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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개조론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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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만 되면 정치적 열망을 뿜어내며 동원되었던 많은 국민들은 곧이어 현실정치판의 추한 모습에 절망을 하는 일정한 사이클을 한국 국민은 오랜 시간 보아왔다. 그래서인지 올해 대선은 웬지 다이나믹하지 못하다고 느끼는데, 이것이 나도 이제 나이들어 정치적 열패감을 느끼는 개인적인 문제인지 진정 정치가 잘못된 사회적인 문제인지 혼동될 때가 많다.

참여정부 들어 부쩍 늘어난 것은 대통령을 아주 쉽게 욕해대는 것이 아닌가싶다. 대학시절에 헐리웃 영화를 보면서 아무리 영화라지만 대통령을 희화하고 비판해대는 것이 저리도 자유로울까 싶어 한편으로 놀라웠고 한편으로 부러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역시 대한민국은 속도가 너무 빨라 넌픽션이 아닌 현실에서의 비판도 이젠 아주 자유로운 듯해 또 한번 놀랄 때가 많다.

갈등을 확인하고 표출시키며 통합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정치라고 전제하면 참여정부는 절대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나름대로의 정책적 열의와 성과에 대해서조차 딴지걸고 폄하하고 시비걸고 색깔 덧씌우는 것에 답답함을 느낄만하다는 것에도 동의하는 바가 있다. 욕해대는 그들이 정권 쥐고 있을 때 했던 짓들을 가슴에 손을 얹고 뒤돌아봐 좀 조용해졌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지만, 그 때 니놈들은 어땠는데?라고 욕해대는 것이 국민이 원하는 큰 정치는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이미 역사의 몫이다.

대통령과 의회가 다른 당에 의해 지배되어 '상호견제와 균형'이라는 분권의 취지와 다르게 정치적 교착상태를 빈번하게 만들어내고 이 과정에서 정치는 쇠퇴하고 언론의 역할은 급격하게 증대되는 현상을 '분할정부(divided gorvernment)'라고 한다. 미국정치에서 일반화된 이 현상은 미국식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정치에서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희망과 비젼을 주지 못하는 정치는 식상해지고, 참여와 책임의 민주주의는 쇠퇴하며, 언론은 판을 친다.

저자 유시민도 참여정부와 한국판 분할정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들어앉았다. 보건복지부 장관시절 입안한 정책과 정책수립의 배경을 중심으로 단 25일만에 써내려간 <대한민국 개조론>에서 그는 못다한 말들을 쏟아내고, 판을 치는 언론과의 대립각을 내려 놓으려하지 않았다. 이유는 국민이 왕인 민주공화국 시대에 신하로서 성심껏 봉사한 것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왕인 국민이 제발 제대로 알아주었으면 하는 진정성에 있지않나 싶다. 다양한 경제지표와 데이터를 토대로 주무부처의 현실적인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입안한 정책에 대한 국민적 이해를 돕고자 함과 동시에 야당과 언론을 통해 간편하게 재단된 '잘못된 정책', '실패한 참여정부'라는 것을 정책사안별로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지루한 정책홍보용 책도 아니고 흔히들 정치인들이 대필하여 발간하는 회고록도 아닌 현실정치인의 현재진행형인 사안에 대한 글들이다.

과대한 힘을 가진 언론의 왜곡과 전문성 부족, 책임없고 일관성 없는 좌우 야당의 정책비판, 이로 인한 본질적인 담론의 분열을 안타까워하는 저자를 보며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가 많다. 그러나 그것이 참여정부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말한대로 권언유착을 폐하고, 부패를 척결하며,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을 기한 공로에 비해 사회적 합의와 분쟁을 조절하지 못한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것에 스스로 양보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행정부처의 정책과 수립과정을 이해하고 저자 유시민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캐쥬얼 차림으로 국회에 입성하던 삐딱함과 글을 펼치는 논리의 날카로움은 살아있고 썩은내만 나는 정치인들 사이에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사람도 있음을 느낄 수 있지않겠나 싶다.


