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앗아간 땅 사할린을 가다] 사할린 하늘 울린 ‘백발의 통곡’ “아버지~”

강제동원 행불자 후손들 60년만에 현지 위령제
영정 속 20대 청년 안고 “조금만 일찍 왔어도”
‘혹시 살아계실지도…’ 사진 돌리며 수소문도

» 러시아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사할린 희생사망동포 위령탑 앞에서 지난 15일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된 뒤 행방불명된 이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렸다. 제삿상 앞에 선 정태랑(67·오른쪽에서 두번째)씨는 “1940년 강제동원된 부친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부친의 사진을 목에 걸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돌을 맞는 사할린 동포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일제에 의해 청춘의 나이에 강제동원된 1세대들은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에 묻은 채 하나 둘 세상을 등지고 있다. 살아남은 이들은 ‘환갑을 맞은 고국’을 바라보며 이국 땅에서의 쓸쓸한 죽음을 예감할 뿐이다. 지금도 4만여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 사할린에서 만난 동포들은 “이제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했다.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빳빳한 상복을 입은 채 침묵을 지키던 노인들 사이에선 가는 흐느낌만 새어나왔다.

“우리, 아버지를 세 번만 불러봅시다.” 태랑(67)씨의 제안에 백발이 된 자식들은 “아버지!”를 목놓아 외쳤다. 하지만 세 번을 다 채우진 못했다. 노인들은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땅만 바라봤다. 흑백 영정 속 20대 청년으로 남은 ‘아버지’의 얼굴은 멀쑥했다.

지난 15일 러시아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사할린 희생사망동포 위령탑 에서 특별한 위령제가 열렸다. 1938∼1945년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됐다 해방 뒤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행방불명된 이들을 위해 고국의 자식들이 직접 제사상을 차린 것이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서 2006년부터 벌이고 있는 ‘해외 추도 순례’ 사업이 사할린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위원회는 부모가 사할린에 강제동원된 것이 증명된 이들의 신청을 받아 18명을 선발했다. 같은 마을에 살던 이들의 증언, 사할린에서 온 편지 한 통이 ‘사할린에 있었다’는 증거가 됐다.

“굴 안에 들어가 작업을 하다가 현기증이 났습니다. …환약 십원어치 사서 먹었으니 그리 아십시오. …일전 편지에 현시에 태중이어서 창월이 임산이라 하였으나 나는 자세히 몰라서 궁금하오니 차후 편지하실 적에 분명히 적어 보내 주기를 바랍니다.”

부친이 1942년 강제동원된 이재순(64)씨는 80살 모친이 간직해 온 편지 한 통을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편지 속 ‘태아’였던 이씨는 “어렸을 때 어른들이 ‘아버지 언제 오나 머리를 긁어보라’고 할 때 난 항상 앞머리를 긁었다고 한다”면서 “곧 오실 거라 믿었는데 얼굴 한 번 못 보고 60년이 지났다”며 눈물을 쏟았다.

“골목길 들어올 때부터 생글생글 웃던 아버지의 모습이 나랑 꼭 닮았다고 한다”며 웃던 김수웅(63)씨도 제삿상에 술을 놓을 땐 “아버지, 너무 원통합니다. 아버지 …”하며 가슴을 쳤다. 눈물을 훔치며 지켜보던 현지 동포 이명희(55)씨는 “한국에서 오신 분들을 생각하니 다 형제처럼 느껴진다. 사할린에 사는 1세대 부모들은 ‘언제 조국에서 배를 보낼지 모른다’며 항상 대문을 열고 기다렸다”고 말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부친이 올해로 90살이 된다는 정태랑씨는 부친의 젊었을 때 사진 70여장을 인쇄해 왔다. 그는 “혹시라도 소식을 들은 분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며, 위령제에 참석한 현지 주민들에게 사진을 나눠줬다. 사진은 금새 동이 났지만, 귀국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 부친의 소식을 전해온 이는 없었다. 동정남(64)씨는 1988년부터 러시아와 일본을 8차례나 오간 끝에 부친이 숨진 장소를 알아냈다. 그는 “제사 날짜라도 알고 싶어 혼자 찾아다녔는데 국가 기관엔 어디 한 군데 물어볼 데도 없었다”며 “나처럼 돌아다니지 않는 한 사망 사실도 모른 채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가족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현지에 살고 있는 안해준(70)씨는 “1세대 동포들의 소식을 알만한 이들은 최근 10년 새 거의 다 돌아가셨다”면서 “이제 와서 진상을 규명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 현지 주민들은 “10년만 일찍 왔어도, 10년만 일찍 왔어도 …”라고 되뇌었다.

유즈노사할린스크/글·사진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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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송두율 교수, 철면피 폭력 언론…한국 가기 두렵다
송두율 교수 '방북 무죄 판결' 뒤 첫 인터뷰

'해방 후 최대 간첩' 내몬 뒤 모르쇠 '분개'
"사법부, 보안법 모순에 전향적 동의한 것. 실용정부 대북정책, 냉전 포위된 비실용"


 
» 송두율(64) 
 
"사법부가 구시대 산물이며 국제적으로 늘 지탄의 대상인, 부끄러운 국가보안법을 과거처럼 적용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한 것 같다."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64·사진) 교수는 1993년 8월 독일 국적 취득 이후 자신의 북한 방문이 국가보안법의 탈출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다음날인 18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사법부가 현행 국가보안법을 확대 해석해 잘못된 관행을 그동안 많이 남겼는데, 이번에는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명예훼손 등 다른 부분의 상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대해선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독일 국적 취득 이전의 방북은 여전히 유죄'라는 사법부의 논리도 꼬집었다. "독일 유타 림바흐 괴테문화원 총본부장은 자신의 임기 동안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가교가 될 괴테문화원을 평양에 연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서울과 평양을 자주 오가는 그 역시 국가보안법이 적용된다면 처벌돼야 한다는 것이냐."

