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도

방안 온도계가 1주일씩 지날때마다 0.5도씩 차곡차곡 오르더니 8월 들어 30도를 돌파했고, 오늘 집구석에 들어오니 31.5도로 찍혀있다. 현관문까지 열어두고 선풍기를 돌려도 1시간이 지나도록 0.5도 떨어지는게 고작이다. 물론 에어컨을 돌리기 시작하면 불과 10분에 2, 3도는 후딱 떨어진다. 무서운 돈의 힘 아니겠는가? 그래도 여름엔 더워야 하는 법이니, 도저히 잠이 들지않는 더위가 아니면 에어컨은 생략한다.

지금 사는 곳은 문을 앞뒤로 다 열어도 환기가 썩 잘 되지않는 닭장같은 곳이긴 하나, 그래도 건물 한가운데를 뻥 뚫어 2층을 정원으로 만들어둔 나름 괜찮은 곳이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와서 탄천 다음으로 좋아하는 곳이 이 정원이다. 멍하게 담배 물고 넉넉히 걸을만하다.

31.5도에 어울리지 않게, 여기는 몇 주 전부터 귀뚜라미가 점령했다. 미친 귀뚜라미가 아니고서야 이 폭염경보에...라고 생각했는데, 자연의 법대로 살아가는 놈들이 틀릴리가 있겠는가 싶어 나도 가을이다라고 믿기로 했다. 계절의 공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마음먹기 나름 아니겠나.

뒤늦은 봄 사진도 꺼내 들었다.







이 폭염에 시시한 이 글 읽으시는 분들께... 여름을 사나, 봄을 추억하고, 귀뚜라미 우는 선선한 가을밤이 함께 하시길 비나이다.

*** 디지털카메라 대신 아직도 필름카메라를 쓰는 덕에 사진 뽑으랴, 해상도가 툭 떨어지는 화일로 스캔하랴... 정말이지 귀찮아져 오늘 작심했다. 필름스캐너 3개월 무이자로 살거다. 화질 짱짱한 사진 올릴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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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20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주일 내내 무더위라고 합니다. :)

dalpan 2007-08-20 13:0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울트라 캡숑 폭염이랍니다! 저야 띵까띵까 휴가 가버리면 되지만...아프님 논문쓰느라 고생 많습니다. 허허허.. 수고!

다락방 2007-08-2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뒤늦은 봄사진이네요 :)

dalpan 2007-08-20 13:0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뒤늦은 봄사진입니다.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던 꽃길입니다. 이제야 사진을 현상해서 올립니다. 좀만 기둘리세요. 제가 필름스캐너 사서 빵빵하게 올려드립지요.

비로그인 2007-08-20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카라고 하시니 부옇긴 하지만 왠지 정겨워요 :)
소녀는 누구?

dalpan 2007-08-20 13:08   좋아요 0 | URL
꽃잎 쌓인 길거리 지나가는 소녀1. 저도 몰라요. ㅎㅎㅎ

twinpix 2007-08-20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사진들이 왠지 낯선 느낌이면서도 좋네요.^^ 필카 느낌이라 더 그럴까요?^^ 사진 잘 보고 갑니다. 무더위는 어떻게 이겨낼 지 고민이에요. 그래도 선풍기로 어찌 버텨봐야겠지만요. 'ㅁ'

dalpan 2007-08-21 00:03   좋아요 0 | URL
오늘도 무척 더웠지요? 전 아직 선풍기에 의지해 사무실입니다. 월욜 아침부터 머리에 열 오른다했더니, 날씨마저 덥네요. 그저 일에 지쳐 서재에 잠시 들어와보니 간간이 들어오신 분들이 반갑습니다. 더운 한주 잘 견디시고.

