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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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는 두 가지 큰 저울이 있다. 하나는 시비是非 즉 옳고 그름의 저울이고, 하나는 이해利害 곧 이로움과 해로움의 저울이다. 이 두 가지 큰 저울에서 네 가지 큰 등급이 생겨난다. 옳은 것을 지켜 이로움을 얻는 것이 가장 으뜸이다.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다가 해로움을 입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그릇됨을 따라가서 이로움을 얻는 것이다. 가장 낮은 것은 그릇됨을 따르다가 해로움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른 일을 해서라도 이로움을 얻으려고 하다가 마침내 해로움만 불러들이고 만다. 첫째는 드물고 둘째는 싫어 셋째를 하다가 넷째가 되고 마는 것이다.-18쪽

내가 사람들의 토지 문서를 살펴 그 내력을 조사해보았다. 1백년 사이에 주인이 바뀐 것이 문득 대여섯 번은 되었다. 심한 경우 일고여덟 번에서 아홉 번까지도 있었다. 그 성질이 흘러 움직이고 잘 달아나는 것이 이와 같다. 남에게는 금방 바뀌고 내게는 어찌 홀로 오래 그대로 있기를 바라. 이를 믿어 아무리 두드려도 깨져 없어지지 않을 물건으로 여기겠는가? (중략) 부자는 밭두렁이 드넓게 이어지면 반드시 뜻에 차서 기운을 돋워 베개를 높이하고 자손을 보며 말할 것이다. '만세의 터전을 내가 너희에게 준다.' 하지만 진시황 당시에 호해에게 전할 때도 이보다 훨씬 더 했음을 알지 못한다. 이 일이 어찌 믿을 만한 것이겠는가?

진시황은 자기 이름도 따로 정하지 않고 그저 시황이라 했다. 아들은 이세황제다. 이렇게 이어 만세까지 이를 것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진나라는 고작 몇 십 년도 못 가 2세 때 망했다. 인간의 다짐이란 이런 것이다. 하지만 땅문서는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수시로 주인이 바뀐다. 변치 않을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지, 고작 땅 주인 되는 데 인생을 걸어서야 되겠는가?-28쪽

공부하는 학생은 그 상이 어여쁘다. 장사치는 상이 시커멓다. 목동은 상이 지저분하다. 노름꾼은 상이 사납고 약삭빠르다. 대게 익힌 것이 오랠수록 성품 또한 옮겨간다. 속으로 마음을 쏟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 상도 이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상이 변하는 것을 보고, "상이 이러니 하는 짓이 저렇지"라고 말한다. 아! 이것은 잘못이다.

마음이 하는 일을 낯빛이 닮아간다. 얼굴은 얼의 꼴, 즉 마음의 모습이다. 공부하는 학생의 얼굴은 해맑다. 매일 듣고 보는 글의 표정을 닮았다. 어찌하면 돈을 많이 벌까하는 궁리만 하는 장사치는 그 검은 속을 닮아 얼굴조차 시커멓다. 꼴 먹이고 소똥을 치우는 목동은 모습도 덩달아 지저분하다. 노름꾼의 눈동자는 잠시도 쉬지 않고 희번덕거린다. 해맑던 아이의 표정 위에 어느덧 장사치의 시커먼 속과 노름꾼의 교활한 눈빛이 깃든다. 사람은 생긴 대로 노는 것이 아니다. 노는 대로 생긴다. 상은 자꾸 변한다. 사람은 나이 들면서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32쪽

요컨데 아침볕을 받는 곳은 저녁 그늘이 먼저 들고, 일찍 피는 꽃은 빨리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람은 이리저리 옮겨 붙어 한시도 멈추는 법이 없다. 이 세상에 뜻을 둔 사람은 한때의 좌절로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한 마리 가을 매가 하늘을 박차고 오르는 기상이 있어야 한다. 눈은 건곤을 작게 보고, 손바닥은 우주를 가볍게 보아야만 한다.

