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읽었지만 아직 다 못 읽었다

 

 

 

 

 

 

 

 

 

 

 

 

 

 

 

문득 펼친 시집에서 하필 이런 시가 눈에 띄어서 적어 본다.

엊그젠가 <유사>에서 조신의 꿈을 옮겨 적어서 그런가 보다.

글끼리 서로 끌어당긴 거 같기도 하고... 참 신기하기도 하지.

 

 

 30년, 하고 중얼거리다
  고교 졸업 30주년

  30년, 하는 제 소리에 놀라
  그는 퍼뜩 꿈에서 깬다
  교련복을 챙기고 도시락을 싸고
  서둘러야 할 시간

  웬 생시 같은 꿈!
  서울로 어디로 떠나 대학생이 되는 꿈 취직하는 꿈 술
담배 배우고 여자도 배우는 꿈 자취로 하숙으로 과외선생으로 돌다가 군대 3년 푹 썩는 꿈 외국으로 유학 가서 박박 기는 꿈 돌아와 눈매 고운 여자 얻어 장가드는 꿈 그 여자와 집 장만하는 꿈 그 여자와 자식 낳는 꿈 아이 자라는 꿈 그 아이 대학생 되도록 애 끓이며 지켜보는 꿈 직장생활 여의치 않은 꿈 뒤늦게 승진하는 꿈 주식으로 한몫 잡는 꿈 다시 꼬라박는 꿈 피신하는 꿈 외로워 우는 꿈 부모님 편찮은 꿈 한 분 먼저 가시는 꿈 남은 분 모시는 일로 집안 뒤집히는 꿈 그러나 아이들 때문에 차마 갈라는 못 서는 꿈 집 넓히는 꿈 승용차 커지는 꿈 접대에 골프에 허덕이는 꿈 어느날 명예퇴직도 하는 꿈 그러다 그러다 아내 먼저 먼 길 떠나기도 하는 꿈 처자식 뒤로 하고 가기도 하는 꿈 졸업 30주년 안내장 받는 꿈 ´무슨 내라는 돈이 이렇게 많대요´ 마누라 잔소리를 한쪽으로 들으면서 ´아 벌써 그렇게나 됐나´ 마음 아득해지는 꿈

  30년, 하고 중얼거리며 차가운 거울 앞에 서면
  헐거워진 머리칼 너머 주름살 너머 먼 저곳
  수1의 정석과 정통종합영어를 우겨넣은 가방을 끼고
  발갛게 상기된 까까머리 앳된 그가 달려간다

  30년, 하고 다시 가만히 말해보면
  명치끝 어디선가 화아한 박하냄새가 올라오는 듯하다
  삭은 젓국냄새도 도는 듯하다
  궂은 저녁의 쓰디쓴 소주 한 잔과 뉘우침의 냄새가 나는 듯하다
  마른 고춧대 태우는 냄새가 도는 듯하다

  가까스로 지각을 면하고 교실로 뛰어가는
  거울 속 까까머리
  그의 새벽 꿈자리가
  기뻤는지 슬펐는지
  알 길은 없다

-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6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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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시이다
    from 突厥閣 2015-03-21 18:17 
    시인은 아주 평범한 일상이나 사물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관조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제된 글로 표현한다. 노숙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미안하다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순한 너를 뉘였으니어찌하랴좋던 날도 아
 
 
 

방금 다 읽은 책에 아래와 같은 글이 나온다.

 

"친구여, 언제나 현재 상황을 헐뜯는 것은 쉬운 일이며 또 인간의 특징이기도 하지요. 아마도 위대한 인물들을 망쳐 놓는 것은 세계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욕망들을 움켜잡고 있는 이 끝없는 전쟁과 오늘날 우리의 생활을 점거하여 이를 뿌리째 파괴하고 있는 열정들일 것이오. 우리 모두가 앓고 있는 탐욕스런 병인 금전욕과 향락욕은 우리를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고 있소. 아니, 그것들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익사시킨다고 해야겠지요. 금전욕은 우리를 시들게 하는 병이고, 향락욕은 가장 비열한 것이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가 무한한 부(富)를 그렇게 존중하고도, 아니 신격화하고도 어떻게 거기에 수반되는 악들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소. 제어되지 않은 무한한 부에는 사치가 가까이서 사람들 말마따나 보조를 맞추며 뒤따르기 때문이오. 부가 도시들이나 집들의 문을 여는 순간 사치도 함께 들어가 그 안에서 살지요.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생활 속에 얼마 동안 머물게 되면 철학자들 말마따나 그곳에 둥지를 틀고는 곧 새끼를 치기 시작하는데, 탐욕과 교만과 허영이 곧 그것이오. 이것들은 서자가 아니라 그것들의 적자들이오. 그리고 이들 부의 자식들은 성년이 되면 곧 우리 마음속에 사정없는 폭군들인 오만과 무법과 파렴치를 낳게 되지요.

