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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아마 현재까지 한국의 경제학자 중에서 장하준 교수만큼이나 세계적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경제학자를 여간해서 보기 힘든 것은 아마도 경제란 게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상생활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루는 학문인 경제학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수식과 모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한 국가의 경제정책이나 경제학자들의 학문은 현실 정치의 역관계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읽는 경제서적이라고 해야 고작 재테크 관련 서적밖에 없었던 와중에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장하준의 이 책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데에는, 2007년부터 본격화된 세계 경제 위기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퇴조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계적 시류와 동떨어져서 이 책을 국방부 금지도서 목록에 올려놓고 여전히 신자유주의만을 - 그것도 아주 질 나쁜 신자유주의를 - 고집하는 남한의 갑갑한 현실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2.
세계경제의 역사와 제반 경제이론에 대한 넓고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장하준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윤색해온 세계 자본주의의 공식적 역사 서술의 부당함을 일반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하는 현재의 선진국들을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 칭하면서 선진국들의 발전의 실제 과거 역사와 그들이 현재 개발도상국들에게 강요하는 자유무역의 원리 간의 이율배반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요약하면, 선진국들의 경제발전은 보호무역을 통한 유치산업의 보호와 선진기술의 탈법적 도입 등을 통해 이루어져 왔고, 이들이 자유무역과 지적 재산권 보호 정책으로 선회한 것은 오로지 그들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이후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무역이 후진국들에게 경제발전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선진국들과 주류 경제학의 주장은 그들의 실제 경제발전의 경험과 상반되는 것이며, 후진국들과의 무역을 통해서 단지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후진국들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하는 것은 마치 여섯 살짜리 아이한테 학교 가지 말고 나가서 돈 벌어오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나, 브라질 대표팀과 여중생들이 축구시합을 하는 것만큼이나 부당하고 불공평한 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이나 헥셔-올린 공리 등에 기반한 자유무역 원리, 또 그에 기반해 진행되는 세계화는 개별 국민경제가 경제발전의 미래를 위해 그 어떤 준비와 육성을 하는 것을 애초부터 부정하고, 현재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가정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의해서 후진국에 부과되는 불공정한 룰은 비단 자유무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외국인 투자에 대한 개방, 국영기업의 사유화, 지적 재산권 등의 문제에 있어서도 불공정한 룰은 부과되어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는다. 나는 국영기업의 비효율성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의 비판을 반박하는 5장을 제일 재미있게 읽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장하준은 공공성의 확장, 수호라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와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5장의 서두에서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의 작업을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좌파적 비판"으로 칭한다. 아마도 이 말이 갈브레이스 뿐만 아니라, 장하준의 작업을 가장 잘 기술하는 말일 것 같다. 장하준은 다방면에서 일관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자유시장 지상주의의 폐해와 부조리함, 불공정함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전면적 계획경제를 통한 시장의 철폐를 이야기했던 과거 현실 사회주의나, 후진국의 보호주의에 대한 전면적 관용을 내세우는 자력갱생 (autarky) 같은 급진적 주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4장 끝부분에서 인용한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자 착취는 끔찍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착취조차 당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존 로빈슨의 유명한 말을 인용한 것은 장하준의 이러한 현실 인식을 뒷받침해준다. 급진적 대안 대신 장하준은 책 전체에 걸쳐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원 배분의 효율성과 그로부터 초래된 경쟁의 부정적 결과의 규제 간의 올바른 “균형”을 강조한다. 특히 지적 재산권을 다룬 6장에서 이 점은 무척 두드러진다.
3.
그렇다면 이런 불공정한 게임의 룰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장하준은 '나쁜 사마리아인들' 스스로의 반성과 교정을 희망한다. 에필로그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케인즈의 일화를 인용한다. 자신이 비일관적이라는 지적을 받은 케인즈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고 한다. "사실이 바뀌면, 나는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나요?" 이 인용은 현재 공공정책 강화에 역점을 두고 있는 오바마 정부의 경제 각료들이 클린턴 집권기 신자유주의 정책의 초석을 다진 이들이라는 점을 두고 보면 무척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미국 국내경제 문제에 한해서는 신자유주의의 폐기가 공식화되었다 해도, 그것이 과연 개발도상국과의 국제 관계에 있어서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에 관해서는 사실 회의적이다. 장하준은 보호무역을 통한 개발도상국들의 경제성장은 장기적으로 선진국 기업들에게 시장을 제공해주리라는 근거를 들어 이러한 회의적 시각을 불식시키려 한다. 또한 (흔히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칭해지는) 2차대전 이후부터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기 전인 1970년대까지의 시기 동안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처럼 행동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샬 플랜을 그것의 사례로 들고 있다. 하지만 냉전으로 인한 미소간의 대립이 없었다면, 과연 그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행동이 가능했겠는가 하고 물어봐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전후의 마샬플랜과 같은 움직임을 보일 동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국내경제의 어려움을 개발도상국과의 불평등한 관계를 유지, 확장함으로써 만회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장하준의 주장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순간,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우리 역시 비현실적이라는 궁색한 처지에 처하고 만다. 신자유주의보다 나은 그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장하준보다 급진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 건설이 그러한 세상을 갖고 올 수 있으리라고 주장할 경우, 그 주장은 장하준이 하는 주장보다 더 비현실적인 주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한 주장을 할 수도 있으나, 그러려면 충실한 내용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선진국들 스스로가 개발도상국에 대한 신자유주의 정책 강요를 철회하리라는 장하준의 기대가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질문으로 장하준의 주장에 흠집을 내는 것은 그 비판이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로의 다른 경로를 보여주지 않는 한 온당치 못해 보인다.