봄꽃에 마음을 쏟아도 얼마 못 가 다 진다. 땅 속 깊이 씨앗을 숨기고 있던 싹이 그제야 올라와 여름 꽃을 피운다. 추레해져 잡초처럼 여겼더기 어느새 꽃을 다시 달고 제 태를 뽐내는 녀석도 있다. 뜨락에 피고 지는 꽃에도 영고성쇠의 자취가 뚜렷하다. 바람은 늘 딴 데서 불어온다. 한때의 좌절과 잠깐의 성취에 일회일비하지 마라. 성취를 이뤘다고 쉬 교만하면 작은 시련 앞에서 바로 꺾이고 만다. 득의의 때에 그 사람의 태도를 보아 그 그릇을 짐작할 수 있다. 시련의 때에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창공을 박차고 오르는 금빛 눈알의 가을 매처럼 가슴속에 차고 늠연한 기상을 길러라. 세상을 가슴에 품어라.-36쪽

사람의 떳떳한 윤리는 오직 지성至誠뿐이다. 삿됨으로 말미암아 욕망과 사정私情이 생겨난다. 삿됨이 들어오는 구멍이 있으니 나고 듦이 너무 빨라, 풀이 싹트고 물이 새는 것과 같다. 떡잎부터 제거하지 않으면 도끼질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개미구멍을 안 막았다간 큰물이 져 넘친다. 지혜로운 사람은 기미를 알아 조심스레 둑을 쌓는다. 창문에 자물쇠를 굳게 하고, 대문에 울타리를 엄하게 두른다. 삿됨이 드나들 길을 막고 흘러들 틈을 막아버린다. 그것을 굴복시켜 녹여버리고, 싫다고 감추어서 덮지 않는다. 온갖 거짓 물러나니 하늘은 드넓은데, 성명誠明이 환해지고 나의 덕이 온전하다.

개미구멍에 강둑이 무너진다. 떡잎부터 제거해야 도끼 들고 설칠 일이 없다. 삿됨은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못 본 척 외면하는 사이에 온갖 거짓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횡행한다. 툭 터진 하늘처럼 시원스런 마음을 닦고 싶은가. 그렇다면 삿됨을 원천봉쇄하라. 자물쇠를 꽉 채우고 담장을 애둘러라.-54쪽

벼슬이 낮고 보면 비록 상관의 명령이 나를 몰아 함정 가운데 넣는다 해도 다만 머리를 숙여 받들어 행하며 실패를 감수할 뿐이다. 자취가 멀게 되면 비롯 마음에 품은 바가 천지를 돌리고 일월을 굴릴 수 있다해도 다만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하며 분수를 지칠 뿐이다. 이런 것을 일러 '유분幽憤'이라 한다. 유분을 품은 사람은 당세에 쓰이지 못하고 오직 필묵에다 이를 발설하여 후세에 떨쳐지기를 바란다. 이를 두고 '고심苦心'이라 한다. 소인의 아첨을 모르고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지사의 유분과 고심을 알지 못해도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다. 이 일기를 읽는 사람이 먼저 그 유분과 고심에 대해 눈을 밝게 뜬다면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지위가 낮으면 불의도 수모로 감내한다.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품은 경륜이 있어도 입을 다물고 만다. 유분은 이러한 감내와 침묵 끝에 가슴속 깊은 곳에 서린 분노다. 고심은 그 분노를 안으로 삭이는 마음이다. 글은 왜 쓰는가? 기록은 왜 남기는가? 서리서리 답쌓인 유분과 고심을 이렇게라도 남기지 않으면 세상에 살다 간 자취가 없고 보람이 없겠기 때문이다. 글을 읽을 때는 글쓴이의 유분과 고심의 소재에 주목해야 한다. 윗사람이 되어서는 아랫사람의 유분과 고심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 마음을 읽지 못하면 책 읽은 보람이 없다. 조직을 이끌 리더쉽이 생겨나지 않는다.-72쪽

대저 터럭을 불어 흠집을 찾고 새로운 견해 내기를 힘쓰는 것은 진실로 큰 병통이다. 지혜를 버리고 뜻을 끊어 온전히 옛 경전을 답습하는 것 또한 실제 소득이 없다. 배우는 자가 선유의 학설에 대해 실로 의심나고 궁금한 점이 있거든 서둘러 다른 의견을 내지 말고, 또한 지나간 일로 속단하지도 말라. 모름지기 환히 깨달을 때까지 연구하여 말한 사람의 본레 뜻을 얻기에 힘써 되풀이해서 검토하고 징험해야 한다. 그러다가 혹 얼음 녹듯 말끔히 풀려도 가만히 혼자 한번 웃을 뿐이다. 혹 그 잘못된 곳이 더 보이더라도 또한 부드럽게 용서하고 좋게 이해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 주장이 이와 같았다. 이제 이렇게 보면 주장이 마땅이 이러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어찌 반드시 겨우 한 부분을 보고 마치 기이한 재화라도 얻은 것처럼 몰래 기뻐 뛰면서 옛것을 배척하고 자기를 내세움을 모기령이 했던 것처럼 거리낌 없이 하겠는가?