 

이것은 불가피한 과정이오. 그러면 사람들은 더 이상 위를 쳐다보지 않고 자신들의 미래의 명성에 유념하지도 않을 것이오. 이러한 악덕들이 순환하는 가운데 인간들의 삶은 점진적으로 파괴되고 정신의 위대성은 이울다가 사라지며 더 이상 추구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들에게서 필멸의 부분은 존중하고 불사의 부분은 개발하기를 게을리하기 때문이오.

 

뇌물 받고 재판하는 자는 정당하고 아름다운 것에 관하여 결코 자유롭고 건전한 재판관이 될 수 없소. 뇌물 받은 자에게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익만이 아름답고 정당해 보일 테니까요. 지금 우리 모두의 삶은 전적으로 뇌물의 지배를 받고 있고, 우리는 또 다른 사람의 죽음을 노리는가 하면 유산을 타기 위하여 덫을 놓고 있소. 우리는 또 저마다 탐욕의 노예가 되어 모든 것에서 이익을 얻고자 영혼도 팔아먹었소. 하거늘 이렇듯 역병으로 삶이 파괴된 가운데서 영원히 지속되는 위대한 것들의 자유롭고 부패하지 않은 재판관이 아직도 남아 있기를, 그리고 그가 이익에 대한 욕망에 압도되지 않기를 우리가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소.

 

사실 우리 같은 인간들에게는 자유로운 것보다는 지배받는 편이 더 낫소.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져 우리가 말하자면 풀려난 죄수들처럼 이웃들에게 덤벼들게 된다면 탐욕은 악의 홍수로 세상을 뒤덮을 것이오. 간단히 말해서" 하고 나는 말을 이었소. "오늘날 인간들의 자질을 망쳐놓는 것은 나태이며 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소. 우리의 모든 노력과 기도(企圖)가 지향하는 것은 칭찬과 쾌락이지 추구하고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선행이 아니기 때문이오." (393-395)

 

요즘 사람들의 물욕과 이기심, 천박한 사치와 허영을 비판하는 듯한 이 글은 사실

기원후 1세기 경의 그리스 출신 저술가로 알려진 롱기누스가 <숭고에 관하여>라는 책의 맨 뒷부분에 쓴 글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본주의가 생긴 이후에 쓰여진 문장이 아니라 무려 2천 년 전의 문장인 것이다.

2000년 전이라고? 근데 왜 난 어제 들었던 얘기 같을까?

 

역사는, 정말 되풀이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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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2-18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번 읽었네요~~~. 느끼는 바가 큽니다. ㅠㅠ

돌궐 2015-02-18 16:27   좋아요 0 | URL
그러시다니 굳이 옮겨 적은 보람이 있네요.^^

cyrus 2015-02-18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에 오랫동안 방치된 시학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

돌궐 2015-02-19 00:14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서양 고전들을 막 찾아다닌 이유가 이 책 때문입니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투퀴디데스 등 저명한 작가들이 자주 소개되고 있어서 궁금증이 생기더라구요.^^
 

 

 

 

 

 

 

 

 

 

 

 

 

 

 

 

두고두고 읽어야 할 책 가운데 하나.
다 읽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초록에는 이런 글들이 적혀있었다.

 

 

Ⅳ-28. 음험한 성격, 남자답지 못한 성격, 완고한 성격, 야수 같고, 가축 같고, 어린애 같고, 나태하고, 거짓되고, 야비하고, 장사꾼 같고, 폭군 같은 성격. (61-62)

 

