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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자본주의의 무질서 - 새로운 위기와 조정에 직면한 세계경제
미셸 아글리에타.로랑 베레비 지음, 김태황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4월
평점 :
1.
이 책의 첫 번째 지은이인 미셸 아글리에타는 ‘조절이론’의 창시자 격인 인물이다. 1970년대 중후반 등장한 조절이론은 훗날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던 신고전파 경제학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이론이었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반기를 들면서, 그 이론의 근저에 자리잡은 자본주의에 대한 파국론적 인식을 명시적으로 거부하였다. 당시 이 이론의 주요 관심은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 동안 핵심부 국가들의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제도화된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타협이 어떻게 자본주의에 내재해 있는 모순을 관리, 조절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자본 축적을 가능케 했는가, 그리고 그 모순이 새로운 위기의 형태로 진화하였는가에 모아졌었다. 곧 자본주의는 우파들의 바램처럼 모순으로부터 자유롭지도 않지만, 좌파들의 소망처럼 곧 없어질 체제도 아니었던 것이다. 곧 조절이론은 이전까지 탐구되지 않았던 지속적인 자본축적의 재생산을 가능케 했던 조절 기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기조정적이지도 않고 그 자체 운동만으로 파국으로 귀결되지도 않는 자본주의 축적체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였다. 2007년에 프랑스에서 처음 출판된 이 책은 그로부터 30년 후 아글리에타의 이론적 현 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떠한 이론적 패러다임이든 30년에 걸쳐 반대자들의 공박에도 불구하고 이론적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이론의 내구성과 동시에 유연성이 상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곧 장기간에 걸쳐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변화하는 현실을 포착해야 하는 이론 자체가 변화해야 함을 말한다.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와서 큰 기대를 갖고 읽었고, 어느 정도까지는 아글리에타 자신의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론적 변신 중 일부의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사실 후한 점수를 주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이론적 변화의 방향이 애초에 조절이론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로부터 상당히 멀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새로운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그 이론이 기존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조절이론이 관심을 끌었던 것도 당시 좌우파 경제이론의 무능력과 이데올로기적 맹목성과 무관하지 않다. 적어도 등장 초기에 조절이론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파국론적 경제 인식과는 거리를 두면서도 여전히 맑스주의적 경제학 비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잉여가치론과 계급 모순의 중심성을 견지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젊고 유능한 비판적 경제학자들을 그 이론을 확대재생산하는 데에 충원할 수 있었다. 조절이론은 당시까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발목을 잡고 있던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역사적 전망 제시라는 이데올로기적 족쇄를 벗어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맑스주의적 에피스테메 내부에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수행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리고 아마 다른 많은 이들도) 조절이론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심이 그 어떤 아쉬움을 동반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일국적 분석단위, 강한 법칙 지향성, 서구에 국한된 분석 등은 과연 이 이론적 패러다임이 한국의 현실을 분석하는 데에 유용한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였다. 조절이론을 갖고 신국제분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 등 신흥공업국의 현실을 불완전하게나마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던 리피에츠는 브와이예 같은 또 다른 조절이론가들에 의해 조절이론의 문제의식을 전도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브와이예 같은 이의 저작은 제도주의자들의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와 친화성을 보이면서, 일국적 분석단위를 고수하면서도 맑스주의적 문제설정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멀어져 완전히 절연하게 됨으로써 조절이론가 중 내가 싫어하는 것들만 모아서 하는 이가 되어 버렸다. 또한 초기에는 맑스주의적 가정에 비교적 충실하였던 리피에츠나 아글리에타 등도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본격적 분석은 일국적 문제들이 충실히 설명된 연후에나 설명될 수 있는 문제라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해 왔다. 나중에 아글리에타는 네그리 등과의 대담에서 자신의 대표적 저작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문제를 다루지 못했음에 대해서 아쉬워했다고 한다. (Michel Aglietta (1994). "De 'Regulation et crises du capitalisme' a la 'Violence de la monnaie' et au-dela: Interview de T. Negri, F. Sebai et C. Vercellone," Ecole de la regulation et critique de la raison economique. L'Harmantan, pp. 47-70. 이 내용은 문원에서 출판된 아글리에타의 책에 실린 전창환 선생의 역자서문에서인가 본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어쨌든 미샬레나 미스트랄 같은 국내에 별로 소개되지 않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글리에타, 리피에츠, 브와이예 등의 파리학파 조절이론은 자본주의 세계경제 분석에는 그닥 기여한 바가 없는 셈이다. 이 문제는 프랑수아 셰네를 비롯한 그르노블 학파에 의해 주도적으로 탐구되고 있다.