다락방 2007-08-2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alpan님이 왜 좋은지 아세요?
누군가의 글을 읽으면 좀처럼 잊지 않으세요.
그리고 누군가에게 했던 말도 좀처럼 잊지 않으시죠.
심지가 굳은 분이신것 같아 신뢰가 가요.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죠?

dalpan 2007-08-21 01:08   좋아요 0 | URL
좋게보아 그렇다는 것이고, 삐딱서니 탈때는 그 성질만큼 까칠한게 없습니다. 저도 늦게 알았지요.
그러나! 굳은 것을 더 순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나를 신뢰해주는 누군가의 믿음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그게 없으면 말짱 꽝이지요.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죠?
 

서울의 청계산과 관악산은 가까이 붙어있는 산이지만 성질이 많이 다르게 느껴진다. '악'자 들어간 산치고 걷기 고운 산은 별로 없다. 그만큼 관악은 뾰죽한 바위도 많고 다소 산세가 험한 곳도 많다. 그에 비해 청계산은 보슬보슬한 흙산같은 느낌이다. 이번에 처음 오른 칠갑산도 흙산이다. 어떤 등산로를 타더라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산이고, 왕복 세 시간이면 초보자라도 충분히 오르내릴 수 있는 산이다.

촉촉히 대지에 빗줄기가 내리던 시간에 시작된 산행은 오락가락 하는 비 덕에 우의를 입었다 벗었다하는 소란을 떨게 만들었다. 난 우의도 없을 뿐더러, 그냥 내리면 맞지...라는 생각으로 편히 걸었다. 일부러 엉뚱한 곳으로 시선돌려 경치보며 걷는 연습도 했다. 평평한 칠갑산이니 가능한 일이라 싶다.



정상!

정상답게 어찌 그리도 절묘하게 알았는지 딱 오른 시간에 맞춰 하늘이 요동쳤다. 그리고는 됫박으로 퍼부어댔다. 이런...된장할...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요즘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본 적 있나?라는 생각을 하면 오히려 재밋기도 하다. 더 내렸으면...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역시 비가 오는 날이다 보니 시야가 좋지 않았다. 산 중턱에 내려와서야 구름에서 걷힌 산세가 보인다. 계룡산이 명산이라 하나 예전에 올라서 받은 느낌은 동네 뒷산에 오른 느낌이었다. 산 하나 그저 불쑥 솟아있고 내려다보면 동네가 훤히 보이는 산. 별로 재미없다. 지리산처럼 산너머 산밖에 안보이는 곳은 아니라도 칠갑산은 산은 낮으나 산세는 수려했다. 구한말 최익현 선생이 이곳 청양에서 척화의병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글쎄... 빨치산처럼 숨어 뛰어다닐만한 곳은 아니다싶다.

도심에는 없는 상쾌한 공기와 푹신한 흙맛이 느껴지는 우중산행. 칠갑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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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17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의가 없어서 고생하셨겠어요~ 아휴 전 작년에 본초산행 갔다가 너무 힘들어서 펑펑 울었었는데 -_-;;

dalpan 2007-08-18 02:00   좋아요 0 | URL
우의 입으면 디따리 덥답니다. 그냥 없이 비 맞는게 간단한 산행에는 더 좋은거 같아요. 시원도 하고. Jade님도 산행은 별로인가 봅니다. 항상 즐거운 일만 하세요.

twinpix 2007-08-19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을 올라가 본 게 오래전 일 같네요. 비오는데 고생하셨네요. 그래도 정상에 오를 때의 그 느낌이 문득 그립기도 합니다. 'ㅁ' 잘 읽고 갑니다.^^

dalpan 2007-08-20 00:28   좋아요 0 | URL
정상에 오른 느낌! 캬... 예전엔 정상서 허리 쭈욱 펴고 담배 한 대 피면 세상 부러울 것 하나도 없었는데, 요즘엔 담배 피면 벌금입니다. 꾸욱 참아야해요. 어찌되었든 땅만 보고 걷다, 하늘 한번 쳐다보고 정상으로 냅다 달렸었는데, 이젠 천천히 걷는 연습하고 있답니다. 산을 더 즐기려면 느긋해져야 한다고 스스로 달래는 중이에요. 한번 올라보세요. 예전 느낌처럼 좋을겁니다.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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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한반도의 북쪽을 통치하던 사람이 죽었고, 세상은 곧 북쪽이 빈 권력의 공백 속에서 혼란과 붕괴의 과정을 보일 것처럼 시끌했다. 나는 그 날을 기억한다. 햇볕이 지글대던 더운 7월 어느날.