*** 그러나, 그가 즐겨하던 시사평론이나 정치경제평론이 아니라 대부분이 보건복지부에서 추진 중이거나 추진했던 사회복지와 관련된 정책적인 글들이라 '유시민이 제시하는 국가발전전략 아젠다'라는 표지의 거창함이 무색하며 주제가 사뭇 제한적이다. 또한 글 초반에 '성공한 개발독재정권'으로 박정희 시대를 정리하고 이 시기를 통해 주어진 대한민국의 운명이 수출주도형 통상국가라는 논리는 FTA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수용이 불가피하다는 그답지 않은 논리비약들이 다수 제기된다. 나름대로 좌우의 의견을 수용하고 객관화하려는 노력들은 느껴지나 기본적인 논리구조는 강고한 듯하여 별점을 넉넉히 주기에는 회가 동하지 않는다. 단지 그 이유에 별 셋을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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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27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잘 읽었습니다 :)

추천해요~

dalpan 2007-09-27 17:57   좋아요 0 | URL
체셔님. 추석 잘 보내셨습니까? 추천하시니 품앗이가 생각나누만요. ㅎㅎㅎ

2007-10-09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grk55 2007-12-31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늦은 추천인가요! 지향점을 견지하되 우리의 정치적특수성과 제도권의 한계를 이해해주는 자세도 필요하다고봅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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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현재의 식량생산은 전세계 인구의 두 배에 달하는 사람이 먹을 정도인데 말이다. 이 책의 화두는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해 연말에 불우이웃돕기하듯 돈 몇 푼 던져달라는 호소가 아니다. 현장을 뛰어다닌 전문적인 활동가로서 양심을 가진 학자로서 그에 관한 구조적인 문제를 파헤친 르뽀이다.

굶주림은 인간태초부터 지금까지의 문제이고, 생존의 문제, 말그대로 먹고사는 문제란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에는 그들이 자기 밥그릇 하나 채우지 못할 정도로 게으르거나, 잘 사는 사람들이 있으면 못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는 너무 간편한 인정, 구조적으로 이해를 한답시고 멜서스처럼 '인구증가는 기하급수적, 식량증산은 산술급수적'을 머리속에 넣고 전세계적으로 식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저자 장 지글러는 이 모두가 다 거짓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전문적인 활동가답게 다양한 실증적인 사례를 제시한다. 아직도 유럽식민지 시대의 정책에서 자유롭지 못한 아프리카는 모노컬쳐(단일농산물생산)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정작 자신들의 먹을거리를 위해서는 농산물을 수입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헐값으로 배부른 유럽을 먹여살리는 전형적인 신식민지정책이라 고발한다. 시카고의 곡물시장을 주름잡는 미국, 프랑스, 스위스의 금융자본은 자본의 자기증식방식에 따라 먹고사는 것을 투기판으로 만드는 잔인함을 과시한다. 미국 CIA가 개입된 칠레 아옌데 민주정부의 전복은 다국적기업 네슬레의 독점적 지위를 위태롭게 한 정책과도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10여년 전에 처음으로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들었다. 그 전에 '레이거노믹스'나 '대처리즘'처럼 한 시대 국한된 지역에서의 경제정책으로만 순진하게 생각하던 물결은 이미 내가 알아차렸을 때는 해일이 되어 온통 세상을 뒤집어 엎어놓은 뒤였을터다. 우리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높은 파고에 뒤집어 엎어졌고, IMF의 가혹한 프로그램은 전국민을 미시, 거시를 넘나드는 경제학자로 만들어 놓았다. 온통 민영화하고, 자본시장 개방되고, 정부예산 삭감하고... 결국 남은 것은 2대8의 논리와 무한경쟁에 대한 무의식적 인정, 중산층 파괴와 빈부격차의 심화, 금전만능, 우리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점심을 굶는 학생들의 존재였다.

