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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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룡이 왔구나아
형님. 걱정 많이 했음다. 이젠 살길이 열렜으니까니.... 자아, 보라요. 저 뒤에 세관으루 양식차 들어옵네다.
그가 우리 방에 들어와 풀어놓은 것은 우선 아이들 먹으라고 월병이 한 상자였고 뒤이어 우리집 식구들을 위하여 입쌀 한 자루에 옥수숫가루 세 포대와 기름 두 통에 밀가루도 있었다. 우리는 누가 권하기도 전에 상자를 뜯고 비닐포장을 헤쳐 월병을 양손에 두 개씩 움켜쥐고 아구아구 먹었다. 다디단 속고물에 혀가 녹는 것 같았다.-55쪽

싸락눈이 덮인 과수원의 나뭇가지 사이로 난 오솔길로 낯익은 껑충한 키의 구부정한 아버지 모습이 나타났을 때의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할머니와 나와 현이는 한뭉치가 되어 아버지에게 와라락 달려붙었다. (중략) 아버지는 어깨가 떨어지고 여기저기 솜이 비어져나온 동절기 군대 누비외투를 얻어 걸치고 있었고 편의화는 개의 혓바닥처럼 창이 벌어졌다. (중략)
야아, 이거 이밥이로구나. (중략)
그때 할머니와 현이와 나는 조금 놀랐다. 아버지가 우리 할머니에게 이제 밥 먹자는 말이나 눈짓도 없이 된장찌개 냄비를 밥에 기울여 반나마 붓고는 정신없이 숟가락으로 퍼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밥그릇 위로 숙인 그의 정수리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머리카락이 빠져 듬성듬성했고 이제는 회색에서 거의 백발로 변해가고 있었다.-66쪽

할마니, 나 추워 못 자갔다....
가느다란 현이의 목소리가 이불 속에 묻힌 채로 들려오곤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현이의 머리 위로 이불을 들씌워주면서 달래곤 했다.
오오, 이제 날 샌다. 날 새문 따뜻해질 거다.
나무들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소리가 더욱 거세어지다가 뭔가 거대한 물결이라도 덮치는 것같이 휘익, 하는 느낌이더니 눈보라가 사정없이 우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얼기설기 엮어놓은 나뭇가지의 지붕이 날아가버렸다. (중략)
현이가 어디 갔니? (중략)
아버지가 먼저 움집 뒤편 둥치 큰 나무가 촘촘히 막아선 숲속에서 현이를 찾아냈다. 그애는 말라붙은 멸치꽁댕이처럼 온몸을 쪼그리고 모로 누워 있었다. 아버지가 현이를 안아일으켰고 할머니가 곁에 따라가며 머리를 흔들었다.
야야, 정신차리라. (중략)
거 추운데 왜 나가 있댄?
오줌 마레와서....
오줌 누군 들오지 거기 있다 얼어 죽을 뻔했구나.
현이는 스르르 눈을 감더니 다시 잠이 들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중략)
나는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언니야, 너 떠나려고 하는 줄 내 다 안다.
우리는 이불 속에 하반신을 넣고 모두 앉은 채로 끄덕끄덕 졸다가 잠들었다. 그날밤 현이는 죽었다. (중략) 그러나 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나 세 사람 누구도 정말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애를 옷가지와 비료포대 여러 장으로 둘둘 말아서 안고는 움집을 나서면서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따라오지 말라-72쪽

나는 마을과 노동지구가 다가올 때마다 크게 비켜가야 했으므로 낮에 걷는 게 별로 이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중략) 나는 낮에 자고 밤에만 길을 가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풀숲에 파카를 펼쳐놓고 누웠다. 칠성이는 내 옆에 몸을 붙이고 앞다리에 턱을 괴고 나를 지켜보았다. 한기에 오슬오슬 추워져서 눈을 뜨니 하늘에 별들이 하나 가득했다. 그건 먼 세상의 집들이 창문마다 불을 켜놓은 듯했다. 하마터면 눈앞에 다가온 제일 큰 별을 따려고 손을 뻗을 뻔했다.-88쪽

부령까지 가면서 나는 밤마다 들판과 마을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헛것들과 부딪쳤다. 그들이 휘적이며 빈 마을길을 스쳐 지나갈 적마다 둥치 큰 나무들 사이로 무거운 바람이 지나가듯 우우우웅하는 나직하고 음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중에 다른 세상으로 가서 수많은 도시들과 찬란한 불빛들과 넘쳐나는 사람들의 활기를 보면서 이들 모두가 우리를 버렸고 모른 척했다는 섭섭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93쪽

나는 샹 언니부부에 대하여 말했고, 그들은 아저씨처럼 친가족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며, 그들이 따렌으로 이사가서 안마업소를 차릴 텐데 나도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는 데까지 말했다. (중략)
앳쌔 말하지 말라. 길구 슬그머니 가문 되는 거이야. 세상에 네 처지가 이러루한데 누굴 믿갔나? 앞으로 아무두 믿지 말라. 이 고장두 인심이 점점 무서워지고 있단다. 이거이 다 무엇 때문이가? 돈 때문이야. 알가서? 세상은 말이다. 전기불 훤해지구 돈 돌문 인정이 사라지게 돼이서. 전에 조선하구 무역한다문서 돌아치던 젊은것덜 전부 부로카질해서 먹구산다.
하더니 아저씨는 또 소주 한 잔을 벌컥, 하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바루 너 같은 아이들 팔아먹구 산다 이거야.-112쪽

할머니의 이야기 중에 장승이와 바리공주의 약속이 생각났다. 길값, 나무값, 물값으로 석삼년 아홉 해를 아들 낳아주고 살림 살아주어야 하는 세월.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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