Ⅴ-1. 아침에 일어나기 싫으면, “나는 인간으로서 일하기 위하여 일어난다.”고 생각하라. 그 때문에 내가 태어났고, 그 때문에 내가 세상에 나온 일을 하려는데 내가 아직도 불평을 한단 말인가? 아니면 나는 이불을 덮고 누운 채 몸이나 데우려고 만들어졌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즐거운걸.” 그렇다면 너는 쾌락을 위하여 태어났단 말인가? 간단히 말해, 네가 태어난 것은 느끼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행동하기 위해서인가? 너는 작은 식물들이, 참새들이, 개미들과 거미들과 꿀벌들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우주를 구성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하거늘 너는 인간으로서 맡은 바 일들을 행하기를 거부하고 네 본성에 맞는 것을 향해 달려가지 않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휴식도 필요하지요.” 그야 물론이지. 하지만 휴식에도 자연은 한계를 정해놓았다. 먹고 마시는 데 한계를 정해놓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고, 충분한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한데 행동에 있어서는 더 이상 그렇지가 못하고, 네 능력에도 못 미치고 있다.
2)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너는 네 본성도, 네 본성의 의도도 사랑할 것이다. 자신의 기술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은 목욕도 않고 식사도 거르며 자신들의 일에 전력을 쏟고 있다. 하지만 네가 너 자신의 본성을 존중하는 것은, 청동 조각가가 청동상을, 무용수가 무용을, 수전노가 돈을, 허명을 좇는 자들이 허명을 존중하는 것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자들도 자신의 일에 열중할 때는 자신들이 마음 먹었던 일의 성사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寢食을 포기한다. 하거늘 너는 공동체를 위한 행동들이 더 하찮고, 노력할 만한 가치가 더 적다고 생각하는가? (71-72)

 

Ⅶ-74. 도움을 받는 데 지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자연에 맞는 행동이다. 그러니 너는 남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도움을 받는 데 지치지 마라. (126)

 

Ⅷ-59. 인간들은 서로를 위하여 태어났다. 그러니 가르치거나 아니면 참아라. (146)

 

Ⅹ-35. 건강한 눈은 보이는 것은 모두 보아야 하며 “나는 초록색만 원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눈병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청각과 후각은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듣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냄새 맡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건강한 위는, 마치 방아가 찧도록 되어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찧듯이, 음식물이면 무엇이든 소화해야 한다. 그와 같이 건전한 정신은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내 자식들은 안전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만인이 칭찬하게 해주소서!”라고 정신이 말한다면, 그 정신은 초록색만 반기는 눈이나 부드러운 것만 찾는 이빨과 같다. (180)

 

Ⅺ-29. 쓰기와 읽기는 네가 먼저 배우기 전에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 (197)

 

Ⅻ-6. 도저히 해내지 못할 것 같은 것들도 연습하라. 많이 써보지 않아 다른 일에는 느린 왼손도 고삐는 오른손보다 더 단단히 잡는다. 왼손은 이 일을 익혀두었기 때문이다.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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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15 1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문장이 많아서 예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골라서 필사를 한 적 있어요.

돌궐 2015-02-15 13:1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냥 너무 유명한 책이라 펼쳤다가 그 자리에서 굳은 것처럼 앉아서 읽었던 책입니다. 다시 한번 읽고 싶어요.

yamoo 2015-02-16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상록, 수상록, 엣세 등은 두고두고 읽을 책들인거 같아요~~~

인용해 주신 부분을 보니, 제가 엔날에 읽으면서 줄친 부분이 생각납니다. 겹치는 부분이 있어 반갑네요~!ㅎ

돌궐 2015-02-16 17:11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갑네요.ㅎㅎ 올해는 그간 못읽었던 고전들을 천천히 읽어보려고 합니다.
 

 

 

 

어제 서점에서 경공술을 연마하다가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들춰 보았다.

근데 그게 실수였다. 이렇게 버젓이 시인의 친필이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서상비' 보법이 흐트러지면서 지면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친필 사인본이 겨우 3권 남아있던데 사지 않을 수 있는 방법과 명분이 내겐 없었다.

 

김사인 님의 따뜻한 마음과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던 시 두 편만 옮겨 본다.

 

바짝 붙어서다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12-13)

 

중과부적(衆寡不敵)


조카 학비 몇푼 거드니 아이들 등록금이 빠듯하다.
마을금고 이자는 이쪽 카드로 빌려 내고
이쪽은 저쪽 카드로 돌려 막는다. 막자
시골 노인들 팔순 오고 며칠 지나
관절염으로 장모 입원하신다. 다시
자동차세와 통신요금 내고
은행카드 대출할부금 막고 있는데
오래 고생하던 고모 부고 온다. 문상
마치고 막 들어서자
처남 부도나서 집 넘어갔다고
아내 운다.

 

'젓가락은 두자루, 펜은 한자루…… 중과부적!'