기아가 게으름의 문제도, 불공평의 문제도, 국제기구의 무능력에 대한 문제도 아닌 것은 그 이면에 숨은 잔인한 금융자본의 논리가 숨어있음과 동시에 인간들에게 보여지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화려함 때문이다. 일상화되어 분노하지 않는 것. 그것이 세상을 절반이나 굶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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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1:36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Jade 2007-08-27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라면 적절한 때 적절한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알아야 할텐데 우리는 쓸데없는 것에 분노의 화살을 돌리나 봅니다.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문구가 오래도록 머리를 맴도네요.

dalpan 2007-08-28 00:56   좋아요 0 | URL
이데올로기란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가려진 것들의 진실을 보는 것.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 쉽지만은 않겠지만, 알아차리는 순간 행동해야한다 생각해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구판절판


잘사는 서구 사람들에게 그런 끔찍한 장면은 별로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아. 서서히 죽어가는 소말리아인들의 참상은 우리에게 그냥 평범한 일이 되고 말았어. (중략) 그리고 너는 이런 희생자들을 좀처럼 볼 수가 없어. 왜냐면 스위스의 TF1, RA1, 독일의 ZDF, 영국의 BBC 같은 서방 언론의 카메라들은 이런 현장에서 몇 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에티오피아의 오가덴에 세워져 있거든. 그러니까 네가 텔레비젼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나마 국경을 넘어 오가덴의 난민 캠프까지 이동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지.-27쪽

너 혹시 전세계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4분의 1을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중략) 하지만 미국은 아주 달라. 소들이 먹어치우는 곡물이 연간 50만 톤에 달한단다. 물론 소들은 움직일 수가 없지. 정해진 공간 내에서 그저 질서정연하게 서 있을 뿐이야. 프랑스의 르네 두몽이라는 농학자가 연구한 바로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피드 롯의 절반에서 연간 소비되는 옥수수의 양이,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면서도 만성적인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잠비아 같은 나라의 연간 필요량보다 더 많다는 계산이 나왔어.-72쪽

세계시장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농산품 가격이 투기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니? 미국 시카고의 미시간 호숫가에는 위압적인 건물이 솟아 있어. 바로 시카고 곡물거래소야. 세계의 주요 농산물이 거래되는 곳이지. 이곳에서는 몇몇 금융자본가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어. 사실 거래는 몇 안 되는 거물급 곡물상의 손에서 결정돼. 그들은 몇 사람 안 되지만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앙드레 S.A.(스위스), 컨티넨털 그레인(미국), 카길 인터내셔널(미국), 루이 드레퓌스(프랑스) 등이야. 그들의 상업함대가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전세계 곡물의 매매가를 결정하고 있단다.-73쪽

유럽은 식량을 폐기처분하고 있는거야. 남반구에서는 식량이 없어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야. 유럽연합은 나름의 논리를 따르고 있어. 자국의 농민들을 살려야 하고, 그 때문에 농산물가격을 높게 유지해야 해. 배고픈 사람들을 돕는 것은 FAO나 WFP의 과제일 따름이지. (중략) 식량의 가격이나 생산량의 결정, 그리고 식량의 공평한 분배 등에 대해 FAO나 WFP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야. 세계시장만이 힘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그 시장은 아주 잔인하단다.-80쪽

아옌데는 소아과 의사 출신의 정치인이라서 유아기의 비타민 및 단백질 부족, 소년소녀들의 건강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었지. 그래서 그가 가장 우선적으로 내건 공약이 분유의 무상 배급이었던 거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분유와 유아식을 판매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던 다국적기업 네슬레가 당시 이 지역의 분유시장을 독점하고 있었지. 네슬레는 우유공장을 경영하며 목축업자들과 독점계약을 맺고 판매망도 장악하고 있었어. 그래서 아이들에게 분유를 무상으로 배급하기 위해서는 네슬레와의 원활한 관계가 필요했지. 아옌데는 결코 네슬레에 분유를 공짜로 달라고 하지 않았어. 제값을 주고 사려했지.
그러나 1971년 스위스 베베이의 네슬레 본사는 칠레 민주정부와의 협력을 모두 거부했어.
당시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그 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적 개혁정책을 꺼리고 있었기 때문이지.-100쪽

강력한 무기를 지닌 이런 약탈자들이 들이닥치기 전만해도 아프리카의 농민이나 목축민들은 현지의 권력자에게 상납하고 자신들이 소비하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했어. 하지만 유럽인들이 도착하면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고 말았지. 유럽에서는 공업이 발달하여, 대량의 농산물을 사들일 구매자들이 있었어.

