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자본주의 새로운 시작
폴 메이슨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0.

오랜만에 좋은 책을 끝까지 다 봤다. 이 책에 대해 얼핏 들었던 것이 올해(2017) 봄이었는데, 내용은 전혀 모르고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것 같아 막연히 읽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연말이 되어서야 짬을 낼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역사와 이론이 폭넓게 다뤄지고 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단과 대안 모색 노력 간의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책이다. 그 이론과 대안에 대한 판단은 잠시 유보하겠다.

 

1. 폴 메이슨

지은이 폴 메이슨은 BBC 방송 프로그램의 경제 에디터로 일한 바 있다. 아무리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고 글을 쓰고 방송을 만드는 언론인이라고 해도,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현대 사회의 정보재, 사물인터넷, 네트워크화한 개인 등의 주제에 동시에 통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텐데 참 대단하다는 경탄을 하면서도, 구성이 그리 체계적이지 않고 난삽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의 주요 소재인 위키피디아에서 검색해보니, 처음엔 음악 교사였다가, 정보 관련 저널리스트 일도 하고, BBC에서 꽤 오래 일하다 프리랜서 선언을 하고, 올해에는 파리 코뮨에 대한 희곡도 썼다 하니, 가히 자유로운 영혼이자 르네상스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2. 장기순환으로 재구성한 자본주의의 역사

메이슨은 이 책에서 오늘날의 공론장에서 사라진 이름들을 소환한다. 콘드라티에프, 보그다노프, 프레오브라젠스키 등, 100년 전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주변에서 사라진 인물들이 그들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이 고전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적 통찰들은 이 책의 뼈대를 구성하는 역할을 하고, 거기에 이들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전기적 요소가 양념처럼 가미되어 있어서, 해당 이론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기 쉽다. 힐퍼딩, 레닌, 트로츠키, 부하린, 로자 룩셈부르크보다도 관심을 훨씬 덜 받았던 이 볼셰비키들의 이론에서 메이슨이 끌어내는 유의미한 통찰은 무엇인가? 이들, 특히 콘드라티에프의 분석은 자본주의 경제사를 재구성함으로써, 소위 정통 맑스주의의 파국론적 가정들에 도전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메이슨은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혁명가들이 주체의 의지를 발휘하면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으리라는 당시의 맑스주의적 가정들을 기각하고, 맑스와 그의 후예들이 자본주의의 적응능력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메이슨은 설비투자의 동력을 50년 단위로 발생하는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본 콘드라티에프의 장기순환 분석을 연장하여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4회의 장기순환을 거쳤으나, 다섯 번째 순환의 시작은 지연되고 있다고 진단한다(105-6). 메이슨의 기여는 두 번째 순환까지를 관찰했던 콘드라티에프의 통찰을 20세기까지 연장시켰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경제순환 이론에서는 보이지 않던 행위자들을 복원시켰다는 점이다(146-7, 312-343). 장기순환의 하강국면에서는 자본주의의 적응 노력이 나타나는데, 처음에는 노동력 비용의 감소 노력으로 나타나지만, 이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저항이 활발해지면서 실패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본은 생산성이 낮은 실물생산에서 금융부문으로 이동하는 한편, 정부가 개입하여 본격적인 적응 노력을 하는 가운데에 더욱 혁신적인 신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하게 된다. 다섯 번째 장기순환의 개시가 지연된 것은 네 번째 파동의 하강기였던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적응국면에서 등장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이 패배하였기 때문이었다(149, 177, 193).

 

이 패배는 주변부 및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노동력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거 편입되면서 노동력의 양적 규모가 갑절로 늘어나는 과정(189)과 결합하였다. 그 결과 중심부-주변부간의 노동시장 분절이 과거의 숙련 대 미숙련간의 구분을 대체하게 되었다(353). 유연성은 중심부 노동자들에게 자기계발을 지속하여 회사의 단기 목표에 자기 자신을 맞추는 능력,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능력, 인맥을 형성하고 관리하는 능력 등을 갖추도록 한 반면, 주변부 노동자들에게는 자동화한 공정을 빨리 습득하고, 감정과 행동을 노동규율에 종속시키게 하였다(353-354). 동시에 서비스 산업 종사자의 비율이 대폭 증가하였다. 또 세계GDP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짐에 따라, 노동자들의 생활과 행동이 금융화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다. 정보노동의 증가로 일과 여가의 경계선 또한 흐려졌다. 장시간 출퇴근이 일반화되면서, 노동자들의 물리적 공동체는 위축되었다.