4.
이 책은 주로 선진국과 후진국 간 관계의 신자유주의적 배열에 대한 포괄적 비판이다. 그러나 장하준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국제 관계에 국한되어 있지만은 않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지 않지만, 그는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시행되어온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일관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
훌륭한 학자 장하준은 한나라당에 가서도 이명박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904/h2009040703195321060.htm), 민주당에 가서도 지난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48672). 적어도 그는 자신의 관점에 충실하였고, 때와 장소에 따라 말을 바꾸는 정치인스러운 행보는 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학자로서 장하준은 그 자신의 몫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세력들은 그와는 다른 몫이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이라고 해봤자, 국회 내에는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밖에 없고, 이들 의석을 다 합해봤자 한 줌도 안 된다. 장하준은 이 책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가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임을 이론적으로 역사적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작금의 세계경제 위기로 그의 선견지명은 더욱 돋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정치적 힘으로 전환하는 것은 바로 반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몫이지, 장하준의 몫은 아닌 것이다.
노무현 서거 이후의 상황은 오히려 이 반신자유주의 세력들에게 그리 유리해 보이지 않는다. 반MB의 당위가 반신자유주의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MB 연대의 주체로 거론되고 있는 제 세력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장은 꼭 따지고 넘어가야 한다. 반신자유주의 연대가 아니면, 반MB 연대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때문에 피해 보는 서민들한테 반MB 연대가 그 의미 이상의 괜한 희망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설령 그래서 다음 선거에서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바보 노무현이 했던 실패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거라도 이명박에 대면 감지덕지라고 얘기하면 맞는 말이지만, 노무현 정권처럼 신자유주의 강행하다 지지세력 이반해서 똑같이 정권 내주면 다음에는 더 이상한 꼴통이 등장할 지 모른다. 한나라당이 자기 손으로 신자유주의를 포기할 리도 만무하고, 설령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한들 립서비스에 그치거나 박정희식 파시즘의 부활로 경도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박근혜는 공식석상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바 있다.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605295)
문제는 민주당과 친노세력이다. 알라딘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도서전"이라는 이름으로 이벤트를 하던데, 그 중에는 장하준 교수의 다른 책, 『국가의 역할』도 들어가 있다. 아마도 그 책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가에 있었나 본데, 그리고 그가 진보주의에 대한 연구도 계획했다는데, 도대체 이들에게 진보주의는 뭐고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화살은 민주당과 친노세력에게만 겨눠져서는 안된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장하준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내가 알기로는 제대로 나와 있는 게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 장하준은 크게는 반MB 연대, 작게는 반신자유주의 연대의 이론적 공약수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반MB 연대는 해야 한다. 그리고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은 그것을 반신자유주의 연대로 발전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반신자유주의 연대가 안된다고 반MB연대의 형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문제는 연대의 수준일 것이다. 낮은 수준에서의 연대나마 가능하려면, 제 세력의 반성과 쇄신 노력이 상호 간에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민주당과 친노의 행보가 결정적일 것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만약 노무현이라면, 학자로서 장하준의 말은 다 맞는데 정치인으로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라고 말했을까? 그렇다면 다음에 조금 더 잘하려면 뭘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하겠는가? 한편으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다른 한편으로 민주당과 친노는 장하준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만약 여기에 대한 대답들이 제 세력들로부터 제시된다면 반MB연대의 수준을 가늠하기는 더 쉬워질 것 같다. 사실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어야 하는 법이라는 말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들린다. 이것은 상대방에 따라 말이 바뀌는 정치인의 생리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이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좌파적 비판”에 반MB 세력들이 좀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어떤 부분을 긍정하고 어떤 부분을 부정하는가는 그들의 자유일테지만, 만약 스스로에게 그 부분들이 분명해진다면 상대방과 이야기하기는 좀더 편해질 것 같고, 보는 사람들도 헷갈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