1997년 반세기동안 북쪽을 지배해 온 나랏님이 죽자 희안하게도 홍수와 가뭄을 번갈아 겪더니 급기야 시장통을 누비는 꽃제비들의 영상이 남쪽에도 날아들었다. 지하철 역마다 굶주림에 쪼들린 북쪽 아이들의 모습이 나붙었고 그 앙상함에 되레 눈망울만 도드라지게 멀뚱했다. 나는 그 사진 속의 아이들을 기억한다. 어줍잖은 모금운동도 벌였고, 덕분에 회사 인사부서에 질질 끌려가 협박도 받았지만 여하튼 옥수수 몇 알 보내는데 일조했다. 나중에 그룹총수의 대북사업 구상이 발표되자 나를 협박했던 사람들은 회사식당 앞에서 가슴을 가로질러 띠까지 두르고 지나가는 우리를 붙잡아 성금내시라 시끄러운 고함을 질러댔다. 사람의 이중성을 보았고, 인식의 차이를 경험했다.

그 때 그런 경험에 나를 몰아넣었던 아이가 바로 바리다.

설화 속의 바리공주처럼 못 먹던 시절에 여섯 딸도 모자라 일곱째 딸을 낳았으니 아마 어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을만도 했다. 급기야 포대기에 싸서 남몰래 버린 딸을 할미와 집에서 키우던 흰둥이가 찾아내지만, 이름 하나 붙여주지않고 살다 결국 할미가 지어준 바리라는 이름은 바로 설화 속의 그 바리다. 죽은 부모를 위해 세상의 끝 서역으로 생명수를 구하러 간 바리공주말이다.

설화 속의 바리공주는 이제 소설 속의 바리가 되어 현실에서 내게 얘기한다. 도대체 생명수가 무엇이냐?

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것이, 먹고 사는 것이 부족해 고난의 시기를 걸어야 했던 북쪽의 현실만도 아니며, 돈을 놓고 인간을 팔아먹는 - 돈 앞에 변질된 - 사회주의 중국만의 이야기도 아니며, 돈에 넘쳐 불빛 찬란한 구미선진국에서는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세계화된 분열과 증오, 죽임의 현실을 뛰어넘을 생명수를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부모를 살리는 생명수는 세계인류를 구원할 생명수를 바랐고, 조선의 설화는 세계에 던지는 용서와 구원의 메세지가 되었다.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직접 보지않고 북받치는 감정을 갖기 힘들듯, 북쪽의, 중국의, 영국의 현실을 직접 보지않고 뭐라 말하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밖의 사람들은 우리를 잘 모를 수 밖에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결국 세계화된 것은 상품과 자본이지 인간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소설은 인식의 차이를 넘어서는 영감을 띄워주었다.

사진과 영상 같은 시각매체가 아니라 글로써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 가슴 속 영상을 불러내도록 하는 것은 대단한 재주이다. 그러기에 바리가 모든 것을 잃어가던 전반의 글은 읽어내는 것이 힘에 겨워 버거웠다. 그만큼 황석영의 글은 내게 넌픽션이 아니고 픽션이었던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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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16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소설 잘 안읽으실 것 같은데, '바리'에 대한 애정이 있으셨군요!

dalpan 2007-08-16 23:56   좋아요 0 | URL
어찌 아셨지요? 소설 잘 안 읽는데 황선생님이 글 하나 쓰셨으니 읽어봤지요. 우리시대 최고의 글쟁이가 맞습디다. 읽는내내 그 생각이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하더라구요.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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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룡이 왔구나아
형님. 걱정 많이 했음다. 이젠 살길이 열렜으니까니.... 자아, 보라요. 저 뒤에 세관으루 양식차 들어옵네다.
그가 우리 방에 들어와 풀어놓은 것은 우선 아이들 먹으라고 월병이 한 상자였고 뒤이어 우리집 식구들을 위하여 입쌀 한 자루에 옥수숫가루 세 포대와 기름 두 통에 밀가루도 있었다. 우리는 누가 권하기도 전에 상자를 뜯고 비닐포장을 헤쳐 월병을 양손에 두 개씩 움켜쥐고 아구아구 먹었다. 다디단 속고물에 혀가 녹는 것 같았다.-55쪽