2.
아글리에타가 로랑 베레비와 함께 쓴 이 책은 따라서 이전에 그가 표한 아쉬움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함을 해소해 주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이 책은 일국적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를 수용하면서도 (2부), 그러한 일국적 정책들이 어떻게 상호의존적으로 자본주의 세계경제, 곧 “세계적 성장체제”의 모습을 규정하고 있는가 (3부)를 탐구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이전까지 조절이론의 외부로 남아 있던 부분으로 그 이론적 지평을 확대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 받을 만하다. 또한 구체적인 이론적 기여로서, 미국의 경상적자 누적 – 자국의 생산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소비 수준을 향유하는 미국 국민들의 생활양식과 저축 부족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자본 흐름이 미국으로 집중되는 현상 - 으로 집약된 세계 자본주의의 불균형의 문제에 대한 실증적 탐구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현재 세계 자본주의의 전환을 가능케 한 동력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파탄시킨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장기간의 수요 부족과 금융 거품으로 인한 구조적인 초과공급”의 결합(34)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기업들의 시장 지배력 상실이 지속”되면서 고객들의 가격 결정력이 강화됨으로써 기업에게는 이윤 압박이 심해지고, 신흥국들에게는 달러보유고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게 함으로써 달러 채무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미국에 대한 채권자 신분으로 변신한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은 순상품 수출국이면서도 채권국의 신분으로서 세계경제의 강력한 행위자로 등장한다. 다른 하나는 미국과 영국 등에서 1980년대부터 이미 시작된 주주가치의 확장, 곧 자본주의 경제의 금융화이다. 이 두 가지 주요 변동은 결합하여 소득 불평등의 확장, 노동자 계급의 정치력 약화, 가계 채무의 증가 등을 초래하였다.
이는 조절이론이 출현했던 1970년대 당시의 경제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현실을 분석하는 것이다. 당시 조절이론의 분석 중심에는 자본주의의 계급 모순, 곧 일국 내부의 임노동 관계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의 쇄도에 1997년 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 가속화된 세계 무역과 금융에서의 신흥국의 세력 강화가 결합함으로써 이전의 분석의 초점이었던 노동자 계급은 주변화되어 버린다. 현실에서의 정치력 쇠퇴가 이론에서의 중요성 감소로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도저히 찜찜함을 버릴 수 없다. 문제는 무엇보다 체제 자체가 그 오작동 - 혹은 지속불가능한 작동 - 에도 불구하고, 체제 변환의 가능성, 혹은 그 체제에 대한 도전세력의 형성 문제는 분석의 지평 내부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학 분석이 잠재적 위기의 가능성에 대해 경고할 수는 있어도 혁명과 전쟁을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 격발 직전에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부동산 시장의 폭락 가능성 등이 시사되고 있지만, 그로 인한 경제외적 여파 등은 이 책의 지평에서는 포착될 수 없다. 사실 이 점은 딱히 새롭다 할만한 약점은 아니다. 조절이론은 애초부터 사회운동이나 전쟁 등의 전개에 대한 사후적 설명 가능성은 갖고 있었을지언정 그 체제 불안의 요소가 제도적 총체 내부로 어떻게 매개되는 지에 대한 설명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석하는 대상 현실의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과 전통적 조절이론 간의 연속성이라 할 만한 것들은 무엇인가? 이 책은 세계적 성장체제에 대해 언급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조절이론과 분석단위 상에서의 상이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성장체제”라는 개념을 고수함으로써 연속성을 보인다. 개별 조절이론가마다 개념 사용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성장체제(growth regime) 혹은 발전양식(mode of development)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의 현실적 결합체로 개념화된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 그리고 조절양식을 구성하는 구조적 (제도적) 형태와 같이 이전의 조절이론이 개발해온 정치한 개념적 장치들을 사용하지 않지만, 성장체제라는 개념을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적용한다.