이번 상고에서 이른바 '소송사기' 사건은 그대로 넘어갔다. "내가 북의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고 주장한 황장엽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 것을 보수우익단체가 소송사기라고 주장해 기소 이유에 포함됐다. 이 부분도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번복시키지는 못했다. 황장엽의 돈을 갈취하기 위해 소송을 벌인 것처럼 몰아, 내게 도덕적으로 흠집을 가하려는 시도는 '가짜교수 송두율' 소동만큼 불쾌하다."

그는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시했다. "일부에서는 북이 막 등장한 이명박 정부를 떠보는 전술 정도로 평가하지만,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 같다. 이 대통령은 연락사무소 설치를 제의했고 대화의 문도 열어놓겠다고 했다. 하지만 동-서독의 사례처럼, 연락사무소가 설치될 정도의 남북관계가 되기 위해선 상당히 견고한 상호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현재 대북정책의 기조로는 어렵다."

"실용정부의 대북정책이 오히려 비실용적이라는 인상을 준다"고 지적한 그는 새 정부가 민족문제를 풀어가려면 "실용이 그저 '돈의 힘' 정도로 이해되는 것 또한 문제다. 실용에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서로 공존하기 위한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난해 낸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라는 책에서, 그는 2003년 9월 방한부터 다음해 8월까지 구금돼 있던 시기를 '광기와 폭력이 난무한' 상황으로 묘사했다. "책을 통해 한국 사회가 나와 관련된 일들을 거울삼아 자신을 비춰보기를 바랐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내 일을 빨리 잊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내 사건이 이른바 '민주화'된 조건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나나 주위의 친지들 모두에게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서울을 떠난 이후 한국 사회의 모습은 더 당혹스럽다. '돈이면 최고지, 도덕은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는 식의 '잘못된 계몽'에 묻혀 있다."

그런 까닭인지 그는 여전히 '귀국'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내가 한국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개인적 소망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로 여기고, 또 서울 가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이른바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내두르는 그 야비한 구조적 폭력이다. '해방 이후 최대 간첩'으로 여론재판을 해놓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는데도,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식의 철면피한 언론이 지배하는 사회가 우선 싫다." 다만, 법적 체제 안에서나마 진일보를 보여준 이번 판결은 분명히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고 그는 덧붙였다.

베를린/한주연 통신원 juyeon@gmx.de

   
  ■ 다음은 송두율 교수와의 인터뷰 전문

-이번 대법원 판결은 독일 국적을 취득한 1993년 8월 이후 방북 부분만 무죄라는 얘기인가?

=이번 판결에 따르면, 독일 국적 취득 이전의 방북은 여전히 유죄다. 하지만 △체제전복의 목적이 아니라, 가령 학술회의의 목적을 갖고 북한을 방문한 것은 국가보안법 처벌 대상이 될 수 없다 △남한이 아니라 외국에서 방북하는 것은 탈출죄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4명의 소수 의견도 있었다.

독일 유타 림바흐(Jutta Limbach) 괴테문화원 총본부장은 자신의 임기 동안 가장 보람있었던 일은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가교를 놓을 수 있는 괴테문화원을 평양에 연 것이라고 말했다. 현 서울의 괴테문화원 원장이 평양 원장을 겸임하고 있어 서울과 평양을 자주 왕복한다. 그도 국가보안법이 적용된다면 처벌돼야 한다.

지휘자 로린 마젤이 뉴욕 필하모니를 이끌고 평양에서 공연했다. 한국인 출신 단원이 8명이었다. 이들도 북한을 평화적인 나라로 선전한 셈이 됐으니, 국가보안법을 적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국가보안법은 상식에 어긋나는 법이다.

-상고 내용이 얼마나 수용됐나?

=일부만 수용됐다. 이른바 '소송사기' 사건은 그대로 넘어갔다. 1997년 망명한 황장엽이 내가 북의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고 주장한 데 대해 명예훼손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내가 김철수라는 증거도,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증거도 없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황장엽이 내게 손해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어정쩡한 판결을 내렸다. 2003년 10월 나에 대한 기소가 진행되고 있을 때, 보수우익 단체가 내 이미지를 손상시키려고 내가 황장엽을 상대로 소송사기를 했다고 검찰에게 고발했다. 검찰은 이를 수용해 기소 이유에 추가했다.

내 변호인들은 배상금을 노린 사기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1·2심 재판부는 결국 검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부분도 무죄라고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이번에도 번복시키지는 못했다. 우리 변호사들도 국가보안법 적용 문제가 핵심이니 지엽적인 문제는 그냥 넘어가자고 했다.

하지만 내가 흡사 황장엽의 돈을 갈취하기 위해서 벌인 소송사기처럼 몰아, 내게 도덕적으로 흠집을 가하려는 시도는 '가짜교수 송두율' 소동만큼 아주 불쾌하다. 소송사기 문제와 한국 국적으로 방북한 부분은 무죄 판결을 받지 못한 것이다. 완전무죄로 내 사건이 종결되지 않아 솔직히 불만스럽다.