 

이라 적고 마치려는데,

다시 주차공간미확보 과태료 날아오고
치과 다녀온 딸아이가 이를 세개나 빼야 한다며 울상이다.
철렁하여 또 얼마냐 물으니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 성을 낸다.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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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2-13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연마하셨다는 경공술이 궁금하네요ㅎ 김사인 시인님이 이리 많은 분께 사랑받는 분인줄 몰랐어요 시가 우리네 삶속에 있어 저도 읽고 싶어요^~^

돌궐 2015-02-13 17:10   좋아요 0 | URL
네, 이 경공술은 자기네들을 사라고 손짓하고 애타게 부르짖는 책들을 회피하면서 돌아다니다 보면 저절로 연마가 됩니다.^^ 김사인 시인은 이곳 서재에서 듣고 찾아보다가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크누트 함순 책이 궁금했었는데, 도서관에 있길래 읽어보았다.

젊은 날 뜨거웠던 열정이 생각나더라. 그땐 그게 참 절실했었는데... 

함순은 말초적이고 낯뜨거운 얘기를 하나도 촌스럽지 않게 표현한다.

 

<목신 판> 중에서

 

나는 일어나서,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젊고 날씬해 보였다. 이솝도 일어나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지?” 내가 물었다.
“방앗간에서요.” 그녀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렇게 밤늦게 방앗간에서 뭘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밤늦게 숲 속을 돌아다녀도 무섭지 않아? 그렇게 어리고 가냘픈데?”
그녀는 소리 내어 웃고는 대답했다.
“난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열아홉 살인걸요.”
하지만 그녀가 열아홉 살일 리는 없었다. 나는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실제로는 그보다 두 살 적은 열일곱 살에 불과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왜 나이가 더 많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앉아라. 이름이 뭐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내 옆에 앉아서 자기 이름은 헨리에테라고 말했다.
“애인이 있니? 애인 품에 안긴 적은 있니?”
“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몇 번이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몇 번이었지?” 나는 되풀이해 물었다.
“두 번.”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녀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그가 널 어떻게 했지? 이렇게 했니?”
“네.” 그녀는 몸을 떨면서 속삭였다.

네 시였다. (38-39)

 

* 된장 이 난봉꾼 같으니라구.

 

 

<빅토리아> 중에서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장미꽃들 사이에서 속삭이는 바람 - 아니, 피 속의 노란 인광. 가장 늙고 가장 쇠약한 심장조차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 '죽음의 무도'. 사랑은 밤이 다가오면 활짝 피는 마거리트 같고, 가벼운 입김에도 꽃잎을 닫고 살짝 만지기만 해도 죽어버리는 아네모네 같다.
사랑은 그런 것.
사랑은 한 남자를 망칠 수도 있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고, 그에게 다시 낙인을 찍을 수도 있다. 사랑은 변덕스러워서,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내일 밤은 낯선 이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또 한편으로는 불변성을 갖고 있어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봉인처럼 굳게 지속될 수도 있고, 죽음의 순간까지 꺼지지 않고 타오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랑은 하늘에 별이 빛나고 땅에 향기가 가득한 여름밤이다. 하지만 왜 사랑은 젊은이로 하여금 은밀한 길을 따라가게 하고 노인으로 하여금 외로운 방에서 발끝으로 서 있게 할까? 아아,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버섯밭으로, 신비롭고 무참한 독버섯이 자라는 무성하고 뻔뻔한 밭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사랑은 수도사로 하여금 한밤중에 높은 담장을 둘러친 정원에 몰래 들어가 침실 창문을 통해 잠자는 사람들을 엿보게 한다. 사랑은 수녀를 어리석음으로 사로잡고 공주의 분별력을 흐리게 한다. 사랑은 왕이 혼잣말로 음란한 말을 속삭이고 소리내어 웃고 혀를 내밀 때 그의 머리카락이 길가 먼지를 쓸 만큼 왕의 머리를 길가에 낮게 내려놓는다.
사랑의 본질이란 그런 것이다. (230-231)

 

* 좋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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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2-1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전 함순 <굶주림>밖에 안 읽어봤는데, 가난한 베르테르 버전으로 읽혔었죠. 이 책에선 상황이 좀 나아보이네요ㅎ;

돌궐 2015-02-10 11:03   좋아요 0 | URL
뭐 결말은 그다지 낙관적이진 않지만... ㅎㅎ
<굶주림>은 못 읽어봤는데 아무래도 좀 나을 거 같긴 해요. 주인공이 가난에 시달리지는 않거든요.
다만 여자에 시달릴 뿐.ㅋ

붉은돼지 2015-02-10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톤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나오는 .....크누트 함순의 두 세 구절 어쩌고 하던게 생각납니다 아마 고딩 국어교과서에 나왔던듯 굶주림을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오락가락....

돌궐 2015-02-10 14:31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굶주림>을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