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양화편에서 한 구절 옮긴다.

 

子曰 由也. 女聞六言六蔽矣乎.對曰 未也.” “. 吾語女. 好仁不好學, 其蔽也愚. 好知不好學, 其蔽也蕩.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好直不好學, 其蔽也絞. 好勇不好學, 其蔽也亂. 好剛不好學, 其蔽也狂.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자로)야, 너는 여섯 가지 말과 [그것들의] 여섯 가지 폐단에 대해 들어보았느냐?”
[자로가] 대답했다.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앉아라, 내 너에게 들려주마. 인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병폐는 어리석게 된다. 지혜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병페는 방탕하게 된다. 신의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병폐는 [남을] 해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곧은 것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병폐는 박절하게 된다. 용기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병폐는 혼란하게 된다. 강한 것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병폐는 잘난 체하게 된다.” (김, 318)

 

이 구절의 의미 전달은 신창호 <한글 논어> 번역이 좀더 나은 것 같다.

 

“… 베풀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리석음이다. 지혜롭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허황함이다. 믿음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해침이다. 곧음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각박함이다. 용맹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난동이다. 굳셈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광기이다.” 
(해설) 여섯 가지 덕을 나타내는 말에 숨겨져 있는 여섯 가지 폐단에 관한 언급인데, ‘육언육폐’라고도 한다. 세상일은 이중적인 경우가 많다.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고,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이 있듯이 말이다. 포용, 지혜, 신뢰, 정직, 용기, 강직 등 여섯 가지는 유학에서 매우 중시하는 덕목이다. 하지만 그것을 오용하거나 지나칠 때 심각한 폐단이 생길 수 있다. 무엇이건 적절하게 적용하지 않고 지나치게 고지식하거나 제멋대로 자의적으로 판단하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신, 417)

 

#

베풀기 좋아하고 배우지 않으면 어리석다. 쓸데없이 남에게 퍼주고 온갖 오지랖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이 만족하기 위해 그런다는데, 이것도 지나치면 진상이고 병폐다. 자기 실속은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베풀기만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일인가?
어떤이들은 지혜롭고 그럴 듯한 말이나 근사한 경구를 사랑하고 스스로 곧잘 하기도 하지만, 배워서 절제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이 모든 말들은 공허한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믿음이 너무나 강하여 그 믿음을 관철시키려다 보면 누군가를 해치게 될 수도 있다. 세상일에는 절대적인 게 없지 않은가. 굽히지 않고 대쪽처럼 곧은 사람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상황에 맞게 처신을 해야할 때도 있는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변한다는 말이다.

용맹한 자는 그 혈기와 용기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난동이나 다름없는 사건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적절한 다스림이 필요하다. 배움이란 다스린다는 말이기도 하다.
강하고 굳센 것은 숭고한 덕목 가운데 하나지만 이것도 잘못하면 맹목으로 빠질 우려가 있다. ‘盲目’이란 게 무언가. 눈이 멀어 아무 것도 안 보인다는 말이다. 배운다는 건 내 주위를 두루두루 잘 살핀다는 말이다.

 

갑자기 "책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읽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떤 폐단이 생길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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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0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신창호 교수의 번역이 좋았습니다. 이을호 교수의 번역도 마치 대화를 하는듯이 생생한 느낌이 드는데 약간 과장스럽게 느껴져서 어색한 것도 있어요.

돌궐 2015-07-09 19:52   좋아요 0 | URL
세 논어 번역본의 장점을 합친 책이 있으면 좋겠어요.ㅎㅎ
 

나는 여태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이 아르주나인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맏형 유디스티라였구나.

