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말로 시리즈 국내 번역을 오래전에 다 읽었었고 말로를 꽤 좋아했었다. 그 시니컬함과 유머감각 넘나 내 스타일인 것. 그러니까 이런 걸 보자.
우연히 덩치 큰 남자를 만났는데 덩치로 그 우악스런 손으로 필립 말로를 억압한다. 그리고는 필립 말로에게 자신은 '벨마'라는 여자를 찾고 있고 그녀가 여기 있을것이니 같이 찾으러 올라가자고 말한다. 그 때 필립 말로가 이런다.
"당신하고 같이 올라가주지. 하지만 나를 안고 갈 생각은 마시오. 걸어가게 놔두란 말이오. 나도 다 컸으니까.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있고 뭐든 혼자 할 수 있다고. 나를 들고 가지만 말란 말이오." -책속에서 (페이지 안적어서 모름)
아 너무 웃기지 않나.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있고 뭐든 혼자 할 수 있다고, 라고 말하는 필립 말로 몇 짤? 삼십대 되시겠다. ㅋㅋㅋㅋㅋ 나는 저런 조크 왜케 웃기지? 필립 말로의 유머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헤밍웨이에 대한 것도 그렇다.
"이제 숙녀들도 없고 친구들끼리니까, 당신이 왜 거기까지 올라갔는지 따지려고 별로 시간 낭비 하지 않겠소. 하지만 이렇게 나를 헤밍웨이라고 부르는 건 진짜 기분이 언짢거든."
"농담 좀 한 거요. 케케묵은 농담이지."
"허밍웨이라는 사람이 누구길래?"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훌륭하다고 해줄 때까지 똑같은 내용을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남자지."
"그러자면 시간이 죽도록 오래걸리겠군." - P239
ㅋㅋㅋㅋ 자기를 잡아가는 형사가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다시 반복하는 걸 보고는 헤밍웨이라고 부르면서 저렇게 말하는 거다. 웃김 ㅋㅋㅋㅋㅋㅋ
그렇게 오래전에 좋아했고 여전히 그의 농담에 웃지만 오만년만에 재독하는 필립 말로는 그런데 이제는 작별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머는 여전히 좋지만 이게 원래 이렇게 문장이 산만했었나? 읽다보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것 같은 문장들도 있고 여튼 매력은 여전하지만 이제 세이 굿바이 해야 하겠다. 필립 말로 시리즈도 내 책장 한 칸을 당당히 차지 했었는데 지난번에 빅 슬립 읽고 팔고 이젠 안녕 내사랑 읽었으니 팔겠다. 하나씩 정리해주고 그 자리에 잭 리처 넣어야지.. 미안 말로여.. 잭 리처 승! ㅋㅋㅋㅋㅋ
아무튼 다시 읽으면서 필립 말로 캐스팅을 해보았는데, 필립 말로를 좋아하는 내 친구는 내가 말로에 어떤 배우가 좋을까, 했더니 대뜸 '존 햄'을 댔다. 자, 그는 이렇게 생겼다.

(단백질 쉐이크를 잔뜩 먹고 웨이트한 필립 말로)

(우연히 만난 여자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필립 말로)
이미지가 확 오긴 하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필립 말로라기엔 지나치게 잘생긴 거 아닌가 싶다. 좀 부담스럽게 잘생긴 타입이랄까. 친구에게 아니, 잘 어울리는데 좀 너무 잘생긴 느낌인데? 했다.
사실 시니컬한 유머에 있어서 나는 '재이슨 스태덤'을 떠올렸더랬다. 그런건 그가 정말 잘하지. 게다가 사람이 뭔가 똭 단단한 이미지이고 좋잖아? 그런데 <안녕 내사랑> 읽다가 재이슨 스태덤을 필립 말로 시키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필립 말로 너무 여자들하고 썸씽 일으키고 다녀. 확 로맨스도 아니고.. 나는 영화에서 재이슨 스태덤의 로맨스를 보고 싶지 않다. 아, 근데 이렇게 쓰는 순간 그가 호주의 어떤 큰 초원을 말 타고 달리고 여자가 그를 찾아갔던 그런 영화가 있었던것 같은데.. 아, 그거 보고 내가 오천년전에 페이퍼도 썼던 것 같은데.. 로맨스도 있고 찾아가는 여자도 있고 그런 영화였는데... 뭐였는지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 신이시여..
어째 내가 생각하는 필립 말로가 '주드 로' 라거나 '브루스 윌리스' 라거나 해서, 아아, 나의 나이 너무 여기서 나와버리는구나. 나의 필립 말로 나랑 같이 늙어간거임? 하고 다시 찾아보고 또다시 찾아보고 했다. 그러다 최근 본 <돈 룩 업>의 디카프리오 생각이 났다. 꽃미모 시절의 디카프리오는 필립 말로와 거리가 멀지만, 영화에서 내내 '섹시하다'고 나오고 살찌고 어딘지 살짝 비열한 듯한 디카프리오는 나름 잘 어울리는 것 같은거다.