-최근 정권 교체 이후 남북관계에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고, 남북교류와 접촉에 짙은 그늘이 드리우고 있다. 북한은 남쪽의 대북 자세에 뭔가 중대한 변화가 있다고 판단했거나, 정권교체기의 어수선한 상황을 자국에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해 압박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한반도에는 온난 기류도 함께 있다. 조지 부시 미 행정부와 북한은 대화와 협상을 통해 북핵 문제에 조심스럽게 접근해 어느 정도 진전을 보고 있다. 그런데 남북관계는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냉각상태에 빠졌다. 지난 십년 동안 나름대로 지속된 한반도의 화해·평화의 분위기가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일단 나빠졌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북이 막 등장한 이명박 정부를 떠보는 전술 정도로 평가하지만,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같다. 이번 방미에서 이 대통령은 연락사무소 설치를 제의했고 대화의 문도 열어놓겠다고 했다. 하지만 동서독의 사례처럼, 연락사무소가 설치될 정도의 남북관계가 되기 위해선 상당히 견고한 상호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연락사무소까지 발전할 수 있는 상호 신뢰구축은 현재 대북정책의 기조로는 어렵다. 현 정부는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퍼주기식'은 없다며, 아쉬운 북한이 먼저 굽히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태도를 보이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물론 새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의 과도기적인 현상이지만, 이른 시일안에 순리적·미래지향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남북 긴장은 불행하게도 오래 갈 것 같다.

-외부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통일이나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실용정부'의 대북정책이 오히려 비실용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냉전적 이념에 너무 포위돼 있다. 또 '실용'이 그저 '돈의 힘' 정도로 이해되는 것 또한 문제다. 그래서 햇볕정책도 돈 문제로만 축소 해석되고, 그저 북에 퍼주는 정책으로만 폄하되는 것같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대북정책이의 긍정적인 부분은 살려가야 한다. 실용에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서로 공존하기 위한 내용을 담아야 한다. 미국,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만 강조하다보면,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전체적 맥락 변화를 놓칠 수 있을 것이다. 한-중 관계, 또 북-중 관계 등, 여러 가지 복합적 관계요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남북관계를 손상된 한-미 관계 회복의 종속변수로만 취급한다면 민족문제 해결의 전망이 나타나겠는가?

-지난해 낸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라는 책에서, 2003년 9월 방한부터 다음해 8월까지 구금돼 있던 시기를 '광기와 폭력이 난무한' 상황으로 묘사한 바 있다. 당시 함께 수감돼 있던 미군 범죄자에 대한 우대와 자신에 대한 푸대접을 지적했다. 한국 검사들의 유치한 사고 수준과 협소한 세계관에 놀라움도 표시했다. 지금 소회는?

=독일에 돌아와 만 3년 9개월 만에 대법원 판결을 듣고 지난날을 돌아보게 된다. 한국사회가 나와 관련된 일들을 거울삼아 자신을 비춰보기를 바랐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내 일을 빨리 잊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를 대면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같다. 내 사건이 이른바 '민주화'된 조건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나나 주위의 친지들 모두에게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서울을 떠난 이후 한국사회의 모습은 더 당혹스럽다. '돈이면 최고지, 도덕은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는 식의 '잘못된 계몽'에 묻히고만 대선과 총선을 지켜보면서, 사실 나도 우리말 집필을 접어뒀다. 지금은 정년퇴임을 얼마 남기지 않아 독일어 저서 집필에만 전념하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다며, 국내로 불러들여놓고는 보수반동적 언론들이 주도한 매카시즘적 여론재판에 휘둘려 최소한의 인권조차 지켜주지 못했다. 이른바 '87년 체제'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실상이 잘 드러났다.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 그런 측면도 있다. 우리를 초청한 사람들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들도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진척되고 모범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기반은 아직도 취약하다. 그래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민주화가 꽤 이뤄졌다는 잘못된 자부심이나 과대평가하는 경향도 있다. 민주화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국민들이 그 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지 못한 조건에서 선거는 실망만 재생산할 뿐이다. 한국의 민주주의 성숙도에 만족했거나 인정했던 외국의 관찰자들에게 내 사건은 충격이었다.

-지난해 후마니타스 인터뷰 때 선생의 귀국은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인가?

=내가 한국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개인적 소망의 문제는 아닌 것같다. 내가 한국사회에서 가장 문제로 여기고 ,또 서울 가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이른바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내두르는 그 야비한 구조적 폭력이다. '해방 이후 최대 간첩'으로 여론재판을 해놓고 사실이 밝혀졌어도,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식의 철면피한 언론이 지배하는 사회가 우선 싫다. 법적 체제 안에서나마 진일보를 보여준 이번 판결은 분명히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그 어려운 때 나와 가족을 지켜준 따뜻한 분들이 사는 그 땅으로 이번 판결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이 자리를 빌어 그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 <후마니타스, 송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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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격투기 팬은 아니다. 더군다나 우리집에는 왠만한 線은 다 끊어놓아서 공중파 이외에는 잡히지 않아 보고싶어도 격투기를 거의 보지 못한다. 그런 내가 우연찮게도 작년 연말 선배집에서 그의 경기를 보게 되었는데, 미사키라는 일본선수에게 추성훈은 그날 떡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지저분하게 떡이 된게 아니라, 한방(규정에 금지하고 있는 사커킥)에 떡이 되었다. 그날 지켜본 내가 더 기분이 상한건 떡된 후 정신차리고 인사하러 간 그를 미사키는 밀쳤고, 마이크를 들고 훈계조로 그를 몰아세웠다. 그리고 링을 내려가는 그의 등에다 대고 "일본은 강하다"라고 관중들에게 외쳤다. 이게 무슨 국가대항전인가? 순간 정신나간 소리로 마이크 들고 훈계하기 좋아하는 길거리의 일본우익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주아주 불쾌했다.

추성훈은 내가 격투기선수 중에 좋아하는 선수인데, 그의 경기는 화끈하다. 어리버리 싸우는게 아니라 소위 '깡'이 있게 경기한다. 예의를 지키는 경기라 유도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리고, 유도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버림받은 선수이다. 디아스포라이다.

