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노동체제와 사회적 합의
노중기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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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십여 년 동안 한국의 노동체제 변동이라는 주제로 한 우물을 파온 노중기 선생이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여러 지면에 발표한 열세 편의 글을 묶은 책이다.

1부에서는 87년 노동체제와 그 전후의 노동체제의 성격들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1, 2, 3장은 모두 대상 시기를 소시기로 구분하여 노동체제 변동의 전개를 살펴보고 있다. 97년 이후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의 성립을 다루는 4장은 발표 당시인 2006년에도 해당 노동체제가 지속 중이어서 그런 지, 소시기 구분은 없었다. 1부에 소개된 노동체제 변동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1) 군부 독재기의 억업적 배제 체제 (1961-87), (2) 1987년 체제 (1987-1997), (3)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 (1997-)로 나눠볼 수 있다. 1부는 술술 읽히는 데에 반해서 지은이의 주장이 이제는 너무 평이하게 느껴져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나마 좀 흥미로웠던 부분은 3장에서 1960-70년대의 노동체제를 “국가 코포라티즘의 배제적 하위 유형”으로 규정했던 최장집을 비판하는 부분이었다. 지은이는 최장집의 이 시도를 라틴아메리카와는 전혀 다른 맥락을 무시한 “과도한 이론화의 한계”를 보이고 있고, 한국노총이 외형적 코포라티즘 기제를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체제 규정적 요소”는 아니었다는 점 등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 (83-87).

1부를 다 읽고 난 다음의 느낌은 역시 노중기스럽다는 것이었다. 진지하고 맞는 말만 하지만 재미가 없다는 것. 아마도 이 중 몇몇 글들을 이전에 읽어보았기 때문에 더 그랬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2부를 읽으면서 나의 이런 판단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1996년 이후를 살펴보는 5장부터 10장까지의 글들은 주로 사회적 합의 시도들과 이에 대한 주요 논자들의 이론적 전제에 해당하는 코포라티즘 담론을 겨냥하고 있다. 5장과 10장은 1부의 1, 2, 3장처럼 소시기별로 사회적 합의 시도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경제위기가 그 직접적 원인이었던 노사정 합의 실험은 “노동의 저항 없이 노동시장을 유연화시킨다”(233)는 전략적 목표를 지닌 국가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경제위기와 노사정위원회는 “노사관계의 자유화•민주화”라는 노동 측의 압력과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혁”이라는 국가•자본 측의 압박 사이에서 해체될 운명에 놓였던 1987년 체제의 종식을 공식화한 사건이었다 (241).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합의 시도들을 코포라티즘으로 볼 수 있는가? 또 신자유주의와 코포라티즘은 양립 가능한가? 사민주의 국가들의 구조적 조건을 결여한 제3세계에서 코포라티즘의 이식은 어떠한 맥락에서 이루어지며, 어떠한 결과를 갖고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지은이의 논의는 1부와 달리 아주 흥미롭다.

그는 코포라티즘에 대한 원론적 논의들(274, 285)을 살펴보면서 이를 “국가의 경제 개입을 통해서 조직적 강제와 동의가 동시에 조직화되는 계급적 타협 체제”(243)로 정의한다. 코포라티즘은 원래 2차 대전 후 “포드주의 체제의 거시적 계급 타협을 유지시킨 통제와 이익 대표의 교환 체제” (309-310)로 인식되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코포라티즘은 전통적 사민주의 국가들이 갖춘 구조적 조건을 결여한 나라들에서 출현하였다는 점에 지은이는 주목한다. 이를 통해 네덜란드 모델이나 아일랜드 모델 등을 들먹이면서, 미래 한국 사회 노동체제는 “신자유주의의 길이 아니라면 ‘사회통합적인 노사관계, ‘사회적 합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식의 단순 이원론을 고집했던 사회적 합의론자들은 다양한 경로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무시한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305). 지은이의 이 비판은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자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나저나 이전에 읽었던 조영철과 정이환의 책도 그랬지만, 후마니타스 출판사는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길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재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퇴조 속에서 이 이론적 흐름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도 무척 흥미로운 볼거리일 것이다.] 8장에서는 한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던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의 경험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이후 제3세계, 특히 동유럽에서 시도된 코포라티즘의 이식 시도들 또한 고찰된다. 그는 서구의 연구들이 “서구 내부의 차이를 강조했으나 제3세계 내부의 차이를 완전히 간과”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코포라티즘의 역사적 조건 상의 차이를 구별한다: “불안정한 민주화 이행과 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스페인),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정치 경제적 혼란(동유럽 국가), 경제 위기와 기존 국가 코포라티즘 체제의 연장 (멕시코), 배제적 노사관계로부터의 이행과정(브라질, 칠레, 한국) 등”.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는 “취약한 정권이 행위자들을 전략적으로 포섭해 헤게모니를 수립하려는” 시도였다는 점 또한 지적된다 (319).

