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민주주의 -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프리즘 총서 26
진태원 지음 / 그린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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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에 읽기 시작해서 해 넘어가기 전에 다 읽으려고 하였지만, 2018년 첫 독후감이 되었다. 나오자마자 냉큼 구해 읽었는데, 좀 만만하게 본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름만 들었던 유럽 철학자들의 논의가 내게는 생소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부 - 김남주, 세월호, 최장집, 푸코 - 에 대해 눈동냥한 것이 있고, 철학 이론이 생소하다 해도 그 이론을 통해 지은이가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대상 혹은 문제가 우리 사회에 관한 것이라 공부하는 마음으로 쭉 읽어나갈 수 있었다. 민주주의, 포퓰리즘, 주체화, ‘몫 없는 이들의 몫’, ‘시민다움등이 주요 주제어이다.

 

내용을 정리하자니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그냥 눈이 좀더 오래 머물고, 머리 속에서 좀더 맴돌았던 말들만 적어둔다.

 

1. 과 정치철학의 만남

책 이름이 독특한데, 아마도 이 책이 우리 사회의 들에 대한 최초의 정치철학적 성찰이 아닐까 싶다. 지극히 한국적인 독특한 현상이라고 생각했는데, 3부에서 지은이는 그 특이성(singularity)을 여러 현대 철학자들이 발전시킨 사유와 접목시킨다

 

그 앞에서는 라클라우(2), 최장집(4), 아렌트(5), 네그리와 하트(6), 랑시에르(5, 7), 푸코 (7), 아감벤(8) 등의 논의가 발리바르의 이론에 준거하여 비판적으로 검토된다. 최장집, 네그리와 하트에 대한 비판은 설득력이 매우 높아 공감하였다. 푸코의 신자유주의 비판에 대한 정리(268-281)는 간명하면서도 충실하지만, “법에 관한 푸코의 역설을 지적하며 비판하는 부분(282-284)은 흥미로웠는데 너무 짧아서 논의가 채 마쳐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뒤에 한두 문단이 더 추가되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2. 자크 랑시에르

행여 다음에 시간이 난다면, 읽어야 할 철학자들의 계보를 정리할 수 있었다는 점은 무척 유용하였다. 일단 엄두가 안 나는 스피노자는 제껴두고아렌트 → 아감벤 랑시에르 발리바르 (5);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르 (7); 벤야민 아감벤 발리바르 (8). 아감벤 랑시에르 라클라우 발리바르 (9). 거의 모든 장들의 소결은 발리바르의 논의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나의 관심을 제일 끄는 인물은 (발리바르가 아니라) 랑시에르였다. 이 책의 주요 성찰대상인 은 랑시에르의 용어로는 몫 없는 이들혹은 셈해지지 않는 이들”(88-90, 286-297, 351, 454), 라클라우를 따르면 라틴어의 포풀루스와 구분되는 플레브스(87)로 다뤄진다. 이들은(신체들을 질서있게 배열하는) 치안의 장 속에 기입되어 있는 그 어떤 몫도 없고, 셈해지지도 않는, 배제된 자들이다. 정치란, 이들이 몫을 주장하고 셈을 요구하는 행위이며, 이는 바로 치안 질서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따라서 몫 없는 이들의 몫”, “셈해지지 않는 이들의 셈이라는 그 자체로 형용모순으로 읽힐 법한 개념은 시제를 달리하는 치안의 객체와 정치의 주체가 포개져 있는 개념으로 읽어야 하는 것 같다. 랑시에르가 『불화』에서 1832년 블랑키의 재판 장면을 다루며 주체화를 논하는 부분은 푸코가 『감시와 처벌』 42장에서 1840년 베아스의 재판 장면을 다루는 부분과 묘하게 겹친다. 블랑키가 (능동적) 주체화 -몫 없는 이들이 자신의 몫을 획득하는 과정” - 를 표상한다면, 베아스의 순응적 체념은 (수동적) 주체화의 사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자가 치안을 정치로 전환시키는 인물이라면, 후자는 법에 의해 규율권력의 장인 감옥으로 떠밀려지는 예속적 주체인 비행자를 대표한다. 랑시에르는 치안 체제 안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게 만드는 것”(452)이 정치라고 하였고, 푸코는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다양한 감금 장치들이 전략적으로 분배되어 있는 여러 주변들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만약 나중에 충분한 시간이 허락된다면, 5장에서 제시된 아렌트 - 아감벤 - 랑시에르 - 발리바르의 계보를 추적해보고 싶다. 그게 안 된다면 랑시에르의 『불화』만이라도 읽어보고 싶은데, 당장은 그것도 엄두가 안 난다. 이 훌륭한 책에 만족하지 못 하고 저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지는 현대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고 싶은 욕망이 드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 책 곳곳에서 제시되는 각종 아포리아, 이율배반, 역설들의 중요성이 철학에 문외한인 내게 그리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아포리아란, “더 이상 진전이 불가능한 논리적 궁지”, “기존의 개념들과 이론, 실천의 한계를 (나타내면서도)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극한의 노력(이면서도 그 돌파의 노력이) 아무런 성공의 보장이 없는 모험적 기획이다(445-446). ‘아포리아가 중요하긴 중요한가 본데, 그렇게까지 중요한가?’ 하는 아마추어적 질문은 아마 내가 이들의 철학적 사유와 그 의의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발리바르의 시민권 헌정과 민주주의가 맺는 이율배반”(145-7, 201), “봉기와 헌정의 차동 관계”(146, 301), 아렌트의 인권의 아포리아”(170-), 을의 민주주의의 아포리아, 그리고 민주주의 자체의 아포리아(445) 등이 그것이다.