그가 겪은 갈등과 번뇌가 어땠을지 짐작도 안 된다. 백 명이 넘는 이복 형제들과 스승과 할아버지까지 다 죽이고도 왕이 되어야만 하는 그 심정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모든 적들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한 뒤 유디스티라가)
“우리의 적은 공덕을 얻어 지금 천국에 있지만, 우리는 살육을 후회하는 이 참회의 지옥에서 살아야 한다. 슬픔만이 우리가 받은 보상이다! 생명을 죽이는 것이 크샤트리아의 의무라는 말은 두 번 다시 하지 마라. 살육만이 인생의 규칙이라면 나는 크샤트리야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 나는 사문(출가수행자)이 되겠다. 내가 동정과 용서를 베풀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이 모든 승리를 얻은 것보다 훨씬 행복할 것이다. 고기 한 조각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개들처럼 우리는 피를 나눈 친척들과 싸워서 그들을 죽였다. 우리는 두르요다나의 무분별한 증오심 때문에 그런 처지로 내몰렸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식으로 그보다 오래 살면서도 아무런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아르주나, 네가 이 나라의 왕이 되어라. 나는 숲으로 떠나야겠다. 고행과 무소유의 은둔 생활을 하면서, 숲속의 천진난만한 동물들과 나무들만 벗으로 삼아서 살겠다.”


유디스티라가 사문으로서의 생활을 계속 노래했기 때문에, 아르주나는 화가 나서 그의 말을 가로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하면 됐어. 그렇게 많은 것을, 그렇게 많은 생명을 희생하고 왕국을 얻었으니, 그 왕국이 형보다 못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 고통받지 않도록 왕국을 다스리는 게 형의 의무야.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하고 희생적인 행위를 후원하고 통치자로서 신의 정의를 유지하는 것이 형의 의무야. 형은 크샤트리야에게 허용된 정당한 수단으로 얻은 왕의 권력을 갖지 않고는 절대로 이것을 해낼 수 없을 거야. 형이 번영하고 부유하지 않으면 이 점에서 형의 의무를 절대로 수행할 수 없을 거야. 거지는 남을 도울 수 없고, 약골은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있는 존재가 될 수 없어. 금욕적인 생활은 우리가 아니라 오로지 거지에게만 어울리는 생활이야. 재산은 더 많은 재산을 가져다줘. 종교 활동, 쾌락, 즐거움, 인생의 모든 성취는 재산에서 생겨나는 거야. 재산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경멸당해. 다툼과 의견 차이는 천상의 신들 사이에도 존재해. 천계에서도 그런데, 우리 인간 사회에도 의견 차이와 싸움이 존재하는 게 뭐가 잘못이야? 영광은 싸워서 얻고, 인생의 좋은 것들은 모두 그 영광에서 생겨나는 거야. 그건 모두 락슈미 여신의 선물로 알려져 있고, 그런 선물을 퇴짜놓는 사람은 여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남에게 손해를 주거나 남을 해치지 않고 얻은 재산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걸 잊지 마.”


그래도 유디스티라는 고행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되풀이했다. 그의 금욕적 사고방식에 화가 난 비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형, 그런 말은 제발 그만둬. 형의 정신은 균형을 잃었고, 형은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어. 형은 경전을 앵무새처럼 암송만 해대는 자들과 마찬가지야. 그들은 아무 관련성도 없는 말을 계속 지껄이지. 왕의 의무를 그처럼 나쁘게 생각한다면, 형이 우리에게 드리타라슈트라의 가족을 몰살하게 한 것은 불필요한 짓이었어. 이게 형의 철학이라는 걸 알았다면 우리는 싸울 상대가 누구든 무기를 드는 데 동의하지 않았을 거야. 적을 죽였으니 이 왕국의 고삐를 잡고 진정한 크샤트리야답게 다스리는 것이 형의 의무야. 형이 아무리 싫어해도 이제 와서 형의 신분을 바꿀 수는 없어. 형의 행동은 우물을 파느라 젖은 진흙으로 온몸을 더럽힌 뒤 물이 막 솟아나고 있을 때 물러나는 사람과 비슷해. 형은 적들을 모조리 죽인 뒤 결국 자살하는 사람과 비슷해. 우리는 형을 추종했지만, 이제 형의 지성이 의심스럽다는 것을 깨달았어. 제발 우리 입장도 생각해줘. 자신의 감정만 중시하는 건 이기적인 짓이야. 은둔 생활은 불치병에 걸렸거나 실패로 괴로워하고 있는 왕들만 선택해야 돼. 극기와 수동성이 최고의 미덕이라면 산과 나무가 가장 고결한 피조물이어야 해. 산과 나무는 항상 초연한 생활을 하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으니까.” (266-269)