======================================================== 이하는 한겨레21에 실린 그의 기사

"추성훈도 나고, 아키야마도 나다"
일본에선 한국인, 한국에선 '반쪽 한국인'으로 살다 일본에 귀화한 종합격투기 추성훈 선수

▣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그는 추성훈(34)이면서, 또 아키야마 요시히로다. 두 개의 이름을 쓰기에, 두 개의 언어를 알아듣기에, 때론 두 배의 아픔을 감당해야 하는 추성훈 그리고 아키야마.

추성훈은 1998년 부산시청 유도팀에 입단하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그는 일본 실업팀들이 '귀화'를 조건으로 스카우트 경쟁을 벌일 만큼 썩 괜찮았던 자신의 실력만을 이곳, 한국 사람들이 봐주길 원했다. 하지만 주류 유도계는 '재일동포 4세'란 신분에 먼저 눈길을 보냈다.

추성훈의 가족은 1923년 일본에 정착했다. 오사카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추성훈이 태어났다. 1972년 재일동포 유도대표로 국내 전국체전에 출전해 우승한 추성훈의 아버지 추계이씨는 이듬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부상으로 탈락하는 아쉬움을 겪었다. 대신 국가대표 수영선수 유은화씨를 만났고, 1975년 추성훈을 얻었다.



△ 지난해 12월31일 일본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열린 종합격투기 대회에서 추성훈 선수가 미사키 가즈오 선수를 링 바닥에 누인 채 공격을 퍼붓고 있다. 추 선수는 반칙 논란이 거센 이 경기에서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패배했다. (사진/FEG 코리아제공)

한국 선수 이기자 관중석에서 “쪽발이”

세 살 때부터 유도장에 드나든 추성훈은 학창 시절 또래들을 능가하는 기량을 갖췄지만, 그곳에서도 '재일동포 4세'란 벽을 만나야 했다. 전국대회 같은 주요 경기엔 일본 국적이 없는 탓에 자신에게 졌던 2, 3등 선수에게 출전권을 양보해야 했다. 아버지 추계이씨는 끝까지 한국 국적을 지킨 것에 대해 "차별이 있었기에 더 한국인으로 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차별에 져서 굴한 것 같은 느낌이 싫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에게 한국행을 직접 권했다. "일본에선 배울 수 없는 한국 유도를 배우라. 그럼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한국 유도를 배울수록 추성훈의 마음엔 상처만 커져갔다. 유도계를 장악한 '특정 대학' 출신이 아닌 탓에, 그 대학 출신 심판들한테서 정당한 판정을 받지 못해 정상 문턱에서 무너지고 만다는 피해의식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추성훈은 외국인 심판들로 구성된 2000년 코리아오픈에서 당시 81kg급 최강자 조인철 등을 꺾으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쯤 되니 대한유도회는 그를 대표팀 2진으로나마 뽑을 수밖에 없었고, 추성훈은 2001년 아시아선수권에서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나가 금메달을 가져왔다. 이 대회에서 추성훈은 전 경기를 한판으로 이겼다. 그건 마치 한판으로 이기지 않으면 자신이 인정받을 수 없다는 조급증에 쫓기는 것처럼 보였고, '이러고도 내가 안 된단 말인가'라며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서글픈 몸짓으로도 보였다.

그러나 추성훈은 이후에도 심판 텃세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의혹을 지우지 못했다. "한국 사람이니까, 국가대표 하고 싶어서 귀화 안 하고 이곳에 왔다"던 그의 말은 "여긴 말을 해도 안 된다"로 바뀌고 말았다. 그는 부산시청 소속 지인에게 "일본에서도 한국 사람이라고 불이익을 주더니, 한국에서도 반쪽 한국 사람이라고 불이익을 당한다"는 말을 남기고, 3년7개월여 만에 한국을 떠났다. 유도계는 81kg급 조인철이 하향세였고, 이 체급의 새 강자가 추성훈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쫓아가 붙잡지 않았다.

그는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젠 일본으로 귀화한 지 두 달 만에 그쪽 대표가 된 아키야마 요시히로란 이름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부산시청 소속으로 훈련했던 구덕체육관 매트에 일장기를 달고 올라선 그는 결승에서 한국 선수와 맞붙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관중석에서 '쪽발이'란 소리까지 흘러나왔지만, 경기 뒤 기자들에게 "저는 원래 한국 사람이니까, 국적 관계없이 (관중들이)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왜 귀화했느냐'는 물음엔 "유도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만 답했다. 한국에서 받았던 서운한 감정을 애써 감춘 건 앞으로도 자기 스스로 '추성훈'이란 한국 이름을 지울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은 강하다"며 비수 꽂은 미사키

2003 세계유도선수권 우승이 좌절된 뒤 2004 아테네올림픽 출전까지 무산된 그는 그해 말 종합격투기 선수로 전향했다. 그리고 2005년 11월 한국을 다시 찾았다. 외국팀과 한국팀으로 나뉘어 싸운 격투기 대회에서 그는 한국팀 소속으로 뛰었고, 경기 뒤 링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오랜만에 한국 와서 시합해 너무 기쁩니다. 진짜 행복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한국 사람이 아니에요. 일본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가슴 안에는, 지금 여기 들어가는(들어 있는) 피는 완전 한국입니다. 더 열심히 해서 한국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도복 한쪽 어깨에 태극기를, 또 다른 쪽에 일장기를 달고 링에 오르는 그는 '한국의 추성훈, 일본의 아키야마'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그렇게 고백했다.