 

3. 준거로서의 발리바르

지은이는 거의 모든 장에서 발리바르에 의지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이 점에서 발리바르는 이 책의 주인공이다. 내가 발리바르를 읽었던 저 옛날 20세기의 기억을 더듬어보니, 민주주의와 독재, 맑스주의에서 정치학의 부재와 그 중요성, 역사유물론의 전화 정도 되는 말들이 파편적으로 남아 있지, 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다른 철학자들의 입장과 발리바르의 입장이 잘 비교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발리바르 철학의 주요 조각들이 각 장에 산재되어 있기 때문에, 나 같은 아마추어가 그 퍼즐을 다 맞춰서 그의 철학의 전체적 윤곽을 가늠해보기는 힘들다. 그래도 단편적으로나마, 시민권 헌정과 민주주의 간의 이율 배반, 다수자/소수자 전략(303-312), 시민권과 시민다움, 폭력 등에 관한 그의 최근 관심들을 알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특히 역사적 사회주의의 실패의 문제가 주변화되지 않고, 여전히 발리바르 철학에서 중요한 계기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론적 준거에 대한 지은이 자신의 성찰이 들어가 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거의 모든 장에서 지은이는 다른 철학자들의 입장을 발리바르의 그것과 대질시키며, 후자의 상대적 강점을 부각시킨다. 아주 일부분(345-348)에서만 발리바르의 모호성이 지적되고 있을 뿐 토론되지는 않는다. 잘 모르지만, 발리바르에 대한 비판들도 존재할텐데, 이 책에서 발리바르는 언제나 공세적 위치에만 존재할 뿐 수세적 위치에는 놓여지지 않는다.

 

4.  乙로 살며, 물어보며

책에 관한 짧은 메모를 쓰다 보니, 스포일러 방지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는데, 정작 이 책의 주제인 乙과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쓰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책으로 인해 비로소 乙에 대한 정치철학적 사유의 길이 열렸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 책이 아니었다면, 여기에 나오는 유럽 철학자들의 이름은 한국의 현대사나 우리 주변의 많은 乙들, 그리고 역시 乙인 신세와 무관하게 존재했을 법하다.  책의 뒷부분에서 지은이는 의 민주주의의 아포리아를 이야기하면서 많은 질문들을 던진다. 그 열려져 있는 질문들이 다른 질문들과 실천들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나 또한 체념한 이지만, 가끔은 질문도 해봐야 하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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