공부는 본받아 뛰어넘기 위해서 한다. 선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실로 중요하지만, 맹종만 하면 발전이 없다. 앞 사람을 뛰어넘어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공부의 큰 보람이지만, 실속 없이 목청만 높이면 웃음거리가 된다. 선학을 넘어서야 내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이 그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모기령은 입만 열면 주자를 욕하고 비방하는 것으로 자신의 문호를 세웠다. 지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알량한 공부로 설치고 날뛰지 마라. 수굿이 다지고 겸손하게 나아가라.-100쪽

경전의 뜻에 밝은 뒤에 도의 본체가 드러난다. 도를 얻어야만 마음가짐이 비로소 바르게 된다. 마음가짐이 발라야 덕을 이룰 수가 있다. 그런 까닭에 경학에 힘쏟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간혹 선유의 학설에 근거하여, 같으면 무리 짓고 다르면 공격해서 감히 의논조차 못하게 하는 자가 있다. 이는 모두 서책을 빙자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무리일 뿐, 진심으로 선을 향하는 자가 아니다.

바른 마음가짐으로 덕을 이루려면 가슴속에 도를 지녀야 한다. 도는 어떻게 얻나? 경전 공부를 통해 얻는다. 경전을 공부하는 것은 도를 깨달아 마음가짐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이지, 패거리 지어 무리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당동벌이, 즉 같으면 패거리 짓고, 다르면 공격하는 것은 소인들의 작태다. 학문을 한다면서 툭 터진 식견을 기르지는 못할망정, 선유의 학설을 굳게 지키는 것만 능사로 알아 입도 뻥끗 못하게 한대서야 학문하는 보람이 아예 없다. -172쪽

중국에 생원이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 양반이 있는 것과 한가지다. 고정림은 온 천하 사람이 다 생원이 될까봐 근심하였다. 마치 내가 온 나라 사람이 다 양반이 될까봐 염려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양반의 폐단은 더욱 심함이 있다. 생원은 실제로 과거에 나아가서 이 호칭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양반은 문과나 무과를 하지도 않았으면서 빈 이름만 차고 있다. 생원은 그래도 정한 인원이 있는데, 양반은 도대체 제한이 없다. 생원은 세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나, 양반은 한번 얻으면 백세가 되어도 절대로 놓지 않는다. 하물며 생원의 폐단을 양반은 모두 겸하여 가지고 있다. 비록 그러나 내가 바라는 바가 있다. 만약 온 나라 사람을 전부 양반이 되게 한다면, 온 나라에 양반이 없게 된다. 젊은이가 있어야 어른이 드러나게 되고, 천한 자가 있어야 귀한 이가 드러나게 된다. 진실로 모두 다 존귀하다면 이것은 존귀한 사람이 없는 셈이 된다. 관자가 말했다. "온 나라 사람을 다 존귀하게 할 수는 없다. 모두 존귀해지면 되는 일이 없고, 나라에도 이롭지가 않다."-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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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미래로 떠난 여행 - 투발루에서 알래스카까지 지구온난화의 최전선을 가다
마크 라이너스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아저씨, 전농동!!"

비오는 날 남의 집에 가는 것이 웬지 불편했지만 거세게 퍼붓던 빗줄기가 사그러들자, 선배집에서 약속한 모임에 가려고 나는 길거리에서 택시를 붙잡느라 진을 빼고 있었다. 냉정하게도 전농동 사거리가 물에 잠겨서 그쪽으로는 못간다는 말을 남기고 택시는 도로에 넘치는 물을 튕기며 내게서 멀어졌다. 내가 있던 안암동과 전농동은 뛰어서라도 가겠구만...감히 엄두가 나지 않은 건 쏟아진 비가 매섭긴 매서웠던 모양이었다.