그러나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07년 마지막 날. 추성훈은 일본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열린 종합격투기대회에서 프라이드 웰터급 챔피언 미사키 가즈오(31·일본)와 맞붙었다. 턱을 얻어맞은 추성훈은 주저앉았고, 일어나려는 찰나 상대가 휘두른 킥에 코뼈가 부러졌다. 미사키가 추성훈의 두발과 두손이 땅에 닿은 상태인데도 규정에 어긋난 사커킥을 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게다가 미사키는 피가 줄줄 흐르면서도 악수를 하러 온 추성훈을 밀치며 마이크를 잡고 "너는 많은 사람과 어린아이를 배반하는 행동을 했다"고 소리쳤다. 추성훈이 2006년 12월31일 일본 격투기 영웅 사쿠라바 가즈시(39)와의 경기에서 몸을 미끄럽게 만드는 크림을 바르고 승리해 출장정지 중징계를 받은 걸 지적한 것이다. 당시 추성훈이 TV 카메라 앞에서 몸에 로션을 발랐다는 점에 비춰 의도성은 없어 보였지만, 처음부터 이 사실을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한 추성훈은 거센 도덕성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그 화살의 방향은 때론 아키야마가 아닌 '재일동포 추성훈'이란 또 다른 그를 향해 날아가기도 했다.

여기에 피를 닦으며 링 밖으로 나가는 추성훈의 뒤통수에 대고 미사키가 "일본은 강하다"고 한 것이 국내 팬들을 흥분시켰다. 그 말은 언뜻 '아키야마'가 아닌 '추성훈'을 겨냥한 것으로 들렸고, 두 개의 이름을 택한 그에게 너무 비정한 비수처럼 보였다.


"그를 좀 자유롭게 해줬으면 좋겠다"


추성훈의 아버지는 말한다. "아들이 가슴 아프게 부산에서 돌아와 귀화를 결정했을 땐 말리지 못했다. 나로선 한국에서는 추성훈으로, 일본에서는 아키야마로 불렸으면 좋겠다." 추성훈의 격투기 측근은 "이제 그를 좀 자유롭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추성훈도 얘기한다. "추성훈은 가슴에 새겨져 있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내 이름이다. 그래서 추성훈도 나고…, 아키야마도 나다."

그의 말은 편견에 사로잡혀 추성훈 속에서 아키야마를 끄집어내지 말고, 아키야마 속에 있는 추성훈을 공격하려 하지 말고, 이제 격투기에서 정상에 오르고 싶은 자신의 도전만을 오롯이 봐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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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은 한반도의 정세를 재는 온도계다. 지난해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고사 직전까지 몰렸으나, 올해는 2·13 합의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바람을 타고 힘찬 기지개를 펴고 있다. 특히, 자유무역협정 협상은 개성공단을 세계적인 관심지역으로 만들었다. 두 나라는 협정에서 조건부이긴 하나 개성산 제품의 미국 수출 가능성을 열어놨다. 개성공단이 남북경협을 넘어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의 진원지가 될지는 지금부터 하기 나름이다.

<한겨레>는 중대한 실험장으로 떠오른 개성공단을 국내외 언론 사상 처음으로 지난달 27일부터 30일까지 3박4일 동안 ‘숙박 취재’를 했다. 개성공단 남북 노동자들의 열정과 희망, 애환과 보람, 그리고 상생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를 드나들 때면 항상 만나게 되는 북쪽 여성 노동자. 수줍음을 많이 타 마지막 날에야 겨우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었다. 개성/김봉규 기자 [2007/04/11 15:05]



북쪽 개성공단에서 북쪽 노동자들이 지난달 29일 아침 6시30분께 통근버스에서 내려 사업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개성공단의 출근 모습은 직장인들로 빽빽한 남쪽의 공단 풍경과 엇비슷했다. 일부 젊은 여성 노동자들은 서로 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다. 개성/ 김봉규 기자 [2007/04/06 14:43]



지난달 28일 평화제화 개성공장에서 19살인 북쪽 노동자가 작업을 하느라 바쁜 손길을 움직이고 있다. 개성/김봉규 기자 [2007/04/06 14:17]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사무실에서 한 북쪽 여성 노동자가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다. 개성/김봉규 기자 [2007/04/11 13:34]





‘평화제화’ 개성공장 앞마당에서 지난달 28일 점심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북쪽 노동자들이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배구를 하고 있다. 북쪽의 노동자들은 점심시간 이외에도 업무와 업무 사이에 몸을 푸는 ‘업간체조’라는것을 즐겨한다고 한다. 개성/김봉규 기자 [2007/04/06 14:17]



개성공단에 입주한 남쪽 기업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철저한 사전 준비와 포용적 관리정책 등이 필요하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구두 생산업체인 평화제화 공장에서 북쪽 여성 노동자들이 공정별로 작업을 하고 있다. 개성/김봉규 기자 [2007/04/09 09:43]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일하는 남쪽 직원들. 왼쪽부터 정미영, 채명원, 김판기씨. 개성/김봉규 기자  [2007/04/11 13:34]



주말을 앞둔 지난달 30일 오후 개성공단 관리위원회 사무실 앞에서 사업지원부 직원 채명원(아래)씨가 남쪽으로 떠나는 비서실의 정미영(위쪽)씨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고립된 생활을 하는 개성공단 남쪽 직원들에게 남쪽으로 외출할 수 있는 금요일은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다. 개성/김봉규 기자 [2007/04/11 10:06]



개성공단 안 높은 언덕에서 바라본 야경. 개성공단과 남쪽의 최북단 동네 대성동 마을(태극기가 게양돼 있는 위쪽 마을)이 손에 닿을 둣 마주하고 있다. 대부분의 개성공단 공장들은 연장근무를 하고 있어 밤에도 불을 밝힌 채 생산라인이 가동되고 있다. 지난달 28일 저녁 7시 23분께 어렵사리 북쪽 관계기관의 협조를 받아 취재할 수 있었다. 개성/ 김봉규 기자 [2007/04/06 14:45]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깃발과 한반도기. 개성/김봉규 기자 [2007/04/11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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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의 대성동마을과 북쪽의 개성공단이 저리도 가까운 지척간인 줄 미쳐 몰랐다.