9장에서는 한국과 멕시코의 비교 연구를 통해 코포라티즘이 신자유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섣불리 이식되었을 경우 어떠한 파멸적 결과가 양산되는 지를 경고하고 있다. 여러 가지 흥미로운 비교들이 시도된다. “국가-지배 정당-공식 노조로 이어진 강력하고 집중적인 권력 체제, 그리고 노동계급에 대한 거의 완벽한 포섭과 통제의 역사”를 갖고 있는 멕시코 국가 코포라티즘 체제와 달리 한국은 “기업별로 분산된 노조 체제, 노동 정당의 부재와 반노동자 이데올로기의 만연, 오랜 국가 폭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상이한 역사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모두 “신자유주의 하의 통제의 위기”라는 동일한 구조적 변인을 공유하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위기는 코포라티즘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반면, “한국에서 위기는 사회 협약의 실험을 끊임없이 야기한 힘이 되었다.” 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새로운 사회 협약”은 다시 여러 공통성들을 보인다: (1) “사회협약은 실질적 교환 체계라기보다 ‘참여와 협조'라는 이데올로기적 통제 장치, 정당화 기제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2) “협약은 노동계급에 대한 분할 지배를 위한 도구였다.” (3) “‘협약의 정치’는 ‘국가 폭력’이라는 또 다른 통제 장치로 보완되어야 했다.” (4) “전 과정을 국가가 주도하며 흔히 강압적 수단을 동원해 합의를 도출했다.” (5) "‘사회 협약의 정치’는 모두 신자유주의 정책에 종속된 하위 정책 수단일 뿐이었다.” (358-360) 곧 이들 두 나라에서 사회협약은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의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곧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전달 벨트”였을 뿐이다 (347).

1부는 다소 지루했고, 2부는 재미있었다면, 3부는 어떠한가? 3부, 특히 그 중에서도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전망을 다룬 마지막 13장은 최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본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관한 글 중에서 가장 잘 쓴 글인 것 같다. 또 그동안 전투적 노조주의의 합리적 핵심을 계승해야 한다는 노중기 선생의 말을 그냥 ‘맞는 말’ 정도로 가벼이 여겼었는데, 이 생각도 바꾸게 되었다. 여기에서 주요 비판 대상은 노동운동 내 국민파로 대변되는 흐름의 ‘사회적 조합주의’ 노선이었다. [사실 난 이 노선 자체에 대해 그리 비판적이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읽는 시점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얼마전 얼토당토 않은 노동자 항복 선언을 사회적 “합의”로 포장한 “노사민정 합의”는 이 정권에서 노동자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자명하게 만들었다.] 지은이에 따르면 “한국판 ‘사회적 조합주의’는 남아공의 ‘사회운동적 조합주의(social movement unionism)’와 유럽의 사회적 코포라티즘(societal corporatism)의 異種交配”이다 (409). “사회운동적 조합주의에 대해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연대와 계급적∙대중적 정치투쟁의 원리를 제거했다. 또 사민주의에서는 역사구조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합의주의와 정책 참가만을 수입했다” (409-410).

13장의 서두에서 지은이는 “1987년 노동체제는 노무현 정권 기간에 거의 완전히 해체”된 반면 “1997년 외환위기 이래 지난 10년 동안 형성된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의 위력은 압도적”으로 발전한 변화된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맞게 된 위기를 진단하고 이에 대한 극복 방향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9장에서 코포라티즘의 다양성을 살펴보았다면, 이 13장에서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역사적 다양성을 살펴보고 있다. 그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살펴보면서 이것의 세 가지 역사적 기원을 준별한다: (1) 1970-90년대 남아공, 브라질, 한국 등 급속한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경험한 제3세계 일부에서 전개된 “강력한 억압 국가를 직접 상대하는 매우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 (2) 1990년대 중반 이후 비즈니스 노조주의를 비판하면서 전개된 미국 노조 운동, (3) 신자유주의 하에서 “본래의 순수한 경제주의로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이 정치적 지향성을 강화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선 유럽 사민주의 노조 운동. 이 일반적 분류 속에서도 그는 한국과 브라질, 남아공의 차이 또한 주목하고 있다 (474).