 

 

 

#

축약본으로 읽었을 뿐이지만 대단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역사와 사회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갈등과 미덕들이 이야기 속에서 끝없이 발견된다. 선악이나 미추로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는 사건과 행동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 위선적 인간과 추악한 인간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영원불멸한 선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지도자로서의 책임이란 과연 무엇인가와 같은 심각한 질문들이 이 거대한 드라마 속에 담겨 있었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칠 수 있는 거의 모든 질문들이 이 <마하바라타>에 이미 나왔던 거라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마하바라타 원본을 죽기 전에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나마 좋은 번역본으로 이 대서사시를 완독한 것에 큰 만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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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판다바 형제의 맏이인 유디스티라와 그를 시험하는 야크샤가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나는 야크샤다. 너의 동생들은 경고를 받고도 억지를 부렸기 때문에 목숨으로 대가를 치렀다. 살고 싶거든, 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는 이 물을 마시지 마라.”
유디스티라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야크샤님, 저는 당신의 것을 절대로 탐내지 않겠습니다. 제가 아무리 목이 말라도 당신의 허락 없이는 이 물에 손을 대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질문에 최선을 다해서 대답하겠습니다.”
“무엇이 날마다 해를 뜨게 하느냐? 무엇이 날마다 해를 지게 하느냐?”
“창조신 브라흐마의 힘입니다. 그의 ‘다르마’(법)가 해를 뜨고 지게 합니다.”


유디스티라는 호된 시험을 거쳐야 했다. 질문이 계속 쏟아졌기 때문에 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유디스티라는 대답도 않고 꾸물거리거나 모른다고 하소연할 용기가 없/었다. 어떤 질문은 어리석게 들렸고, 어떤 질문은 심오하게 들렸고, 어떤 질문은 모호하면서도 다의적으로 들렸다.


… 중략

야크사는 계속 물었다.
“땅보다 무거운 것은 무엇이냐?”
“어머니.”
“하늘보다 높은 것은?”
“아버지.”
“바람보다 빠른 것은?”
“마음.”
“눈을 뜨고 자는 것은?”
“물고기.”
“태어난 뒤에도 움직이지 않는 것?”
“알.”
“추방자의 친구는 누구냐?”
“살아 있는 동안 베푼 자비.”
“신이 내려준 친구는 누구냐?”
“아내.”
“무엇을 버려야 부자가 되는가?”
“욕심.”
“무엇을 버려야 슬픔이 가고 기쁨이 오는가?”
“분노.”
“무엇을 버려야 만인의 사랑을 받게 되는가?”
“자만심.”
“어떤 학문을 공부해야 현명한 사람이 되는가?”
“경전을 공부한다고 사람이 현명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지혜가 뛰어난 사람과 사귐으로써 조금이라도 더 현명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브라만은 누구냐? 타고난 브라만이냐? 학문이나 행위로 브라만이 된 사람이냐?”
“타고난 브라만이 아니라 경전과 선행에 대한 지식으로 브라만/이 된 사람입니다. 브라만으로 태어난 사람도 설령 베다에 정통하더라도 마음이 불순하고 악행을 저지르면 수드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질문은 100개가 넘었다. 유디스티라는 갈증과 슬픔과 긴장으로 기절할 것 같아서 속삭이는 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야크샤가 말했다.
“네 가지 질문에만 더 대답해라. 그러면 죽은 동생들 중 한 명을 살려주겠다. 정말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냐?”
“재산이 얼마 안 되지만 빚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장 놀라운 불가사의는 무엇이냐?”
“날마다 사람이 죽고 주검이 실려 가지만, 구경꾼들은 자기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는 영원히 살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불가사의입니다.”
“길은 무엇이냐?”
“길은 위대한 사람이 지나간 자리입니다. 사람이 길을 찾을 때는 경전이나 논쟁을 공부해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경전이나 논쟁은 모순되고 상충합니다.”


