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씨와 윤경원 교수의 만남… 스스로를 ‘난민’으로 인식하는 자의 몸부림
▣ 정리 유현산 · 김수현 기자 bretolt@hani.co.kr
▣ 통역 강혜정/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국제협력위원장
▣ 사진 류우종 기자
이 대담은 발랄하게 시작할 수 없었다. 작가이자 도쿄경제대 교수인 서경식(53)씨.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에서 태어났고,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조선을 짓밟은 일본은 그에게 온갖 차별을 선사했지만, 그는 일본어로 읽고 쓴다. 그의 형인 서승·서준식씨는 ‘조국’ 한국의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다가 간첩 낙인을 받고 십여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는 누구인가, 재일조선인은 누구인가. 한국에 번역된 네 번째 책 <소년의 눈물>(돌베개 펴냄) 출간에 맞춰 귀국한 서경식씨에게 그것을 물었다. 대담자로 재일조선인 문제를 포함해 역사와 탈사회 사상을 연구하는 단체인 TSTH-NET 공동대표 윤경원(50) 숙명여대 교수가 나섰다. 서씨의 언어는 묵직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저녁 대용으로 회의실에 차려놓은 김밥은 밤늦도록 줄지 않았다.
윤경원: 최근 한국에서 과거사 문제가 불거져나왔는데 과거사는 식민지 시대가 남겨놨던 60만 재일 조선인을 빼고는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식민지배의 유산만이 아니라 그 유산을 지속해왔던 한국 사회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20세기가 남겨놓은 식민지 시대와 세계 전쟁의 유산을 청산하고 있는지, 최근 논의되고 있는 동아시아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 도쿄경제대학 교수시고, 작가로서 활발할 활동을 하고 계시는 서경식 선생님을 모시고 여러 가지 얘기를 듣게 된 점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재일동포가 아니라 재일조선인이라는 명칭을 써야 한다고 강조해오셨는데, 그러한 노력에도 그 명칭에 대해 관심 없는 게 현실입니다. 다시 한번 재일조선인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 서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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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저는 재일조선인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해왔습니다. 조선인이라는 표현이 한국분들한테 위화감을 주는 단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 전체에 대한 호칭을 조선이라고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민족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국가가 한국입니다. 민족 전체를 시야에 담기 위해서도 재일조선인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재일조선인의 존재가 드러내는 역사성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식민지배 때문에 건너오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재일조선인이 존재하는 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고, 그 역사의 산증인이 재일조선인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전후 처리’라고 표현합니다만, 동아시아 전후의 문제와 관련된 역사성이 있다고 봅니다. 일본이 잘못된 식민지 지배를 했고 잘못된 침략전쟁을 했다는 역사가 명확해졌다면, 재일조선인이 차별받고 스스로의 정체성 때문에 아픔 겪고 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재일조선인은 1910년 이후 일본으로부터 일본 국적을 부여받았고, 해방 뒤 1952년에 그 국적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국적을 부여받고 그 뒤 일방적으로 박탈당했던 재일조선인이 어느 국적에 해당하겠습니까. 그때 재일조선인의 조국은 남북으로 갈려서 치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한번도 북쪽에 대해서도 남쪽에 대해서도 일본 스스로 식민지 지배를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1952년 바로 그 순간에 난민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자기 민족의 근대사와 해방 뒤 역사 안에서 재일조선인을 중시해오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한국인들이 근대사를 재일조선인까지 포함한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싶어요.
윤경원: 재일조선인의 역사성 문제를 두 가지로 요약해주셨습니다. 하나는 식민지 시대 산증인, 또 하나는 전후 처리 피해자라는 것입니다. 재일조선인이 한국 근대사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주셨는데, 그런 부분에서 우리 역사 속에서 지워질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아 있는 것이 1970년대 이른바 ‘서경식, 서승 간첩사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재일조선인은 식민지 지배, 냉전, 남북분단이라는 역사적 구조 속에서 유지돼왔습니다. 지금은 정치적 상황이 바뀌었지만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독재 체제의 피해자로 평가를 한다거나 냉전의 희생물로 평가하는데, 재일조선인이라는 입장은 빠져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일본어를 하는 재일조선인들을 보면 우리는 욕하고 조롱하기 바빴다. 서경식씨가 말하는 민족과 역사는 국민국가의 틀에 찌들어 사는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담담히 우리의 경직된 관념들을 찔러대며 형들의 옥고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왜 민족의식이라는 표현을 버리고 ‘우리의식’(우리라는 의식)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됐는지 설명해주었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져도 공동의 역사적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가 가지는 의식 말이다.