JSA에 근무하던 선배덕에 15년 전에 대성동마을에 들렀을 때, 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저 깃대가 얼마나 높던지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었다. 태극기는 크기가 너무 커 펄럭펄럭도 아니고 퍼~얼럭 퍼~얼럭 휘날릴 정도였으니까. 무지하게 높은 깃대와 태극기, 거기에 대북방송을 위한 스피커는 대남방송을 위한 북측 것보다 훨씬 성능좋은 독일제 스피커라 했고, 그것도 네 개를 쌍으로 묶어 이쪽저쪽에서 떠들어대니 참 시끄러운 세상이다 싶었다. 생각해보면 북측 것 보다는 무조건 크고 좋은 것이 절대선(善)이었던 시기가 아닌가?

한겨레의 개성공단 취재기사를 보노라니, H그룹의 정회장이 소떼를 끌고 판문점을 넘어가던 장면이, 금강산으로 떠나던 첫 유람선이 출항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그때 서울에서 북을 거쳐 유럽의 끝 샹뜨뻬쩨르부르크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꿈을 꾸었다. 반도의 섬나라에서 대륙국가로 거듭나는.

빌리브란트의 동방정책이든 덩샤오핑의 특구개발정책이든 밑바탕은 포용이다. 설사 정치적, 경제적 이해득실이 엮인 문제라 하더라도 나와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겠다는 포용이 기본이다. 박연을 보고, 황진이와 화담의 흔적을 더듬고, 선죽교에서 충절의 핏자국을 보겠다고 개성을 바라지는 않는다. 여전히 자존심 하나로 못 먹어도 빌어먹지는 않겠다는 저들이, 개성공단과 금강산 골프장을 위해 군부대를 후방으로 이전하고 문을 조금이라도 열 여지가 있었던 것이 중요하다.

여전히 수줍은 저들. 나는 개성을, 평양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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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조선 난민들의 몸부림을 들어라

[학술- 다시, 동아시아!]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씨와 윤경원 교수의 만남… 스스로를 ‘난민’으로 인식하는 자의 몸부림

▣ 정리 유현산 · 김수현 기자 bretolt@hani.co.kr
▣ 통역 강혜정/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국제협력위원장
▣ 사진 류우종 기자

이 대담은 발랄하게 시작할 수 없었다. 작가이자 도쿄경제대 교수인 서경식(53)씨.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에서 태어났고,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조선을 짓밟은 일본은 그에게 온갖 차별을 선사했지만, 그는 일본어로 읽고 쓴다. 그의 형인 서승·서준식씨는 ‘조국’ 한국의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다가 간첩 낙인을 받고 십여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는 누구인가, 재일조선인은 누구인가. 한국에 번역된 네 번째 책 <소년의 눈물>(돌베개 펴냄) 출간에 맞춰 귀국한 서경식씨에게 그것을 물었다. 대담자로 재일조선인 문제를 포함해 역사와 탈사회 사상을 연구하는 단체인 TSTH-NET 공동대표 윤경원(50) 숙명여대 교수가 나섰다. 서씨의 언어는 묵직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저녁 대용으로 회의실에 차려놓은 김밥은 밤늦도록 줄지 않았다.


윤경원: 최근 한국에서 과거사 문제가 불거져나왔는데 과거사는 식민지 시대가 남겨놨던 60만 재일 조선인을 빼고는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식민지배의 유산만이 아니라 그 유산을 지속해왔던 한국 사회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20세기가 남겨놓은 식민지 시대와 세계 전쟁의 유산을 청산하고 있는지, 최근 논의되고 있는 동아시아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 도쿄경제대학 교수시고, 작가로서 활발할 활동을 하고 계시는 서경식 선생님을 모시고 여러 가지 얘기를 듣게 된 점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재일동포가 아니라 재일조선인이라는 명칭을 써야 한다고 강조해오셨는데, 그러한 노력에도 그 명칭에 대해 관심 없는 게 현실입니다. 다시 한번 재일조선인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 서경식

서경식: 저는 재일조선인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해왔습니다. 조선인이라는 표현이 한국분들한테 위화감을 주는 단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 전체에 대한 호칭을 조선이라고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민족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국가가 한국입니다. 민족 전체를 시야에 담기 위해서도 재일조선인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재일조선인의 존재가 드러내는 역사성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식민지배 때문에 건너오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재일조선인이 존재하는 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고, 그 역사의 산증인이 재일조선인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전후 처리’라고 표현합니다만, 동아시아 전후의 문제와 관련된 역사성이 있다고 봅니다. 일본이 잘못된 식민지 지배를 했고 잘못된 침략전쟁을 했다는 역사가 명확해졌다면, 재일조선인이 차별받고 스스로의 정체성 때문에 아픔 겪고 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재일조선인은 1910년 이후 일본으로부터 일본 국적을 부여받았고, 해방 뒤 1952년에 그 국적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국적을 부여받고 그 뒤 일방적으로 박탈당했던 재일조선인이 어느 국적에 해당하겠습니까. 그때 재일조선인의 조국은 남북으로 갈려서 치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한번도 북쪽에 대해서도 남쪽에 대해서도 일본 스스로 식민지 지배를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1952년 바로 그 순간에 난민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자기 민족의 근대사와 해방 뒤 역사 안에서 재일조선인을 중시해오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한국인들이 근대사를 재일조선인까지 포함한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싶어요.