마지막으로 야크샤는 말했다.
“너는 동생들 가운데 누구를 되살려주기를 원하느냐?”
“제가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막내 나쿨라가 다시 살아나게 해 주십시오.”
“나쿨라는 어쨌든 너의 이복동생이다. 나는 네가 아르주나나 비마를 원할 줄 알았다. 너한테는 그들이 소중할 테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어머니가 둘이었습니다. 우리 다섯 형제들 가운데 둘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 두 어머니에게 아들이 각각 하나씩 있게 해주십시오. 쿤티 어머니의 아들로는 제가 살아 있으니, 마드리 어머니의 아들로는 나쿨라를 살려주십시오.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너는 겸손함과 현명한 대답으로 나를 만족시켰다. 네 동생들을 모두 되살려서 너와 함께 가게 해주마.”
그후 야크샤는 그의 동생들을 모두 되살렸고, 유디스티라에게 다음과 같은 은혜도 베풀었다.
“앞으로 너는 동생들과 아내와 함게 어디를 가든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야크샤는 바로 죽음과 심판의 신이며 유디스티라의 아버지인 야마였다. 야마는 유디스티라의 정신력을 시험하고 계속 신분을 숨길 수 있는 능력을 주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추방 생활의 마지막 1년 동안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면 안 된다는 조건을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특별한 은혜였다. (149-153)

 

 

 

“네 가지 질문에만 더 대답해라. 그러면 죽은 동생들 중 한 명을 살려주겠다. 정말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냐?”
“재산이 얼마 안 되지만 빚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장 놀라운 불가사의는 무엇이냐?”
“날마다 사람이 죽고 주검이 실려 가지만, 구경꾼들은 자기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는 영원히 살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불가사의입니다.”
“길은 무엇이냐?”
“길은 위대한 사람이 지나간 자리입니다. 사람이 길을 찾을 때는 경전이나 논쟁을 공부해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경전이나 논쟁은 모순되고 상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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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이 산다고 하였다.

오늘, 내 마음 속 빈집에는 어떤 풍경이 살고 있을지... 혹 길 잃은 들개가 메마른 벌판을 헤매는 풍경?

 

 

빈집의 약속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 문태준, 『가재미』, 98-99쪽

 

나에겐 문태준의 시가 좀 어려운 것 같다.

함민복이나 김사인의 정서는 언뜻 공감이 많이 됐었는데, 문태준은 좀더 심오하다고 할까?

<가재미>, <서리>, <운문사 뒤뜰 은행나무>, <무늬는 오래 지닐 것이 못되어요>, <빈집의 약속> 등 몇몇은 좋았다.

책 말미 이광호의 해설에 나오듯 "그의 시에서 세계는 '자아화'되지 않으며, 단지 작은 존재들과의 사소한 교감을 통해서 시적 자아는 자신의 존재론을 조심스럽게 탐문한다"는 건데, 자꾸 읽어보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는 깨닫거나 느끼는 것이지 '아는' 건 아니지 않나. 나는 문 시인 스타일의 '사소한 탐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일까? 어떤 시는 솔직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라. 견문과 독서의 부족을 느낀다. 시집을 좀더 많이 찾아 읽어야겠다.

 

어쨌거나 글쓰는 사람들의 문체를 바꿀 수 있는 게 있다면 아마 시일 것 같다. 시에 쓰인 낱말, 문체와 리듬과 강약에 읽는이의 글쓰기가 영향을 받을 수 있겠다는 짐작이 든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시인만큼 내 마음과 사물들을 담담하게 관조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시적 비유 같은 건 천부적 자질이 필요한 덕목이다. 엊그젠가 저녁에 산 위로 막 떠오르고 있는 보름달을 보면서 딸내미는 "달이 굴러떨어질 것 같다"고 하였다. 경사진 산의 윤곽에 달이 살짝 걸려있는 걸 보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어린이들은 다 시인이라고 하던데 과연 그렇구나 하고 혼자 감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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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에서는 의상과 김춘추가 줄거리를 이끌어낸다.