싸락눈이 덮인 과수원의 나뭇가지 사이로 난 오솔길로 낯익은 껑충한 키의 구부정한 아버지 모습이 나타났을 때의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할머니와 나와 현이는 한뭉치가 되어 아버지에게 와라락 달려붙었다. (중략) 아버지는 어깨가 떨어지고 여기저기 솜이 비어져나온 동절기 군대 누비외투를 얻어 걸치고 있었고 편의화는 개의 혓바닥처럼 창이 벌어졌다. (중략)
야아, 이거 이밥이로구나. (중략)
그때 할머니와 현이와 나는 조금 놀랐다. 아버지가 우리 할머니에게 이제 밥 먹자는 말이나 눈짓도 없이 된장찌개 냄비를 밥에 기울여 반나마 붓고는 정신없이 숟가락으로 퍼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밥그릇 위로 숙인 그의 정수리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머리카락이 빠져 듬성듬성했고 이제는 회색에서 거의 백발로 변해가고 있었다.-66쪽

할마니, 나 추워 못 자갔다....
가느다란 현이의 목소리가 이불 속에 묻힌 채로 들려오곤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현이의 머리 위로 이불을 들씌워주면서 달래곤 했다.
오오, 이제 날 샌다. 날 새문 따뜻해질 거다.
나무들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소리가 더욱 거세어지다가 뭔가 거대한 물결이라도 덮치는 것같이 휘익, 하는 느낌이더니 눈보라가 사정없이 우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얼기설기 엮어놓은 나뭇가지의 지붕이 날아가버렸다. (중략)
현이가 어디 갔니? (중략)
아버지가 먼저 움집 뒤편 둥치 큰 나무가 촘촘히 막아선 숲속에서 현이를 찾아냈다. 그애는 말라붙은 멸치꽁댕이처럼 온몸을 쪼그리고 모로 누워 있었다. 아버지가 현이를 안아일으켰고 할머니가 곁에 따라가며 머리를 흔들었다.
야야, 정신차리라. (중략)
거 추운데 왜 나가 있댄?
오줌 마레와서....
오줌 누군 들오지 거기 있다 얼어 죽을 뻔했구나.
현이는 스르르 눈을 감더니 다시 잠이 들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중략)
나는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언니야, 너 떠나려고 하는 줄 내 다 안다.
우리는 이불 속에 하반신을 넣고 모두 앉은 채로 끄덕끄덕 졸다가 잠들었다. 그날밤 현이는 죽었다. (중략) 그러나 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나 세 사람 누구도 정말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애를 옷가지와 비료포대 여러 장으로 둘둘 말아서 안고는 움집을 나서면서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따라오지 말라-72쪽

나는 마을과 노동지구가 다가올 때마다 크게 비켜가야 했으므로 낮에 걷는 게 별로 이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중략) 나는 낮에 자고 밤에만 길을 가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풀숲에 파카를 펼쳐놓고 누웠다. 칠성이는 내 옆에 몸을 붙이고 앞다리에 턱을 괴고 나를 지켜보았다. 한기에 오슬오슬 추워져서 눈을 뜨니 하늘에 별들이 하나 가득했다. 그건 먼 세상의 집들이 창문마다 불을 켜놓은 듯했다. 하마터면 눈앞에 다가온 제일 큰 별을 따려고 손을 뻗을 뻔했다.-88쪽

부령까지 가면서 나는 밤마다 들판과 마을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헛것들과 부딪쳤다. 그들이 휘적이며 빈 마을길을 스쳐 지나갈 적마다 둥치 큰 나무들 사이로 무거운 바람이 지나가듯 우우우웅하는 나직하고 음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중에 다른 세상으로 가서 수많은 도시들과 찬란한 불빛들과 넘쳐나는 사람들의 활기를 보면서 이들 모두가 우리를 버렸고 모른 척했다는 섭섭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93쪽

