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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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한반도의 북쪽을 통치하던 사람이 죽었고, 세상은 곧 북쪽이 빈 권력의 공백 속에서 혼란과 붕괴의 과정을 보일 것처럼 시끌했다. 나는 그 날을 기억한다. 햇볕이 지글대던 더운 7월 어느날.

1997년 반세기동안 북쪽을 지배해 온 나랏님이 죽자 희안하게도 홍수와 가뭄을 번갈아 겪더니 급기야 시장통을 누비는 꽃제비들의 영상이 남쪽에도 날아들었다. 지하철 역마다 굶주림에 쪼들린 북쪽 아이들의 모습이 나붙었고 그 앙상함에 되레 눈망울만 도드라지게 멀뚱했다. 나는 그 사진 속의 아이들을 기억한다. 어줍잖은 모금운동도 벌였고, 덕분에 회사 인사부서에 질질 끌려가 협박도 받았지만 여하튼 옥수수 몇 알 보내는데 일조했다. 나중에 그룹총수의 대북사업 구상이 발표되자 나를 협박했던 사람들은 회사식당 앞에서 가슴을 가로질러 띠까지 두르고 지나가는 우리를 붙잡아 성금내시라 시끄러운 고함을 질러댔다. 사람의 이중성을 보았고, 인식의 차이를 경험했다.

그 때 그런 경험에 나를 몰아넣었던 아이가 바로 바리다.

설화 속의 바리공주처럼 못 먹던 시절에 여섯 딸도 모자라 일곱째 딸을 낳았으니 아마 어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을만도 했다. 급기야 포대기에 싸서 남몰래 버린 딸을 할미와 집에서 키우던 흰둥이가 찾아내지만, 이름 하나 붙여주지않고 살다 결국 할미가 지어준 바리라는 이름은 바로 설화 속의 그 바리다. 죽은 부모를 위해 세상의 끝 서역으로 생명수를 구하러 간 바리공주말이다.

설화 속의 바리공주는 이제 소설 속의 바리가 되어 현실에서 내게 얘기한다. 도대체 생명수가 무엇이냐?

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것이, 먹고 사는 것이 부족해 고난의 시기를 걸어야 했던 북쪽의 현실만도 아니며, 돈을 놓고 인간을 팔아먹는 - 돈 앞에 변질된 - 사회주의 중국만의 이야기도 아니며, 돈에 넘쳐 불빛 찬란한 구미선진국에서는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세계화된 분열과 증오, 죽임의 현실을 뛰어넘을 생명수를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부모를 살리는 생명수는 세계인류를 구원할 생명수를 바랐고, 조선의 설화는 세계에 던지는 용서와 구원의 메세지가 되었다.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직접 보지않고 북받치는 감정을 갖기 힘들듯, 북쪽의, 중국의, 영국의 현실을 직접 보지않고 뭐라 말하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밖의 사람들은 우리를 잘 모를 수 밖에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결국 세계화된 것은 상품과 자본이지 인간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소설은 인식의 차이를 넘어서는 영감을 띄워주었다.

사진과 영상 같은 시각매체가 아니라 글로써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 가슴 속 영상을 불러내도록 하는 것은 대단한 재주이다. 그러기에 바리가 모든 것을 잃어가던 전반의 글은 읽어내는 것이 힘에 겨워 버거웠다. 그만큼 황석영의 글은 내게 넌픽션이 아니고 픽션이었던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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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16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소설 잘 안읽으실 것 같은데, '바리'에 대한 애정이 있으셨군요!

dalpan 2007-08-16 23:56   좋아요 0 | URL
어찌 아셨지요? 소설 잘 안 읽는데 황선생님이 글 하나 쓰셨으니 읽어봤지요. 우리시대 최고의 글쟁이가 맞습디다. 읽는내내 그 생각이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