서경식: 그 질문에 답변드리기 위해 60년대라는 시대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52년 재일조선인이 일본 국적을 박탈당하면서 난민 상태일 때 세 가지 선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차별을 받는 난민 상태 그대로 일본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1959년부터 시작됐던 ‘귀국운동’입니다. 일본에서는 귀국운동, 한국에서는 북송운동으로 표현합니다. 1959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9만5천명 정도의 동포가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회주의 건설에 꿈을 위탁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일본 사회에서는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하나의 선택이 있다면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교 수립이 안 된 시점에서 한국에 간다면 다시는 일본으로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귀국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것이 1965년인데, 바로 그때 저희 형제는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희 형제는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한-일 조약은 재일조선인 집단 안에 한국 국적자와 그외 조선적을 만들어 분단을 가져왔고, 특히 한국국적자에게 비교적 안정적인 ‘협정영주권자’라는 지위를 부여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당시 박정희 정권과 당시 일본 정권이 협력해서 재일조선인이라는 민족집단을 냉전적 사고로 찢어놓은 시도와 다름없습니다.
60년대 형들 얘기로 옮겨가면 우리는 본국 사람들의 투쟁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일조선인 안에서도 차별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소극적인 의미뿐 아니라 한국에서 진행되는 민주화·통일운동에 재일조선인으로서 참여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제 형인 서승, 서준식씨가 한국으로 유학간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습니다. 형들은 북한이 일본을 경유해서 한국으로 보낸 간첩이라는 명목으로 구속됐습니다. 이 간첩사건 안에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일조선인은 일본 내에서 지역적으로 분단되지 않은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의 가족 안에 총련계 사람도 민단계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지역적으로 찢어놓을 수 없는 재일조선인을 국가보안법으로 찢어놓으면서 가두었던 것이 저희 형들을 포함한 재일조선인 간첩단 사건입니다. 정확한 수는 기억할 수 없지만, 형들을 시작으로 해서 수백명의 재일조선인들이 한국에서 체포되고 구속됐습니다. 그 사람들이 받았던 혐의들 중 공통된 점은 일본에서 총련계 인사와 접촉했거나 대화 중 이적행위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재일조선인으로 생활하는 한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국가보안법은 남과 북,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장벽일 뿐 아니라 국내와 국외, 조국과 재일조선인을 나누는 장벽이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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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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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원: 넓은 의미에서 재일조선인을 반난민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반난민이라는 규정을 통해 좀더 많은 ‘우리’를 애기할 수 있을 겁니다. 난민 논의는 일본의 전후 책임을 둘러싼 논쟁에서 나온 얘기라고 생각하는데, 과거의 전쟁 책임과 현재 일본 국민의 의식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쟁 책임의 주체와 반난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요.
서경식: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재일조선인은 일본에 의해 난민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 국민 대다수에게 그런 인식은 없어요. 자기들 국가가 난민으로 만든 존재에 대한 의식은 없습니다. 제 저서 중에서 ‘반난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간 난민들처럼 먹을 것이 없고 살 곳이 없는 상태는 아니지만 국가로부터 추방된 상태라는 의미에서 사용했습니다.
책임주체의 논리와 관련지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됐는지 설명드리죠. 1990년대에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들이 존재를 드러냈는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산증인으로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런 충격 안에서, 그러면 일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이런 존재들과 관련해 어떤 책임이 있는가 하는 논의들이 불거졌습니다. 그런 논의들이 결실을 맺지 못해서 일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대부분 내가 어떤 책임이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반적인 일본 국민들은 자신의 발언이나 행동이 국가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은 채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본 사회에서 같은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재일조선인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라는 문제제기를 하기 위해 반난민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하지만 그런 저의 시도는 예상한 것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에 대한 ‘책임’과 난민으로서의 의식을 이야기하던 서경식씨에게 윤경원씨는 북-일 수교를 찬성한 이유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북-일 수교와 함께 납치사건이 밝혀지면서 재일조선인은 일본인들의 물리적인 폭력까지 견뎌내야 했다. 서씨는 당시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온갖 차별을 꿋꿋이 버텼던 재일조선인들까지 일본 국적을 얻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고심 끝에 얻은 결론은 “우리의 반식민 투쟁은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전세계적인 반식민 투쟁을.
윤경원: 일국주의적 관점에서 책임주체가 얘기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난민적인 자기인식이 이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열된, 분단된 존재로서 자기인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들은 자기가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생활을 하는가라는 면에도 각인돼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조국, 고국, 모국의 어긋남, 모국어와 모어의 어긋남 등을 유대인의 경험을 통해 풀어내고 계신데요.
