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지형은 '과잉우경화', '과잉보수화'되어 있지만, 시민들은 간헐적으로 파열구를 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한국의 정치지형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중략) 한국의 정치적 상부구조는 승자독식 구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대의제가 대중의 의사, 이익, 욕망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하다 보니 시민들이 '직접행동'에 호소하는 것입니다.-49쪽
한 사회에서 부와 가치를 창출하는 곳이 기업 아닙니까? 엄밀하게 얘기하면 자본과 노동이겠죠. (중략) 그런데 창출된 부와 가치를 사회적인 차원에서 어떤 우선순위에 따라 얼마만큼 어떤 절차에 따라 분배할 것인가는 정치가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권력이 바뀌면 그에 따라 경제구조가 바뀔 수 있는 거죠. (중략) 문제는 정치를 책임지는 주체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 구체적인 세밀한 계획이 있는가입니다.-54쪽
(경제모델에 대한) 체계적 설계가 아직 없죠. 그러니까 삼성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은 하는데, 나오는 대안을 보면 형법, 세법, 공정거래법 등 '법적 규제' 수준에 머무는 거죠. 경제권력의 오남용에 대한 법적 규제를 OECD 수준으로 강력하고 엄격하게 정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우리나라가 어떤 경제모델로 가야 하는지 정해야 하고, 그 속에서 대기업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해야 하죠. 그런데 아직은 그 대안적 경제모델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삼성 개혁에 대한 논의도 진척이 안 되는 겁니다.-60쪽
김상곤 경기교육감은 진보적 교수였지만 직업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어느 정치인 못지않게 우리 사회에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전선'을 만들어냈습니다. (중략) 지금까지 진보개혁 진영은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말만 했지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정책을 이슈화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거든요. 또한 이론적, 정책적 차원에서 복지국가를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대중적인 공감을 일으키지 못했고요. 그런데 무상급식 논쟁은 신자유주의 반대, 복지국가 건설의 의미가 무엇인지 대중이 바로 알아듣게 만들어주었습니다.-67쪽
과거에는 '제로'였는데 지금은 나름의 권력과 명성을 갖게 되니까 사고방식도 행동방식도 달라진 것이죠. 386세대 운동권 출신도 국회에 많이 들어갔지만, 선수가 쌓이고 당 고위간부가 되다 보니까 자기가 갖고 있는 지분과 세력을 유지하는 데 급급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투사'가 '영주'로 변모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영주는 왕에게 받은 봉토가 있고, 자신에게 속한 농노가 있고, 일정한 조건 아래 중앙의 왕과 교섭할 수도 있잖아요. 왕과 맞서기보다는 그냥 영주로 사는 것이 안전하고 행복하죠. 왜 오래전부터 혁신하라는 주문은 많았는데 혁신하지 않을까요? 그들이 언제부터인가 영주처럼 사고하고, 영주처럼 행동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으로 의심하자면, 왕이 되기를 포기한 거죠.-68쪽
저는 386세대의 이중성을 지적하는 데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정치에서는 진보, 생활에서는 보수(혹은 무대책)'라는 이중성 말입니다. (중략) 정치에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자녀 교육 문제로 가게되면 별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중략) 학원 가라, 외고 가라, 토플 공부해라, 졸업하면 삼성 가라 등의 말을 하게 되는 거죠. 이러한 이중성이 386세대의 근본 모순이었다고 봐요. 386세대가 정치 영역에서 집단적 노력을 통하여 진보를 이루었듯이, 다른 생활영역에서도 집단적으로 고민해서 진보적 대안을 만들고 그것을 정파와 관계없이 연대하여 제도적 대안으로 만들어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73쪽
