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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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나는 공선옥 작가와 몇 번의 통화를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조교로 일하는 곳에서, 지역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방학 중에 연수를 하는데, 여러 강좌 중에 <소설가와의 만남>이라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을 공선옥 작가가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업무상의 통화였지만, 내게는 참 흥분되는 일이었다.

  공선옥 작가가 온다기에, 나는 공선옥 작가에게 사인이라도 받아둬야 겠다고 생각해서, 가장 최근작인 이 책을 다짜고짜 샀다. 그리고 읽었다. 읽지도 않고 사인을 받기에는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공선옥이란 이름, 작가 공선옥을 그전에는 알지 못했다. 공씨 작가는 공지영 밖에 몰랐기 때문에, 이 공선옥이란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꽤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를 만나게 되는 날이 꽤나 기다려졌다.

  몇 번의 통화에서 나는 공선옥 작가가 어떤 사람일거라는 추측을 조금은 할 수 있었다. 연수 강좌를 맡았기에, 몇가지 서류와 함께, 강의 원고를 작성해 나에게 보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소설가라는 사람이 원고를 어떻게 써야되느냐, 3시간 동안 말해본 적이 없어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다느니, 말주변이 없다느니 하는데, 그 목소리 또한 왠지 털털한 느낌이기도 했고,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각과는 다른 느낌. 왠지 말을 조용조용 조리있게 잘 할 것만 같고, 분위기 고상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일거에 무너져 버렸다. 옆집 아줌마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 것은 공선옥 작가에 대한 무례일까? 그건 아닐거라는 생각은 이 책 <<유랑가족>>을 읽으면서 얻게 되었다.

  그녀의 그런 목소리, 그런 솔직한 대답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가난한 작가일 뿐./ 가난하여 '이 땅 어디에도 삶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하고 떠도는' 유랑민처럼/ 나 또한 가난한 '유랑작가'일 뿐." (작가의 말)

  자기는 가난한 작가, 그리하여 '유랑작가'이니, 고상한 척, 잘아는 척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유랑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털털해 지고, 또한 옆집 아줌마처럼 생활력 강하고 모든 닥치면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해치워야하는 그런 작가여야 하지 않을까?

  이 책 <<유랑가족>>은 떠도는 가족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 이전에, 왜 유랑, 즉 떠돌아야 하는 가족이 될 수 밖에 없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가난이라는 문제, 가난한 사람들의 삶, 거기에서 오는 많은 아픔들, 고통들, 그래서 결국에는 유랑해야만 하는, 그래야만 질긴 생명 부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구성은 5개의 짧은 이야기들이 하나의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며 한 편의 연작소설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단편들이 등장인물의 중복, 또는 장면의 교차, 또는 가난이라는 주제의 큰 틀 안에서 하나의 유기적 구성을 갖게된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인물은 작가의 분신처럼 생각되어지는 '한'이라는 사진작가이다.

  이 '한'이라는 사진작가는 어쩌면 작가와 동일시 되어진다. 공선옥 작가는 가난이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들을 한 장의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그렇다. 그러면서도 이 '한'이라는 인물, 그리고 이 '한'의 가족들 또한 그 '가난'이라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즉 가난한 작가 공선옥처럼 '가난하다.' 그러기에 나는 '한'을 보면서 공선옥 작가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 질긴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몇 가지 나의 의문은, 이제 가난타령은 진부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선옥 작가는 왜 이리 가난에 천착하는 건가? 라는 의문이 든다. 이 둘은 어쩌면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의문이리라.

  '가난' 타령은 이전 소설에서 많이 애용되어 왔다. 2~30년대의 사실주의 소설, 대표적으로 현진건의 소설에서나, 1950년대 이후의 전후소설에서 이 '가난'의 모습은 너무 많이 나왔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 더이상 '가난'의 이야기들은 적어도 소설에서는 더이상 먹히지 않는 소재가 아닐까? 98년의 IMF이후 가난이라는 것이 이슈가 될만도 했지만, 빠른 요즘 세상에서 잊혀지는 것 또한 빨라,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진부한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그런데 유독 공선옥은 가난이라는 이야기를 써내고 있다.

  왜 이리도 가난에 천착하는가?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가난한 작가일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가난 이외에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가난을 가장 잘 아는 작가라는 뜻일까? 가난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작가는 그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곧 '가난'을 이 시대에 끊임없이 문제제기 하면서, 소외되어 있는 이 시대 이 세대의 가난의 모습들을 문제적인 것으로 부각시키고, 그에 대한 이 사회의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도 모른다.

  가난이 먹히지 않는 소설계에서 공선옥 작가의 '가난'이야기는 그녀를 계속적으로 가난한 작가로 만들고 있는 것이지 모르겠다. 잘 팔리는 소설을 써야 가난에서 면할 수 있는 방법이기때문에, 진부한 소재로 외면받는 가난이야기는 잘팔리기에는 애당초 그른 것이 아닌가? 그럴 수록, 작가가 가난할 수록, 공선옥은 가난 이야기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나는 공선옥 씨처럼 유행적인 담론이 아니라 자기의 독자적인 경험과 사유에 의해 굳건히 뒷받침된 소설을 쓰는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일층 제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선옥 씨는 우리에게 참으로 귀중한 존재다. 먼 훗날 누가 21세기 벽두에 한국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가 하고 물을 것이라면 우리는 이 물음에 대비한 타임캡슐 안에 공선옥 씨의 소설들을 넣어두어도 될 것이다."

  작품의 해설을 쓴 방민호 평론가의 말이다. 그렇다. 누구도 쓰지 않는 이 시대의 가난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공선옥은 그렇지 않은 다른 소설가에 비해 어떤 면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먼 후일에 그의 가치가 더욱 돋보이게 될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공선옥 작가의 가난말하기가 그래도 이 당대에 이슈가 되고 잘 팔렸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 지독한 가난에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겠는가?

  며칠전에 공선옥 작가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번 연수에 강좌를 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신 권지예 소설가가 온다고 한다. 그래서 부랴부랴 <<꽃게무덤>>을 사놓았다. 그런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공선옥 작가를 만나서 꼭 사인을 받아두고 싶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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