또한 초기 아글리에타의 조절이론에서처럼 사회적 규범의 문제를 중요시한다. 이 점은 특히 일국적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다루는 2부에서 부각된다. 유럽인들은 효율성과 형평성을 상호 갈등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244)이나, 이기적 개인들 간의 계약과 이 “계약을 합법화하는 법규와 소송을 재판하는 사법기구가 시장의 바탕을 이루는” 서구의 시장경제와 “개인적 행위를 결정할 때 공동선을 고려함으로써 계약의 불완전성을 어느 정도 극복”하는 중국 시장 사회주의 경제의 유교적 사회 규범 (309-310) 간의 대비에서 잘 드러난다. 재미있는 것은 지은이들이 중국 자본주의를 평가하면서 유교 자본주의에 대해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교 자본주의론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꽤 번창하였으나, 1997년 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로 학계에서는 자취를 감춰 버린 바 있다. 하지만 영미식 신자유주의의 결정체인 워싱턴 컨센서스가 시효만료된 오늘날 다시금 이 이론이 등장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이 책을 통해서 받았다. 사실 유교 자본주의론은 싱가포르의 리콴유처럼 유교는 쥐뿔도 모르는 아시아의 독재자들이 보편적 인권 개념을 서구에 특유한 규범 정도로 상대화함으로써 자신의 독재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의도와는 무관하지만, 21세기 초반 세계 경제위기 이후 나온 유교자본주의에 대한 서구 중도좌파의 긍정적 평가라는 점에서 이 책은 주목받을 만하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사실 이는 조절이론 뿐만 아니라, 일부 서구 좌파 이론들이 때때로 나타내는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적 열광의 연장일 수도 있다. 1960-70년대 중국 문화혁명에 대한 열광이나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한 관심 표명의 21세기 초반 버전 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자세히 좀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아글리에타는 New Left Review 2008년 11/12월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자신의 조절이론이 브로델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그 글을 읽었을 당시 나는 그 브로델의 영향이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었다. 브로델과 조절이론 간의 관계의 문제라는 측면에서는 지엽적인 부분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은 중국을 다루면서 “시장경제가 위계적인 중앙 집권 국가에 의해 발전되고 또 조절되는 것은 중국의 오랜 전통에 부합한다”(308)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중국에 자본주의가 번성했던 것은 시기적으로 유럽보다 한참 앞서는 1000년대 무렵부터 1세기 정도의 기간으로서 송나라(960-1279) 때” (309)라고 말한다. 유럽보다 앞서 자본주의가 중국에서 존재했다는 이 주장은 서구 좌파들이 그 동안 기반하고 있던 맑스주의적 인식에서는 상당히 낯선 주장이지만,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소개된 브로델의 3층구도 내에서의 자본주의의 개념화를 이용한다면 정당화 가능한 주장이다. 곧 인간의 경제는 맨 아래의 물질생활, 2층의 시장경제, 3층의 자본주의의 중첩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적 규정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자본-임노동 관계가 아니라, 시장의 작동에 개입하는 권력이자 위계의 최정상을 뜻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브로델 식으로 파악하면 이처럼 송대에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발달된 상업 경제를 자본주의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자본주의관은 아리기의 Adam Smith in Beijing이나 스기하라 카오루의 산업혁명과 근면혁명의 비교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본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굴러가는 시장경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권력의 거처이면서도 기저의 물질문명에 녹아들어 가 있는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은 축적(시장)은 조절(정치권력, 제도, 규범) 없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조절이론의 기본 명제와 통하는 것이다.