그래서 식민지의 권력자들은 아프리카 농민들에게 유럽의 기업이 필요로 하는, 즉 유럽 시장에서 소비될 수 있는 작물을 경작하도록 했어. (중략)

세네갈은 프랑스 식민지였는데, 오로지 땅콩 농사에만 매달리도록 강요받았어.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런 수출만을 위한 단일경작(모노컬쳐)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하지만 정부의 수출가격에 비해서 농민들은 너무나 헐값으로 농산물을 넘긴단다. 기생적인 관료들과 지배계급은 이렇게 농민들의 피땀 어린 노동을 착취하여 얻은 차액으로 엄청난 사치를 누리고 있어. (중략)

세네갈 정부는 땅콩을 수출해서 벌어들인 수입의 일부로 태국이나 캄보디아, 혹은 그 밖의 나라에서 쌀을 대량으로 구입하지. (중략) 다시 말해서 세네갈은 해마다 식량의 외국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셈이야. 세네갈의 국민들은 무척 부지런해서 식량을 자급자족할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식량을 수입해야만 하는 시스템이 되어 있지. -132쪽

글로벌화한 금융자본의 힘은 막강하다. 그 기동성을 꾸준히 강화하여 투자의 결정과정을 단축하는 한편,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새로운 금융수단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금융자본은 결코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 (중략) 1919년에 막스 베버는 "부란 일하는 사람들이 산출한 가치가 이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오늘날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 부, 즉 경제력은 다혈질적인 투기꾼들이 벌이는 카지노 게임의 산물이다.-160쪽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고 썼다.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법칙은 사회정의를 보장한다. 세계시장은 규범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의 집단적인 의지를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
경제의 유일한 견인차는 이윤지상주의라는 입장,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두면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허구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이 시대의 급박한 과제다.-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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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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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한반도의 북쪽을 통치하던 사람이 죽었고, 세상은 곧 북쪽이 빈 권력의 공백 속에서 혼란과 붕괴의 과정을 보일 것처럼 시끌했다. 나는 그 날을 기억한다. 햇볕이 지글대던 더운 7월 어느날.

1997년 반세기동안 북쪽을 지배해 온 나랏님이 죽자 희안하게도 홍수와 가뭄을 번갈아 겪더니 급기야 시장통을 누비는 꽃제비들의 영상이 남쪽에도 날아들었다. 지하철 역마다 굶주림에 쪼들린 북쪽 아이들의 모습이 나붙었고 그 앙상함에 되레 눈망울만 도드라지게 멀뚱했다. 나는 그 사진 속의 아이들을 기억한다. 어줍잖은 모금운동도 벌였고, 덕분에 회사 인사부서에 질질 끌려가 협박도 받았지만 여하튼 옥수수 몇 알 보내는데 일조했다. 나중에 그룹총수의 대북사업 구상이 발표되자 나를 협박했던 사람들은 회사식당 앞에서 가슴을 가로질러 띠까지 두르고 지나가는 우리를 붙잡아 성금내시라 시끄러운 고함을 질러댔다. 사람의 이중성을 보았고, 인식의 차이를 경험했다.

그 때 그런 경험에 나를 몰아넣었던 아이가 바로 바리다.

