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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2017년 1월 11일 조간신문을 통해 바우만이 영국 시간으로 9일 유명을 달리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기사를 오려서 읽다 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 고이 접어 넣었다. 그 날 오전에는 후배가 바우만이 죽었다는 소식을 보고 내 생각이 났다며 안부를 물었다. 자기 주변에는 바우만을 좋아했던 사람이 나밖에 없다며. 언제쯤 그
후배에게 무슨 맥락에서 그 말을 했는지 도통 감이 안 잡혔다. 바우만 책을 이전에 대여섯 권 정도 읽었다. 그의 주저라 할 수 있는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와 『액체근대』를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쏟아져 나오는 그의 저작들과 좀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액체근대』일 것 같아서 읽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애도를 좀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였다.
바우만의 주요 테마
목차는 해방, 개인성, 시/공간, 일, 공동체를 다루는
다섯 개의 장과 사회학적 글쓰기에 관한 보유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이 책뿐만 아니라 2000년대에 나온 거의 모든 저술에 등장하는 주요 개념들을 정리하는 방식부터 시작하는 것이 책 전체의 이해에
효과적인 것 같다.
(1) 액체 근대
안토니 기든스, 울리히 벡, 스캇
래쉬 등과 마찬가지로 바우만은 포스트모더니티 개념에 대해 회의적이다. 유튜브 강의 Liquid Modernity Revisited를 통해서 그는 이 이유를 두 가지로 밝힌다. 첫째, 그는 탈근대라는 시대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다. 근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근대의 성격이 바뀌었을 뿐이다. 둘째, 포스트모더니티가 갖고 있는 개념적 부정성(negativity)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티는 모더니티 개념이 전제되어야
전개될 수 있는 논의이고, 그 자체로서 오늘날의 현실에 대해서 실정적으로(positively) 기술하지 않는다. 이러한 불만 때문에 기든스, 벡, 래쉬 등은 2차
근대, 성찰적 근대, 위험사회 등의 개념을 사용하였고, 바우만은 액체성 (liquidity) 혹은 유동성
(fluidity)이 “근대 역사에서 여러모로
새로운 단계인 오늘날의 속성을 파악하기에 적합한 은유”이므로 “액체
근대”라는 개념을 사용한다(9, 55). 곧 오늘날은 근대
이후가 아니라, 무거운 고체적 근대 이후의 가벼운 액체적 근대로 볼 수 있다. “과거의 근대성은 (오늘날의 ‘가벼운‘ 근대성과 대조되는) ‘무거운‘ 것으로, (‘유동‘ ‘액체‘ 혹은 ‘용해‘와 구분되는) ‘고체‘의 특성을 지닌 (확산이나 ‘모세혈관식
분산‘과는 대조되는) 응축된 상태이고, 마지막으로 (그물망식 조직과 다르게) 체계적이다”(43).
무거운 고체적 근대에서 가벼운 액체적 근대의 단계로 이행함에 따라, 장기-지속성, 고착성, 상호의존성이
즉시성, 일시성, 이동성,
개인화로 대체되었다. 또 이는 ⓐ역사적
과정이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믿음과 ⓑ인류, 민족, 혹은 어떤 집단이 고유의 과제와 책임이 있다는 믿음의 종말을 갖고 왔다. 이제
인류 전체의 이성이나 정의보다는 개인의 권리, 책임, 자질이
더 중요시된다(49). 또 고체 근대에서 사회학의 주제는 인간의 복종과 순응의 조건들이었지만, 액체 근대에서 사회학은 자유와 자율성의 촉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339).
(2) 개인화
울리히 벡에 의해서 정초되고 발전한 개념인 개인화가 바우만의 깊은 사색에 의해 독특하게 정의된다. 바우만은 엘리아스의 『개인들의 사회』를 인용하며, 개인이
사회와 대립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구성단위로 자리매김된 것을 근대의 특성으로 파악한다. 근대는 사회와 개인을 양립가능하면서 상호의존적으로 상정하였다. 바우만에
따르면, “’개인화’는 [신분
같은] ‘주어진’ 것으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이 아니라, 이를
하나의 ‘과제’로 삼아 그 과제를 수행할 책임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행위자에게 지우는 [계급 같은] 것”이다. 이는 실제적(de
facto) 자율성의 확립과 상관없이 법적(de jure) 자율성이 확립되는 것이다(53). 근대성은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강제적이고 의무적으로 결정되던 것을 개인의 결단의
결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개인화는 각 국면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고체근대에서 개인화는 기존의 귀속적 신분을 해체하면서, 후천적 행위에
의해 구성원의 자격이 주어지는 계급으로 개인들을 합류시켰던 반면, 액체근대에서 개인화는 이전의 ‘계급’과 같은 새로운 집단성이라는 목적도 전망도 없이, 개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게 된다. 불확실성은 사회로부터
발생되지만, 그 책임은 이제 개인이 져야 하는 것이다.