(나에게도 리즈 시절이 있었다고 부르짖는 필립 말로)

(매력적인 여자를 만난 필립 말로. 욕망의 노예)

(역시 술이 짱인 필립 말로)

(술을 먹어도 너무 먹은 필립 말로)
사실 헤밍웨이 농담에서 떠올린 건 '레지 장 페이지' 였다. 다른 장면은 잘 안어울리는데 문학적인 조소는 레지 장 페이지가 하면 좀 괜찮지 않을까 했던 것.

(명함은 이렇게 박았지만 돈을 하도 못벌어서 곧 망가질 필립 말로)

(내가 어제 다른 여자랑 키스했지만 널 아껴.. 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한마디로 개수작중인 필립 말로)

"허밍웨이라는 사람이 누구길래?"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훌륭하다고 해줄 때까지 똑같은 내용을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남자지."
그러다가 브리저튼 에서 앤소니 역을 맡았던 배우 생각도 났다. 그가 브리저튼 시즌1에서는 상태 메롱인걸로 나와서 매력 진짜 1도 없는데, 제대로 찍은 사진은 나름 근사한거다.

(여성 의뢰인이군. 앉으세요. 초라한 사무실이지만..)

(납치되었다 눈 뜬 필립 말로. 난 누구 여긴 어디?)

(처음엔 이런 모습으로 시작한 필립 말로)
그러나 내 결론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백프로 흡족하진 않지만, '톰 하디'로 났다. 톰 하디가 가장 적합한듯하다. 뭔가 더럽고 비열한 목소리도 잘 낼 것 같고, 술 잔뜩 먹고 헤롱거리는 것도, 얻어터지는 것도 이만큼 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아오 돈 다 떨어졌는데 사건 의뢰가 왔어? 굿. 하러가자.)

(당신 옆에 앉아있지만 당신 정체를 눈치챘지. 훗. 난 탐정이니까. I am a 탐정.)

(날 어디로 데려가는건가, 헤밍웨이.)

(납치된 장소에서 눈을 뜬 필립 말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최근에 베놈을 봐가지고. 그런데 톰 하디도 필립 말로 하기에는 좀 잘생긴 느낌이다. 현실에서 잘생긴 남자 보기는 넘나 어려운데 왜때문에 필립 말로 역할 찾으려니 지나치게 잘생긴 놈들이 넘쳐나는거지? 세상은 요지경이구먼.
내가 딱히 못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은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못생긴 남자들하고만 연애했던 것은 내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어쩌면 잘생긴 남자를 만날 수 없는 병에 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잘생긴 배우들 사진 좌르륵 올리면서 보는네 다 너무 부담스러운거다. 와 이런 얼굴하고 어떻게 사귀냐.. 막 이런 생각이 들어. 아 역시 .. 여기까지가 나의 한개인건가...
한개를 극보카자!!
모델이라고 말했어도 믿겠더라고요. 그 남자가 내게 관심을 보이는데, 믿을 수가 없었죠. 우리는 딱 한 번 섹스를 했어요. 그 후로도 그가 계속 전화를 했는데, 정말 이상하더군요. 여러 가지 이유로 관계를 지속하지 않기로 했죠. 우선은, 그 남자가 너무 잘생겼어요. 그가 나한테 정말 빠져 있었다는 생각은 들지만. 둘째로, 나한테는 나보다 더 예쁜 사람이랑은 절대로 데이트하지 말자는 원칙이 있어요. 자부심이나 정신 건강 면에서 좋지 않거든요.
-이성애자 여성, 26세 (p.41)
아주 잘생긴 남자랑 사귀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랑은 장기적 관계를 맺고 싶은 생각이 전혀 안 들었어요. 그가 나한테 동침하자고 요구했죠. 불안하기도 했지만...거절할 수가 없더라고요. 누가 봐도 잘생겼다고 할 만한 남자였죠. 하지만 그는 아주 불안한 성격에, 절대로 순응주의자가 아니더라고요. 나를 많이 좋아했답니다...
-주로 이성애를 하는 여성, 36세 (p.44)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