설화 속의 바리공주처럼 못 먹던 시절에 여섯 딸도 모자라 일곱째 딸을 낳았으니 아마 어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을만도 했다. 급기야 포대기에 싸서 남몰래 버린 딸을 할미와 집에서 키우던 흰둥이가 찾아내지만, 이름 하나 붙여주지않고 살다 결국 할미가 지어준 바리라는 이름은 바로 설화 속의 그 바리다. 죽은 부모를 위해 세상의 끝 서역으로 생명수를 구하러 간 바리공주말이다.

설화 속의 바리공주는 이제 소설 속의 바리가 되어 현실에서 내게 얘기한다. 도대체 생명수가 무엇이냐?

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것이, 먹고 사는 것이 부족해 고난의 시기를 걸어야 했던 북쪽의 현실만도 아니며, 돈을 놓고 인간을 팔아먹는 - 돈 앞에 변질된 - 사회주의 중국만의 이야기도 아니며, 돈에 넘쳐 불빛 찬란한 구미선진국에서는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세계화된 분열과 증오, 죽임의 현실을 뛰어넘을 생명수를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부모를 살리는 생명수는 세계인류를 구원할 생명수를 바랐고, 조선의 설화는 세계에 던지는 용서와 구원의 메세지가 되었다.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직접 보지않고 북받치는 감정을 갖기 힘들듯, 북쪽의, 중국의, 영국의 현실을 직접 보지않고 뭐라 말하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밖의 사람들은 우리를 잘 모를 수 밖에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결국 세계화된 것은 상품과 자본이지 인간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소설은 인식의 차이를 넘어서는 영감을 띄워주었다.

사진과 영상 같은 시각매체가 아니라 글로써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 가슴 속 영상을 불러내도록 하는 것은 대단한 재주이다. 그러기에 바리가 모든 것을 잃어가던 전반의 글은 읽어내는 것이 힘에 겨워 버거웠다. 그만큼 황석영의 글은 내게 넌픽션이 아니고 픽션이었던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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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16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소설 잘 안읽으실 것 같은데, '바리'에 대한 애정이 있으셨군요!

dalpan 2007-08-16 23:56   좋아요 0 | URL
어찌 아셨지요? 소설 잘 안 읽는데 황선생님이 글 하나 쓰셨으니 읽어봤지요. 우리시대 최고의 글쟁이가 맞습디다. 읽는내내 그 생각이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하더라구요.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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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룡이 왔구나아
형님. 걱정 많이 했음다. 이젠 살길이 열렜으니까니.... 자아, 보라요. 저 뒤에 세관으루 양식차 들어옵네다.
그가 우리 방에 들어와 풀어놓은 것은 우선 아이들 먹으라고 월병이 한 상자였고 뒤이어 우리집 식구들을 위하여 입쌀 한 자루에 옥수숫가루 세 포대와 기름 두 통에 밀가루도 있었다. 우리는 누가 권하기도 전에 상자를 뜯고 비닐포장을 헤쳐 월병을 양손에 두 개씩 움켜쥐고 아구아구 먹었다. 다디단 속고물에 혀가 녹는 것 같았다.-55쪽

싸락눈이 덮인 과수원의 나뭇가지 사이로 난 오솔길로 낯익은 껑충한 키의 구부정한 아버지 모습이 나타났을 때의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할머니와 나와 현이는 한뭉치가 되어 아버지에게 와라락 달려붙었다. (중략) 아버지는 어깨가 떨어지고 여기저기 솜이 비어져나온 동절기 군대 누비외투를 얻어 걸치고 있었고 편의화는 개의 혓바닥처럼 창이 벌어졌다. (중략)
야아, 이거 이밥이로구나. (중략)
그때 할머니와 현이와 나는 조금 놀랐다. 아버지가 우리 할머니에게 이제 밥 먹자는 말이나 눈짓도 없이 된장찌개 냄비를 밥에 기울여 반나마 붓고는 정신없이 숟가락으로 퍼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밥그릇 위로 숙인 그의 정수리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머리카락이 빠져 듬성듬성했고 이제는 회색에서 거의 백발로 변해가고 있었다.-66쪽

