출이지 결코 유용성이 아니다. 참된 정치적 행동은 힘이나 폭력이 아니고, 후세 사람들에게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기록하려면 연설이 필요하겠지만 연설만으로는 안 된다. -p.122
...좋은데? 한나 아렌트 좋은데? 정말이지 인간의 조건을 읽고 온 몸으로 흡수하고 싶다. 그런데 웬디 브라운은 이렇게 주장한 한나 아렌트의 잘못된 점을 지적한다.
아렌트는 행동을 이론으로 정식화함으로써 행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육체와 물질적 삶을 거부한 그리스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머지, 정칙적 행동을 우상숭배에 가깝게 옹호하면서도 그것의 가능성 자체를 지워 버린 것이다. 행동에는 사고와 말뿐만이 아니라 육체가 필요한데, 아렌트는 정치에 육체가 끼어드는 것을 거부했다. 이렇게 본다면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오독한 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리에서 논리를 다소 터무니없게 극단으로 밀어 붙인 것이다. -p.123
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정치에 육체가 끼어드는 것을 거부했다, 행동을 이론으로 정식화해서 행동을 불가능하게... 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가 이게 무슨 말인지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조건을 읽는 게 선행되어야 할까?
역시.. 책은 계속 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니, 웬디 브라운 님하..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베버 다룬다면서 왜케 한나 아렌트 얘기 하지요? 한나 아렌트 사야되잖아요... 휴.....
아무튼, 이 페이퍼 읽는 어린 혹은 젊은 학생들이 있다면 반드시 명심하세요.
공부하세요. 부지런히 공부하세요. 달달 외우세요. 그것은 나중에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 안하면 후회합니다.
자, 여러분. 공부하자.
그럼 이만.
남성이 노예·여성·동물의 육체에 대한 통제권을 얻으면, 이들은 오직 남성의 욕구 파악과 충족을 통해서만 ‘인간‘의 구조에서 생존과 장소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정신까지 남성의 욕구에 바치게 된다. 이런 이중 소외 과정, 즉 주인에게 육체적 본성과 욕구를 내줄 뿐만 아니라 자기 지향의 정신까지 내주는 소외 과정에서 사실상 새로운 생물, 길들거나 장애가 있는 이들이 등장한다. 이런 생물들이 자족성을 위한 수단을 빼앗겨서 자신의 생존 수단도 없이 유지되는 한 자유로운 남성들이 그들을 다스리고, 그들로부터 혜택을 취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 보일 수도 있다. 미시적으로 볼 때 여기에는 주인과 노예, 남편과 가족, 인간과 동물, 정치의 영역과 필요의 영역 등의 ‘자연스러운‘ 관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식화가 있다. 지배와 착취의 정치라는 조건이 제도적·이데올로기적 변환을 통해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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