어쨌든 이러한 역사적 경험의 다양성 때문에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의 사용 범위는 무척 넓고, 그 개념적 경계는 무척 모호하다. 그냥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노중기는 여기에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크게 네 가지의 이념적 지향들, 곧 민주성∙자주성∙연대성∙변혁성의 이념 지향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노동운동의 노선”으로 개념적 정의를 분명하게 한다 (476-479).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과거 제3세계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주요 지향은 민주성(조합원의 자발적 가입과 적극적 참가, 지도부에 대한 비판과 감시)과 자주성(노조는 지배 세력의 통치기구가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계급적 요구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자주적 기구)이었던 반면, 1990년대 이후 서구, 특히 미국의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강조점은 연대성(노조가 조직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미조직 노동자 대중과 중간계급 집단과 조직적으로 연대)과 변혁성(사회주의 사회 건설 지향)에 있었다.

지은이는 또 이러한 개념화에 입각하여 1987년 노동체제의 산물인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전투적 조합주의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네 가지 요소와 함께 기업별노조 체제 및 그것에 기인한 협소한 경제주의를 동시에 내포한 운동 전략”이었다 (485). 민주노조가 법적으로 금지된 상황에서 노동운동에게 민주성과 자주성의 확보는 당면 과제였지만, 연대성은 “기업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는” “자족적인 노조 활동을 전제로 한 연대”에 그쳤으며, “변혁성은” 과격한 구호와 이념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자유와 국가와 자본의 노조 개입 중단을 요구하는 소극적 내용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진단을 통해 전투적 노조주의에 대한 국내외의 상반된 평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987년 노동체제의 구조적 제약은 전자[민주성, 자주성]의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했고 이는 서구의 학자들에게 우리 민주 노조 운동에 대한 과도한 평가를 하도록 만들었다. 반대로 1997년 이후 구조조정 정치과정에서 후자의 측면[연대성과 변혁성의 한계]이 중요해지자 사회적 노조주의 지향의 이론가와 활동가는 전투적 노조주의 전체를 부정하는 오류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487). 이 문장에 대한 각주에서 지은이는 현재의 “민주노조 운동이 사회운동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 귀결은 일본식 기업 단위 노사 협력주의(혹은 미시 코포라티즘)의 아류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1987년 체제 하 노동운동의 특징이었던 자연발생성이 지금은 비정규 노동자들 일부에서만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는 위로부터 지도부의 목적의식적 노력을 매개로 조직된 정규직 노동운동과 미조직 부문, 비정규 노동자의 현장 의지를 묶는 이중적 전략 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 이 새로운 단계 사회운동성의 핵심은 “연대성과 변혁성의 확장 및 제도화”에 있다고 한다. 이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발전방향을 언급한 것이지만, 그는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과도한 평가 또한 경계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는 실체적 모델은 아니”기 때문이다.

13장은 정말 재미있게 보았는데, 현재의 노동운동이 처한 내우외환을 생각하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지은이의 진단과 처방이 대부분 옳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 하에서 강요되었던 사회적 합의의 신자유주의적 결과의 파괴성이 누적된 지금 지은이의 주장은 더욱 돋보인다. 또 현 정권의 시대착오적 신자유주의 유지 기조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퇴조 흐름은 분명 경쟁력 코포라티즘으로 정리되는 사회적 합의에의 참여 압력의 명분을 대폭 침식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이 자신에 대해 사회적으로 부여된 실낱 같은 희망을 실력을 통해 입증하지 못한다면, 지은이의 경고대로 일본의 미시 코포라티즘이나, 과거 멕시코의 국가 코포라티즘, 그리고 현재의 한국노총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행복한 노예가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이러한 암울한 전망의 실현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인다.

좋은 책에 걸맞는 좋은 서평도 못하고 괜히 현실에 대한 갑갑함만 토로한 것 같아 찜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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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3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9-03-13 23:37   좋아요 0 | URL
^^..님께서도 재미있어 하실 지는 모르겠습니다. 사회운동노조에 대해서 궁금하시다면 맨 마지막 장만 보세요. 요즘과 같은 시국에서는 이 책의 주요 비판 대상인 사회적 합의주의 자체가 쟁점이 아니라, 민주노총 자체의 존립 근거가 더 문제가 되기 때문에, 다른 글들은 허벅지 찔러가면서 공부한다고 마음 먹지 않으면 자칫 지루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2009-05-16 0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6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7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