윤경원: 재일조선인의 역사성 문제를 두 가지로 요약해주셨습니다. 하나는 식민지 시대 산증인, 또 하나는 전후 처리 피해자라는 것입니다. 재일조선인이 한국 근대사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주셨는데, 그런 부분에서 우리 역사 속에서 지워질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아 있는 것이 1970년대 이른바 ‘서경식, 서승 간첩사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재일조선인은 식민지 지배, 냉전, 남북분단이라는 역사적 구조 속에서 유지돼왔습니다. 지금은 정치적 상황이 바뀌었지만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독재 체제의 피해자로 평가를 한다거나 냉전의 희생물로 평가하는데, 재일조선인이라는 입장은 빠져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일본어를 하는 재일조선인들을 보면 우리는 욕하고 조롱하기 바빴다. 서경식씨가 말하는 민족과 역사는 국민국가의 틀에 찌들어 사는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담담히 우리의 경직된 관념들을 찔러대며 형들의 옥고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왜 민족의식이라는 표현을 버리고 ‘우리의식’(우리라는 의식)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됐는지 설명해주었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져도 공동의 역사적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가 가지는 의식 말이다.

서경식: 그 질문에 답변드리기 위해 60년대라는 시대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52년 재일조선인이 일본 국적을 박탈당하면서 난민 상태일 때 세 가지 선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차별을 받는 난민 상태 그대로 일본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1959년부터 시작됐던 ‘귀국운동’입니다. 일본에서는 귀국운동, 한국에서는 북송운동으로 표현합니다. 1959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9만5천명 정도의 동포가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회주의 건설에 꿈을 위탁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일본 사회에서는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하나의 선택이 있다면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교 수립이 안 된 시점에서 한국에 간다면 다시는 일본으로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귀국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것이 1965년인데, 바로 그때 저희 형제는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희 형제는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한-일 조약은 재일조선인 집단 안에 한국 국적자와 그외 조선적을 만들어 분단을 가져왔고, 특히 한국국적자에게 비교적 안정적인 ‘협정영주권자’라는 지위를 부여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당시 박정희 정권과 당시 일본 정권이 협력해서 재일조선인이라는 민족집단을 냉전적 사고로 찢어놓은 시도와 다름없습니다.

60년대 형들 얘기로 옮겨가면 우리는 본국 사람들의 투쟁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일조선인 안에서도 차별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소극적인 의미뿐 아니라 한국에서 진행되는 민주화·통일운동에 재일조선인으로서 참여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제 형인 서승, 서준식씨가 한국으로 유학간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습니다. 형들은 북한이 일본을 경유해서 한국으로 보낸 간첩이라는 명목으로 구속됐습니다. 이 간첩사건 안에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일조선인은 일본 내에서 지역적으로 분단되지 않은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의 가족 안에 총련계 사람도 민단계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지역적으로 찢어놓을 수 없는 재일조선인을 국가보안법으로 찢어놓으면서 가두었던 것이 저희 형들을 포함한 재일조선인 간첩단 사건입니다. 정확한 수는 기억할 수 없지만, 형들을 시작으로 해서 수백명의 재일조선인들이 한국에서 체포되고 구속됐습니다. 그 사람들이 받았던 혐의들 중 공통된 점은 일본에서 총련계 인사와 접촉했거나 대화 중 이적행위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재일조선인으로 생활하는 한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국가보안법은 남과 북,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장벽일 뿐 아니라 국내와 국외, 조국과 재일조선인을 나누는 장벽이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 윤경원

윤경원: 넓은 의미에서 재일조선인을 반난민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반난민이라는 규정을 통해 좀더 많은 ‘우리’를 애기할 수 있을 겁니다. 난민 논의는 일본의 전후 책임을 둘러싼 논쟁에서 나온 얘기라고 생각하는데, 과거의 전쟁 책임과 현재 일본 국민의 의식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쟁 책임의 주체와 반난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요.

서경식: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재일조선인은 일본에 의해 난민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 국민 대다수에게 그런 인식은 없어요. 자기들 국가가 난민으로 만든 존재에 대한 의식은 없습니다. 제 저서 중에서 ‘반난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간 난민들처럼 먹을 것이 없고 살 곳이 없는 상태는 아니지만 국가로부터 추방된 상태라는 의미에서 사용했습니다.

책임주체의 논리와 관련지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됐는지 설명드리죠. 1990년대에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들이 존재를 드러냈는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산증인으로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런 충격 안에서, 그러면 일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이런 존재들과 관련해 어떤 책임이 있는가 하는 논의들이 불거졌습니다. 그런 논의들이 결실을 맺지 못해서 일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대부분 내가 어떤 책임이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반적인 일본 국민들은 자신의 발언이나 행동이 국가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은 채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본 사회에서 같은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재일조선인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라는 문제제기를 하기 위해 반난민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하지만 그런 저의 시도는 예상한 것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에 대한 ‘책임’과 난민으로서의 의식을 이야기하던 서경식씨에게 윤경원씨는 북-일 수교를 찬성한 이유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북-일 수교와 함께 납치사건이 밝혀지면서 재일조선인은 일본인들의 물리적인 폭력까지 견뎌내야 했다. 서씨는 당시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온갖 차별을 꿋꿋이 버텼던 재일조선인들까지 일본 국적을 얻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고심 끝에 얻은 결론은 “우리의 반식민 투쟁은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전세계적인 반식민 투쟁을.

윤경원: 일국주의적 관점에서 책임주체가 얘기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난민적인 자기인식이 이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열된, 분단된 존재로서 자기인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들은 자기가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생활을 하는가라는 면에도 각인돼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조국, 고국, 모국의 어긋남, 모국어와 모어의 어긋남 등을 유대인의 경험을 통해 풀어내고 계신데요.