초록에서 몇 구절 옮겨온다.

 

(원효가 자신을 찾아온 의상에게)
“문제는 재구성된 이야기 자체가 아닙니다. 이런 상징들은 경전과는 다른 감동을 주니 아름답습니다. 문제는 상징을 역사의 사실이라 믿게 될 때 부처님 말씀에 왜곡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붓다께서 후계를 정하지 않았음에도 가섭이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왜곡과 착각이 발생하면 법은 오염됩니다. 곡두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천축국에서 부처님 금란가사가 전해져 법맥을 이루고 그 법맥을 이어받은 달마가 중국에 와 중국 불교의 초조가 되고 그 밑으로 다시 법맥이 인가된다는 환각! 이런 환각이 은밀히 퍼져가면 필연적으로 중화주의와 사대주의를 강화하게 됩니다. 중국으로 유학 가서 법맥을 받아 오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사태가 벌어집니다. 요즘 나타나는 황룡사 현상을 보십시오. 황룡사의 물질적 타락은 이미 오래된 일이나 최근에는 중국에서 돌아온 유학파들이 일으키는 정통성 분란에 계파 싸움까지 가세한 데다 금란가사와 사리 다툼까지 얽히고설켜 있으니, 대체 거기를 어찌 절집이라 하겠습니까? 여기는 신라입니다. 당나라 장안의 어느 학파가 인가해 준 불교가 아니라 이 땅에는 지금 이 땅의 백성들이 원하는 불교가 필요한 거요!” (74)

 

(김춘추가 원효에게) “잘 들어라, 원효! 정치란 백성의 삶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백성이란 그냥 있는 것이다. 누가 백성의 지배자가 되는가, 이것이 중요할 뿐. 백성에겐 정의가 없다. 백성에겐 국가가 없다. 그들은 어디에서건 목숨만 부지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너희들의 그 한심한 아미타림처럼 말이다.”
원효는 김춘추의 말들이 뼛속까지 아팠다. 지배하는 이들은 천년 후에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더더욱, 이 뿌리 깊은 고통을 막기 위해서 백성이 깨어 있어야 한다. 권력의 질주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부처임을 각성해야 한다. 시급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205)

 

(강신주 해제 중에서)

국가 권력의 비호로 화엄 10개 사찰을 건립하고 그 사찰의 주인으로 권위를 행사했던 의상, 반대로 서라벌 저잣거리 땀 냄새와 술 냄새가 난무하는 곳으로, 더 낮고 더 냄새나고 더 역한 곳,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갔던 원효. 그렇다. 의상과 원효의 차이는 아주 간단한 비유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물에 빠진 사람들의 아우성을 보면서 재난 구조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람과 물에 빠진 사람들의 아수라장에 뛰어들어 그들을 묵묵히 구하려는 사람 사이의 차이라고나 할까. 말로 하는 불교와 말로 하는 자비는 몸으로 하는 불교와 몸으로 보여주는 자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숭배와 존경을 받으며 중생들 앞에서 그들을 이끌려고 했던 의상, 그리고 스님이라는 자리마저 버리고 중생들의 옆에 혹은 그 뒤에 있었던 원효. 스님으로 존경받기는 쉽지만 평범한 사람으로 존경받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랬다. 의상은 스님으로 죽었지만, 원효는 스님으로 죽지 않았다.
그렇지만 원효는 의상보다 더 커다란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다. 한 사람의 중생이라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스님이란 존경의 자리, 혹은 안정적인 지위마저도 기꺼이 버리려고 했던 남자, 그가 바로 원효였으니까.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중생 가까이 가기 위해. 자신이 누누이 강조했던 ‘진속불이(眞俗不二)’를 원효는 정말 그대로 실천했던 사람이다. (282-283)

 

그리고 누구나 궁금해할 것 같은 원효와 요석의 첫날밤 분위기는 대충 이러했다.