사실 386세대의 모순은 진보개혁 진형 전체의 모순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진보개혁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정치인이건 지식인이건 간에 진보적 상상력을 키우는 것을 자제하면서 스스로 희망의 불씨를 꺼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중략) 언제부턴가 진보개혁 진영의 상상력은 쪼그라들었고, 실천마저 과감해지지 못한 것입니다. (중략) 정치적 민주화가 되면서 이 '투사'들이 각 영역에서 자리를 잡았고 이후 점점 '관리자 모드'로 바뀐 거죠. 자신도 이 체제 아래에서 자리를 잡게 되고, 국회의원이나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친구나 지인이 생기면서 몸도 마음도 둔해진 겁니다. 진보는 열정을 가지고 미답의 장, 미완의 장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바로 후퇴하거든요.-74쪽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핵심 중의 하나가 '사회임금'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임금이라고 하면, 직장에서 일하고 받는 '시장임금'만을 생각합니다. (중략) 직업을 못 구하거나 구조조정 등으로 직장을 잃게 되면, 시장임금은 없어지고 사회임금도 거의 없으니 암담한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국가가 제도를 통해서 사회임금을 높여주면 시장임금이 낮아져도 삶이 팍팍해지지 않습니다. 유럽에서는 국민의 약 70~80퍼센트가 큰 부담 없이 평생 임대 주택에 살 수 있어요. 대학 진학을 위한 사교육은 희귀한 일이고, 대학등록금도 매우 낮아서 교육비 부담이 적죠. 무상의료의 범위가 넓기 때문에 중병이 들었다고 해서 집안이 의료비로 거덜 나는 일은 없어요. 이들 나라의 시민은 시장임금 외에 사회임금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이런 모든 것을 개인이 시장임금을 벌어 해결해야 하니 죽을 노릇이죠.-101쪽
사회임금이 잘 갖추어져 있으니 굳이 정규직이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노동자가 스스로 비정규직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간과해선 안 될 것이 있어요. 그런 나라에서는 사회임금이 높다는 점 외에도 비정규직에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관철된다는 점이에요. 한국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양과 질의 노동을 해도 임금이 반 토막 나거든요.-113쪽
현 시점에서 진보개혁 진영이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의 예를 참조해 경제민주화를 추진하면 좋겠어요. 발렌베리는 6대째 약 150년 동안 세습경영을 하면서 일렉트로룩스, 에릭슨, ABB, 사브, 스카니아 등 세계적 기업을 여럿 거느리고 있고, 총 시가총액이 스웨덴 주식시장의 40퍼센트를 넘습니다. (중략) 그런데 발렌베리는 불법경영이나 불법상속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노동조합을 인정할 뿐 아니라 경영에 참가시킵니다. 스웨덴에서 대기업과 집권 사회민주당, 노동조합이 이렇게 '빅딜'을 한 겁니다. 세습경영 인정과 노동자의 경영 참가를 동시에 인정한 것이죠.-121쪽
정치와 정책은 바로 욕망을 가지고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을 전제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도덕주의적으로 정치와 정책을 바라보고 접근하면 실패하기 마련이죠. 현재 정치학의 시작을 마키아벨리에서 찾는 이유도 그가 최초로 윤리와 정치를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진보개혁 진영 내부에 '이익의 정치'나 '욕망의 정치'를 '가치의 정치'와 대립적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위험합니다. (중략) 그리고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 평등, 연대 등의 진보적 가치에 따라 욕망의 내용과 방향을 재설정해야 합니다. 법과 제도를 통하여 욕망이 자기 파괴적으로, 그리고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방식으로 발현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135쪽
거듭 말씀드리지만 북한 인권 문제에는 남쪽의 수고보수 진영이 아니라 진보개혁 진영이 나서야 의미도 있고 효과도 있습니다. 사실 좌파적 사상과 실천을 '이적'으로 몰아 처벌하는 남쪽의 국가보안법이나, 김일성, 김정일 사진을 깔고 앉는 행위조차도 처벌하는 북한 형법 모두 분단이 낳은 비이성의 산물 아닙니까?-194쪽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권력혐오증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막스 베버는 "정치인은 악마적 힘과 손잡은 사람"이라고 갈파한 바 있어요. 정치권력은 다름 아니라 악마적 힘입니다. 이 힘과 손을 잘못 잡으면 악마에게 내가 넘어가죠. 이 힘을 포기하면 반대 정파가 이 힘을 사용하여 나를 억누르죠. 그러나 그 힘을 정확히 사용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능력이 정치인에게는 필요한 겁니다.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에 능한 것을 넘어, 그 권력을 잡았을 때 이를 잘 다루어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거죠. 진보개혁 진영의 사람들은 권력 행사를 혐오하는 경향을 버려야 하며, 권력을 유능하게 행사하는 기술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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