서경식: 현재 전세계에 난민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최소한 1억명 이상이라고들 합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예외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 모습의 진실을 드러내는 존재들인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현재 세계 대다수 국민들은 ‘조국’ ‘모국’ ‘고국’이 자신에게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는 조국은 자기 선조의 출신지, 자기의 뿌리가 되는 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국은 자기가 국민으로서 소속돼 있는 국가기구죠. 고국은 자기가 태어난 땅입니다. 제게는 조국은 식민지 지배를 받기 이전의 조선반도입니다. 그리고 제가 국적을 두고 있는 곳은 대한민국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일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게 세 가지는 다 어긋나 있습니다. 게다가 재일조선인은 자기의 조국을 침략하고 지배하고 그럼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각각이 어긋나 있고 겹쳐지지 않는 존재들이 인류 전체로 봤을 때 예외적일까요. 난민들은 어긋나고 겹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기구는 조선반도를 출신지로 하는 많은 사람들 중 일부 사람들의 국가기구에 불과합니다. 이 세 가지의 일치를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고 의심해보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분열돼 있다는 것은 불쌍하거나 슬픈 것이 아니라 21세기적인 인류의 존재양식이라고 봅니다. 이 분열을 국가주의로 통일하고 하나로 묶는 것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재일조선인을 포함한 재외동포의 요구와 바람을 담아내려면 현재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잠깐 모국어와 모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어로 글을 쓰면서 한자로 모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모국어로 자연스럽게 대체되는 경우가 많지만,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모어는 자기가 어머니를 통해서 배우는 첫 언어입니다. 재일조선인 대다수에게 그들의 모어는 일본어입니다. 모국어는 글자 그대로 자기가 속한 국가가 국어로 삼고 잇는 공용어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보면 모어가 모국어와 일치하는 예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저의 형인 서승씨도 모어는 일본어입니다. 60년대에 한국으로 유학해서 모국어인 조선어를 습득하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저는 식민지배로 인해 뿌리가 마를 뻔했던 모국어의 권리를 일본에게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한 나라의 국어를 가지고 있는 국민에게 모어 마이너리티가 모어를 지킬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모어를 즉각적으로 모국어로 번역해버리는 것은 모어와 모국어가 당연히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어를 모국어로 갖고 잇는 대한민국 국민 안에 다른 모어를 가지고 있는 재일조선인 같은 사람도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다언어 사회, 다문화 사회로 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윤경원: 한국 방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죠. 선생님 책이 그동안 4권 정도 번역됐습니다. 재일조선인의 책이 한국에 번역되는 것에는 어떤 느낌, 어떤 기대가 있는지요.

서경식: 만일 국내에 있는 사람들이 제가 지금까지 계속 말씀드렸던 바와 같은 단일민족주의적인 국가관이나 언어내셔널리즘, 폐쇄적인 국가주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생각들이 조금씩 바뀌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윤경원: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의 서양 미술 순례>를 다시 한번 읽어봤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창조하는 인간과 감상하는 인간의 단절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 단절을 간단하게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토로하십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무슨 어떤 의미인지요.


△ 1971년 4월 대선 직전에 터진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의 주인공 서준식(왼쪽), 서승 형제. 재일조선인의 특수성과 함께 이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진/ 한겨레21)

서경식: 칠흑 같던 80년대 형 둘이 옥중에 묶여 있고 부모님께서 차례차례 돌아가셨을 때 조금이라도 숨을 쉬고 싶어서 유럽을 여행하면서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저는 미켈란젤로의 <반항하는 노예>라는 조각을 보게 됐습니다. 이 작품은 실은 옥중에 있던 서준식씨가 책으로 그 조각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편지에 쓴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온몸으로 반항하며 가치를 창조하면서 싸우는 인간과 단순히 미술로서 감상하고 있는 인간인 나 사이에 단절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당시 한국의 옥중에서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인간과 나라 밖에서 먹을 걱정은 안 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나를 대비시킨 것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단절을 언제나 의식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진정한 투쟁의 밖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 단절이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을 해버리면 저는 진정한 투쟁 밖에 인생이 끝날 때까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지금은 진정한 투쟁 밖에 존재하지만 나의 투쟁도 언젠가는 합류할 것이라는 바람을 담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재일조선인들이 지금 전개하고 있는 몸부림이나 북한 사람들의 몸부림이 언젠가는 합류하리라는 바람이기도 합니다.

대담이 끝나갔고 대담자들이나 통역자나 기록을 맡은 기자나 파김치가 됐다. 그리고 슬슬 그의 ‘몸부림’을 어떻게 한국어로 독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나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걷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그의 말을 믿는다. 통역을 맡은 강혜정씨가 마지막 말을 옮기며 “감동적인 말로 끝내시네”라고 혼잣말 하는 것을 기자는 엿들었다.

윤경원: 선생님이 서 계신 자리에서 하는 몸부림이 새로운 형태로 어떤 희망을 향해서 나타나는 게 ‘전야’라는 단체라고 생각합니다. 왜 전야이고 뭘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지요. 어떤 활동 계획을 갖고 계신 건지요.

서경식: 전야라는 단체의 이름을 제안했던 것은 접니다. 현재 일본의 상황이 정말 전쟁 전야로 느껴지기 대문입니다. 그런 사태가 전개됐을 때 일본 안에서 살고 잇는 재일조선인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는 저 자신도 상상하기조차 싫은 악몽입니다. 전야가 가지고 잇는 특징 중 하나는 발기인 이사 중 나와 같은 재일조선인이 몇 사람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즉, 소수파, 마이너리티가 가지고 있는 위기감 등을 일본 사회에서 깊고 넓게 전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70년대 이후 패배를 경험하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잘 쓰는 레토릭이 뭐냐면 전망이 없다면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루쉰의 말을 떠올립니다. 희망은 있는 거라고도 없는 거라고도 할 수 없다…. 그건 달리 말하면 인간은 희망이 있어서 걸어가는 게 아니라 걷는 가운데 희망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걷지 않으면 희망이 절대로 없다는 이야기겠죠. 저는 아무리 전망이 안 보여도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가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조국의 사람들이 전야의 활동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지원도 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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