 

광대한 격정의 순간들을 주재하며 깎아지른 벼랑처럼 뜨겁던 요석의 몸이 점차 침착해졌다. 단애를 흠뻑 적신 불붙은 물의 시간, 서로의 몸속에서 목숨으로 태동하던 완벽한 합일이 수차례 거듭되며 벼랑이 무너지고 온몸의 뼈와 살이 공기처럼 흩어졌다. 온몸이 공기이자 빛이자 숨결인 채 요석과 원효가 서로를 지극히 아껴 맞아들이는 동안, 시간과 시간이 포개지며 두 몸은 둘이자 하나의 몸으로 새 우주를 이루었다. 원효가 지나온 시간과 요석이 지나온 시간이 서로에게 스며들었고, 원효의 몸속에서 요석은 처음으로 자신의 나신을 보았다. 뭉클한 노을빛 구름들이 몸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스러졌다. 저녁노을과 새벽노을이 한 몸에서 피어올랐다. 아, 님이여. 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겠습니다. 이런 말이 요석의 입속을 맴돌 때, 요석은 깨달았다. 나는 이제 살 수 있겠구나. 요석의 입술이 벌어지며 하아,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요석을 꽉 끌어안은 채 아끼고 아끼며 쓰다듬던 원효가 그 탄성을 들으며 안도했다. 원효의 가슴 위로 요석이 몸을 포갰다. 심장소리가 북소리처럼 들려왔다. 뜨거운 몸을 식히려는 듯 요석의 등을 원효가 가만가만히 쓸어 주었다. 요석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원효도 그러했다.
원효의 품에서 요석이 잠깐 잠에 들었다. 짧고 깊은 잠이었다. 잠에서 깬 요석이 원효와 눈을 맞추었고 서둘러 원효의 손을 찾아 깍지를 끼었다. 단 한 순간도 아까워 어쩔 줄 모르는 그 손을 맞잡고 서로를 향해 누운 채 눈부처를 바라보았다. 님의 품에서 든 첫잠입니다. 요석이 수줍게 웃었다. 거울처럼 원효가 웃었다. 요석의 이마와 두 눈과 콧등과 두 뺨과 입술에 차례로 입 맞춘 원효가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따라 일어나려는 요석을 그대로 누인 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요석의 나신 단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원효의 뜨거운 입술이 지나갔다. 다시 몸이 열리고 몸이 섞였다. 꽃이 피고 꽃의 은하가 열렸다. 불일불이한 우주가 일렁이며 흙의 냄새와 물의 냄새와 불의 냄새와 바람의 냄새가 중심으로부터 흘러넘쳤다. 그와 함께 무한히 텅 빈 허공이 역동했다. 몸의 모든 변방에서 꽃들이 떨리며 피어났다. 환희롭고 길고 긴 밤이었다. (25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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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02 0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자 동물의 본능 중 권력욕과 사리사욕은 벗었지만(전 이걸 사회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욕만큼은 버리지 못한 것일까요. 어쨌거나 지상에 태어난 것은 다 자연이겠지요. 과유불급이 돼서 문제...

돌궐 2015-07-02 09:20   좋아요 1 | URL
책에서는 이 장면이 원효와 요석의 첫날밤이자 마지막밤으로 서술됩니다. 요석을 김춘추의 손아귀에서 구해내기 위해 원효가 자신의 권위와 존엄조차 포기하는 순간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원효는 사랑이나 성욕이란 것조차도 무애한 경지에 이른 것이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요석을 안은 것으로 읽혔습니다.
강신주는 요석과 원효가 통하지 않았다고 보았고 김선우는 통했다고 하였는데, 요석과 원효 두 사람 말고 과연 누가 진실을 알겠습니까.ㅎㅎ

AgalmA 2015-07-02 09:21   좋아요 0 | URL
돌궐님 해석이 더 정통하신 듯 ㅎ))

돌궐 2015-07-02 09:40   좋아요 1 | URL
아니 이 무슨... 제 해석이 아니고 책에 그렇게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