어쨌든 새로운 개념화는 참신함만큼이나 불편함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이론적 토론이 어떻게 조직될지, 과연 조직이나 될지 모르겠지만 한 번 관심을 갖고 지켜볼만한 주제인 것 같다.
4.
이 책은 그리 좌파적인 책은 아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 기존 제도를 누가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관한 측면에서 현 제도 바깥에 위치해 있는 세력들의 역할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체제 이후의 대안이 제시되지만, 그 대안을 만들어 가는 주체는 이미 분석대상에 포함되어 있는, 곧 현 제도 내부에 포함되어 있는 세력들이다. 준달러 본위제에서 복수통화 본위제로의 이행, IMF의 개혁, 미국의 내수 억제와 신흥국들의 내수 중심 체제로의 전환, 각국 경제정책의 국제적 조율 등의 정책 제안 등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다가도 계급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계급 문제는 주변화되는 이론적 역설이 몹시도 불편하다.
이 불편함은 저자의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문제, 책을 읽은 시점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비극적 패배를 맞은 쌍용자동차 파업은 사실 이 책에서 분석된 금융화의 전개, 중국의 성장, 세계적 수준에서의 과잉투자로 인한 초과 생산 설비라는 맥락과 떼어놓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물론 한국 자본주의와 현 정권의 야만성에 대한 구체적 분석 없이 파업 노동자들, 그리고 남한 좌파 전체의 이 패배를 세계적 자본주의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겠지만, 이 책에서의 정책 제안을 머리 속으로 수긍하는 것과 현재 느끼는 분노 간의 괴리, 그 괴리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이론적 실천의 부재, 그리고 그로 인해 더 깊이 빠져드는 무기력의 늪에서 질식의 공포는 커져만 간다.
책 내용에 대한 세세한 정리는 관두고, 느낌만 정리하면 이렇다. 이 책은 내가 조절이론에 대해 갖고 있던 기대와 실망을 전도시킨 책이다. 나는 애초에 조절이론이 임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자본주의의 축적과 조절의 동학 속에서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고, 세계경제에 대한 설명 부재에 실망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세계경제에 대한 설명은 어느 정도 제시하지만, 계급 분석은 완전히 주변화시켜 버린다. 물론 조절이론이 아글리에타만의 것도 아니고, 다른 훌륭한 이들도 있겠지만 그 이름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읽고 나서는 지적 희열보다는 공허감이 앞서는 것을 감출 수는 없다.
사족
개인적인 실망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번역, 출판은 그 값어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훌륭하고, 오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또한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가 어떻게 세계성장체제 전체의 재구성에 기여했는 지에 관한 이론화 자체는 무척 새롭다. 현 경제 위기에 대하여 아글리에타가 대중적인 책을 하나 쓴 모양인데, 그것도 좀 번역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추기 2009. 8. 13]
2009년초부터 미국 가계 저축률이 급상승했다는 글. 이 책의 지은이들이 제시하는 글로벌 불균형 시정의 필요조건인 미국 저축률의 상승에 관한 마틴 펠트스타인의 분석.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710532
[추기 2009. 9. 21.]
G20 정상회의에서 세계경제 불균형을 다룬다는 기사. http://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unit/377937.html
[추기 2009. 11. 30]
아글리에타에 실망한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니다. 프랑수아 셰스네[르몽드 디폴로마디티크 한국판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셰네'가 아니라 '셰스네'가 맞다고 한다]가 최근에 프랑스에서 나온 경제위기 관련 저작들에 대한 비판을 실어 놓았다. 셰스네가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듯 보이는 프레드릭 로르동의 <과도한 위기 - 파산한 세계의 재건>과 앙드레 오를레앙의 <도취에서 공포로: 금융위기를 생각한다>가 무척 보고 싶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