할마니, 나 추워 못 자갔다....
가느다란 현이의 목소리가 이불 속에 묻힌 채로 들려오곤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현이의 머리 위로 이불을 들씌워주면서 달래곤 했다.
오오, 이제 날 샌다. 날 새문 따뜻해질 거다.
나무들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소리가 더욱 거세어지다가 뭔가 거대한 물결이라도 덮치는 것같이 휘익, 하는 느낌이더니 눈보라가 사정없이 우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얼기설기 엮어놓은 나뭇가지의 지붕이 날아가버렸다. (중략)
현이가 어디 갔니? (중략)
아버지가 먼저 움집 뒤편 둥치 큰 나무가 촘촘히 막아선 숲속에서 현이를 찾아냈다. 그애는 말라붙은 멸치꽁댕이처럼 온몸을 쪼그리고 모로 누워 있었다. 아버지가 현이를 안아일으켰고 할머니가 곁에 따라가며 머리를 흔들었다.
야야, 정신차리라. (중략)
거 추운데 왜 나가 있댄?
오줌 마레와서....
오줌 누군 들오지 거기 있다 얼어 죽을 뻔했구나.
현이는 스르르 눈을 감더니 다시 잠이 들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중략)
나는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언니야, 너 떠나려고 하는 줄 내 다 안다.
우리는 이불 속에 하반신을 넣고 모두 앉은 채로 끄덕끄덕 졸다가 잠들었다. 그날밤 현이는 죽었다. (중략) 그러나 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나 세 사람 누구도 정말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애를 옷가지와 비료포대 여러 장으로 둘둘 말아서 안고는 움집을 나서면서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따라오지 말라-72쪽

나는 마을과 노동지구가 다가올 때마다 크게 비켜가야 했으므로 낮에 걷는 게 별로 이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중략) 나는 낮에 자고 밤에만 길을 가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풀숲에 파카를 펼쳐놓고 누웠다. 칠성이는 내 옆에 몸을 붙이고 앞다리에 턱을 괴고 나를 지켜보았다. 한기에 오슬오슬 추워져서 눈을 뜨니 하늘에 별들이 하나 가득했다. 그건 먼 세상의 집들이 창문마다 불을 켜놓은 듯했다. 하마터면 눈앞에 다가온 제일 큰 별을 따려고 손을 뻗을 뻔했다.-88쪽

부령까지 가면서 나는 밤마다 들판과 마을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헛것들과 부딪쳤다. 그들이 휘적이며 빈 마을길을 스쳐 지나갈 적마다 둥치 큰 나무들 사이로 무거운 바람이 지나가듯 우우우웅하는 나직하고 음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중에 다른 세상으로 가서 수많은 도시들과 찬란한 불빛들과 넘쳐나는 사람들의 활기를 보면서 이들 모두가 우리를 버렸고 모른 척했다는 섭섭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93쪽

나는 샹 언니부부에 대하여 말했고, 그들은 아저씨처럼 친가족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며, 그들이 따렌으로 이사가서 안마업소를 차릴 텐데 나도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는 데까지 말했다. (중략)
앳쌔 말하지 말라. 길구 슬그머니 가문 되는 거이야. 세상에 네 처지가 이러루한데 누굴 믿갔나? 앞으로 아무두 믿지 말라. 이 고장두 인심이 점점 무서워지고 있단다. 이거이 다 무엇 때문이가? 돈 때문이야. 알가서? 세상은 말이다. 전기불 훤해지구 돈 돌문 인정이 사라지게 돼이서. 전에 조선하구 무역한다문서 돌아치던 젊은것덜 전부 부로카질해서 먹구산다.
하더니 아저씨는 또 소주 한 잔을 벌컥, 하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바루 너 같은 아이들 팔아먹구 산다 이거야.-112쪽

할머니의 이야기 중에 장승이와 바리공주의 약속이 생각났다. 길값, 나무값, 물값으로 석삼년 아홉 해를 아들 낳아주고 살림 살아주어야 하는 세월.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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