액체 근대에서 개인의 고충들은 유사할 수는 있지만, 더해질 수 없는 것이 된다(58). 이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무관심한 개인은 “시민의 적”이다(59). 하버마스의 관찰과 정반대로, 이제 사적인 관심이 공적 공간을 식민화하고 있다(60, 64, 112,
219). 이제 생활세계를 체계의 식민화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해방을 위해서라도
공적 영역, 곧 정치를 강화해야 한다(82). 그리고 이
정치(Politics)의 임무는 “법률상의 개인의 여건과
실제 개인이 될 수 있는 기회, 즉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진정 바라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극복하는 것, 곧 “공적 공간을 정비하여 사람을 채워넣는 일”인 것이다(63-64). 곧 공동의 대안적 삶은 생활정치(life politics)로
후퇴하여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대문자 정치(Politics)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83). 액체 근대의 개인화된 사회에서 정치의 임무를 도출하는 바우만의 이러한 방식은
벡의 개인화와 하위정치(subpolitics)에 관한 논의보다 훨씬 진일보한 것으로 보인다. [더 자세한 것은 289쪽에서 스치듯 언급되는 In search of Politics(1999)를 봐야할 것 같다.]
(3) 소비자 사회
무거운 근대의 포드주의 하에서 자본과 노동은 견고하게 바닥에 고정되어 모두 쇠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92-96, 187, 232-236). 그러나 오늘날 자본의 이동성은 급증하였으나, 노동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다. 노동은 쇠우리 안에서 고용불안정에
시달리고 있지만, 자본은 쇠우리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194). 이러한
자본과 노동의 상호결속의 종말은 푸코의 규율사회가 기반하고 있는 원형감옥 모델의 종말이기도 하다. 규율하는
자와 규율당하는 자가 무거운 원형감옥 안에 가까이 존재했던 고체 근대와 달리, 액체 근대에서 규율하는
자의 편에 속하는 이들은 더 이상 피통치자들을 가까이서 감시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19-21, 195-6).
전체 경제에 있어서나, 개인의 정체성 형성 모두에서 이제 생산자의 역할보다는
소비자의 역할이 중요시된다(122-142, 195-198)). 이제 자본의 결속 대상은 노동자가 아니라
구매자/고객/소비자가 되었다(239-242). 고체 근대의 탄생을 특징 짓는 ‘만족의 지연’, 곧 금욕적 노동윤리는 액체 근대로 넘어오면서 이제 “최소한으로
줄일수록 좋은 희생”이자 곤경으로 간주된다(251-5). 만족의
지연은 없을수록 좋고, 불가피하다면 최소화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노동윤리가
소비의 미학으로 대체된다. 욕망이 소비를 통해 충족되고 끝나면, 또
다른 욕망을 자극하는 소비의 대상이 생기고 이를 또 소비하게 되는 과정이 무한히 지속되는 것이다(251-4).
바우만의 서술 스타일
『액체근대』는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아무래도 사회과학적 글쓰기라고
하기에는 저자의 스타일이 돋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우만의 관심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의 글은 스마트폰, SNS, 토크쇼, 인공지능, 첨단무기 등 오늘날의 테크놀로지가 이룬 변화들에 무척
민감하다. 또 쇼핑, 연애,
여가, 일시성 등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서술들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그의 뛰어난 점은 이러한 사례들로부터 개인들이 느끼는 불안, 공포, 사랑, 불의 등에 관한 뛰어난 통찰을 보여주며, 이것이 독자들의 개인적 감정의 경험들과 공명한다는 것이다. 바우만의
매력은 바로 그가 사회적 현실의 변화와 독자들의 감정적 경험을 훌륭한 통찰로 매개한다는 점이다. 이는
고전과 현대의 文史哲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독서가 현인의 지혜를 통해 숙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며
그러나 그의 탁월한 문제진단에 감탄하는 독자라 하더라도, 그의 책을
다 읽고 나면 뭔가 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마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부분, 곧 대안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는 세상에 어떠한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이 문제적
상황에 대한 윤리적 개입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다 함께 세상에 대한 대안을 계속 고민해보자고 하는 것 같다. 액체근대에서
또 다른 견고성을 가정하는 대안은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완전한 대안이 다 준비된 다음에
하는 싸움이란 세상에 없다. 대안이란 것은 고쳐야할 현실이 지양된 像이며, 액체근대의 가능한 대안이란 아마도 유동적인 liquid alternatives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현인
지그문트 바우만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