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누트 함순 책이 궁금했었는데, 도서관에 있길래 읽어보았다.

젊은 날 뜨거웠던 열정이 생각나더라. 그땐 그게 참 절실했었는데... 

함순은 말초적이고 낯뜨거운 얘기를 하나도 촌스럽지 않게 표현한다.

 

<목신 판> 중에서

 

나는 일어나서,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젊고 날씬해 보였다. 이솝도 일어나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지?” 내가 물었다.
“방앗간에서요.” 그녀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렇게 밤늦게 방앗간에서 뭘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밤늦게 숲 속을 돌아다녀도 무섭지 않아? 그렇게 어리고 가냘픈데?”
그녀는 소리 내어 웃고는 대답했다.
“난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열아홉 살인걸요.”
하지만 그녀가 열아홉 살일 리는 없었다. 나는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실제로는 그보다 두 살 적은 열일곱 살에 불과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왜 나이가 더 많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앉아라. 이름이 뭐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내 옆에 앉아서 자기 이름은 헨리에테라고 말했다.
“애인이 있니? 애인 품에 안긴 적은 있니?”
“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몇 번이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몇 번이었지?” 나는 되풀이해 물었다.
“두 번.”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녀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그가 널 어떻게 했지? 이렇게 했니?”
“네.” 그녀는 몸을 떨면서 속삭였다.

네 시였다. (38-39)

 

* 된장 이 난봉꾼 같으니라구.

 

 

<빅토리아> 중에서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장미꽃들 사이에서 속삭이는 바람 - 아니, 피 속의 노란 인광. 가장 늙고 가장 쇠약한 심장조차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 '죽음의 무도'. 사랑은 밤이 다가오면 활짝 피는 마거리트 같고, 가벼운 입김에도 꽃잎을 닫고 살짝 만지기만 해도 죽어버리는 아네모네 같다.
사랑은 그런 것.
사랑은 한 남자를 망칠 수도 있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고, 그에게 다시 낙인을 찍을 수도 있다. 사랑은 변덕스러워서,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내일 밤은 낯선 이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또 한편으로는 불변성을 갖고 있어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봉인처럼 굳게 지속될 수도 있고, 죽음의 순간까지 꺼지지 않고 타오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랑은 하늘에 별이 빛나고 땅에 향기가 가득한 여름밤이다. 하지만 왜 사랑은 젊은이로 하여금 은밀한 길을 따라가게 하고 노인으로 하여금 외로운 방에서 발끝으로 서 있게 할까? 아아,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버섯밭으로, 신비롭고 무참한 독버섯이 자라는 무성하고 뻔뻔한 밭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사랑은 수도사로 하여금 한밤중에 높은 담장을 둘러친 정원에 몰래 들어가 침실 창문을 통해 잠자는 사람들을 엿보게 한다. 사랑은 수녀를 어리석음으로 사로잡고 공주의 분별력을 흐리게 한다. 사랑은 왕이 혼잣말로 음란한 말을 속삭이고 소리내어 웃고 혀를 내밀 때 그의 머리카락이 길가 먼지를 쓸 만큼 왕의 머리를 길가에 낮게 내려놓는다.
사랑의 본질이란 그런 것이다. (230-231)

 

* 좋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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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2-1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전 함순 <굶주림>밖에 안 읽어봤는데, 가난한 베르테르 버전으로 읽혔었죠. 이 책에선 상황이 좀 나아보이네요ㅎ;

돌궐 2015-02-10 11:03   좋아요 0 | URL
뭐 결말은 그다지 낙관적이진 않지만... ㅎㅎ
<굶주림>은 못 읽어봤는데 아무래도 좀 나을 거 같긴 해요. 주인공이 가난에 시달리지는 않거든요.
다만 여자에 시달릴 뿐.ㅋ

붉은돼지 2015-02-10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톤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나오는 .....크누트 함순의 두 세 구절 어쩌고 하던게 생각납니다 아마 고딩 국어교과서에 나왔던듯 굶주림을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오락가락....

돌궐 2015-02-10 14:31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굶주림>을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