반바지에 샌들, 우산 하나 걸치고 약속을 포기한 나는 자취방으로 돌아왔지만 상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져있었다. 언덕 중턱에 있던 자취집이었지만, 이미 집으로 들어가던 복도는 물로 넘쳐났고 현관문을 열어보니 신발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인집 할머니는 40년 넘게 여기서 살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물 퍼내는 내 옆에서 궁시렁거렸다. 나는 그해 여름을 기억한다. 기상청은 이를 두고 '게릴라성 폭우', '국지성 호우'라는 처음 듣는 생소한 단어를 쏟아냈다.

그 이후 여름에 국지성 호우는 더욱 빈번해졌다. 어디 그뿐인가? 부쩍 짧아진 봄과 가을.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것이 삼천리 금수강산의 자랑거리라던 옛 교과서의 문구가 생소할 지경이다. 봄이면 화사한 봄꽃을 뒤덮어 버리는 누런 황사가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요즘처럼 따뜻해진 겨울에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이상고온'이라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처럼 많은 기후변화의 징후가 이미 오래전부터 나타났고, 먹이를 찾아 녹아버린 살얼음 빙판을 조심스레 어슬렁거리는 북극곰의 슬픈 사연도 이미 매체를 통해 많이 접했지만, 이 모든 것이 내 삶과 직결되지 않은 일이다보니 대부분은 소위 '달나라 얘기'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지구온난화. 이 책의 주제이다.
마크 라이너스라는 젊은 환경운동가에 의해 쓰여진 이 책은 제목처럼 지구온난화로 벌어지는 현재의 변화로 미래가 아닌 이미 현재에 변화된 지구의 모습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쓴 일종의 환경 여행기이며 실천적인 수기이다. 제목에 '미래'란 표현은 아마도 이성을 가진 독자들이라면 아주 약간(?)의 상상력만으로도 풀수있는 남겨준 숙제같다.

지구온난화로 빙하는 녹아내리고 해수면의 상승한다는 것이야 누구나 알 것이다. 바닷물 몇 센티미터 올라갔다고 우리 일상에 무슨 큰 영향이 있겠냐마는 남태평양에 평균고도 3m 밖에 되지않는 한 섬나라는 만조때만 되는 쏟아져 들어오는 바닷물 탓에 이미 국가영토를 포기한 나라가 있다. '투발루'. 빙하의 녹는 속도가 이미 가속도가 붙은 상황이니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이 나라 국민들에게는 말그대로 국가적인 재앙인 것이다. 더욱 아이러니 한 것은 이 사람들은 지구온난화에 가장 작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인데도 말할 수 없는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중국 네이멍구에서 몰아친 모래바람이 중국을 건너, 한국으로 날려오는 것처럼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는 전지구적이며 상호연관성을 띄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어느 누구도 내 탓이라 인정하기 쉽지 않으며,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이멍구에서 날려보낸 모래바람을 뒤집어 쓴 한국사람이, 한국에서 쏟아올린 이산화탄소 탓에 네이멍구가 그렇게 사막화 되었다고 인정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알래스카의 주민도 마찬가지다. 알래스카는 녹아내리고 있지만 한편에선 끝없이 원유를 퍼올리고 있다. 주민들은 저 원유가 내 삶터인 알래스카를 녹아내리게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원유업자들은 원유가 훨씬 더 매장되어 있는 '북극야생동물보호구역'을 열어젖히라 외친다. 이런 예는 직접적이고도 1차적인 인과관계이지만, 마치 생태계의 한 계층만 무너져도 생태계 전체가 위험에 처하는 것과 비슷한 사실은 훨씬 더 복잡한 관계 속에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기후변화는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투발루의 국민들은 우리들의 피해가 당신들의 재앙의 전주곡일 것이라 아무리 얘기해 본들 가속화된 전지구적인 산업화를 당장 제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몇 십년내에 닥칠 현실적인 위기라는 점에서 지속적인 경고를 보내는 환경론자들과 과학자들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세계 곳곳의 기상이변과 이상징후를 눈으로 직접 보고 써내려간 현장감있는 보고서임과 동시에 지구온난화를 제어해야 할 인류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하고 있다.

전쟁과 평화, 이념을 말하던 이데올로기의 시대보다도 어쩌면 더 필요한(!) 인류의 보편적 연대의 필요를 당신은 이 책에서 발견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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