 

3. 네트워크 개인주의

노동자들의 존재조건의 변화는 그들의 사고와 행동양식, 그리고 인격의 변화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메이슨은 베리 웰먼과 리처드 세넷의 논의를 빌어, “네트워크 개인주의의 등장을 현대의 주요 특징으로 규정한다(206, 251, 356). 또 이 논의를 하트와 네그리의 선언』(2012)을 인용하면서 사회 전체가 하나의 공장이 되었다는 오페라이스모의 현실 진단과 연결시킨다(356-8, 385).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들의 등장은 한편으로는 콘드라티에프 파동을 입증하려고 하였던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체사레 마르체타의 논의(100)와 연결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알렉산더 보그다노프의 SF 소설 『붉은 별』(1909)에 나오는 기계의 견고한 조직에 두뇌가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는 화성인 이야기(368)와 중첩된다. 또한 이 이야기는 트로츠키의 만능 두뇌(universal mind, 384-5)” 이야기와 겹치고, 허버트 사이먼의 “Organization and Markets”(1991)에서 나오는 화성인이 바라본 지구의 경제 이야기와 겹쳐진다(440-443). 메이슨은 기업이나 시장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상품, 노동, 서비스의 교환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자본주의에서 포스트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증가되었던 지식경제, 정보사회, 인지자본주의 담론들의 등장으로 포착되었던 현상은 이 시대의 새로움을 반영하는 것이다. 정보기술은 새로운 안정적인 자본주의를 형성해내기보다는 시장 메커니즘을 잠식하고, 재산권을 침해하며, 임금, 노동, 이윤의 오래된 관계를 무너뜨렸다(202). 위키피디아와 리눅스 같은 공유지 기반 동료생산(commons-based peer production)의 확산은 자본주의의 태내에서 발전하고 있는 새로운 생산양식인 것이다(230).

 

여기에서 메이슨의 논의가 피터 드러커, 요차이 벤클러, 제레미 리프킨 등의 논의와 구분되는 것은 그가 맑스의  『그룬트뤼쎄』의 기계에 관한 단상에서 한 번 언급되고 맑스 자신에 의해서도 다시 다뤄지지 않은 개념인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의 논의를 끌고 와서, 오늘날의 인지자본주의 연구와 접목시킨다는 점이다[236-243, Cf. Paolo Virno(2007), ”General Intellect”, Historical Materialism 15(3): 3-8].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에서 지식이 주도하는 생산은 투입된 노동의 양과 무관하게 무한한 부를 창출하는데, 곧 가치법칙이 폐지되는데, 이 자본주의는 지식을 향상시켜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을 선호하는 모순이 심화된다. 그러나 그는 『자본』에서 이 개념을 언급하지 않는데, 메이슨은 이를 그의 시대에는 아직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의 정신이 사회적 지식에 의해 연결된” “일반지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맑스의 일반지성의 사회적 조건은 20세기 후반부터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4. 프로젝트 제로

메이슨은 포스트자본주의로의 이행은 100년 전에 볼셰비키들이 상상했던 방식, 곧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고, 중앙계획경제를 통해 시장경제를 대체하며, 생산력을 극도로 발전시켜 공산주의를 이룩하는 방식을 통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본다. 대신 이 이행은 봉건제가 수백년에 걸쳐 자본주의로 이행했던 방식과 유사하리라고 본다. 메이슨은 특히 (1) 1300년대 이후 진행된 기근, 질병, 농민반란에 이은 임금 상승, (2) 은행업의 발달, (3)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과 약탈, (4) 인쇄술의 발명 등을 봉건제 붕괴의 주요 요인으로 지목하고, 이 요인들의 다른 우연한 요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장기간 진행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398-402). 그는 사회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세계의 내부에서 분자 단위로 건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 프레오브라젠스키의 주장을 기각한다(407).

 

지금까지 내가 정리한 방식만 본다면, 메이슨은 분명 21세기에도 여전한 맑스주의자이다. 하지만 그는 160년 전의 맑스와도, 100년 전의 볼셰비키와도 다른 세상에서 사는 맑스주의자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원리를 설명한 맑스의 잉여가치론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한 옳다고 믿지만, 시장경제를 중앙계획경제가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대략적인 스케치에 지나지 않지만 이행의 프로그램으로 프로젝트 제로”(탄소배출량, 상품 생산의 한계비용, 필요노동시간을 최대한 줄여 0에 가깝게 만든다는 이행의 비전)와 이의 실현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445-449)을 제시한다. 또한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발달한 공산주의 국가에서 실현할 수 있는 10가지 프로그램을 제시하듯, 포스트자본주의 프로젝트의 최상위 목표를 네 가지 제시한다(450-451).

 

이 과정에서 인상적인 것은 위에서 기각한 프레오브라젠스키의 다른 통찰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경제학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학문이다. 그것은 사회적 기술이다”(445). 이 책에서 처음 본 이 구절은 마치 미셸 푸코가 아담 스미스 시대의 정치경제학을 파악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이행은 경제 분야에 국한된 것일 수 없고, 전 인류의 변화, 곧 새로운 우선순위를 갖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의 탄생이다(446). 메이슨은 베버를 인용하면서 포스트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이 신자유주의, 나아가서 자본주의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451). 이 새로운 정신은 자본주의라는 정글 속에서 새로운 식물들이 자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경제의 거대 행위자인 정부는 민영화를 멈추고, 시장을 개혁하며, 인프라를 조정하고 계획하며, 기후변화, 고령화, 에너지 안보, 이민 등의 문제에 대응하고, 부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포스트자본주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서 협력적 노동을 확장하고, 독점은 억제하거나 사회하며, 금융 시스템 또한 사회화하고,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며, 네트워크를 통제해서는 안 된다. 메이슨은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며, 요즘은 참 보기 힘든 좌파적 효능감을 보여준다.