나는 샹 언니부부에 대하여 말했고, 그들은 아저씨처럼 친가족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며, 그들이 따렌으로 이사가서 안마업소를 차릴 텐데 나도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는 데까지 말했다. (중략)
앳쌔 말하지 말라. 길구 슬그머니 가문 되는 거이야. 세상에 네 처지가 이러루한데 누굴 믿갔나? 앞으로 아무두 믿지 말라. 이 고장두 인심이 점점 무서워지고 있단다. 이거이 다 무엇 때문이가? 돈 때문이야. 알가서? 세상은 말이다. 전기불 훤해지구 돈 돌문 인정이 사라지게 돼이서. 전에 조선하구 무역한다문서 돌아치던 젊은것덜 전부 부로카질해서 먹구산다.
하더니 아저씨는 또 소주 한 잔을 벌컥, 하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바루 너 같은 아이들 팔아먹구 산다 이거야.-112쪽

할머니의 이야기 중에 장승이와 바리공주의 약속이 생각났다. 길값, 나무값, 물값으로 석삼년 아홉 해를 아들 낳아주고 살림 살아주어야 하는 세월.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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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의 의미 - 어느 재일 조선인 소년의 성장 이야기 카르페디엠 14
고사명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이 책을 사서 읽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한가지는 재일조선인 - 서경식 선생의 글을 읽은 이후로는 재일동포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아직도 재일동포 중에 무국적자가 많으며, 남한이든 북한이든 통일되지 않은 조국은 그들에게 변화된 현실에 따라 그들의 역사적 정체성을 강요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 의 삶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관심이며, 다른 하나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도쿄도 에다가와 조선인학교의 외로운 싸움에 이 책을 사서 몇 푼이나마 기부해 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에다가와 조선인초급학교는 일본우익의 대표인사인 도쿄도지사 이시하라의 이민족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정책으로 인해 수십년간 실질적 점유권을 지녀온 학교터에 대해 당장 반환하거나 사용료를 내라는 말도 안되는 통보를 받았다. 이에 일본시민사회와 한국의 몇몇 관심어린 사람들과 함께 소송을 제기해 실질적인 승소를 이끌어 내었으나, 학교터에 대한 매입금을 마련하지 못해 여러 채널을 통해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중이다.

논리적으로 실제 국유지를 학교가 점유했으니 돌려주는 것이 합당하나, 재일조선인의 삶을 되돌이켜 본다면 가당찮은 일이다. 일제강점기 재일조선인의 삶은 가난과 차별, 이 두가지 용어만으로도 충분하다. 전쟁으로 인한 동원의 시대, 재일조선인은 험한 일에 끌려다녔고 그들의 삶의 터전은 식수 하나 제대로 끌어오지 못하는 일종의 변두리 집단거주의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해방이후 일본사회에 살아남아야 하는 조선인들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어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열정은 그 험한 땅에 직접 학교를 만들기에 이른다. 아무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지만, 그들은 한글을 가르치고 배웠다. 그게 에다가와 학교이고, 수많은 일본 내 우리의 조선인 학교이다. 

머리가 뜨거웠던 시절,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다가 책을 집어던질뻔 했다. 그 시절 '忍'이라는 것은 세상에 타협하고 굴복하는 것에 다름아니었고, 내겐 이데올로그화된 지배개념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문득 책을 덮으며 이 생각이 난 것은, 저자가 생각하는 살아간다는 의미 속에는 재일조선인의 가난하고 차별받은 삶이 있을지언정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져버려서는 안된다는 그의 뒤늦은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나 밋밋하게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가 살아온 시대와 그가 살아온 생을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손을 내밀기 전에 이미 그들은 뜨겁게 살고 있을터였다.