서경식: 현재 전세계에 난민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최소한 1억명 이상이라고들 합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예외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 모습의 진실을 드러내는 존재들인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현재 세계 대다수 국민들은 ‘조국’ ‘모국’ ‘고국’이 자신에게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는 조국은 자기 선조의 출신지, 자기의 뿌리가 되는 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국은 자기가 국민으로서 소속돼 있는 국가기구죠. 고국은 자기가 태어난 땅입니다. 제게는 조국은 식민지 지배를 받기 이전의 조선반도입니다. 그리고 제가 국적을 두고 있는 곳은 대한민국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일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게 세 가지는 다 어긋나 있습니다. 게다가 재일조선인은 자기의 조국을 침략하고 지배하고 그럼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각각이 어긋나 있고 겹쳐지지 않는 존재들이 인류 전체로 봤을 때 예외적일까요. 난민들은 어긋나고 겹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기구는 조선반도를 출신지로 하는 많은 사람들 중 일부 사람들의 국가기구에 불과합니다. 이 세 가지의 일치를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고 의심해보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분열돼 있다는 것은 불쌍하거나 슬픈 것이 아니라 21세기적인 인류의 존재양식이라고 봅니다. 이 분열을 국가주의로 통일하고 하나로 묶는 것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재일조선인을 포함한 재외동포의 요구와 바람을 담아내려면 현재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잠깐 모국어와 모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어로 글을 쓰면서 한자로 모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모국어로 자연스럽게 대체되는 경우가 많지만,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모어는 자기가 어머니를 통해서 배우는 첫 언어입니다. 재일조선인 대다수에게 그들의 모어는 일본어입니다. 모국어는 글자 그대로 자기가 속한 국가가 국어로 삼고 잇는 공용어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보면 모어가 모국어와 일치하는 예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저의 형인 서승씨도 모어는 일본어입니다. 60년대에 한국으로 유학해서 모국어인 조선어를 습득하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저는 식민지배로 인해 뿌리가 마를 뻔했던 모국어의 권리를 일본에게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한 나라의 국어를 가지고 있는 국민에게 모어 마이너리티가 모어를 지킬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모어를 즉각적으로 모국어로 번역해버리는 것은 모어와 모국어가 당연히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어를 모국어로 갖고 잇는 대한민국 국민 안에 다른 모어를 가지고 있는 재일조선인 같은 사람도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다언어 사회, 다문화 사회로 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윤경원: 한국 방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죠. 선생님 책이 그동안 4권 정도 번역됐습니다. 재일조선인의 책이 한국에 번역되는 것에는 어떤 느낌, 어떤 기대가 있는지요.
서경식: 만일 국내에 있는 사람들이 제가 지금까지 계속 말씀드렸던 바와 같은 단일민족주의적인 국가관이나 언어내셔널리즘, 폐쇄적인 국가주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생각들이 조금씩 바뀌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윤경원: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의 서양 미술 순례>를 다시 한번 읽어봤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창조하는 인간과 감상하는 인간의 단절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 단절을 간단하게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토로하십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무슨 어떤 의미인지요.
△ 1971년 4월 대선 직전에 터진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의 주인공 서준식(왼쪽), 서승 형제. 재일조선인의 특수성과 함께 이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진/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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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칠흑 같던 80년대 형 둘이 옥중에 묶여 있고 부모님께서 차례차례 돌아가셨을 때 조금이라도 숨을 쉬고 싶어서 유럽을 여행하면서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저는 미켈란젤로의 <반항하는 노예>라는 조각을 보게 됐습니다. 이 작품은 실은 옥중에 있던 서준식씨가 책으로 그 조각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편지에 쓴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온몸으로 반항하며 가치를 창조하면서 싸우는 인간과 단순히 미술로서 감상하고 있는 인간인 나 사이에 단절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당시 한국의 옥중에서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인간과 나라 밖에서 먹을 걱정은 안 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나를 대비시킨 것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단절을 언제나 의식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진정한 투쟁의 밖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 단절이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을 해버리면 저는 진정한 투쟁 밖에 인생이 끝날 때까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지금은 진정한 투쟁 밖에 존재하지만 나의 투쟁도 언젠가는 합류할 것이라는 바람을 담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재일조선인들이 지금 전개하고 있는 몸부림이나 북한 사람들의 몸부림이 언젠가는 합류하리라는 바람이기도 합니다.
대담이 끝나갔고 대담자들이나 통역자나 기록을 맡은 기자나 파김치가 됐다. 그리고 슬슬 그의 ‘몸부림’을 어떻게 한국어로 독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나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걷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그의 말을 믿는다. 통역을 맡은 강혜정씨가 마지막 말을 옮기며 “감동적인 말로 끝내시네”라고 혼잣말 하는 것을 기자는 엿들었다.
윤경원: 선생님이 서 계신 자리에서 하는 몸부림이 새로운 형태로 어떤 희망을 향해서 나타나는 게 ‘전야’라는 단체라고 생각합니다. 왜 전야이고 뭘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지요. 어떤 활동 계획을 갖고 계신 건지요.
서경식: 전야라는 단체의 이름을 제안했던 것은 접니다. 현재 일본의 상황이 정말 전쟁 전야로 느껴지기 대문입니다. 그런 사태가 전개됐을 때 일본 안에서 살고 잇는 재일조선인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는 저 자신도 상상하기조차 싫은 악몽입니다. 전야가 가지고 잇는 특징 중 하나는 발기인 이사 중 나와 같은 재일조선인이 몇 사람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즉, 소수파, 마이너리티가 가지고 있는 위기감 등을 일본 사회에서 깊고 넓게 전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70년대 이후 패배를 경험하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잘 쓰는 레토릭이 뭐냐면 전망이 없다면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루쉰의 말을 떠올립니다. 희망은 있는 거라고도 없는 거라고도 할 수 없다…. 그건 달리 말하면 인간은 희망이 있어서 걸어가는 게 아니라 걷는 가운데 희망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걷지 않으면 희망이 절대로 없다는 이야기겠죠. 저는 아무리 전망이 안 보여도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가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조국의 사람들이 전야의 활동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지원도 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