 

5. 단상과 의문들

이 책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점에서 마이클 뷰러워이의 『생산의 정치』에 비견할 만하다. 시간이 난다면 어느 책에서 사람 이름이 더 많이 나오는 지 한 번 세어보고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폴 메이슨을 하나의 특정한 이론적 전통에 자리매김하기는 참 힘들다. 콘드라티에프 순환을 이야기할 때에는 월러스틴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실버와 아리기를 연상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리기는 콘드라티에프 순환을 기각한 바 있다. 또 자본주의와 외부와의 상호작용이 자본주의의 생존에 있어서 핵심적이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통찰을 강조할 때에나 기타 부분에서는 네그리를 연상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네그리가 『제국』 31장에서 아리기가 시도했던 축적의 체계적 순환의 발견적 가치를 부정한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콘드라티에프 순환에 기반한 역사해석에 반대할 것임은 자명하다. 맑스에 대해서도 비슷한데, 메이슨은 잉여가치설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일반지성에 대한 통찰을 중요시하면서도, “노동계급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틀렸다”(317)고 단언한다. 어찌 되었든 폭넓은 이론적 컨텍스트 속에서 종횡무진하며, 포스트 자본주의에 관한 일관된 주장을 펼치는 그의 안목은 참으로 대단하다.

 

 

 

다음은 책 전체의 논지를 침해할 정도의 의문은 아닌데, 일단 기록해둔다.  다뤄지는 이론의 스펙트럼이 넓고, 이들을 직조하는 역량이 탁월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의 시각을 뭉뚱그리지 않고 예리하게 벼려서, 각 이론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려고 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콘드라티에프 순환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하나의 순환 내에 존재하는 연속적 국면들에 대한 그의 구분이 내가 아는 것과 다른 부분들이 좀 있다. 예컨대, 메이슨은 장기순환의 상승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새로운 나라들이 국제시장에 진입한다"고 한다(89). 그런데 월러스틴에 따르면, 이것은 하강국면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생기는 일이다. 곧 격심한 경쟁을 벌이던 핵심부 자본들이 비용절약을 위하여 생산설비를 주변부로 이동하는 형태의 자본 수출이 1960-70년대의 신국제분업의 출현을 야기하였고, 이를 발판 삼아 신흥공업국들이 국제시장에 진입한 것이다.

 

메이슨은 4장의 한 절("그림으로 보는 파동의 붕괴", 178-192)에서 12개의 그래프를 통해 콘드라티에프 파동이 과거 50여년 동안 관철되었는 지의 여부를 보여주겠다고 하였는데,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어떤 지표가 파동과 어긋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인 지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이것은 독자인 내 잘못이 아니라, 저자인 폴 메이슨의 잘못이다(고 감히 생각해본다 ㅋ).

 

 

오역

전반적으로 잘 읽히지만, 논지를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오역들이 좀 있다. 또 기존에 정치경제학계에서 쓰이는 용어들이 맥락없이 역자 재량껏 직역되어서 읽기 불편하다. 예컨대, '이윤압박'을 '이윤압축'으로, 상쇄경향반작용경향으로, ‘내포적 성장내연적 성장으로, ‘이행기전환기로 옮긴 것들이 그 사례이다(170, 191, 253, 375, 382).

 

96: 18-20: "장기파동 이론의 통계에 오류가 있다는 것은 계산자의 시대인 17세기부터 리눅스의 시대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줄곧 나온 지적이다."

 

말도 안 되는 번역이다. 콘드라티에프는 20세기 초반의 사람인데 17세기라니... 17세기에 누가 장기파동을 이야기했단 말인가? 원문은 다음과 같다.

 

It[the data problem] has pursued long-cycle theory all the way through from the era of the slide rule to that of the Linux box. (영어본 42쪽)

 

번역자가 계산자(slide rule)가 17세기부터 쓰였다는 정보에 착안했는지. 17세기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 같다.

 

통계 데이터에 대한 의문은 슬라이드룰의 시대부터 리눅스 박스의 시대인 오늘날까지 장기순환 이론을 계속 괴롭혀 왔다.

 

189: 15-16: 밀라노 밀라노비치

193: 9: 34

296: 6: OCED → OECD

 

313: 22: "그들은 사명을 완수했다."

It's complicated (영어본 182쪽). 그들의 운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406: 24: 21세기 초의 사회주의자들은 20세기 초의 사회주의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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