저자 고사명(본명 김천삼)씨는 1932년생이다. 이 책 역시 1974년에 쓰여진 책이다. 내가 어쩌면 은근히 바랐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나 피폐했던 삶에 대한 울부짖음이 아니라, 차분하게 옛 시절을 관조하고 거기에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는 특수성을 일본인들에게 높낮이 없는 투로 전달을 한다. 그도 그럴것이 어린 시절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그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가난하고 차별받아 죽음을 생각해 보았지 왜 차별받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천황을 위해 특공대에 지원하겠다는 생각은 순식간에 찾아온 종전으로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 공허함이 오히려 그에게는 현실인식과 함께 삶을 의미를 찾아나서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태어날때 이미 조선은 일본이었던 개인사적 상황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책은 더 현실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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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08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alpan님 리뷰보니까 내용보기 전에 너무너무 반가운거 있죠 ㅎㅎ 저 dalpan님 팬 할까봐요 ㅎㅎ

dalpan 2007-08-08 12:23   좋아요 0 | URL
밤도깨비 Jade님! 팬1호로 임명합니다~ 팬카페 만들면 얘기해 주세요. ㅎㅎ

멜기세덱 2007-08-08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흠!! 나 막 질투~~~ㅋㅋ

dalpan 2007-08-08 12:25   좋아요 0 | URL
제가 세덱님 팬이잖수. 라주님과 함께. ㅋㅋ

프레이야 2007-08-08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판님, 책을 읽게된 이유부터 자분자분.. 추천입니다^^

dalpan 2007-08-08 12:29   좋아요 0 | URL
혜경님 말씀하시는 투가 더 자분자분합니다! 흐흐흐.. 지난번 '화려한휴가'를 보고 저도 혜경님처럼 '꽃잎' 생각이 나더군요. 글을 한번 써볼까했는데 혜경님이 다 쓰셔서 그냥 추천만. 진짜 영화리뷰로 책 한번 내세요!

다락방 2007-08-08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사는 하셨나요?
이제 dalpan님의 서재에 오시는 분도 점점 늘어가고, 팬도 생기셨네요.
그런만큼 서재에 글도 많이 많이 올려주세요. 늘 와서 읽고 가고 있으니 말예요.

dalpan 2007-08-08 13:18   좋아요 0 | URL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우리같은 종족은 숨어서 암약하는걸 좋아라하는데, 너무 노출이 많이 됐어요. 머리도 딸리고..뜰 때가 됐나봐요. 에이띠...

2007-08-08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dalpan 2007-08-08 23:16   좋아요 0 | URL
마흔다섯이면 노후준비해야 한답니다. 마흔다섯 넘어 은퇴하면 할일없어 알라딘에 글이나 올리고 있을지도 모르니...어쩌면 우리는 지금 진짜 삶을 위한 은퇴준비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허허허..

비로그인 2007-08-0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5년 서재의 내공이 이제야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군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

dalpan 2007-08-08 23:19   좋아요 0 | URL
내공은 네이버에서 찾으셔야지요..흐흐흐
대신 알라딘은 서재지수가 말해주지요..희안하게도 항상 서재지수가 총방문자수를 아주약간 앞질러 갔는데, 요근래에 뒤집혔습니다.

저는 게으르고 서재는 겉멋이 들었나봅니다.

송도둘리 2007-08-08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이 넘치고 시원합니다. 장맛비의 척척함이 싹 가시는데요? 추천합니다.^^

dalpan 2007-08-08 23:21   좋아요 0 | URL
처음 뵙는 팰릭스님. 감사합니다. 어제밤에 정말 더워 할일없어 적은 글인데, 칙칙함을 싹 가시게 했다니 제가 되레 감사하나이다. 자주 뵈어요.

마늘빵 2007-08-08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거 댓글의 향연이군요. :)

dalpan 2007-08-08 23:47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아프님 서재만 할까요.

라로 2007-08-08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참 잘쓰시네요...
알라딘에 숨은 보석들이 많은건 알았지만...^^;;;;

dalpan 2007-08-09 12:58   좋아요 0 | URL
어이쿠..나비님 무슨 그런 말씀을..
찾아주시고, 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